낮에 휴대폰 문자가 하나 왔습니다.
"우리 허니 결혼기념일 축하해. 행복한 하루 되길 바래. 당신의 여보가."
그제서야 결혼기념일인 것을 알았습니다. 여전히 익숙치 않은 답신 문자를 보냈습니다.
"헉. 오늘이네. 일찍 퇴근해야지."
참으로 무심한 남편입니다. 사실 문자로 이렇게 주고받은 것도 처음인 것 같습니다. 얼마나 남편이 무심했는지, 아내는 올해 이전의 시기에는 결혼기념일이 되기 몇일 전부터 알려주곤 했었습니다. 가정 보다 일에 몰입했던 젊은 날들이었습니다. 올해는 아내가 의외로 문자를 보냈는데 아마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남편의 문자를 받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일찍 퇴근해 함께 소박한 외식을 했습니다.
벌써 13년여가 지났지만, 결혼기념일을 생각하니 아내를 거짓말로 속여서 청혼을 했던 옛 추억이 떠오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가족의 장손인데다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놈과 결혼해준 아내가 정말 고맙습니다. 아내(이하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은 어떠한 예측도 없었습니다. 당시 아리따운 처자였던 그녀와 첫 만남은 우연이었습니다.
당시 그녀의 친구 K와 업무상 알고 지냈는데 K가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K가 자리를 주선해 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친구인 K가 다른 남자에게 그녀를 소개팅시켜주는 자리에 제가 동석하게 된 것이 우연의 시작이었습니다. K는 소개팅 자리에 뻘쭘하니까 저랑 같이 가자고 해서 동행한 것이 우연의 시작이었습니다.
오직 가진 것이라고는 무모한 자신감 밖에 없었던 저는 넉살도 좋게 남의 소개팅 자리에 참석해 그녀와 다른 남자의 소개팅을 잠시 지켜보면서 그녀에게 더욱 마음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자의 소개팅 상대 남자가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주지않고 혼자서 술만 잔뜩 시켜놓고 엉뚱한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았습니다. 원래 말이 없는 편이었는데 그 자리에서는 어떤 용기로 왜 그랬는지.
처음 본 그녀의 모습에 한 눈에 반했던 겁니다. 그녀와의 기회는 앞으로는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녀와 소개팅 자리에 나왔던 남자는 저의 방해공작(?) 때문인지 다른 약속이 있다고 갑자기 일어섰습니다. 그냥 나가버리려는 그 남자에게 제가 "식사 값을 지불하고 가시는 것이 어떻겠는지"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싫은 눈치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저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일부 식사값은 내고 나갔습니다. 당시에 그 분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에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일인데 조금은 심하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날은 잘 되었다 싶어 아내와 K와 함께 노래방에 가서 실컷 흥겹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해할 수 있어 소개하자면 그녀의 친구 K는 이미 기혼이었으니 들러리일 뿐이었습니다. 당시까지 살아오는 동안 어떤 여자에게도 바래다주지 않았는데 그녀에게는 처음으로 택시를 타고 집에 까지 바래다 주었습니다. 그 날 택시에서 저는 인사불성으로 잠이 들어 오히려 그녀가 저를 걱정하는 처지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놈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업무상 술자리가 많았던 저는 밤 10시 이후 몰래 빠져나와 그녀의 집 앞에 나타나 데이트를 했습니다. 물론 갈 곳이 없으니 맥주집이 대부분의 데이트 장소였습니다. 그런 만남이 계속 되는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해가 바뀌고 만남은 계속 됐습니다.
그녀와 이제는 결혼을 해야 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어떻게 청혼을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는 선배의 조언을 받아 그녀가 나와의 결혼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마음을 알고 싶었습니다. (사실 사랑하고 있지만 제가 가난한 집안의 장손이라는 책임감이 엄습해오면서 그녀가 고생할 수도 있는데, 원하지 않는 결혼에 매달리게 되면 그녀가 불행할 수도 있어 거절하면 그녀의 행복을 위해 깨끗하게 포기하겠다는 각오도 있었습니다.)
저녁에 자주 만나던 그녀의 집 앞에 있는 호프집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미 선배와 1차에서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500 CC 맥주만 들이켰습니다. 그녀의 궁금증이 커져 갈 무렵, 고개를 푹 숙이고 더욱 심각한 표정을 짓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나, 회사에서 잘렸어. 시골에 내려가려고 해. 우리 시골에서 내려가서 같이 살자."
청천벽력 같은 저의 이야기에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습니다.
"정말? 거짓말 아니야?"
"응. 정말이야. 시골 가서 같이 살자."
그녀는 제가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한 것도 처음이지만 거짓말을 못하는 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말문을 맏고 한참 동안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생각하는 동안에도 저는 혼자서 맥주만 마셨습니다. 사실은 '그녀가 어떤 말을 꺼낼까' 속도 타고 목이 타서 맥주를 계속 마신 것이었습니다. 잠깐 기다리는 시간이 마치 천년의 시간 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래. 시골 가서 같이 살자."
갑자기 하늘에서 일곱 색깔 무지개가 나타나고 환희의 교향곡이 울려퍼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행복한 표정을 숨기고 맥주만 계속 마셨습니다. 이제는 속으로 기뻐서 마셨습니다. 마음은 날아갈 것 같고 쾌재는 부르고 싶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맥주를 마셨습니다.
미안하고 이기적인지 모를 청혼이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됐으니,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그렇게 몇십분 동안 혼자 만의 기쁨을 만끽한 후 결국 그녀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거짓말 하고는 또한 참지 못하는 성미라서 이실직고했습니다.
"사실은 회사 잘렸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깜빡 속은 그녀는 저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구 저의 온 몸을 구타했습니다. 아무런 아픔을 느낄 수 없는 구타를 실컷 행복하게 맞이 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녀는 만나는 동안 저의 인생을 조금씩 알고있었기에 너무 불쌍해 거절할 수 없었고 자신이라도 곁에 있어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도회지에 자란 그녀가 시골 생활을 어찌 안다고 그런 무모한 결심을 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 날 이후 일사천리로 결혼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에도 결혼식에 이르기까지는 양가 부모의 반대와 봉착해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결혼을 해서 예쁜 두 딸아이를 두고 잘 살고 있습니다. 아내는 장손의 아내이자 맏며느리로서 집안 어르신들 잘 모시고 아이들 잘 키우는 현모양처입니다. 그리고 모자란 남편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도 홀로이신 장모님을 먼저 생각하고 잘 모시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아직도 표현에는 항상 서투른 남편이지만, 단지 믿음 하나만으로 부족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준, 착한 그녀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날 당시 이후 스토리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다음 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탐진강 블로그를 구독하시려면 옆의 RSS 추가버튼을 이용해 주세요.^^

'일상 문화예능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연아 프리티걸 특집, 감동과 용기를 준 무한도전 (20) | 2009/04/25 |
|---|---|
| 20년전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찾고보니 (29) | 2009/04/18 |
| 아내에게 거짓말 청혼 "회사에서 잘렸어" (97) | 2009/04/16 |
| 하얀 싸리꽃 여심과 사월의 단정한 사랑 (6) | 2009/04/14 |
| 하늘나라 천국우체국의 감동을 아시나요? (10) | 2009/04/12 |
| 이웃 블로그 선물받고 가족 패션쇼한 사연 (22) | 2009/04/0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