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 우연히 '놀라운TV 서프라이즈'를 시청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방송 내용은 '아...! 알로하오에'라는 서프라이즈한 역사였습니다. 그 동안 몰랐던 하와이왕국과 역사에서 사라진 망국사였습니다.

트위터를 살펴보니 서프라이즈 시청 후 느낀 글들이 많았습니다. 모두가 비슷한 심정이었습니다. 하와이왕국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그러한 망국사에서 교훈을 느끼는 글들이 다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이 하와이왕국의 모습은 아닌가 오버랩된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특히나 내일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8.15 광복절이라서 특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지요. 또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우리 스스로 국민의식이 높아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사라진 하와이왕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우선 서프라이즈 방송 이후 트위터에 남긴 네티즌들의 글부터 살펴볼까요.

서프라이즈 시청 후 트위터의 글들

"하와이에 하와이왕국이 있었으며, 무능하고 자기 자신과 돈밖에 모르는 독재자 칼라카우에가 자국민의 복지는 외면하고 자국의 문화도 배척하며 미국만 쫓다가 미국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하와이 역사를 보니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있는 MB가 오버랩된다."

"오늘 서프라이즈에 나온 하와이왕국의 멸망과정을 보고 너무 놀랬다 지금의 우리나라가 돌아가는 모습과 닮아도 너무 닮아있다!!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국민의 인식이 달라져야 할거다 안 그러면 몇년 안에 하와이 원주민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될거라 생각"

"지금 서프라이즈에서 미국이 하와이 왕국을 가져가는 것을 보니까 왠지 한국의 미래를 보는거 같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도 머지 않아 미,중,일 중 하나에 저렇게 팔릴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사실 전에 일본과 불평등 조약에서 이미 나라가 한번 팔린적이 있었지. 만약 독립이 되지 않았으면, 우리나라도 하와이 왕국처럼 역사속에 나마 남겨질 이름이되었을지도...
그리고 어쩌면 우린 그런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와이왕국의 85년만의 멸망. 무섭네요. 100년도 못 버틴.. 알고보면 호주나 뉴질랜드의 원주민들또한 같은 처지이죠~ 호주나 뉴질랜드의 원주민에 대한 처우를 보면 완전 주객이전도된 샘이죠. 힘이 없다는거 힘을 잃어간다는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MBC <서프라이즈> 815특집인가요? ^^ 하와이왕국의 멸망사! 미국의 치밀한음모, 민중을버린 권력, 자주권없는 나라...의미심장하군요. PD가 누구신지 궁금^^"

(이미지는 뉴스엔 중에서)

오늘 방송된 서프라이즈의 '아...! 알로하오에'는 하와이왕국의 탄생과 멸망 과정에서 '알로하오에'의 슬픈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방송 마지막 부분에서 교훈을 남기더군요. 국가를 형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국토, 국민 그리고 주권입니다. 하와이왕국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잃은 왕국의 망국사였다는 것이지요. 무분별하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힘을 키우지 못한 채 고유의 문화마저 지키지 못한 어느 왕국 이야기가 바로 '알로하오에'였습니다. 이는 하와이왕국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와이왕국의 탄생과 멸망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인터넷의 여러 자료를 토대로 하와이와 하와이왕국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것이라 다소 내용이 많은 점 양해바랍니다.

하와이 역사와 하와이왕국의 망국사

하와이 역사의 탄생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하와이 비숍 박물관의 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하와이 제도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서기 750년경부터 입니다. 타히티 북동지역 마르케사스 섬에서 쌍둥이 카누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여기에 정착한 후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후 서기 1000년경에는 타히티와 소시에테 제도의 다른 부족들이 하와이로 이주해 와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살고 있던 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대 하와이 사회를 형성하였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점차 남쪽과 동쪽으로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이들은 솔로몬과 피지, 그리고 마침내는 뉴질랜드를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이스터 섬, 북쪽으로는 하와이 제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3각형의 폴리네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습니다.


이 문화권 안에는 사모아, 통가, 타히티, 마르케사스 등의 제도들이 포함되며, 이들 섬들은 오래 전부터 서로 교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와이 역사의 원조를 본다면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탄생했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하와이왕국의 탄생과 멸망 85년 역사는? 


