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12.21 1박2일 혹한기 캠프 '예능 아닌 최강 다큐'였다 (강원도 겨울 군대시절 폭설과의 전쟁) by 진리 탐구 탐진강 (84)
  2. 2009.10.14 김제동의 오마이텐트, 살둔마을 왜 갔나? by 진리 탐구 탐진강 (82)
  3. 2009.08.28 대학생 전방입소 거부, 연병장서 시위 그 후... by 진리 탐구 탐진강 (54)
  4. 2009.06.17 DMZ 수색대 짬장의 작살, 김일성고기 잡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62)
  5. 2009.02.22 20년전 군대 위문편지 보낸 선희에게 by 진리 탐구 탐진강 (17)


강원도 인제에서 촬영된 1박2일 혹한기 대비 캠프는 마치 겨울 군대 생활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사실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생활을 경험한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겨울철은 눈과의 전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어쩌다 여행 중 만나는 눈보라는 하나의 추억과 낭만일지 몰라도 군생활 중 매일 내리는 눈은 '하늘의 쓰레기'나 '악마의 비듬'에 불과했습니다.

벌써 20여년이 지났지만 1박2일 혹한기 캠프 장소를 보면서 강원도에서의 겨울철 군생활이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강원도 인제와 원통 그리고 양구에 걸친 최전방 지역은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말이 아직도 전해내려오듯이 험난한 산악지형 지역입니다.
 
그래서 1박2일 혹한기 대비 캠프 인제 내린천편은 겨울 병영 캠프를 보는 듯 했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 속을 뚫고 내려오는 1박2일 멤버들의 모습이 바로 겨울 군인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던 것입니다. 1박2일이 표방한 리얼 야생 로드 버라이어티라는 모토와 군대의 겨울나기는 다를 바가 없어 보였습니다. 

실제 제가 군대 시절에 겨울에 허리까지 차는 폭설이 내려 작전 도로도 막히고 병영 막사가 고립돼 배낭을 메고 매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서 산을 넘어 부식(군대 식사 재료)을 추진해야 했던 일도 많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1박2일 내용부터 먼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박2일 혹한기 캠프는 감동의 리얼 야생 로드 다큐였다

1박2일 멤버들이 보여준 인제 혹한기 캠프는 예능이 아닌 최강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예능으로 시작했지만 갑자기 내린 폭설로 산속에 고립된 야생 탈출기였습니다. 이승기는 극한 상황에서도 '예능이 아니다. 다큐다'라고 말하면서도 '눈내리는 것은 복이다' '눈으로 세트장을 만들었다면 돈이 엄청날 것이다'라며 긍정적으로 대하는 자세로 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폭설은 아무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멤버들은 배드민턴 게임과 라면 내기 복불복 게임을 마치고 비닐 막사의 야생에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이내 눈으로 변했습니다. 곧이어 폭설로 변했고 제작진은 긴급히 산속에서 철수하기로 했습니다. 자칫하면 산 속에서 완전히 고립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멤버들은 사륜 산악오토바이를 타고 일단 산정상에 도착한 후 반대편으로 걸어서 하산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사륜 산악오토바이는 인제 내린천 ATV팀이 1박2일을 도와준 것이었습니다. 폭설로 자동차 차량은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선발대로 강호동 이승기 MC몽은 산 정상에 도착 후 산 아래 내리막을 걸어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눈 내리는 길, 스노우로드였습니다. 멤버들이 내려오는 도중에 엄청난 눈보라를 만나 한치 앞도 보이지않는 길에서 사투를 벌였습니다.



게다가 눈길이 미끄러워서 멤버들은 계속 넘어지곤 했습니다. 촬영하던 VJ가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히말라야나 북극이 따로 없었습니다. 1박2일 멤버들은 극한 눈보라에도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감동을 연출했습니다. 아이리스와 1박2일을 교차편집한 장면을 보니 딱 들어맞았습니다. 2012가 1박2일이란 의미라는 MC몽의 말이 이상해 보이지가 않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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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각본없는 야생 리얼 버라이어티 다큐였습니다. 1시간 30분이 넘는 길을 걷는데 후발대인 이수근 김C 은지원 일행이 폭설이 줄어든 틈을 타 사륜 산악오토바이를 타고 유유히 내려왔습니다. 그 때 해피선데이의 대표 연출자인 이명한PD가 산 아래에서 걸어서 올라와 강호동과 극적인 조우를 했고 함께 감격적인 포옹을 했습니다.

