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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하면 서울시장 보궐선거일인 10월 26일 투표소에 가서 투표할 수 없는 선거권자는 부재자 투표를 통해 소중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 부재자 투표 방법은 간단합니다. 10월 7일부터 10월 11일 사이에 부재자신고서를 작성하여 자신의 주민등록지 구청장에게 신고하면 자신의 집이나 직장 등에서 손쉽게 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부재자신고는 선거인명부에 오를 자격이 있는 국내거주자 중 부재자신고를 하고자 하는 유권자가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구청이나 동사무소에 비치된 부재자신고서를 이용하거나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서식을 다운받아 작성하여 늦어도 10월 11일 오후 6시까지 자신의 주민등록지 구청에 도착되도록 우편발송(무료)하거나 직접 제출하면 됩니다.

부재자신고 인명부는 10월 12일 확정되며, 부재자신고인에게는 오는 10월 17일까지 부재자투표용지와 후보자가 제출하는 선거공보, 그리고 투표안내문이 발송될 예정입니다.

            당신이 투표하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탐욕의 그들에 의해 짓밟혀질 것이다.

특히,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부재자투표는 별도의 부재자투표소가 설치되지 않고 거소투표의 방법으로 실시됨에 따라 부재자신고 후 선관위에서 보내온 투표용지에 1인의 후보자를 선택하여 해당 난에 볼펜 등으로 기표한 후 투표일인 10월 26일 오후 8시까지 관할 구위원회에 도착될 수 있도록 우편으로 송부하면 됩니다.

오는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일에 투표소에서 직접 투표할 수 없는 유권자는 미리 부재자신고를 하면 집이나 직장에서 거소투표의 방법으로 투표할 수 있는 만큼 투표권 행사를 포기하지 말고 꼭 부재자신고를 하여 투표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민주주의 서울 민으로서 자존심을 지켰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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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민주주의 시민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투표에 의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해야 겠습니다.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지역이나 장소에 거주하는 분들은 부재자 투표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투표 안하면 너희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바라보는 듯한 표정들이다

부재자 신고서 양식의 일부를 캡쳐한 내용이니 참고해 부재자 신고 방법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부재자 투표를 하려면 먼저 10월 11일까지는 반드시 부재자 신고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부재자 신고서는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부재자 신고 서식 다운로드를 클릭하면 해당 한글 서식 부재자 신고서 문서가 뜹니다. 부재자 신고서에 따라 각각 내용을 기입한 후 본인 서명이나 도장 날인을 합니다. 그리고 부재자 신고서와 함께 출력되는 서식을 접는 선에 따라 풀칠해 봉투로 만들어 서울시 해당 구청에 보내면 됩니다. 그러면 서울시 해당 구청에서 10월 17일(월)까지 투표 용지를 배송해 줄 것입니다.

이제 민주주의 서울 시민이라고 자부할 수 있겠지요.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 투표용지에는 1번부터 10번까지 출마자 이름이 있으니 잘 확인하고 투표를 해야 합니다. 저희 장모님도 경기도 아들 집에 살면서 아직 주소지가 서울이라서 투표에 꼭 참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특히 앞으로 대한민국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은 자신의 소중한 투표권 권리는 행사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서울시장 보궐선거 부재자 투표 방법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아름다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미래가 활짝 열렸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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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탐진강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것 만으로도 풍성한 마음이 가득하겠지요. 맏며느리인 아내는 벌써부터 차례상 준비에 걱정이 많습니다. 물가도 오르고 준비할 것도 많아서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오랜 시간 교통체증에 고생할 귀성행렬에서 벗어난 것에 감사한 마음이 더 크더군요.
 
일가 친척들을 비롯한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에는 모처럼 이야기 꽃이 활짝 피곤 합니다. 누가 어떻게 잘 사는지 가족 안부부터 먼저 궁금하겠지요. 그리고 술 한 잔 걸치면 꼭 정치 이야기가 안주로 나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가 더럽다 욕하지만 여전히 정치는 우리 생활과 밀접하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 이야기 안주로 정치인들에 대한 품평회가 열리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올해 추석 민심의 최대 이슈는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나올 만한 주제는 '안철수 신드롬'이 아닐까 합니다. 안철수 현상은 지난 9월 1일부터 지금까지 단 몇 일 만에 최대의 화두였으니까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원장(박사)은 단 두마디로 기존 정치권의 뿌리를 송두리채 흔들어 버렸습니다. 첫번째 한 마디는 서울시장 출마에 대해 '고민 중'이라는 말이었지요. 안철수 박사는 순식간에 여론조사 지지율 50%를 넘는 1위 후보로 정국을 강타했습니다. 여야 정치권은 경악했고 패닉상태에 빠졌지요.


안철수 박사가 단지 '고민 중' 한 마디에 우리나라 정치 지형이 송두리채 바뀌는 쓰나미가 밀려왔다

또 한 마디는 그 후 안철수 박사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변호사)에게 '양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조건도 없었습니다. 50% 지지율을 받는 절대 강자가 단 5%의 약자에게 양보한 것이지요. 그것은 안철수 박사가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두 사람의 신뢰는 아름다운가게,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등 나눔의 시민운동을 함께 했고 포스코 사외이사 등을 통한 오랜 관계가 있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철수 박사가 쿨하게 학교로 돌아간 후에도 후폭풍은 더 강하게 불었습니다. 안철수 박사의 지지를 받은 박원순 변호사는 단숨에 여론조사 지지율 50%로 1위에 등극했습니다. 안철수 박사를 지지하던 표의 70%가 박원순 변호사에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철수 박사는 순식간에 유력한 대권 후보 반열에 올랐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철옹성이었던 '박근혜 대세론'은 안철수 신드롬에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대통령 후보 지지율 1위가 안철수 박사로 바뀐 것이지요.

이러한 안철수 신드롬에 대해 일시적 거품 현상이다, 파괴력이 강해 오래 갈 것이다 등 갑론을박 말이 많습니다. 안철수 신드롬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추석 민심을 타고 더욱 확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이유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국민들은 현재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물론 여야 정치인들을 모두 싸잡이 못믿겠다는 분위기입니다. 더 나아가 기존 부패하고 부조리한 정치인들을 바꿔보자는 민심이 들끓고 있습니다.

                             지난 4년간 박근혜 대세론은 안철수 신드롬에 단번에 사라졌다

그 다음으로, 이런 민심 변화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는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썩어빠진 기존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의 폭발이자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열망입니다. 국회의원들은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매일 싸움질만 하는 것에 넌덜머리가 났습니다. 시대착오적인 구시대 좌우 이념논쟁에만 매달려 있는 것도 신물이 납니다. 지역간 갈등, 세대간 대결을 부추기는 것도 정치권이 원흉입니다. 정치가 국가 사회의 갈등을 통합하고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흑백논리와 편가르기로 갈등과 반목을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국민들은 국민 통합을 통한 미래와 희망의 비전을 제시할 인물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철수 신드롬의 시작이었습니다. 신선한 충격이지요. 안철수 박사는 반듯한 가정에서 자라 엘리트 교육을 받았지만 늘 사회에 헌신하는 공적 삶을 살아왔습니다. 나 보다는 남을 먼저 배로하고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었지요. 그리고 항상 공부하고 노력하며 미래와 희망을 만드는 도전정신의 연속이었습니다. 더욱이 높은 도덕성은 물론 상식과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세론은 어떤가요? 그야말로 구시대의 인물로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원칙있는 정치인으로 회자되기도 하지만 아버지 박정희의 향수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르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측은지심의 산물일 수도 있지요. 박근혜 대세론은 대안이 없는 정치 상황에서 발생된 한시적 효과였던 셈입니다. 그 나물이 그 나물이라는 한계였지요. 따라서, 안철수 신드롬 한 방에 박근혜 대세론이 흔들리는 것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갈구하던 국민들의 변화 욕구가 폭발한 것입니다. 

                            국민 갈등과 분열의 진원지는 바로 시대착오적 정치행태에 있다

무엇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분출된 상황입니다. 이명박 정권은 '공정사회'와 '친서민'을 국정기조로 내세웠지만 실제는 불공정한 사회와 부자들을 위한 정책만 추구해 왔습니다. 게다가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인권과 복지도 신음했습니다. 자랑스런 민주주의 역사가 과거로 역주행한 것이지요.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나라를 염원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갈증과 변화 움직임은 이제 거대한 물결이 되고 있습니다. 안철수 신드롬은 갑자기 튀어나온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와 희망을 향한 시대혁명인 것이지요. 이명박 대통령이 어제 대담 방송을 했습니다. 이미 정해진 질문에 따른 답변 형식이라서 대화가 아니라 연기라는 비아냥도 받더군요. 이명박 대통령은 추석 민심을 잡기 위해 마련된 대담 방송에서 안철수 현상에 대해 '올 것이 왔다'며 정치권의 변화를 주문했습니다. 방송 전 언론보도에는 안철수 신드롬을 비판할 것이라고 나오기도 했는데 국민의 눈초리에 발언 방향을 바꾸었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안철수 신드롬이 이명박 대통령이나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같은 인물들이 엉뚱한 전시행정과 부조리에 분노한 국민들의 불만 분출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나라당이나 민주주당의 기득권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부패와 부조리한 구시대적 정치행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흑색선전 인신공격 등 마타도어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습니다. 기존 구시대 정치인들이 만든 갈등과 반목의 정치행태는 극우 찌라시 매체에도 그대로 투영돼 있더군요. 이번 추석 민심 이슈에서 안철수 신드롬이 더욱 확산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기득권 정치인들이 참회록을 쓰고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국민들 앞에 바짝 엎드리지 않으면 여야 정치인들은 내년에 모두 쓰나미에 밀려 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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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을 앞두고 아파트 단지를 걷다가 무궁화꽃을 만났습니다. 하얗고 붉은 무궁화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핀 모습을 보니 반갑더군요. 무궁화꽃을 보면 어린 시절 생각이 납니다.

어릴 때 시골마을에는 무궁화꽃이 많았습니다. 초가집에 대문도 없던 마을이었지요. 이맘 때가 되면 마을에는 무궁화꽃이 기득했습니다. 마을의 집마다 무궁화꽃이 울타리 역할을 했습니다. 무궁화는 가지만 꺽어서 심어놔도 그냥 뿌리를 내리고 자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합니다. 그래서 시골 마을 사람들은 무궁화를 울타리 대용으로 사용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자연스럽게 무궁화꽃인 친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무궁화는 어느 집이나 심어져 있었으니까요. 무궁화꽃이 필 때면 끊임없이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무궁화 뿌리의 생명력 만큼이나 꽃도 생명력이 강했던 것이지요. 우리 민족이 끈기있고 근면한 민족성이 상징이듯이 무궁화가 그랬습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는데 물방울을 머금은 무궁화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동구 밖에서 술래잡기를 할 때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곤 했습니다. 술래가 눈을 감은 채 벽에 대고 무궁화꽃을 외치는 순간에만 다른 아이들은 움직일 수 있었지요. 그렇게 아이들은 무궁화꽃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무궁화는 쉽게 만날 수 있었지요. 무궁화가 얼마나 우리나라 사람들과 가까운 식물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무궁화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궁화꽃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무궁화는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지요. 옛날 기록을 보면 우리 민족은 무궁화를 고조선 단군시대 이전부터 하늘나라의 꽃으로 무궁화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신라는 스스로를 근화향, 즉 무궁화 나라로 불렀습니다. 중국에서는 과거부터 우리나라를 무궁화가 피고 지는 군자의 나라로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근현대사에서 무궁화가 더욱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해진 계기는 애국가 노래가사에 무궁화가 들어가면서부터 였습니다. 조선말 개화기를 거치면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노랫말이 애국가에 삽입된 것이지요. 항일 독립군도 여러 문서나 문양에 무궁화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는 무궁화를 싫어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은 무궁화가 대한민국의 국화라는 이유로 무궁화를 뽑아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일제가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처럼 무궁화도 정치적 이유로 탄압을 받은 셈입니다.