카메하메하 대왕의 하와이 통일


카메하메하(1795~1819년) 왕은 하와이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습니다. 카메하메하는 하와이어로 외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출생은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하늘이 크게 갈라지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멎자, 서쪽 하늘에서 꼬리를 길게 단 유성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파에아라고 이름 붙여진 이 남자아이는 쑥쑥 자라 건강하고 힘도 세며, 무예에도 조예가 깊은 청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를 발견할 당시, 하와이 제도는 각지에 사는 부족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의 시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컸던 사람은 하와이 섬의 왕 칼라니오푸우(Kalaniopuu)였습니다. 카메하메하는 이 왕의 조카로, 어린 시절부터 그의 궁전에서 자랐습니다. 젊은 날의 카메하메하는 1778년과 1779년에 왕과 함께 쿡 선장의 배를 견학하기도 했습니다. 카메하메하는 거기에서 서양 문명을 접하고, 현대적인 총포의 위력 앞에서 과학적인 지식을 배웠습니다. 1782년 칼라니오푸우 왕이 죽자, 카메하메하는 하와이 섬의 경쟁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1790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으로 카메하메하는 케오우아(Keoua) 족을 제외한 전 부족을 통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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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하메하 2세 죽음과 기독교의 하와이 문화 파괴

위대했던 카메하메하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장남인 리홀리호(Liholiho, 카메하메하 2세,  1819~1824년)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카메하메하의 총애를 받았던 왕비 카아후마누(Kaahumanu)는 그의 후견인이 되어, 스스로를 섭정여왕이라 칭하며 통치권을 장악하였습니다. 하와이 역사에 그녀가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고 합니다.

1820년 미국의 보스턴으로부터 선교사단이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하고, 영어로 교육을 시킴으로써 사람들은 영어를 학습 문자로 갖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있었던 카아후마누는 전통적인 관습이나 카푸(Kapu)라고 불리던 인습적인 계급제도를 비판하며, 마침내 카메하메하 2세로 하여금 이 제도를 폐지하게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계기를 놓치지 않고 기독교 종교개혁운동을 펼쳤고, 일부 과격파에 의해서 성전과 많은 우상물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로써 하와이 문화는 종교와 섞이게 되었고, 이것은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외래인들로 인하여 서구 사상이 하와이에 들어오기 전까지 카푸 제도는 하와이 원주민들 사이에서 100년 이상이나 전해져 오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제도가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또한 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1824년 카메하메하 2세와 그의 부인 카마말루(Kamamalu)는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했는데, 홍역에 걸려 그해 7월에 죽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바이런 경이 진두지휘한 영국 군함에 실려 하와이로 되돌아왔습니다.

카메하메하 3세의 30년간 왕조 번성 시대

1824년, 카메하메하 2세의 뒤를 이어 나이가 10살이나 어린 동생 카우이케아오울리(Kauikeaouli)가 9살의 나이로 카메하메하 3세(재위 1824~1854년)가 되었습니다. 카메하메하 3세가 통치하던 30년간은 하와이 왕조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시대였습니다. 그는 1840년에 헌법을 공포함으로써 하와이가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의 기강을 확립해 나갈 수 있게 했으며, 토지제도개혁(1842년) 등 국가 체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였습니다.

1850년에 그는 수도를 마우이의 라하이나에서 오아후의 호놀룰루로 옮겼습니다. 경제의 중심은 백단향 채취와 고래잡이에서 온난한 기후를 이용한 사탕수수의 재배로 옮겨갔습니다.

카메하메하 4세와 영국과의 교류 확대

1854년에 카메하메하 3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조카 알렉산더 리홀리호(Alexander Liholiho, 카메하메하 3세의 이복 누이인 Kinau의 아들이자, 카메하메하 1세의 손자,  1855~1863년)를 후계자로 지명하였습니다. 카메하메하 4세는 산업을 주도하면서 하와이에 경제적인 붐을 가져왔습니다. 하와이 섬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고, 라하이나와 호놀룰루는 무역을 위한 중요한 항구가 되었습니다.

카메하메하 4세는 미국 방문 때 받은 인종적인 모욕에 대한 분노와 갈수록 깊숙이 파고드는 미국의 강력한 힘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반면, 영국을 방문했을 때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와이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점점 키워 주었습니다. 그가 남긴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퀸스 병원의 설립이었습니다. 세균에 대한 면역이 없는 하와이인들이 외국인과의 접촉으로 여러 가지 병원균에 전염되어 사망률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왕실은 항상 염려해 왔던 것입니다. 1863년 카메하메하 4세는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후계자로 그의 맏형 로트(Lot)를 지명하였습니다.