또한, 제작진들도 함께 만났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이산가족 상봉과도 같았습니다.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됐는데, 산 위에서 내려온 VJ가 '넘어지며 구르면서 촬영했다'고 말하자 산 아래에서 올라온 VJ가 고생했다면서 어깨를 두드려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1박2일 제작진과 멤버들의 팀워크가 빛난 장면의 연속이었습니다. 이것은 예능이 아닌 최강 다큐였습니다.

폭설로 고립된 군대 막사 10일간 추억, 생존 전쟁이었다

다시 강원도 양구에서의 겨울 군생활 추억담으로 넘아가 봅니다. 지난 1980년대 중반, 군생활 도중 겨울에 폭설로 당시 저희 소대 막사가 고립된 적이 있었습니다. 산 속에서 땅굴탐지 특수 수색대 임무를 맡아 단독 소대 생활을 했던 터라 고립되면 외부와 단절되고 식사도 할 수 없어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늘이 뻥 뚫린 듯 폭설은 매일 계속 내렸고 도로는 완전히 허리 높이의 눈으로 뒤덮였습니다. 매일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제설작업을 해도 50미터를 뚫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비상 식량도 바닥나고 결국 저희 소대는 매일 1개 분대씩 돌아가며 산정상을 넘어 반대편 평지까지 걸어서 부식과 식량을 배낭에 메고 돌아오는 작전을 돌입했습니다. 새벽에 출발해도 밤 12시에 도착하는 강행군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막사와 도로의 눈을 치우는 제설작업에 하루 동일 매달렸습니다.


눈이 멈추기만 바랐지만 무심한 하늘은 하루도 쉼없이 눈발을 흩날렸습니다. 군장을 멘 부식추진조는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매서운 눈보라 속에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산악 눈길을 걷는 것 조차 힘들었습니다. 소대원의 식사와 목숨이 걸린 일이라 한 순간도 쉬지않고 걷고 또 걸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고립된 생활 기간이 무려 10일이나 됐습니다. 가장 오래 고립된 시기였습니다.
 
그 후로도 폭설도 도로가 막혀 단기간 고립되는 일은 자주 있었습니다. 물론 작전도로가 넓어 겨울 내내 제설작업만 계속 했습니다. 강원도 양구 최전방 가칠봉을 비롯한 산악지대는 9월부터 첫 눈이 내리기 시작해 다음해 5월까지 눈이 내릴 정도였습니다. 정말 눈만 보면 지긋지긋했습니다. 
지금은 지나간 추억으로 남았지만 강원도 산악지대에서 겨울 군생활은 눈이 결코 낭만이 아닌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것은 인식하게 해준 경험이었습니다.
 


이 처럼 1박2일 혹한기 대비 캠프는 바로 강원도 최전상 군인들의 겨울병영생활을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 이번 강원도 인제편은 1박2일의 리얼 야생 버라이어티 정신과 저력을 보여준 감동의 명작이었습니다. 아울러, 오늘도 나라를 지키는 국방의 의무에 겨울 내내 고생할 최전방 국군 장병들에게 따뜻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젊은 그들이 있어 오늘 밤도 편안히 잠잘 수 있기 때문입니다. 1박2일이 있어 즐겁고 최전선 군인들이 있어 평안한 하루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무려 40여년 이상을 강원도 산 속 마을에서 살고있는 강원도 노인 아저씨와 강호동이 눈 속에서 마주치자 두 사람이 잠시 나눈 대화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역경과 도전 속에서도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동안 인생을 달관한 산할아버지의 우문현답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호동 : 왜 우리는 험한 날씨를 몰고 다니는 걸까요?
아저씨 : 다 복이예요, 복.