                무궁화는 삼천리 금수강산 방방곡곡마다 울타리 대신에 사용되어 친숙한 꽃이었다

이러한 모진 풍파 속에서도 무궁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계속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궁화는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자연스럽게 나라꽃이 되었습니다. 이어 태극기가 국기법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국기봉의 윗부분은 무궁화 꽃봉오리 모양으로 정해졌습니다. 정부와 국회의 표장도 무궁화꽃의 도안으로 만들어져 사용됐습니다. 이 때부터 무궁화꽃이 다양한 국가 상징물에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무궁화는 어떤 꽃인가?

무궁화(無窮花, Hibiscus syriacus)는 아욱과의 낙엽관목으로, 대한민국의 나라꽃입니다. 중국·인도가 원산지로 알려졌으며, 세계 여러 곳에서 가꾸어지고 있습니다.

작은키 나무로, 2~3미터의 높이에 팔목 정도의 굵기로 자랍니다. 꽃잎은 길이가 4~10센티미터이며 달걀 모양으로 깊게 3갈래로 보통 5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7월에서 9월에 꽃이 피는데, 새벽에 꽃이 새로 피었다가 오후에는 오므라들기 시작하고 해질 무렵에는 꽃이 떨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씨에는 잔털이 붙어 있습니다.



꽃 색깔은 붉은색, 분홍색, 연분홍색, 보라색, 자주색, 파란색, 흰색 등 다양합니다. 꽃잎에는 보통 밑부분에 단심이라고 하여 색이 더 짙은 부분이 있는데, 이 곳에서 바깥쪽으로 같은 색깔의 선들이 뻗고 있습니다. 긴 타원형 열매는 방이 다섯 개로 나누어지며 완전히 익으면 갈라져서 씨를 퍼뜨립니다.

날마다 새로운 꽃이 피어 신선한 모습을 자랑하며 추위에도 비교적 강한 편입니다. 나무가 건강하기 때문에 특별히 환경이 좋은 곳이 아니더라도 잘 자랍니다. 따라서 뜰이 넓은 집 안이나 공공 건물의 화단에 심으면 좋습니다.

번식은 씨로도 하고 꺾꽂이로도 할 수 있습니다. 씨로 번식시킬 때는, 지난해에 받은 씨를 2~3월에 뿌립니다. 꺾꽂이로 할 때는, 봄이 되어 싹트기 전에 묵은 가지를 10~15cm로 잘라서 꽂거나, 장마철에 그 해에 자란 가지를 잘라서 꽂아둡니다. 꺾꽂이한 것은 모두 뿌리가 내립니다. 뿌리가 내린 후 1~2년 지나서 원한 곳에 옮겨 심습니다. 무궁화는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으므로 겨울 또는 봄에 가지를 치면 그 해에 자란 가지에 꽃이 피고 키가 커지는 것도 막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궁화는 8월 15일 전후로 꽃이 활짝 피어났습니다. 광복절 즈음에 무궁화는 가장 흐드러지게 고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화려한 장미꽃과 같은 여타 화초에 비해 무궁화는 다소 검소한 모습이기는 합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근한 매력을 지닌 무궁화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 민족의 특성을 닮아 있다고 할까요. 

그러면 무궁화의 꽃이름 명명법은 어떨까요? 무궁화의
학명은 히비커스(Hibiscus)입니다. 이집트의 히비스의 여신을 닮았다는 뜻으로 히비스의 여신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영문명(Rose of sharon)은 신에게 바치고 싶은 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자명 무궁화(無窮花)는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않는 꽃'이란 뜻이며 한글은 세종25년 훈민정음을 창제하며 처음으로 불리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궁화는 우리 고유 품종 70여종을 포함하여 200여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궁화의 분류는 크게 배달계, 단심계(백단심, 홍단심계, 청단심), 아사달계로 나뉘어집니다. 배달계는 백의 민족인 한민족을 지칭하며, 꽃잎과 단심이 온통 순백색꽃입니다. 단심계는 반만년 역사속에 조국을 지켜온 우리민족의 뜨겁고도 헌신적인 투철한 애국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꽃잎은 희거나 분홍 보라색이며 단심은 붉은색 형태를 지니고 있지요. 아사달계는 무영탑에 얽힌 석공과 아사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단심은 붉고 꽃잎은 좌우상하에 연분홍 고운무늬가 깔려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무궁화는 7월부터 매일 새벽에 새로운 꽃이 피어납니다. 이렇게 꽃이 피는 무궁화는 10월 중순까지 무려 100일이상 연이어 꽃이 끊임없이 계속 피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끈기, 인내, 근면의 배달겨레의 표상이여기서 드러납니다. 강인한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성이 무궁화에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무궁화는 손에 닿으면 부스럼이 생기기도 하고 진딧물이 많이 생겨 꺼려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꽃이 외면받은 계기였지요. 그럼에도 진딧물에 강한 개량종 무궁화가 개발되면서 점차 좋아지고 있습니다.

무궁화의 꽃말은 '섬세한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 다른 꽃말로는 '일편단심'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나라 민족이 일편단심이라는 말을 애국심의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조나 절개로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무궁화는 변함없이 우리 민족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올해 광복절 66주년을 맞아 무궁화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초등학생 시절에 무궁화꽃을 노래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네 땅이라고 역사왜곡하고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만행에 무궁화꽃은 여전히 일제 강점기에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지키는 것은 역사의식을 갖는 것부터 출발입니다. 그리고 청산하지 못한 반역과 굴종의 친일 역사는 단죄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는 한 우리나라 꽃, 일편단심 무궁화는 슬픔과 고통 속에 피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에 피는 무궁화는 보고 싶습니다. 진정한 광복의 무궁화를...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꽃.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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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 우연히 '놀라운TV 서프라이즈'를 시청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방송 내용은 '아...! 알로하오에'라는 서프라이즈한 역사였습니다. 그 동안 몰랐던 하와이왕국과 역사에서 사라진 망국사였습니다.

트위터를 살펴보니 서프라이즈 시청 후 느낀 글들이 많았습니다. 모두가 비슷한 심정이었습니다. 하와이왕국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그러한 망국사에서 교훈을 느끼는 글들이 다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이 하와이왕국의 모습은 아닌가 오버랩된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특히나 내일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8.15 광복절이라서 특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지요. 또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우리 스스로 국민의식이 높아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사라진 하와이왕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우선 서프라이즈 방송 이후 트위터에 남긴 네티즌들의 글부터 살펴볼까요.

서프라이즈 시청 후 트위터의 글들

"하와이에 하와이왕국이 있었으며, 무능하고 자기 자신과 돈밖에 모르는 독재자 칼라카우에가 자국민의 복지는 외면하고 자국의 문화도 배척하며 미국만 쫓다가 미국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하와이 역사를 보니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있는 MB가 오버랩된다."

"오늘 서프라이즈에 나온 하와이왕국의 멸망과정을 보고 너무 놀랬다 지금의 우리나라가 돌아가는 모습과 닮아도 너무 닮아있다!!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국민의 인식이 달라져야 할거다 안 그러면 몇년 안에 하와이 원주민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될거라 생각"

"지금 서프라이즈에서 미국이 하와이 왕국을 가져가는 것을 보니까 왠지 한국의 미래를 보는거 같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도 머지 않아 미,중,일 중 하나에 저렇게 팔릴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사실 전에 일본과 불평등 조약에서 이미 나라가 한번 팔린적이 있었지. 만약 독립이 되지 않았으면, 우리나라도 하와이 왕국처럼 역사속에 나마 남겨질 이름이되었을지도...
그리고 어쩌면 우린 그런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와이왕국의 85년만의 멸망. 무섭네요. 100년도 못 버틴.. 알고보면 호주나 뉴질랜드의 원주민들또한 같은 처지이죠~ 호주나 뉴질랜드의 원주민에 대한 처우를 보면 완전 주객이전도된 샘이죠. 힘이 없다는거 힘을 잃어간다는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MBC <서프라이즈> 815특집인가요? ^^ 하와이왕국의 멸망사! 미국의 치밀한음모, 민중을버린 권력, 자주권없는 나라...의미심장하군요. PD가 누구신지 궁금^^"

(이미지는 뉴스엔 중에서)

오늘 방송된 서프라이즈의 '아...! 알로하오에'는 하와이왕국의 탄생과 멸망 과정에서 '알로하오에'의 슬픈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방송 마지막 부분에서 교훈을 남기더군요. 국가를 형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국토, 국민 그리고 주권입니다. 하와이왕국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잃은 왕국의 망국사였다는 것이지요. 무분별하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힘을 키우지 못한 채 고유의 문화마저 지키지 못한 어느 왕국 이야기가 바로 '알로하오에'였습니다. 이는 하와이왕국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와이왕국의 탄생과 멸망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인터넷의 여러 자료를 토대로 하와이와 하와이왕국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것이라 다소 내용이 많은 점 양해바랍니다.

하와이 역사와 하와이왕국의 망국사

하와이 역사의 탄생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하와이 비숍 박물관의 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하와이 제도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서기 750년경부터 입니다. 타히티 북동지역 마르케사스 섬에서 쌍둥이 카누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여기에 정착한 후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후 서기 1000년경에는 타히티와 소시에테 제도의 다른 부족들이 하와이로 이주해 와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살고 있던 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대 하와이 사회를 형성하였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점차 남쪽과 동쪽으로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이들은 솔로몬과 피지, 그리고 마침내는 뉴질랜드를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이스터 섬, 북쪽으로는 하와이 제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3각형의 폴리네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습니다.


이 문화권 안에는 사모아, 통가, 타히티, 마르케사스 등의 제도들이 포함되며, 이들 섬들은 오래 전부터 서로 교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와이 역사의 원조를 본다면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탄생했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하와이왕국의 탄생과 멸망 85년 역사는? 