카메하메하 5세와 왕조의 종말 예고

로트(Lot Kamehameha, 카메하메하 5세, 1863~1872년)는 그의 할아버지 카메하메하 1세 때의 찬란했던 왕권을 다시 복원하는 데 힘썼습니다. 동시에 주민들에게 세심한 정책을 펼쳤던 그는 주법(酒法)의 폐기를 반대하고, 주민들과 자유롭게 어울렸습니다. 또한 사탕수수 산업의 증진을 위해 노동을 권장하기 시작했고, 이민 부서를 설치하여 외국으로부터 많은 노동 이민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헌법에 대한 정부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1864년에 헌법을 작성하여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이 헌법은 하와이 역사상 어느 헌법보다도 가장 긴 23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속되기는 했지만, 결국은 왕정을 무너뜨리게 된 반대파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던 카메하메하 5세는 그의 누이인 빅토리아 카마말루(Victoria Kamamalu)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그녀는 1866년에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다시 파우아히 비숍(카메하메하 1세의 증손녀)에게 왕관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그녀는 사양하였습니다. 결국 카메하메하 5세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카메하메하 직계의 대는 이어지지 못했으며, 이는 곧 그 왕조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 선출된 루날릴로왕의 1년만의 사망

카메하메하 5세 사망 후 카메하메하 자손의 대가 끊기자 새로운 왕조가 왕과 귀족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카메하메하 1세의 이복 동생의 후손인 윌리엄 찰스 루날릴로(William Charles Lunalilo, 1873~1874년)는 왕실 의회의 선거에 의해 6대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경쟁자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를 투표에서 가볍게 누르고 당선되어, 의회의 승인을 받아 왕이 된 것입니다.

그의 재위 기간에 왕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지방 하와이안 세력들과의 싸움이 표면화되고, 반면 왕조정치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경제면에서는 사탕수수 재배가 발달하여 중요한 산업으로 성장을 계속하였습니다. 파우아히 공주의 부군인 찰스 비숍을 포함하여 세 명의 미국인을 내각에 기용하고 있던 왕의 정부는 사탕수수의 이익을 늘리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하여 미국과 상호조약을 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미국측의 진주만 양도 요구와 맞물리자 원주민들은 분노하였습니다. 결국 루날릴로 왕은 그 조약을 철회하였습니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 술을 많이 마셔, 왕위에 오른 지 1년 25일 만인 그의 39번째 생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칼라카우아왕, 미국과 상호조약 체결 후 왕국 몰락



루날릴로의 뒤를 이은 사람은 이전의 왕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그에게 패한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 재위 1874~1891년)였습니다.
칼라카우아는 단 한 사람의 적수였던 엠마(Emma) 여왕을 쉽게 물리치고 입법회의에 의해 왕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폐지되었던 훌라 댄스를 부활시키는 등 사라져 가는 하와이 전통문화를 되살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또 미국을 방문하여 상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하와이의 설탕을 관세 없이 미국에 수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상품 또한 관세 없이 수입해야만 하였습니다. 이를 기회로 미국의 자본가들은 점차 하와이에서 그들의 세력을 넓혀 갔으며, 그 힘은 정치에까지 미쳐 진주만을 미국 해군의 보급기지로 한다는 조항을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음모가 숨어있었던 상호조약 체결과 미국의 진주만 보급기지 건설은 하와이 운명에 결정적 작용을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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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폐위와 하와이왕국의 종말

칼라카우아 왕이 죽은 후, 그의 여동생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1891~1893년)가 뒤를 이어 여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칼라카우아 왕이 외유 중일 때는 섭정을 맡기도 했던 여왕은 의지가 강하고 정치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와이를 미국과 합병시키려는 소수 백인들로부터 하와이 원주민들의 권리를 되찾는 데 온 정열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반대파들은 합병을 지지하는 연맹을 결성하여 왕권을 제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미국 해군 함대의 선원과 해군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왕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헌법을 공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직적인 군사력을 갖춘 합병파는 여왕이 만든 신헌법 초안에 대하여 일종의 쿠데타라 칭하며, 이올라니 궁전을 봉쇄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해 여왕에게 퇴위를 강요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와이 85년 왕국은 비운의 여왕 릴리우오칼라니의 퇴위로 막을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을 노래한 알로하오에(Alohaoe)는 그녀가 작사, 작곡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국 하와이였습니다. 하와이는 결국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며 역사에서 사라졌고 원주민들은 비참한 신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와이는 원래 태평양 한 가운데서 평화롭던 섬들이 모여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와이왕국의 멸망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자본에 의해 예속되면서 야금야금 하와이는 몰락해 갔습니다. 더 멀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평화의 하와이왕국에 대한 변화와 몰락의 거센 태풍은 178년 영국의 탐험가 쿡 선장이 카우아이섬에 상륙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카메하메하는 서양 무기와 기술로 하와이제도를 통일해 왕국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영광이자 몰락을 가져온 시발점이었습니다.