(덧붙여, 1박2일 멤버들이 산에서 미끄러지는 TV장면을 보던 아이들은 저기서 비닐 포대 눈썰매를 타면 재밌겠다고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이미 비닐 눈썰매를 타본 아이들의 경험은 놀이를 생각한 모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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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김제동이 다시 돌아옵니다. KBS '스타골든벨'에서 퇴출당한 김제동이 MBC 토크쇼 '오마이텐트'를 통해 시청자들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우선 김제동에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갑작스럽게, 김제동의 KBS 퇴출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외압설을 제기하며 KBS가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했다며 분노의 감정을 보였습니다. 차라리 MBC에서 권토중래할 수 있도록 응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김제동이 MBC의 새로운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었으니 또 한번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김제동의 MBC '오마이텐트' 출연은 이미 지난 달부터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김제동은 지난 9월 25일과 26일 1박 2일 동안 '오마이텐트' 첫 방송을 녹화했다고 합니다. KBS에서 김제동의 하차를 통보한 시점은 불과 몇일 전입니다. 김제동에게 있어 우연치고는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주 일주일은 '운명의 장난'일까?

김제동은 이번 주 월요일(12일)에 KBS의 스타골든벨 녹화가 있었습니다. 눈물의 마지막 녹화였습니다. 김제동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동료 개그맨인 김태현 정주리 등도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김제동에게 방송에서 장난으로 좌파제동이란 말실수를 했던 김구라는 그것이 예언이 되어버리자 미안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비록 말은 못하지만 유재석 강호동 등 동료 MC들도 안타까운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주일은 1980년 전두환 정권 시절에 대머리라는 이유로 방송 출연을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최고권력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코미디언이 방송에 나오는 자체가 보기싫었기 때문입니다. 외모 때문에 방송 출연금지가 되다니 황당한 블랙코미디였습니다. 완장 찬 정권세력의 과잉충성이 이주일을 비롯한 연예인들에게 재갈을 물린 사건이었습니다.
 
▲ 착하고 따뜻한 심성을 지닌 MC 김제동은 등산을 좋아한다

그런데 30년전 독재정권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일이 재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제동의 하차 소식에 이어 손석희 교수의 '100분 토론' 진행 하차 논란도 이어졌습니다. 김제동의 퇴출도 신해철 윤도현 등 연예인들이 하차한 연장선 상에서 의혹이 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에 관심갖는 사회 참여 연예인들이 현 정권에서는 보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주의 압권은 나경원 의원의 '좌파 발언'인 듯 싶습니다. 나경원 의원은 12일 국정감사에서 이병순 KBS 사장에게 "김제동씨가 하차한 이유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에서 좌파적인 발언을 했기 때문인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나라의 대통령의 죽음에 슬퍼한 대다수 국민들을 모독하는 발언일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나경원 발언은 수십년전 냉전시대도 아닌데 국민을 대상으로 좌우 색깔을 논하는 것은 비열한 국민분열 책동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경원 의원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궁색한 해명을 했지만 차라리 사과를 하는 편이 깨끗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반전이 있었습니다. MBC가 새롭게 기획한 '오마이텐트'가 이번 주 금요일(16일) 밤 11시 30분에 첫 방송을 시작합니다. 김제동의 KBS 하차 소식이 있은지 몇일 만에 MBC 승차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티즌들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반응입니다. 김제동에게는 이번 주 롤러코스트를 타고 지옥과 천당을 오르내리는 느낌일 듯 합니다. 
 

오마이텐트는 어떤 토크 프로그램일까?

'오마이텐트'는 MC와 출연자가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1박2일 토크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즉 1박2일 동안 함께 먹고 자고 놀면서 서로 간에 가슴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신개념 프로그램이라는 것입니다. 토크쇼와 다큐멘터리를 섞은 리얼 야생 토크쇼인 셈입니다. 사람들과 등산을 좋아하고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를 즐기는 김제동과 맞는 프로그램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는 파일럿 프로그램이라서 정규 프로그램이 될지는 아직은 미지수이기는 합니다.
 