카메하메하 대왕의 하와이 통일


카메하메하(1795~1819년) 왕은 하와이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습니다. 카메하메하는 하와이어로 외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출생은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하늘이 크게 갈라지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멎자, 서쪽 하늘에서 꼬리를 길게 단 유성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파에아라고 이름 붙여진 이 남자아이는 쑥쑥 자라 건강하고 힘도 세며, 무예에도 조예가 깊은 청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를 발견할 당시, 하와이 제도는 각지에 사는 부족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의 시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컸던 사람은 하와이 섬의 왕 칼라니오푸우(Kalaniopuu)였습니다. 카메하메하는 이 왕의 조카로, 어린 시절부터 그의 궁전에서 자랐습니다. 젊은 날의 카메하메하는 1778년과 1779년에 왕과 함께 쿡 선장의 배를 견학하기도 했습니다. 카메하메하는 거기에서 서양 문명을 접하고, 현대적인 총포의 위력 앞에서 과학적인 지식을 배웠습니다. 1782년 칼라니오푸우 왕이 죽자, 카메하메하는 하와이 섬의 경쟁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1790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으로 카메하메하는 케오우아(Keoua) 족을 제외한 전 부족을 통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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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하메하 2세 죽음과 기독교의 하와이 문화 파괴

위대했던 카메하메하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장남인 리홀리호(Liholiho, 카메하메하 2세,  1819~1824년)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카메하메하의 총애를 받았던 왕비 카아후마누(Kaahumanu)는 그의 후견인이 되어, 스스로를 섭정여왕이라 칭하며 통치권을 장악하였습니다. 하와이 역사에 그녀가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고 합니다.

1820년 미국의 보스턴으로부터 선교사단이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하고, 영어로 교육을 시킴으로써 사람들은 영어를 학습 문자로 갖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있었던 카아후마누는 전통적인 관습이나 카푸(Kapu)라고 불리던 인습적인 계급제도를 비판하며, 마침내 카메하메하 2세로 하여금 이 제도를 폐지하게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계기를 놓치지 않고 기독교 종교개혁운동을 펼쳤고, 일부 과격파에 의해서 성전과 많은 우상물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로써 하와이 문화는 종교와 섞이게 되었고, 이것은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외래인들로 인하여 서구 사상이 하와이에 들어오기 전까지 카푸 제도는 하와이 원주민들 사이에서 100년 이상이나 전해져 오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제도가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또한 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1824년 카메하메하 2세와 그의 부인 카마말루(Kamamalu)는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했는데, 홍역에 걸려 그해 7월에 죽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바이런 경이 진두지휘한 영국 군함에 실려 하와이로 되돌아왔습니다.

카메하메하 3세의 30년간 왕조 번성 시대

1824년, 카메하메하 2세의 뒤를 이어 나이가 10살이나 어린 동생 카우이케아오울리(Kauikeaouli)가 9살의 나이로 카메하메하 3세(재위 1824~1854년)가 되었습니다. 카메하메하 3세가 통치하던 30년간은 하와이 왕조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시대였습니다. 그는 1840년에 헌법을 공포함으로써 하와이가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의 기강을 확립해 나갈 수 있게 했으며, 토지제도개혁(1842년) 등 국가 체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였습니다.

1850년에 그는 수도를 마우이의 라하이나에서 오아후의 호놀룰루로 옮겼습니다. 경제의 중심은 백단향 채취와 고래잡이에서 온난한 기후를 이용한 사탕수수의 재배로 옮겨갔습니다.

카메하메하 4세와 영국과의 교류 확대

1854년에 카메하메하 3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조카 알렉산더 리홀리호(Alexander Liholiho, 카메하메하 3세의 이복 누이인 Kinau의 아들이자, 카메하메하 1세의 손자,  1855~1863년)를 후계자로 지명하였습니다. 카메하메하 4세는 산업을 주도하면서 하와이에 경제적인 붐을 가져왔습니다. 하와이 섬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고, 라하이나와 호놀룰루는 무역을 위한 중요한 항구가 되었습니다.

카메하메하 4세는 미국 방문 때 받은 인종적인 모욕에 대한 분노와 갈수록 깊숙이 파고드는 미국의 강력한 힘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반면, 영국을 방문했을 때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와이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점점 키워 주었습니다. 그가 남긴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퀸스 병원의 설립이었습니다. 세균에 대한 면역이 없는 하와이인들이 외국인과의 접촉으로 여러 가지 병원균에 전염되어 사망률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왕실은 항상 염려해 왔던 것입니다. 1863년 카메하메하 4세는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후계자로 그의 맏형 로트(Lot)를 지명하였습니다.

카메하메하 5세와 왕조의 종말 예고

로트(Lot Kamehameha, 카메하메하 5세, 1863~1872년)는 그의 할아버지 카메하메하 1세 때의 찬란했던 왕권을 다시 복원하는 데 힘썼습니다. 동시에 주민들에게 세심한 정책을 펼쳤던 그는 주법(酒法)의 폐기를 반대하고, 주민들과 자유롭게 어울렸습니다. 또한 사탕수수 산업의 증진을 위해 노동을 권장하기 시작했고, 이민 부서를 설치하여 외국으로부터 많은 노동 이민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헌법에 대한 정부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1864년에 헌법을 작성하여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이 헌법은 하와이 역사상 어느 헌법보다도 가장 긴 23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속되기는 했지만, 결국은 왕정을 무너뜨리게 된 반대파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던 카메하메하 5세는 그의 누이인 빅토리아 카마말루(Victoria Kamamalu)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그녀는 1866년에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다시 파우아히 비숍(카메하메하 1세의 증손녀)에게 왕관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그녀는 사양하였습니다. 결국 카메하메하 5세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카메하메하 직계의 대는 이어지지 못했으며, 이는 곧 그 왕조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 선출된 루날릴로왕의 1년만의 사망

카메하메하 5세 사망 후 카메하메하 자손의 대가 끊기자 새로운 왕조가 왕과 귀족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카메하메하 1세의 이복 동생의 후손인 윌리엄 찰스 루날릴로(William Charles Lunalilo, 1873~1874년)는 왕실 의회의 선거에 의해 6대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경쟁자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를 투표에서 가볍게 누르고 당선되어, 의회의 승인을 받아 왕이 된 것입니다.

그의 재위 기간에 왕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지방 하와이안 세력들과의 싸움이 표면화되고, 반면 왕조정치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경제면에서는 사탕수수 재배가 발달하여 중요한 산업으로 성장을 계속하였습니다. 파우아히 공주의 부군인 찰스 비숍을 포함하여 세 명의 미국인을 내각에 기용하고 있던 왕의 정부는 사탕수수의 이익을 늘리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하여 미국과 상호조약을 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미국측의 진주만 양도 요구와 맞물리자 원주민들은 분노하였습니다. 결국 루날릴로 왕은 그 조약을 철회하였습니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 술을 많이 마셔, 왕위에 오른 지 1년 25일 만인 그의 39번째 생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칼라카우아왕, 미국과 상호조약 체결 후 왕국 몰락



루날릴로의 뒤를 이은 사람은 이전의 왕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그에게 패한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 재위 1874~1891년)였습니다.
칼라카우아는 단 한 사람의 적수였던 엠마(Emma) 여왕을 쉽게 물리치고 입법회의에 의해 왕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폐지되었던 훌라 댄스를 부활시키는 등 사라져 가는 하와이 전통문화를 되살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또 미국을 방문하여 상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하와이의 설탕을 관세 없이 미국에 수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상품 또한 관세 없이 수입해야만 하였습니다. 이를 기회로 미국의 자본가들은 점차 하와이에서 그들의 세력을 넓혀 갔으며, 그 힘은 정치에까지 미쳐 진주만을 미국 해군의 보급기지로 한다는 조항을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음모가 숨어있었던 상호조약 체결과 미국의 진주만 보급기지 건설은 하와이 운명에 결정적 작용을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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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폐위와 하와이왕국의 종말

칼라카우아 왕이 죽은 후, 그의 여동생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1891~1893년)가 뒤를 이어 여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칼라카우아 왕이 외유 중일 때는 섭정을 맡기도 했던 여왕은 의지가 강하고 정치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와이를 미국과 합병시키려는 소수 백인들로부터 하와이 원주민들의 권리를 되찾는 데 온 정열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반대파들은 합병을 지지하는 연맹을 결성하여 왕권을 제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미국 해군 함대의 선원과 해군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왕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헌법을 공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직적인 군사력을 갖춘 합병파는 여왕이 만든 신헌법 초안에 대하여 일종의 쿠데타라 칭하며, 이올라니 궁전을 봉쇄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해 여왕에게 퇴위를 강요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와이 85년 왕국은 비운의 여왕 릴리우오칼라니의 퇴위로 막을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을 노래한 알로하오에(Alohaoe)는 그녀가 작사, 작곡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국 하와이였습니다. 하와이는 결국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며 역사에서 사라졌고 원주민들은 비참한 신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와이는 원래 태평양 한 가운데서 평화롭던 섬들이 모여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와이왕국의 멸망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자본에 의해 예속되면서 야금야금 하와이는 몰락해 갔습니다. 더 멀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평화의 하와이왕국에 대한 변화와 몰락의 거센 태풍은 178년 영국의 탐험가 쿡 선장이 카우아이섬에 상륙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카메하메하는 서양 무기와 기술로 하와이제도를 통일해 왕국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영광이자 몰락을 가져온 시발점이었습니다.

미국의 문화-경제-정치 등 지배 후 하와이 복속 역사의 교훈

당초 서양의 과학기술과 화약무기는 카메하메하에게 하와이 제도 전체의 통치자라는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하와이 원주민들에겐 재앙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쿡 선장이 하와이 제도를 발견할 당시 원주민들의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80년 후 원주민들의 인구는 5분의 1인 6만 명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서양인들이 함께 가져온 홍역과 매독을 비롯한 전염병과 성병 때문에 엄청난 하와이 원주민들이 사망을 한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면역력이 약하고 의약품이 부족해 대거 사망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지요.

또한, 하와이왕국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문화와 역사를 잃은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카메하메하 대왕 사후 미국에서 파견된 기독교(루터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하와이의 전통 신앙을 간직했던 성전들이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당했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하와이 전통문화를 말살해 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19세기 중엽 미국을 휩쓴 '골드 러시(Gold Rush)'의 영향으로 미국 서부 해안지대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하와이는 설탕공급지가 되었습니다. 미국 자본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지배한 것입니다.

          하와이를 지배한 돌은 하와이공화국 대통령이 됐고 돌 집안은 지금껏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하와이 경제가 미국 백인 농장주의 사탕수수 산업으로 급속하게 이동한 결과는 하와이왕국에 더욱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하와이의 토지 대부분과 원주민들의 문화가 완전히 미국 백인들의 손에 넘어간 셈입니다. 백인 농장주들이 중국, 일본, 한국, 필리핀 등지에서 값싼 노동력을 수입하면서 헐값으로 하와이 원주민들의 토지를 빼앗았습니다. 원주민들은 일자리조차 얻지 못하고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 갔습니다. 미국이 하와이를 자본으로 지배하고 문화마저 말살해버린 것이지요.

미국은 사실상 경제와 문화를 복속한 데 이어 정치 군사적으로도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노골적으로 하와이를 미국과 합병시키려 했지요. 미국은 진주만을 해군 보급기지화 건설에 나서기도 햇습니다. 릴리우오칼리니 여왕이 즉위한 후 다시 하와이 원주민 문화를 되찾는 노력에 나서자 미국 백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아예 정복에 나섰습니다. 미국은 쿠데타 후 임시정부를 수립해 궁전을 봉쇄해 버렸지요. 여왕 구출을 위한 원주민들의 무장 봉기가 제압당하자 릴리우오칼리니 여왕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퇴위문서에 서명하며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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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894년 7월 4일, 백인들은 샌퍼드 돌(Dole)을 대통령으로 하는 하와이공화국 수립 선포를 하고 말았습니다. 하와이왕국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여기서 샌퍼드 돌은 델몬트와 함께 다국적 식품회사 돌(Dole)사를 만든 제임스 돌이 사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898년 미국 의회는 하와이와의 합병안을 승인해 미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하와이 진주만 기지를 바탕으로 아시아로 진출하는 군사적 요충지로도 제국주의 기반에서 중요했던 것이지요. 1909년 미국은 하와이 진주만은 태평양 함대 근거지로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제2차 대전 당시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하와이에서 민간인 사망자가 대량 발생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슬픈 하와이 원주민들의 삶을 닮은 알로하오에 이유는?