미국의 문화-경제-정치 등 지배 후 하와이 복속 역사의 교훈

당초 서양의 과학기술과 화약무기는 카메하메하에게 하와이 제도 전체의 통치자라는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하와이 원주민들에겐 재앙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쿡 선장이 하와이 제도를 발견할 당시 원주민들의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80년 후 원주민들의 인구는 5분의 1인 6만 명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서양인들이 함께 가져온 홍역과 매독을 비롯한 전염병과 성병 때문에 엄청난 하와이 원주민들이 사망을 한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면역력이 약하고 의약품이 부족해 대거 사망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지요.

또한, 하와이왕국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문화와 역사를 잃은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카메하메하 대왕 사후 미국에서 파견된 기독교(루터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하와이의 전통 신앙을 간직했던 성전들이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당했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하와이 전통문화를 말살해 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19세기 중엽 미국을 휩쓴 '골드 러시(Gold Rush)'의 영향으로 미국 서부 해안지대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하와이는 설탕공급지가 되었습니다. 미국 자본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지배한 것입니다.

          하와이를 지배한 돌은 하와이공화국 대통령이 됐고 돌 집안은 지금껏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하와이 경제가 미국 백인 농장주의 사탕수수 산업으로 급속하게 이동한 결과는 하와이왕국에 더욱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하와이의 토지 대부분과 원주민들의 문화가 완전히 미국 백인들의 손에 넘어간 셈입니다. 백인 농장주들이 중국, 일본, 한국, 필리핀 등지에서 값싼 노동력을 수입하면서 헐값으로 하와이 원주민들의 토지를 빼앗았습니다. 원주민들은 일자리조차 얻지 못하고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 갔습니다. 미국이 하와이를 자본으로 지배하고 문화마저 말살해버린 것이지요.

미국은 사실상 경제와 문화를 복속한 데 이어 정치 군사적으로도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노골적으로 하와이를 미국과 합병시키려 했지요. 미국은 진주만을 해군 보급기지화 건설에 나서기도 햇습니다. 릴리우오칼리니 여왕이 즉위한 후 다시 하와이 원주민 문화를 되찾는 노력에 나서자 미국 백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아예 정복에 나섰습니다. 미국은 쿠데타 후 임시정부를 수립해 궁전을 봉쇄해 버렸지요. 여왕 구출을 위한 원주민들의 무장 봉기가 제압당하자 릴리우오칼리니 여왕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퇴위문서에 서명하며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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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894년 7월 4일, 백인들은 샌퍼드 돌(Dole)을 대통령으로 하는 하와이공화국 수립 선포를 하고 말았습니다. 하와이왕국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여기서 샌퍼드 돌은 델몬트와 함께 다국적 식품회사 돌(Dole)사를 만든 제임스 돌이 사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898년 미국 의회는 하와이와의 합병안을 승인해 미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하와이 진주만 기지를 바탕으로 아시아로 진출하는 군사적 요충지로도 제국주의 기반에서 중요했던 것이지요. 1909년 미국은 하와이 진주만은 태평양 함대 근거지로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제2차 대전 당시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하와이에서 민간인 사망자가 대량 발생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슬픈 하와이 원주민들의 삶을 닮은 알로하오에 이유는?

그렇게 하와이왕국의 멸망은 나라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릴리우오칼리니 여왕은 퇴위 후 사망시까지 궁전에서 연금상태로 살다 1917년 호놀룰루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작사 작곡한 노래가 바로 '알로하오에'였습니다. '알로하오에'는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그녀가 공주 시절 젊은 연인들의 이별장면을 보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알로하오에는 하외이어로 '그리운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알로하오에는 연인들의 이별에 대한 슬픔을 넘어 하와이왕국의 멸망에 대한 비극이 담긴 노래였던 셈입니다.

우리는 하와이왕국 멸망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원래 자기네 땅에서 쫓겨나 지슴처럼 비참한 삶을 살고있는 하와이 원주민들의 신세입니다. 하와이왕국은 기독교에 의해 자기들의 문화를 먼저 잃어버렸고 이후 미국 자본에 경제가 예속된 후 결국 정치와 군사적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 사이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가져온 바이러스 병균에 인구의 대다수가 사망했고 태평양 전쟁에서도 많은 수가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하와이왕국의 슬픈 역사가 생각납니다. 미국과 대등한 관계는 좋지만 너무 미국의 자본과 문화에 예속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민족 고유의 전통과 역사를 잃고 외세에만 의존하다가 나라를 송두리채 빼앗긴 것입니다. 최근 독도나 동해 문제를 보면 미국은 일본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저자세로 미국을 형님처럼 모셨지만 미국은 한국은 관심조차 갖지 않았습니다. 특정 국가에만 올인하면 위험할 수 있으니 등거리 외교가 필요한 셈이빈다. 우리나라도 당당한 자주 국가로서 민족과 역사의식을 갖고 우리의 경쟁력을 키워나가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