▲ 김제동은 살둔마을 야영장에서 일반인들과 기타를 치며 녹화했다 (사진 솔모루님)

특히나 오마이텐트의 첫 방송 초대손님은 김제동 MC 자기 자신입니다. 즉, 김제동이 MC이자 게스트로서 1인 2역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KBS 퇴출 이전에 녹화한 방송이라지만 어떤 이야기가 전파를 탈지 궁금해집니다. 마치 김제동의 미래를 예견한 듯한 기획이 된 셈입니다. 따라서, 이번 오마이텐트는 김제동의 인생관은 물론 그 동안 김제동을 둘러 싼 다양한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지 않을까 기대되고 있습니다.
 
홍천 살둔마을의 따뜻한 이웃과 야영 이야기

김제동은 평소 등산을 즐겨 했습니다. 소탈하고 푸근한 김제동의 모습은 야영을 하면서 일반 사람들과 함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와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녹화를 한 곳은 강원도 홍천의 살둔마을이라고 합니다. 아주 산골마을인 듯 합니다. 살둔마을이란 이름은 '사람이 기대어 살만한 둔덕'이라는 뜻인 것만 봐도 이해가 됩니다. 이미 폐교가 된 오지의 산둔마을 야영장에는 김제동이 대자연과 만나고 따뜻한 이웃들과 마주하는 리얼 토크멘터리(토크+다큐멘터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직접 현장 야영객으로 참여한 솔모루님의 블로그에 의하면 김제동 스스로 텐트를 치기도 하고 식사도 직접 짓기도 하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이 김제동과 어울려 즐거운 듯 깔깔대기도 합니다.
김제동은 야영객들과 '남자라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동물이죠?' '토마토가 싫은데 어떻게 하면 좋아질까요?' 등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밤샘 토크를 펼친다는 것입니다.



김제동의 오마이텐트는 다른 예능 버라이어티와 차이가 많습니다. 스타 연예인들이 대거 출동해 신변잡기를 늘어놓고 억지 과장의 몸개그를 펼치는 것이 일반적이 예능 버라이어티였습니다. 오마이텐트는 우리 이웃들과 함께 하는 잔잔한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리스크도 있겠지만 신선한 감동과 진솔한 사람들의 훈훈한 이야기를 이끌어낸다면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제동이 가장 험난한 두메산골에서 야생 리얼 토크를 진행하는 것은 현재 자신이 처한 어려움과 흡사한 것 같습니다.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과 힘든 무명시절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꿈을 개척해 왔듯이 현재의 고난과 역경은 오히려 더 큰 도약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김제동이 어떤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으로 '처음 시작할 때를 잊지 않겠다'고 한 것과 같이 이번 오마이텐트는 김제동 자신의 리얼 야생 극복기가 될 것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김제동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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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1980년대 대학가는 매일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던 시절입니다. 당시는 공포의 군사독재 정권 시대였습니다.

대학생이 된 이후 그들은 엄청난 갈등을 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배웠던 사실들이 엄청나게 달랐던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알면서 부조리와 불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정의감이 불타오르던 시기였습니다.


대학가 시위에는 무차별 최루탄 난사와 백골단의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전투경찰과 달리 백골단은 하얀 헬맷을 쓰고 몽둥이를 들고 가장 앞으로 뛰어나와 공격을 했기에 백골단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최루탄이아 백골단 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일 잡혀가면 엄청난 구타와 폭력이  행해졌던 시절임을 생각하며 겁없던 젊은 대학생들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은 당시 1학년 때 문무대에 입소해 군사훈련을 받았고, 2학년 때는 최전방 부대에서 전방 입소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군사독재 시절의 군사교육에 대한 거부감이 컸습니다. 1986년에는 서울대 학생이던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민주주의 쟁취 및 전방입소 거부를 외치며 분신 자살을 하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당시 폭압적 정권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대학생들의 전방입소를 강제화했습니다. 거부하면 강제로 입대를 시켰고 교련과목 학점이 주어지지 않았고 군복무 단축 혜택도 없었습니다. 

전경들이 대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있고 뒤에는 하얀 헬맷을 쓴 백골단이 서 있다.