그렇게 하와이왕국의 멸망은 나라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릴리우오칼리니 여왕은 퇴위 후 사망시까지 궁전에서 연금상태로 살다 1917년 호놀룰루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작사 작곡한 노래가 바로 '알로하오에'였습니다. '알로하오에'는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그녀가 공주 시절 젊은 연인들의 이별장면을 보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알로하오에는 하외이어로 '그리운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알로하오에는 연인들의 이별에 대한 슬픔을 넘어 하와이왕국의 멸망에 대한 비극이 담긴 노래였던 셈입니다.

우리는 하와이왕국 멸망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원래 자기네 땅에서 쫓겨나 지슴처럼 비참한 삶을 살고있는 하와이 원주민들의 신세입니다. 하와이왕국은 기독교에 의해 자기들의 문화를 먼저 잃어버렸고 이후 미국 자본에 경제가 예속된 후 결국 정치와 군사적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 사이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가져온 바이러스 병균에 인구의 대다수가 사망했고 태평양 전쟁에서도 많은 수가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하와이왕국의 슬픈 역사가 생각납니다. 미국과 대등한 관계는 좋지만 너무 미국의 자본과 문화에 예속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민족 고유의 전통과 역사를 잃고 외세에만 의존하다가 나라를 송두리채 빼앗긴 것입니다. 최근 독도나 동해 문제를 보면 미국은 일본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저자세로 미국을 형님처럼 모셨지만 미국은 한국은 관심조차 갖지 않았습니다. 특정 국가에만 올인하면 위험할 수 있으니 등거리 외교가 필요한 셈이빈다. 우리나라도 당당한 자주 국가로서 민족과 역사의식을 갖고 우리의 경쟁력을 키워나가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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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탐진강


최근 청계천 광교 부근에서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즐기는 여자 외국인 3명의 사진이 퍼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이색 풍경이지요. 요즘 무더운 여름 날씨를 감안하면 유럽같은 외국에서는 있을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지요.

그렇다면 이들 외국 여자들은 어떤 모습이었길래 그럴까요? 청계천에 발을 담그고 계단에 엎드려 햇볕을 즐기는 모습은 유럽의 강변을 연상시킬 만도 했습니다. 두 명의 백인 여성은 짧은 핫팬츠에 민소매 옷을 입은 채 대화를 나누었으며, 나머지 한 명의 여성은 아예 비키니 상의 차림으로 누워서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들 외국 여성들은 아예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한 모습도 보이더군요.

그런데 청계천 일광욕 논란이 일게 된 것은 과연 비키니 차림이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백인 외국 여성이라는 점이 더욱 불을 지폈지요. 서울시에 따르면
하의에 민소매 옷을 입은 정도라면 일광욕이 가능하지만 비키니 차림은 어렵다는 것. 우선 서울특별시 청계천 이용에 관한 조례 제11조는 '시장은 시민 안전 및 공익을 위해'  몇가지 사항에 대해 행정지도를 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백인 여성들의 청계천 일광욕 논란의 배경은? 

조례에 따르면 낚시 및 유어 행위, 수영 목욕 등 이와 유사한 행위, 야영행위 및 취사행위, 흡연행위 및 음주행위, 노숙행위 및 영업행위, 폐기물 투기행위 및 방뇨행위, 동물동반 출입행위 및 자전거 인라인스케이트 이용행위 등이 행정지도 사항입니다. 즉, 일광욕 규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고 관련을 지어보자면
청계천 이용에 관한 조례 제1조에 '시민의 건전한 여가 선용과 문화생활을 방해하는 행위는 제재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청계천에서 민소매와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백인 외국 여성들이 포착됐다

현재 조례상으로 일광욕과 비키니 복장에 대한 구체적 가이드라인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시민들이 불쾌감을 느껴 신고하면 경범죄처벌법에 근거해 1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는 있다고 합니다. 즉,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한다면 경찰의 판단에 따라 경범죄에 의한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과다 노출의 정도를 어디까지 판단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애매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결국 경찰로서도 난감한 판단 문제이지요.

만약 우리나라 여성들이 청계천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면 사람들의 반응을 어떠했을까요? 당장 현장에서 쌍욕과 쓴소리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도 듭니다. 우리나라 정서와 맞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백인 여성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서울 한복판에서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즐겼고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론 경찰에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지요. 이를 두고 혹자는 백인에 대한 막연한 우대주의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열등감의 사례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률을 따르듯이 백인 여성들도 한국에서는 우리의 정서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심에서 비키니 복장으로 일광욕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청계천에서 비키니가 처음일까요. 지난 7월초부터 청계천에서는 비키니 패션쇼가 열리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이른바 '청계천 수상패션쇼'를 통해 동대문 패션타운 활성화 프로그램 일환으로 비키니 패션쇼를 비롯 시민모델 선발대회 등을 열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시는 청계천에서 비키니 패션쇼를 비롯 여러 행사를 한 바 있다

결국 청계천에서의 비키니 복장은 서울시가 이미 일반 시민들에게 선보인 셈입니다. 따라서 외국 여성들이 청계천에서 비키니 복장을 입지 말라고 하기에도 이율배반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개인의 복장에 대한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서양의 문화와 비교하며 우리는 여전히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보수적인 측면도 존재합니다. 이는 문화적 차이일 수 있겠지요. 도심에서 비키니 복장을 두고 찬반 양론이 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라 볼 수 있지요.

도심 하천변에서 일광욕에 대한 외국의 사례를 살펴볼까요. 독일 베를린에서 가장 큰 공원인 티어가르텐에서는 상의를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시민들이 많습니다. 호주에서도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세느강 강변도로에 인공적인 모래톱에 야자수와 파라솔이 조성돼 있어 파리 시민들이 일광욕을 만끽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유럽은 도심에서도 눈치보지 않고 일광욕을 하는 것이 일상화된 것이지요. 유럽인들이 일광욕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어떤 이는 백인의 경우 자주 일광욕을 해주어야 피부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도 하더군요.

동서양 문화적 전통과 복장의 자유 문제는?

그러나 이집트 등 이슬람교 국가에서는 여성들의 노출을 절대 금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이란은 테헤란 유프라테스강 인근에서 여자들이 일광욕을 하자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 행동으로 규정해 금지시킨 바 있습니다. 이슬람에서 여성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는 차도르를 착용하는 것이 관습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에 여성들이 외출시 얼굴을 가리는 장옷을 두른 것과 유사합니다. 과거에는 맨살이 보이지 않도록 긴 치마를 입은 것도 유교문화에 기인한 것이지요.


조선시대 장옷이나 이슬람의 차도르는 여인들의 얼굴을 가리는 의상문화로 유사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각 나라의 문화나 시대에 따라 복장 문화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개화기 이후 장옷이 사라지고 서양식 복장이 점차 일상화되기 시작한 것이 이러한 사례이지요. 우리나라에 처음 미니 스커트가 등장했을 때 터부시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일상 복장 중 하나가 되었고 최근에는 더 노골적인 하의실종 패션이 도심을 활보할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아직 정서적으로 과도한 노출 복장에 대해서는 조심스런 부분이 있습니다.

무조건 어떤 문화가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습니다. 이슬람권 국가들에서 여성들이 노출하지 못하도록 율법에 정한다며 그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고 서양의 잣대로 비판할 수는 없겠지요. 오래 전통을 통해 내려온 문화는 저 마다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획일적으로 서양의 문화에 따라야 할 필요는 없는 셈입니다. 다만 합리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문화적 충돌이란 항상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의의 장으로 끌어올려 치열한 토론과 소통의 과정에서 합일점을 찾아가야 하겠지요.

논의의 장에 따른 공감대 형성과 대안은 ?

그러면 대안은 없는 것일까요? 프랑스가 센느강변에 "파리 쁠라즈(Paris-Plage)"를 조성한 것이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프랑스도 7~8월경에 장기 여름휴가를 떠납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빠리지엥들이 모두 멀리 휴가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가지 사유로 산이나 바다로 떠나지 못하는 빠리지엥들은 파리 근교의 숲이나 호수에서 일광욕을 즐깁니다. 그런데 그러한 휴가 문화 공간을 파리시가 조성해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프랑스 파리는 세느강변에 여름 휴가 시즌에 인공적으로 모래밭을 조성해 일광욕을 할 수 있게 했다
   (사진 출처 : 김필영)

파리에 '파리 쁠라즈'가 조성된 것은 지난 2002년 입니다. 파리 플라즈는 여름휴가를 떠나지 못한 파리 시민들에게 쉽게 휴가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지요. 파리 쁠라즈는 7월 하순부터 8월 중순까지 일시적으로 통행을 금지시킨 세느강 오른쪽 강변도로의 둑 위에 임시로 만든 모래밭이라고 합니다. 강물이 오염돼 있어 수영은 할 수가 없지만 일광욕을 즐기기에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파라솔을 비롯 휴가지 분위기는 물론 샤워 시설도 있어 원스톱 휴가지 서비스가 가능한 셈이지요.

따라서 세느강 주변의 파리 쁠라즈에는 젊은이들이 모래밭에 비키니 수영복 차림으로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소한 풍경이기에 관광객으로 가면 놀랍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익숙해지면 당연한 풍경이 되겠지요. 파리시가 파리 쁠라즈를 조성한 시기도 1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문화의 명소가 되었지요. 하나의 아이디어가 현실화되면서 이제는 파리시의 문화공간이 된 셈입니다.

우리나라도 파리시의 파리 쁠라즈 모델을 한강변과 같은 곳에 7~8월 여름 휴가 시즌에 조성하는 대안도 추진해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청계천도 공간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장기적 차원에서 고려할 수 있겠지요. 모든 것을 법률이나 관습에 따라 해결할 수는 없겠지요. 특히나 복장 문화는 더욱 여러가지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적 대안을 찾고 공감대를 형성해 문화적 요소로 만든다면 좋지 않을까요. 청계천에서 비키니 일광욕 논란을 보면서 우리도 대안을 모색하는 접근법이 낫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분은 청계천 일광욕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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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일생동안 행동으로 애국을 보여준 지도자입니다. 이 시대는 말로 하는 애국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할 때 입니다."

누가 한 말일까요? 놀랍게도, 이 말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07년 4월 서울시장 시절에 한 발언입니다. 당시 인도를 찾은 이명박은 간디 박물관을 둘러보며 '행동하는 애국'을 주창했습니다. 그리고 이명박은 "(간디는) 가난한 인도 국민을 위해 자기 몸과 목숨을 던져 사랑을 실천했고, 서민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 행동으로 보여줬다"고 말했습니다. 오직 서민 국민들을 위해 행동으로 헌신한 간디를 역설한 것입니다.

인물 소개에 보면, 이명박이 존경하는 인물은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이명박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주신 '간디 위인전'을 읽고 자신의 행동철학과 일생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명박이 간디와 같은 행동철학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명박은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서민을 외치지만 결국 부자 정책을 선택합니다. 말로는 국민을 들먹이지만 결국 권력과 탐욕을 취합니다.

우리가 간디를 존경하는 이유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평생 인도 국민들을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간디는 '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 겸손해져야 한다'며 겸손한 행동을 했습니다. 매일 간디는 민족의 독립과 화합을 위해 기도했고 그렇게 비폭력 불복종운동으로 서양제국주의에 맞서 앞장서 몸소 행동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명박이 간디처럼 평생 헌신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았을까요. 이명박은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이명박에게 국민은 훈계의 대상이었습니다. 독선적이었지요. 국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소통하지 않는 불통만 있었습니다. 민족의 화합 보다는 대결적 정책을 펼쳤고 지역 통합 보다는 분열만 가중시켰습니다.    

간디는 검소했습니다. 간디는 엄청난 국가 재산을 관리했지만 '동전 한 푼도 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간디가 사망한 후 남기 유품은 단 2가지였다고 합니다. 간디가 직접 만든 신발 두 컬레와 평소 읽던 힌두교의 경전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간디가 검소한 생활을 하며 서민들과 함께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은 어떤가요. 국민세금을 자기 호주머니돈처럼 펑펑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민 70%가 환경파괴한다고 반대해도 무려 22조원이나 투입해 4대강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국민 그리고 엄청난 국가 예산을 형 이상득에게 배정하기도 했습니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감면해주고 서민들이 고통받는 물가는 천정부지로 올랐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명박은 막대한 국민세금으로 퇴임 후 호화 주택을 강남에 짓겠다고 합니다. 현재 이명박과 자신과 가족 명의로 수백~수천억원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간디는 나라가 망하는 7가지 징조를 역설한 바 있습니다. 7가지 사회악이지요.

간디가 말한 '나라가 망하는 7가지 징조'

1. 원칙 없는 정치
2. 양심 없는 쾌락
3. 인격 없는 교육
4. 인간성 없는 과학
5. 노동 없는 부
6. 도덕 없는 경제
7. 희생 없는 신앙

그런데 간디가 말한 사회악 7가지가 이명박 정부 들어  더욱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가 간디가 말한 7가지 징조를 그대로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원칙 없는 정치'가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독도가 자기땅이라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외교적 대응은 무능하기만 했습니다. 자주 독립국가의 상징일 수도 있는 전시작전권도 미국에게 회수를 포기했지요. 4대 강국을 비롯 외국에 굴욕적인 등신외교가 많았습니다. 세종시 수정, 4대강 대운하 강행, 광우병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정부 요직에 범법자 우대 등용, 범죄자 이건희 회장 사면, 잠실롯데 120층 신축, 민간인 불법사찰 및 증거인멸, 예산안 날치기 및 나눠먹기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다음으로 '양심 없는 쾌락'도 사회적으로 도를 넘고 있습니다. 어린이 성폭행, 성매매의 만연 등 범죄가 들끓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성희롱에 연루되기도 하며 도덕성 부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탐욕스런 부자나 권력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양심 불량 재벌 유통대기업은 영세 상인들의 시장마저 빼앗고 있습니다. 중소 하청업체들을 쥐어 짜 막대한 이익을 남기면서 그들만의 돈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검찰은 대통령 머리 위에 앉아서 온갖 특혜를 받고 있습니다. 도덕과 양심은 없고 집단이기주의 탐욕과 쾌락에 빠진 권력자들의 나라가 되었지요.



또한 '인격 없는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국사 교육을 경시하고 인성교육은 없이 지식만 강제 주입하고 있습니다. 그저 효율성만 강조되는 교육 하에서 학생들은 숨이 턱턱 막힙니다. 반값등록금 공약도 지켜지지 않아 대학생과 학부모들만 허리가 휠 지경입니다. 사립학교 재단의 비리와 부조리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인간성 없는 과학'도 문제가 많습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인간 중심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소와 돼지 등 가축 수백만 마리가 생매장 매몰되기도 했습니다. 인간성이 무시되고 오직 돈벌이를 위한 과학으로 전락하고 있기도 합니다. 

'노
동 없는 부'도 심각합니다. 재벌 세습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재벌가 자제가 서민 노동자를 폭행하기도 했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일상화되어 버렸습니다. '돈이면 다'라는 사회분위기가 팽배합니다. 노동없이 부동산 투기 등 편법과 탈법으로 돈을 버는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행태가 비일비재합니다. '도덕 없는 경제'도 노동사 산재 외면, 용산 철거민 시위 무력진압 화재로 대거 사망. 태안 기름유출 사고, 결식아동 급식비 삭감 등 문제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희생 없는 신앙'이 사회를 더욱 피폐화시키고 있습니다. 오직 돈벌이 수단화되는 대형교회의 행태는 심각한 사회문제입니다. 사랑의 종교는 사라지는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현실이 간디가 말한 '나라가 망하는 7가지 징조'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것도 이명박이 존경한다는 간디의 말입니다. 그러나 간디와 이명박은 철학과 행동이 전혀 달라 보입니다. 이명박의 이러한 존경인물과의 언행불일치 사례는 또 있습니다. 이명박은 도산 안창호를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이명박은 "4대강 사업이 되면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산 개조의 꿈이 이뤄지는 것이고, 그러한 꿈에 도전하는 긍지를 가지고 해야 한다"고 항변한 것입니다.

참으로 부적적한 이명박의 발언이었습니다. 이명박은 도산 안창호 선생을 거론하면서 4대강 사업 정당성을 역설하다니요. 평생 독립운동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친 안창호 선생의 고귀한 뜻을 왜곡하는 이명박식 아전인수의 극치였습니다. 이명박은 도산 안창호의 이름을 4대강 홍보에 이용하려는 치졸한 행태였던 것이지요. 국민여론 무시, 날치기 예산 확보, 환경 파괴 등 불법 탈법 편법으로 얼룩진 부끄러운 4대강 사업을 도산 안창호 이름과 연결짓다니 기가막힐 일이었습니다.

이명박의 가훈은 '정직'이라고 합니다. 과연 이명박은 정직한 삶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앞서 언급한 간디도 그렇지만 안창호 선생도 정직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은 그 동안 수많은 거짓과 위선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안창호 선생의 말씀이 지금 이명박에게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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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한국광고박물관을 구경했습니다. 잠실역 근처에 약속이 있어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잠시 들렀던 곳입니다. 우리나라 광고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더군요.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광고가 오랜 역사 속에 발전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광고박물관은 서울 송파구 신천동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광고산업과 광고문화 발전을 위한 인프라 시설로서 한국방송광고공사가 2008년 11월 개관했습니다. 한국의 광고 역사, 광고의 순기능, 광고제작과정 등을 체험할 수 있더군요. 특히 우리나라 광고 120년 역사를 시기별로 정리된 자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의 꽃은 광고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광고에 관심있는 사람은 누구라고 무료로 광고박물관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한국광고박물관은 한국광고문화회관 건물에 있습니다. 그리고 광고박물관 관람은 개인 또는 단체 모두 가능하며, 매주 월요일과 국경일은 휴관이라는 것을 알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광고박물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별도의 디지털카메라가 없어 그냥 아이폰 카메라로 촬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소 화질이 좋지 않습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담배광고였습니다. 조선시대 최초의 담배 인쇄광고를 비롯해 여러가지가 전시돼 있더군요.

광고박물관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여자가 최초의 담배 광고 모델?

무엇보다 담배광고가 눈길을 끈 이유는 여자가 광고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근현대식 담배 광고는 1910년 처음 선보였습니다. 중국 상하이에 공장을 둔 미국 담배회사가 만든 '히어로' 담배였습니다. '샹등지권연초'에서 만든 담배인 듯 했습니다. 1910년 광고인데 벌써 컬러 광고가 시작된 것이 이채롭더군요. 그런데 광고모델은 조선 한복을 입은 2명의 여자였습니다. 머리를 서로 기댄 채 손을 잡고 나란히 선 모습이 독특한 느낌이었지요.

                    1910년 최초의 담배광고에 한복을 입은 2명의 여자가 등장한 것이 이채롭다

외국산 담배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담배 광고를 시작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후 1914년 조선연초주식회사의 담배광고가 실렸습니다. 국산담배로는 최초 인쇄광고가 아닌가 싶습니다. 만화 형태로 제작된 흑백광고인데 한복을 입은 여인이 담배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창기 담배광고를 보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담배광고에 여자 모델이 등장한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한 이유는 당시 담배가 인체 건강에 해로운 기호식품이 아니었던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구요? 처음 조선에 담배가 알려질 당시 조선사람들의 담배에 대한 인식은 기호품이기 보다는 의약대체품으로 더 선호했습니다. 가래나 천식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으며, 복통과 치통을 가라앉게 할 뿐만 아니라 상처의 지혈과 화농방지제로 담배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믿음 때문에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상하 계급 차이없이 담배는 전국으로 급속히 퍼졌습니다.

              1914년 11월, 조선연초주식회사의 만화형식 담배광고인데 여성이 모델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담배의 역사를 살펴볼까요. 담배를 처음 피우기 시작한 민족은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답배를 알파벳 표기인 '타바코'와 비슷한 발음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디언 발음대로 담배를 '타바코(tabaco)'로 명기하여 서양세계에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한편 아시아에서는 16세기 일본이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몇몇 국가들과 교역을 하기 시작한 이래 타바코도 주요 교역품의 하나로 일본에 전래됐습니다. 일본은 타바코를 '단바고' 또는 '단바기'로 불렀으며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우리나라 조선에도 자연스럽게 전파됐습니다. 조선은 한자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한자로 표기할 때는 남초(南草) 또는 왜초(倭草) 그리고 연기를 피운다 하여 연초(煙草)라고 표기했습니다. 1600년대에는 일본 발음과 유사하게 담바고, 담바귀로 불리다가 훗날 '담배'라는 용어로 굳어지지요.

조선시대에 남녀노소가 담배를 즐긴 이유와 담배 예절은?

조선시대 문장가 장유는 1630년경 그의 저서 '계곡만필'에 담배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장유는 담배에 대해서 "맛이 쓰고 독성분이 조금 있어 먹지는 못한다. 그러나 입으로 빨아 연기를 뿜어 내는데 처음에는 어지러우나 자꾸피면 '인'이 박혀 어지럽지 않다. 요즘 피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장유는 "지금 담배를 즐기는 사람들은 피우면 배가 부르고, 배부름을 줄여주며, 추울때는 몸을 따뜻히, 더울때는 시원케 한다"라며 담배 예찬까지 했다니 당시 상황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조선시대에 담배는 급속히 확산됐습니다. 담배 물량 확보를 위해 담배 연초를 직접 경작하는 농민들이 증가했습니다. 담배 농사로 인해 정작 먹거리인 쌀, 보리, 밀, 콩 등 식량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였지요. 급기야 조선 조정에서는 '비옥한 땅에서는 담배를 재배치 말라'고 어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 이후 담배 재배는 기존 밭이 아닌 화전이나 산악지대에서 이루어지게 되지요. 그러나 담배 인기는 날로 높아져 17세기 중엽에 한양의 시전거리에서는 쌀, 면포, 어물 다음으로 담배 거래가 활발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유교문화권답게 담배 예절도 등장했습니다. 남녀노소 담배를 즐겼기에 규율이 필요했겠지요.
연례(煙禮)라고 불렸지요. 가령 연장자 앞에서는 피우지 말아야 하며, 양반 앞에서 평민은 금연을 해야 했습니다. 장죽은 주로 양반이 사용했고, 곰방대는 평민이 사용하는것이 일반적 관례였습니다. 그리고, 기생이나 관기 등 특수 계층이 아니면 여자는 남자 앞에서 담배피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담배 예절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셈입니다.