그 다음 해인 1987년은 역사적인 민주화 항쟁이 전국 대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이 대거 참여해 일어난 해입니다. 그런데 그 해에도 대학생들의 전방입소 거부 움직임은 계속 벌어졌습니다. 입소가 몇일간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방 입소를 하면서도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고 반독재 구호가 난무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도 교내 운동장에서부터 반독재 구호와 함께 시작된 시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학생들은 태운 버스가 최전방 군부대의 연방장에 멈췄습니다. 완전 무장 군인들이 연병장에 내린 대학생들을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사단장이 대학생들이 나와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연병장에서도 연좌농성을 하면서 반독재 구호를 외쳤고 민중 가요를 다 함께 부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군사독재라는 이유로 사단장과의 악수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두려움을 모르는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군대에서 그것은 순진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내 군인들과 조교들의 폭력과 얼차려가 시작됐습니다. 군대에서 반항은 가차없는 폭력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유와 진리를 추구한다는 상아탑은 아니었던 시절이었고 군대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고분고분해질 수 밖에 없었던 셈입니다. 기선을 제압한 조교가 크게 외쳤습니다.
"여기가 어딘 줄 아나?"
"...(침묵)..."

"여긴 그 악명높은 삼청교육대다. 어디에도 도망갈 곳이 없다. 도망가면 사살이다."
"...(허걱)..."

대학생들은 놀랐습니다. 삼청교육대라면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무력으로 장악한 후 사회정화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불법 군대 입소시켜 무자비한 폭력과 훈련을 시켰던 곳입니다. 인권은 전혀 없던 곳이었습니다. 가장 악명높은 강원도 최전방의 삼청교육대가 바로 거기 였습니다.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인 강원도 양구의 백두산부대였습니다. 기가 눌린 대학생들은 온통 까마득한 산으로 둘러싸인 연병장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삼청교육대 시절의 훈련방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훈련이었습니다. 

인권이 말살된 시절의 삼청교육대 훈련은 무자비했다

실제 소위 휴전선 철책에서 야간 근무도 이루어졌고,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GP에도 들어가야 했습니다. 4월의 강원도 산악은 너무 추었습니다. 실제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군사적 대결의 분위기에서 대학생들에게 극도의 긴장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난생 처음 최전방에서 훈련받는 대학생들은 가족들과 친구들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나이의 군인들과 대학생들이 같은 내무반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해야하는 암울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로서 공감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깊은 산 속에서 자유를 잃었지만 결국은 다가 올 희망과 미래였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런 전방입소 훈련이 끝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지긋지긋한 강원도 양구의 전방입소가 끝나고 친구들에게 한마디했습니다. "강원도 양구를 향해 오줌도 누지 않겠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내 5월이 오고 6월이 다가왔습니다. 5월은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달이라 대학가는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해 6월은 전국에서 들불처럼 민주화항쟁이 일어났습니다. 대학생들을 필두로 시민들이 대거 동참했습니다. 군대라는 특수성을 이용해 장기 군사정권을 획책했던 독재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전방입소 군사훈련이 결국 대학생들에게 아무런 특효약이 되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 다음 해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이제 군대도 많이 좋아졌겠지 하는 기대도 했습니다. 처음 입대해 준비하는 곳은 춘천 102보충대였습니다. 하필이면 강원도 춘천이란 말인가. 그 후 실제 훈련을 받는 부대가 배치됐는데 강원도 양구 백두산부대였습니다. 이런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춘천 소양호를 건너 배를 타고 더블백을 물고 산을 넘어 백두산부대에 도착했습니다. 조교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얼차려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전 해 대학생 전방입소에서 받았던 그 연병장이었습니다. 이미 기선을 제압한 조교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OO대학 출신 손 들어! 어서!"

저는 손을 들었습니다. 다른 몇 명도 손을 들었습니다. 다시 조교의 비장한 한 마디가 들렸습니다.
"너희들은 죽었다고 복창한다. 작년 여기 연병장에서 기억나는가? 앞으로 튀어 나와!" 