좀 더 담배 역사 이야기를 해볼까요. 잎담배 형태의 담배가 오늘날 필터담배로 바뀐 것은 1800년대 중엽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원래 필터 담배는 터키산 담배잎에 면 필터를 말아서 러시아 군인들이 즐겼는데, 1854년 크림전쟁때 영국군이 러시아 포로들로부터 빼앗아 피웠습니다. 영국군들은 러시아식 담배 맛에 반해 전쟁 후에도 필터 담배를 찾게 된 것입니다. 당시 필터담배의 효시로 영국이 필터담배를 생산하게 되었고 전세계에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뿌리깊은나무 잡지에 '여자가 어째서 사람 대접을 받아야 하나?' 제목 광고가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 필터 담배가 들어온 시점은 1883년 개항 이후였습니다. 영국이 필터 담배를 생산한지 약 30년 지난 일이지요. 당시 주로 수입된 담배로는 미국산 올드골드, 히어로, 스타와 더불어 영국제 스리캣슬리이도 있었습니다.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그 후 1901년 그리스인 벤들리스가 인천에 동양연초회사를 설립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담배공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는 수입담배에 밀려 곧 문을 닫았는데 1903년 미국인 헤밀턴이 동양연초회사의 자리에 '제물포 연초회사'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홍도패, 산호, 뽀삐 등 궐련 담배 상표가 여기서 등장하게 됐던 것이지요.

서상돈 선생이 국채보상운동에서 전 국민 금연을 호소한 이유는?

그러나 그 후 1921년 조선총독부가 연초전매법을 발표하면서 일본인이 담배 사업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당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던 서상돈 선생은 대국민참여 호소문에 금연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서상돈은 2천만 동포가 일제히 담배를 끊어 나라 빚 1300만원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나섰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담배를 즐겼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수년 동안 우리 정부가 일본에서 얻은 빚은 약 1300만 원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빚을 갖지 못하면 장차 우리 국토가 일본의 담보가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궁리 끝에 전국 2천만 동포가 일제히 담배를 끊는다면 한사람의 한 달 담배 값을 20전으로 추산하여 3개월이면 국채액에 도달하리라 봅니다. 부녀자들의 금가락지나 비녀도 크게 도움이 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우리 백성이 석달만 담배 끊으면 우리의 국토가 보전될 수 있습니다."

              1940년대~50년대 담배 이름 역사이며 아리랑은 무려 30년간 판매된 히트상품이다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광복후 미 군정청에서는 해방을 기념한 '승리'라는 담배를 제조 발매했습니다. 당시 한 갑에 3원의 고가였지만 최상류층에서 '흰 담배'로 애용했다고 하지요. 이어 1958년에 발매된 '아리랑'은 우리나라가 생산한 최초의 필터 담배였습니다. 입니다. 아리랑은 1988년 12월에 단종될 때까지 무려 30년간 장수 히트상품 담배였던 셈입니다. 그렇게 현대식 국산 담배 역사는 시작돼 신탄진, 청자,  거북선, 선, 솔, 88, 디스, One 등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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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고박물관에는 근현대사 주요 광고의 역사와 더불어 직접 광고제작 체험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담배의 역사를 보면 담배 광고모델이 여자가 최초였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조선시대 당시 담배가 임산부 등 건강에 해롭다고 알려졌다면 또 역사는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의약품 내지 건강식품으로 잘못 알려져 남녀노소가 찾는 상품이 되었던 것이지요.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만약 지금 담배에 여성을 광고모델로 등장시켰다가는 담배회사는 큰 봉변을 당하겠지요. 잠깐, 해외에서 재밌는 담배 이야기루머가 있어 참고로 더 보기에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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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광고 이야기지만 거기에는 당시 선조들의 삶과 역사가 함께 있었습니다. 사실 잎담배 재료로 곰방대에 담배 피우던 시절도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닙니다. 1960~70년대에만 해도 시골에 가면 곰방대에 담배피우는 노인들을 흔히 볼 수 있었으니까요. 과거 화장품 광고나 잡지책 표지 등을 보아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어떤 경우는 상식이 아닐지 모르지만 당시는 현실이었지요.  광고는 그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창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광고는 어떤 모습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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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탐진강


까치하면 좋은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까치 까치 설날, 노래도 친근합니다. 은혜갚은 까치 전래동화 이야기도 생각니다. 아침에 우는 까치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거나 좋은 소식을 전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까치를 길조로 여겼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에게 까치는 신성한 존재였습니다. 당시 산골 농촌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어른들은 까치를 길조라며 까치를 괴롭히거나 함부로 잡아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교과서에 나오는 까치는 항상 고마운 동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까치는 친근하고 영험한 길조로만 기억되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까치에 대한 그 동안 생각이 완전히 깨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최근 어떤 건물 앞에 지인 N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참새(?)를 닮은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레드카펫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작은 새가 아직은 어려보였습니다. 귀엽고 신기한 모습이라서, 아이폰을 어린 새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조금 후 작은 새가 갑자기 날아갔습니다. 그 때, 커다란 까치 한 마리가 우리 일행 곁을 '휙' 지나갔습니다. 참새가 날아간 곳을 향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 곳으로 가봤습니다. 그러자 까치는 작은 관목 숲에서 다시 하늘로 날아갔습니다. 그 때 N씨가 놀란 표정으로 저에게 말했습니다.
"봤어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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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새 한 마리가 레드카펫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가는데 갑자기 커다란 까치가 그 뒤를 쫓았다

"까치가 참새를 물고 갔어요."
"정말요?"

저와 N씨는 까치가 날아간 방향으로 뛰어갔습니다. 까치가 멀리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 참새를 물고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장면에 경악했습니다.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고 자주 산촌마을도 찾는 편이지만 까치가 참새를 잡아먹는 모습은 처음 목격했습니다. 저도 지인 N씨도 황당한 표정이었습니다. N씨는 다시 외쳤습니다.
"저기 보세요. 까치가 참새를 물어뜯고 있어요."
"이럴 수가. 까치가 참새를 잡아먹다니. 무섭네요."

                      까치가 참새 잡아먹는 장면 (사진은 블로거 산촌님 블로그 인용한 것임)

저희 일행은 까치가 앉아있는 소나무 부근으로 다가갔습니다. 까치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더 멀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참새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까치에 대해 단순히 길조로만 여겼던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까치에 대한 환상이 모두 깨졌습니다. 그제서야 까치는 잡식성 조류이지 않아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까치가 다른 새를 잡아먹는 육식동물일까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트위터를 비롯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실제 까치가 참새 잡아먹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으악 까치가 참새를 물고 날아갔다."며 벌버둥치던 참새에 대해 안타까워 했습니다. 또 다른 이는 "헐, 창밖에서 까치가 작은 새를 잡아먹고 있다. 까치도 육식을 하는구나"라며 순간 포착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했습니다.

까치가 새를 잡아먹는 모습을 본 목격자들은 모두가 놀라워 했습니다. 까치를 초식 새로 알았는데 육식도 한다는 것에 놀랐던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알고있던 까치와는 딴판이었던 셈입니다. 까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지지를 받는 새이기에 더욱 경악할 수 밖에 없겠지요. 누구라도 까치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지르는 장면을 본다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과연 까치는 어떤 새일까요? 백과사전을 찾아봤습니다. 까치는 학명상 구분으로 참새목 까마귀과에 속하는 새였습니다. 까치가 참새를 잡아먹는 것은 실제로 동족상잔이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치가 우리나라에서 나라새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까치는 1964년 나라새 뽑기 공모에서 압도적 다수로 뽑힌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서울의 상징새로 까치가 선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기도 했습니다. 까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 더 보기를 보면 됩니다.

더보기

그런데 까치는 요즘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되는 지방자치단체가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까치는 길조가 아니라 흉조 신세로 전락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왜 까치는 유해동물이 되었을까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최근 몇년간 서울시에서 가장 많이 포획된 유해 야생동물은 까치였습니다. 또한 서양에서 소위 '평화의 상징'으로 불리는 비둘기도 유해 동물이었습니다. 실제 비둘기는 똥이 지독한 악성이고 몸에 기생충이 많아 더러운 야생동물이라고 하더군요.

까치는 도시에서 전력망에 피해를 주거나 항공기 이착륙에 방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령 까치가 전신주에 까치집을 지어 정전피해를 일으키는 원인이었습니다. 또한 농촌에서도 까치는 농작물에 무차별적으로 큰 피해를 주는 유해동물이었습니다. 까치는 천적도 없이 왕성한 번식력으로 도시와 농촌을 점령해 갔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는 까치 소탕작전이 벌어질 지경이더군요. 반면 흉조로 여겼던 까마귀의 경우는 해충을 잡아먹어 오히려 좋은 동물로 대접받는다고 합니다.

제주시의 경우 까치제거를 위해 까치틀, 사냥용 총기, 까치집 제거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전력공사는 까치 한 마리당 3500원이란 현상금까지 내걸었을 정도. 제주에는 1989년 까치가 처음 53마리 방사된 이후 최근에는 13만 마리가 넘는 개체수로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제주시와 한국전력공사 제주지사, 한국야생동식물협회 제주도지부는 '까치 개체수 감소를 위한 업무협약'까지 맺는 진풍경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길조라 여겼던 까치가 흉조로 공식화 되는 순간인 셈이지요. 까치 문제는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 부산 등 대도시는 물론 전국 농촌의 공통된 현상입니다.

까치는 이제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까지 몰리며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까치가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주선해주는 칠월칠석의 오작교 다리 전설의 시대는 지난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감나무 가지에 걸린 홍시를 쪼아먹던 까치의 정겨운 장면은 옛날 추억일 뿐입니다. 길조라며 무작정 보호만 할 수는 없겠지요. 서울시나 지자체가 까치를 상징새로 보호하는 것도 재검토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까치가 참새를 잡아먹는 장면을 본 후 여러가지로 까치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혹시 지구온난화 등 환경변화로 까치의 습성도 변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까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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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탐진강


굿네이버스를 아시나요? 굿네이버스(GoodNeighbors)는 1991년 한국인에 의해 설립되어, 국내 최초로 유엔경제사회이사회(UN ECOSOC 유네스코)로부터 포괄적 협의지위(General Consultative Status)를 부여받은 국제구호개발 NGO(비영리기구)입니다. 굿네이버스는 한국인이 설립했기에, 본부가 대한민국에 있는 NGO라는 자부심이 있지요.

굿네이버스는 굶주림 없는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빈곤과 재난,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웃의 인권을 존중하며 사회적 약자들이 희망을 갖고 자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나눔의 실천에 그 취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소외된 이웃 곁에서 헌신된 자세로 희망을 전하는 굿네이버스는 현재 국내는 물론 북한과 해외 27개국에서 종교와 인종, 사상을 초월하여 전문사회복지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국제단체입니다.

왜 굿네이버스냐구요? 굿네이버스는 예전부터 우연히 알게 된 NGO입니다. 제 블로그의 왼쪽에 달려있는 보안위젯도 하나를 달 때 마다 굿네이버스에 적립금이 쌓이게 되더군요. 작은 실천이 모여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이번에 굿네이버스는 온라인 나눔대사로 '좋은 블로거 2기' 20명의 원정대원을 찾는다고 합니다. 블로그도 열심히 하고 소외된 이웃도 도울 수 있는 기회인 셈입니다.

굿네이버스는 한국인이 만든 유네스코 산하 국제 NGO 자부심

특히, 굿네이버스 나눔대사 활동은 블로그를 통한 사회공헌 개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BSR(Blog Social Responsibility)이라고 명명했더군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CSR(CorporateSocial Responsibility)라고 하는 명명법에 착안한 것이지요. 블로그가 원래 순수한 1인 소셜미디어라는 관점에서 볼 때 BSR은 그 의미가 사회공헌과 관련이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굿네이버스는 1991년 설립돼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아 20명의 '좋은 이웃 블로거' 20명을 선정할 계획인 것입니다. 원정대원이라고 한 것은 1년 동안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블로거로서 방방곡곡에 나눔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알려주는 원정의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눔의 온라인 스토리 확산으로 우리 지구촌 사회가 보다 온정이 넘치는 이웃들로 넘쳐나는 공동체가 될 수도 있겠지요. 이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이겠지요.

블로그를 통한 사회적 책임, BSR 활동의 재발견

굿네이버스 온라인 나눔대사 블로거 모집기간은 4월 27일(수)까지 입니다. 참가자격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웃사랑의 마음을 지닌 블로그라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기부문화에 관심이 있거나 자신의 재능(영상, 요리, 일러스트 등)을 나눔 활동에 활용하고 싶은 분도 가능하겠지요. 만약 좋은이웃 블로거 2기로 선정이 되면 2011년 5월 1일부터 2012년 4월 30일까지 1년간이더군요. 좋은 이웃 블로거 원정대원의 혜택은 활동기기간 중 사회공헌 행사 참여 및 취재활동에 우선 기회가 제공되고 활동 후 인증서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굿네이버스 홈페이지에서 지원서를 다운받아 이메일(shheo@gni.kr)로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이메일 제목에는 '좋은 이웃 블로거 2기 - 김삿갓' 등과 같이 지원분야와 이름을 명기하면 더 좋겠지요. 블로그가 소외된 이웃들을 돕는 사회공헌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문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아직 기부나 나눔에 대해 인색한 측면이 있는데 보다 기부문화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어떠신가요? 평소 마음은 간절하지만 나눔의 사회공헌 봉사활동 기회가 없었다면 이번 굿네이버스 온라인 나눔대사에 참여하지 않으시겠어요. 정보가 나눌수록 커지듯이 우리 블로거들도 나눌수록 세상은 보다 아름답고 따뜻해집니다. 여러분, 블로그를 통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BSR(블로그 사회적 책임) 활동으로 글로벌 원정을 떠나보지 않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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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탐진강


"현재 한국인들의 분위기를 보면서 (교과서 검정 일정)을 바꾸자는 것은 억지인 것 같습니다"

일본 산케이 신문 서울 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의 망언입니다. 일본 중학교 교과서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에 대해 억지 주장이라고 비난한 것이지요. 구로다는 예전부터 한국의 비빔밥을 양두구육이라고 비하한 것은 물론 한국의 과거 역사를 일본 식민지 사관으로 보는 여러 망언으로 악명높은 극우 일본 언론인입니다. 구로다의 눈에는 여전히 한국인이 일본의 식민지 노예로 보이는 셈입니다.

구로다는 어제 오전 평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 입니다'에 출연해 일본 대지진 참사 성금 모금과 독도문제를 연결짓지 말라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구로다는 주장입니다. "이번에 교과서 문제가 나왔다고 해서 독도 문제로까지 연결돼 논의가 되면 한국인들의 이번 재난에 대한 선의와 우정이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훼손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구로다 망언, 한국인이 일제 식민지 노예로 보이나?

얼핏 보면, 한국 정부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한국 정부와 방송사를 필두로 한국인들이 일본의 재난 피해돕기를 위해 선의로 모금운동을 하는 와중에 일본 교과서 문제가 나왔지만 연결해서 논의하지 말라는 충고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정부가 독도문제와 대지진 피해 성금 모금 활동을 분리해 논리적으로 조용히 대응하자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극우 일본인 언론인 구로다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며 한국이 억지부리지 말라 망언을 했다

구로다는 얍삽(야비)하고 교활한 일본인의 전형입니다. 구로다의 말장난은 계속 이어집니다. 
"일본 지진에 대한 지원과 독도 영유권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서로 연결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자국 교과서의 독도 표기 문제에 대응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면 어떻겠습니까? 교과서 검정 문제는 연례 행사일 뿐입니다. 교과서 상에서 각 나라의 주장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국 교육의 권한입니다."

어떤가요? 구로다의 주장이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요? 한국민들은 분노하지 말고 조용히 넘어가자고 합니다. 아예 대응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교과서 검정 문제는 매년 연례 행사로 진행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본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교육시키는 것은 자국 정부의 고유 권한이라는 주장입니다.

극우 친일파의 역사왜곡 설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

어이가 없습니다. 독도는 엄연한 대한민국 영토인데 일본 땅이라고 역사왜곡을 해도 한국인들은 조용히 입닫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구로다가 한국인과 한국 역사를 우습게 아는 것이지요. 아주 기고만장했습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구로다의 억지 주장은 극우 일본인들의 본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뉴라이트 친일파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하고, 정신대에 끌려간 한국의 소녀 위안부를 자발적 성매매라고 황당한 왜곡을 하기도 합니다. 극우 일본인들과 다를 바 없는 주장입니다.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 주장은 심지어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거하고 있다'는 역사왜곡도 서슴치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정부는 그 동안 독도문제에 어떻게 대응했었을까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호적 한일관계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독도문제에 대해서도 조용한 외교를 해왔습니다. 일본이 독도문제를 영토분쟁지역으로 삼아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도록 하는 전략이라며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였지요. 그래서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국제적으로 떠들고 다녀도 한국정부는 조용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 주요 국가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령 다케시마로 표기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이 초등학교를 비롯 중학교 교과서, 더 나아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표기하려는 움직임에도 한국정부는 조용한 외교에만 방치해 두었습니다. 반면 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라고 선언하며 일본이 조금이라도 독도문제를 꺼내면 단호하게 응징할 것을 천명했었지요. 실제 2006년 일본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발포명령을 내려 일본 순시선이 꽁무니를 빼고 도망간 사례도 있었습니다.

<노무현 독도연설>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정부는 독도문제에 대한 대응방침을 전면 재검토하겠습니다.

독도문제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인식,
자주독립의 역사와 주권 수호의 차원에서 정면으로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

물리적인 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세계여론과 일본 국민에게 일본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끊임없이 고발해 나갈 것입니다.
일본정부가 잘못을 바로잡을 때까지,
전 국가적 역량과 외교적 자원을 모두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그 밖에도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할 것입니다.
어떤 비용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우리의 역사를 모독하고 한국민의 자존을 저해하는 일본정부의 일련의 행위가
일본국민의 보편적인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일간의 우호관계,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가 결코 옳은 일도,
그리고 일본에게 이로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일본 국민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냉정하고 대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국민과 지도자들에게 간곡히 당부합니다.
우리는 더이상 새로운 사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누차 행한 사과에 부합하는 행동을 요구할 뿐입니다.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행위로
한국의 주권과 국민적 자존심을 모욕하는 행위를 중지해 달라는 것입니다
.

한국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와 기준에 맞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실과 인류사회의 양심 앞에 솔직하고 겸허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이웃나라에 대해서, 나아가서는 국제사회에 이 기준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일본은 그 경제의 크기에 걸맞은 성숙한 나라,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로 서게 될 것입니다.

국민여러분,
우리는 식민 지배의 아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선린우호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 지향속에
호혜와 평등 평화와 번영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해왔고, 또 큰 관계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양국은 공통의 지향과 목표를 항구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 더욱더 노력해야 합니다.
양국관계를 뛰어넘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사의 올바른 인식과 청산, 주권의 상호 존중이라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사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과감히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21세기 동북아 평화와 번영, 나아가 세계 평화를 향한 일본의 결단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 노무현


(2006년 4월, 노무현 명연설 중에서)

조용한 외교 한일관계가 빚은 참극, 일본의 독도 교과서 파문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 반대로 조용한 외교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일관계 우호에만 맞춘 '조용한 외교'는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지난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 일본 후쿠다 총리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후쿠다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독도를 일본 땅이라는 선전포고성 발언을 했습니다. 당시 대화는 요미우리 신문이 작년 2010년 3월에 보도해 노출됐었지요.

후쿠다    총리 : "교과서 해설서에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를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 :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 달라" 


이것이 유명한 MB 독도발언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달라'입니다. 네티즌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초기라서 곤란할 수 있으니 나중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일본 교과서에 사용할 수 있다고 묵인한 발언이 아닌가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국가 영토 수호의 책임과 의무를 가진 대통령이 독도를 포기한 듯한 발언은 중대 사안임에도 국내 언론들은 조용했습니다. 청와대나 외교부도 조용했습니다. 요미우리신문을 상대로 단호하게 오보 대응 소송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본은 한국의 조용한 외교를 부추기며 뒤통수를 쳤던 것입니다. 어쩌면 일본의 간교한 계략에 말려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우호적 한일관계를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만들기 위해 차근차근 계획을 밀고나갔던 것이지요.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조용히 눈치보던 일본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교활한 술책을 펼친 셈입니다.

이는 한국 정부가 일본의 계략에 철저하게 당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일본의 독도 강탈 계획에 조용히 미온적으로 넘어가자 일본은 오히려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표기를 그대로 강행했습니다. 뒤늦게 한국 정부는 교과서 강행을 더 늦추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지만 일본은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조용한 외교가 굴욕외교가 된 것이지요.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라며 자국 영토로 표기한 교과서를 강행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일본은 교활하고 야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일제 시대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이 보복으로 간도의 조선인을 수천명 학살했습니다.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조선인 폭동으로 이간질해 일본인들에 의해 6천명 이상 조선인이 죽창에 찔려 학살당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일본군은 수만명의 농민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임진왜란을 비롯 일본의 한국 침략 역사는 잔인함 그 자체였던 것이지요.

과거 역사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일본은 한국이 방심한 틈을 타서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곤 했습니다. 역사를 잊지말고 항상 긴장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후 해방된 대한민국은 이승만 정권에 친일파들이 대거 정부에 등용됐습니다. 친일파 청산을 못한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비극이었습니다.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는 민주화 인사나 반대파를 무조건 반공과 빨갱이로 몰아 전가의 보도를 휘둘러 제거했지요. 일제가 조선인과 독립군을 학살했던 방식이지요.