삼청교육대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군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으로 대상자들을 검거하기 위한 군경 합동작전의 명칭이 '삼청작전'이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국보위는 1981년 1월까지 4차에 걸쳐 6만 755명을 불법으로 강제 체포했습니다. 피검거자들은 보안사령부를 비롯한 심사위원회에서 A B C D 4등급으로 분류되어 A급 3,252명은 군법회의 회부되었고, B급과 C급 3만 9,786명은 각각 4주교육 후 6개월간 노역과 2주의 교육 후 풀려나야 했습니다.

정통성이 없던 군사정권이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했지만 삼청교육 입소자들 가운데는 반체제 인사를 비롯해 억울하게 검거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의 4주간 교육은 군부대 연병장 둘레에 헌병을 배치하고 엄중한 총기 무장 감시 속에서 무차별 구타와 폭력이 자행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현재 밝혀진 것만으로도, 당시 삼청교육대에 끌려 가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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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김일성고기를 아시나요?
지금으로부터 20년전 군대 같은 소대에 1주일 고참 K가 있었습니다. 하루만 빨라도 깍듯이 고참으로 모셔야 하는 특수부대(?)였습니다. K는 비무장지대 수색정찰대인 우리 소대의 짬장이었습니다. 짬장은 주방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군대에서 자주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비무장지대 수색대는 소대단위로 별도로 산 속에 은거해 생활했습니다.

K는 지독한 산골의 오지에서 자랐던지라 빵도 먹지 못했습니다. K는 인스턴트 식품류들을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과도하게 특이한 식성의 고참이었습니다. 전방에서는 아침 식단이 빵이었는데 짬장인 자신이 먹지못하기 때문에 아침마다 K는 자신만의 채식 식단을 별도로 하나 더 준비하곤 했습니다. 소대원들이 빵을 먹는 시간에 K는 자신의 특별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어느 여름 날, 짬장 K가 DMZ 수색에 나섰습니다. 강원도 양구 중동부 전선의 계곡 물 속에는 소위 '김일성 고기'로 불리는 물고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K는 수색 전날부터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수색에 나선 K가 완전 군장과 별도로 몰래 준비한 것은 물고기 사냥용 작살이었습니다.
 
그 날은 너무 더웠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에 수색을 한다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비무장지대의 계곡을 지나던 참이었습니다. 짬장 K가 드디어 작살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평생 처음 맛보는 특별식을 제공하겠다."
"...네..."

수색대원들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짬장 K는 병장 고참이었을 때라서 수색대를 이끌던 시기였습니다. K는 저격병 및 M60 기관총 사수 부사수 등 몇명을 주변 경계 근무를 시킨 후 곧바로 계곡의 웅덩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방탄복 등 완전 무장도 해제하고 팬티만 입고 작살을 들고 물 속으로 유유히 헤엄쳐 갔습니다.

얼마 후 K가 작살에 커다란 물고기를 명중시켜 물에서 나왔습니다. 군대에서 김일성고기라고 불리는 물고기였습니다. 양구 산악지대 계곡에는 김일성고기가 많이 살았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김일성고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물이 차가운 지역인 양구 등 이북에만 서식하는 물고기였습니다. K는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몇번을 거듭하며 엄청난 수의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신기에 가까운 작살 수렵 실력이었습니다. 우리 수색대원들은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속으로 탄성을 질렀습니다. 비무장지대 내에서는 말을 해도 안되고 담배를 피워도 안되는 지역입니다. 물론 작살로 물고기 잡아도 안됩니다. 그러나 가끔 일탈도 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것 이외에도 구렁이를 잡거나 물찬(?) 더덕을 캐는 일도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데 그 일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습니다.

K가 다시 물 속에서 나왔습니다. 작살에 팔뚝만한 김일성고기 2마리가 동시에 잡혔습니다. 화투로 치면 1타2피인 셈입니다. 그렇게 어느 한 여름날 수색대는 물가에 있었습니다. 비무장지대 적군 수색은 안하고 물고기 수색만 한 셈이었습니다. 김일성고기를 잡았으니 전혀 근무를 안한 것은 아닙니다만...  K의 물고기 사냥이 끝나고 수색대원들은 황급히 비무장지대를 빠져나왔습니다.