일본의 억지 주장과 한국의 역사적 사실 근거 비교 분석

우리는 일본의 독도 침략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분노해야 합니다. 한반도의 막내이자 민족의 자존심 독도를 강탈하고자 한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분쇄해야 합니다. 북한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처하듯이 일본의 도발에도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합니다. 구로다와 같이 극우 일본인에 한국 땅에서 설치는 것도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극우 국민행동본부가 천안함 1주기에 철원 백마고지에서 대북전단을 살포 행사를 하려다 현지 주민들에게 저지당했는데 당시 국민행동본부와 함께 극우 일본인이 일장기 들고 참가해 황당했었지요.

               극우 일본인이 일장기를 들고 국민행동본부 대북전단 살포 행사에 참석했다(사진 힛걸)

그리고 독도문제는 제대로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일본의 독도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 우리는 정확한 역사인식도 필요합니다. 단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넘어 왜 우리 영토인지 설명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사이버 독도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독도가 한국 영토인 근거 이유 4가지입니다.

독도가 한국 영토인 4가지 이유

첫 번째, 독도는 서기 512년 신라가 우산국을 복속한 한국의 영토입니다. 이는 '삼국사기' 1145년 기록에 명확히 표시돼 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기록엔 '우산·무릉 두 섬은 (울진)현의 동쪽 바다에 있고 두 섬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청명한 날에는 섬을 볼 수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두 번째, 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고 에도막부로 부터 서계를 받은 바 있습니다. 숙종 19년인 1693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한·일 어부들이 충돌했고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 어부들이 안용복을 납치해 갔습니다. 에도 막부에 이송된 안용복이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주장하자 '울릉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다'라는 서계를 써준 것입니다.

세 번째, 1900년 대한제국의 칙령 41호로 독도가 울도군의 소속이 된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침입과 산림 벌채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자 대한제국은 울릉도와 독도를 행정구역상 독립된 군으로 승격 시키고 도감 대신에 군수를 두었습니다.

네 번째, 1946년 연합국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 지령으로 독도가 한국 영토로 확정된 것입니다. 1943년의 카이로 선언은 일본이 강압과 폭력으로 탈취한 새 영토를 반환시킬 것을 정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총사령부는 1946년 1월 29일자로 울릉도·독도· 제주도를 반환해야 할 대표적인 섬으로 명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이 독도가 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이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내용과 실제 우리 한국 땅 독도인 이유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근거를 바탕으로 일본 주장의 허구성을 각각 비교해 보겠습니다.

 일본의 독도 영토 억지 주장  한국 땅 독도의 역사적 사실 근거
에도 막부로 부터 울릉도 '도해 면허'를 얻어 매년 어업을 행하고 독도는 기항지로 사용해왔다. '도해 면허'는 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면허장을 뜻한다. 즉, 그 당시 일본에서도 울릉도를 외국(조선)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국이 점령했다고 볼 수 있는 자취가 없어 국제법상 '무주지 선점(주인이 없는 땅을 먼저 차지)' 원칙에 따라 1903년 이래 일본인이 살았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독도(우산도)에 대해 언급돼 있을 뿐 아니라 안용복이 말한 '조율양도'도 일본 문헌에 '우산도와 독도'라고 나와 있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영유권) 고시로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일본의 영유권 고시 자체가 국제법 상 불법이다. 당시 을사조약으로 인해 외교권이 박탈된 상황이라 일본의 독도 편입은 무효한 것이다.
강제 편입 이후 어업 활동 등 실효적 지배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위 사례와 같이 '시마네현 고시 자체가 국제법 상 불법'이다.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역사적 사실 문헌과 일본의 억지 주장 비교 분석

<김장훈 발차기 패러디>


1. 세종실록지리지(1454년)등 역사적 문헌

(한국측)
o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于山(독도)과 무릉(울릉)의 二島가 縣(울진현) 正東의 바다 가운데 있다. 이도(二島)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오늘날 독도는 울릉도로부터 육안관측이 가능하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고, 일본의 오끼島로부터는 육안관측이 불가능함.

o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1531년)도 우산도(독도)와 울릉도를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조선영토임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同) 부속지도에서도 울릉도와 우산도를 동해 가운데에 표기하고 있음. 다만, 우산도의 위치가 조금 틀리는데 이것은 지도제작상의 미숙으로 지적될 수 있으나 영유권문제에 있어 우산도(독도)가 조선영토임을 증명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는 것임.

(일본측)
o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于山島가 죽도(독도)인가에 대해 의문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한 설(說)로는 우산, 울릉, 본일도(本一島)'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속지도는 우산도를 한반도와 울릉도 사이에 그리고 있어 위치관계가 죽도(독도)와 부합되지 않음.

o 조선고문헌 중의 우산도는 울 릉도에 있던 우산국(于山國)이 신라(新羅)에 귀속되었다고 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의 기록을 함께 생각해 보면, 전래되어 오는 과정에서 혼란이 생겨 울릉도를 울릉도와 다른 우산도(于山島)가 존재하는 것처럼 기술한 것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음.

2. 독도에 관한 일본 최초의 기록문헌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1667년)

(한국측)
o 隱州視聽合記(1667년)는 송도(독도)와 울릉도가 고려(조선)에 속한 것이고 은기(隱岐)(오끼島)가 日本의 한계(限界)라고 기록하고 있음.

(일본측)
o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에는 독도는 송도(松島)라는 명칭으로, 울릉도는 죽도(竹島)라는 명칭으로 기술되어 있음.

3. 17C말 안용복(安龍福)사건과 울릉도.독도의 조선영토 재확인

(한국측)
o 숙종실록에 의하면, 안용복은 1693년 봄 울릉도에서 대곡가(大谷家)의 어부들에 의해 日本의 은기도(隱岐島)로 납치되어 가서 은기도주(隱岐島主)에게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주장했고, 1696년 봄 다시 울릉도와 독도에 건너가 일본어부들이 조선영토인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를 침범한 것을 꾸짖고, 일본으로 건너가 隱岐島主, 백기주(伯耆州)태수에게 일본어부들의 울릉도 및 독도의 침범을 항의했음. 이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문제가 조선왕조와 덕천막부의 외교현안으로 되었으나 1699년 양국이 외교문서의 교환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재확인하였음.

o 위 외교문서에 지금의 독도명 칭은 나오지 않으나 이 섬을 울릉도에 속해 있는 섬으로 보고 있는 이상 그 영유권도 동일하게 처리된 것임. 왜냐하면 17C 일본인이 독도에서 행한 어업이란 울릉도 진출의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임. 그 증거로 덕천막부의 울릉도 도항금지후 대곡(大谷) 및 (촌천)村川의 양가(兩家)가 독도만을 목적으로 도항한 일은 없었음.

o 17C말 안용복사건후 덕천막부시대의 일본 문헌들은 한 건(件)도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주장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많은 관찬 및 준관찬 고지도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표기하고 있음. 특히 하야시가 1785년에 제작한 3국접양도에는 조선국을 황색으로 일본국을 녹색으로 채색했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황색으로 표시하여 조선영토임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지도의 울릉도와 독도 옆에 '조선의 것'이라고 문자로 표기까지 하고 있음.

(일본측)
o 울릉도는 신라에 귀속된 이후 조선령이었으나 오랫동안 무인도로 되어 있었고, 덕천막부는 울릉도가 조선령이라는 인식이 없는 채, 1618년 大谷, 村川 兩家에 대하여 도해면허(渡海許可,독점적 개발권)를 부여했음. 송도(독도)에 대해서는 울릉도의 경우와 같은 도해허가의 공문서는 남아 있지 않지만 대곡가(大谷家)의 기록에 의하면 독도에 대해서도 관의 허가를 얻어 독점적 개발을 하였음.

o 大谷, 村川 兩家에 의한 울릉도 개발은 80년간 계속되었으나 1693년의 안용복납치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조선 양정부간에 울릉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교섭이 이루어졌고, 일본은 울릉도가 조선령인 것을 인정하여 1696년 3월 1일자로 죽도(울릉도)에 도해금지 지령이 내려졌으나 송도(독도)가 영유권 교섭의 대상이 된 기록은 없음.

o 안용복(安龍福)은 1696년 6월 다시 은기(隱岐)에 나타났고, 적기(赤崎)에서 무슨 소송에 연루되었다가 동년 8월 조선으로 돌아갔음. 당시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조선은 안용복을 국외도망죄로 처벌하였는데, 조사를 맡았던 비변사의 기록은 없어져 버렸지만 숙종실록에는 그 개요가 재기록 되어 있음.

o 1696년 3월 울릉도에 도해금지 지령이 내려진 관계로 안용복이 내방한 동년 6월에는 일본인이 울릉도에 도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진술은 사실에 반하고 쇄국의 금기를 깨뜨린 것에 대한 변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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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배타적경제수역과 독도(1996년)

(한국측)
o 한국정부는 1996. 2. 9 "독도는 한국고유의 영토이고 한국이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영토이기 때문에 이러한 접안공사는 한국의 정당한 주권행사이고,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음.

o 한국정부는 1996. 6.11 배타적경제수역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고, 15대 국회가 개원되어 임시국회가 소집되면 이를 심사하게 될 것임.

o 한국학자들간에는 독도가 배타적경제수역을 가질 수 있는 섬인지에 대해 찬반논쟁이 있음.

(일본측)
o 유엔해양법협약의 발효에 따른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의 선포를 앞두고 1996. 2. 9 일본정부는 '독도는 일본의 영토이고 일본의 동의없는 독도접안시설공사는 일본주권에 대한 침해로서 이의 중지를 요구'하여 왔음.

o 1996. 6월 현재 일본은 국회에서 배타적경제수역법안을 심사중이고, 일본언론은 독도주변수역을 공동관리수역으로 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음.

이제 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인지 역사적 사실 근거로도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교육은 중요합니다. 일본이 독도를 역사왜곡 교육에 포함시키는 이유도 역사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국사교육이 필수과목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국사교육을 필수과목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독도를 지키는 방법은 국사교육부터 입니다. 제대로 역사를 알아야 독도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일본은 도발을 했습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30일 오후 교과용 도서 검정조사심의회를 열고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거나 기술한 중학교 사회교과서 18종에 대해 승인한 것입니다. 김성환 외교부 장관히 엄중 항의서한을 발송하고 뒤늦게 허둥대고 있습니다. 조용한 외교가 아니라 도발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처럼 강력하게 대처해야 했습니다. 일본이 대지진 참사 속에서도 독도에 대한 도발을 하는 것은 내부문제를 외부로 돌리기 위한 술책도 포함돼 있을 것입니다.

일본은 과거 역사가 말해주듯이 교활하고 간교했습니다. 무조건 일본인을 배척해서도 안되겠지만 엄연한 한국 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 주장을 한다면 확실히 매운 맛을 보여줄 필요도 있습니다. 아이가 땡깡을 부리면 회초리를 들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 땡깡을 부리는 독도 역사 왜곡에는 전국민적으로 단호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조용히 지나가 달라는 구로다의 말은 곧 독도에 대해 침묵하라는 강요일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대한민국의 자존심 독도를 우리 땅이란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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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