열목어는 강원도 중동부 지역 부근부터 이북의 차가운 물에서만 서식하는 산천어 종류이다

막사에 도착하기 전 냇가에서
K가 드디어 요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수색대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건 김일성고기가 아니다."
"그럼 무슨 물고기입니까?"

"열목어. 천연기념물이다"
"...(허걱)..."

우리는 말문을 닫았습니다. 천연기념물을 이렇게 많이 포획했으니 천벌을 받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물고기를 먹는다는 기대감 등 각자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실 강원도 양구지역 1급수의 깨끗한 물에는 김일성고기라고 불리는 산천어가 많이 있었습니다. 물이 맑고 차가운 곳이라서 그런지 남쪽 지방과 같이 물고기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몇종의 산천어 부류가 주로 서식했습니다.

김일성고기를 열목어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잘못된 용어이기는 합니다. 눈이 튀어나와 망둥어처럼 생긴 물고기를 부대원들은 김일성고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수색대원들은 열목어와 김일성고기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열목어와 김일성고기는 산천어 형제뻘 정도 되는 셈입니다. 강원도 양구 지역의 열목어는 눈이 빨개서 김일성고기로 불리게 됐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김일성고기는 백두산 천지에 김일성이 산천어를 풀어서 서식하게 해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일성은 생전에 백두산에서 기른 산천어를 보양식으로 즐겨 먹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날 우리 수색대원들은 짬장 K가 만든 열목어 회를 실컷 먹었습니다.
천연기념물을 먹었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그런데 비무장지대에서는 정전협정상 천연기념 포획에 대한 위반 규정은 없지 않을까요?)

[추가] 열목어는 맛은 그다지 없었습니다. 젊고 배고팠던 20대 초반의 군인 시절이라서 무엇이든 식성이 좋았던 터라 주는 대로 잘 먹었을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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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군대 복무 기간 동안에 사용했던 '군생활 회상록'을 꺼내 봤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은 백두산부대에서 소속 부대 배치 당시에 나누어주었던 일종의 앨범입니다. 지난 1988년에 입대했으니 이제 20년이 지났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은 이미 색도 바랬고 글자로 벗겨지는 등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을 넘기다가 초등학생의 '군군 아저씨에게'로 시작되는 위문 편지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선희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편지 내용은 남아 있는데 편지봉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희가 보낸 편지에는 자신과 함께 엄마와 남동생의 사진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약 6 장 정도되는 사진인데 어쩌면 소중한 자신의 가족사진일지도 몰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어졌습니다.

선희는 아마도 당시 대구의 어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편지 내용 중에도 성은 없고 그냥 선희라는 이름만 있었습니다. 편지 내용이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단어 구사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선희도 세월이 흘렀으니 서른살이 훨씬 넘었을 나이일 것입니다.

지금은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 편지를 보내는 일은 없어진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초등학생들이 위문편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제가 20년전 근무하던 곳은 강원도 최전방이라서 학생들 위문편지도 다른 후방 부대들을 거쳐 제일 마지막에 받을 수 있어 일부 초등학생들 편지만 겨우 도착했었습니다. 아예 못받는 경우도 있었으니 편지라도 하나 받으면 감개무량한 시기였습니다.
 
먼저 간단히 당시 선희의 편지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저는 고향이 대구이고 대구에서 자라고 있어요. 먼저 우리 반의 여러 이야기를 말씀드릴께요. 저희 반에는 말썽장이들만 모여서 지내고 있어 그런지 언제나 덤벙대고 작은 사고도 가끔씩 일어난 답니다.

저번에는 교실에서 제기로 탁구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깨는 일이 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장난스러운 아이들을 용서해 주시기도 하셨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보내주신 편지를 내 친구가 빼앗아가서 아저씨와 나의 편지내용이 다른 아이들에게 들통날 뻔 하였지만, 내가 간신히 빼앗아 내용이 들통나지 않았어요.

아저씨, 휴전선을 지키실 때 북한 공산군과 마주보기도 하시죠. 그 때의 기분이 어떠세요. 저는 아저씨가 어떤 분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그리고 더 친해지고 싶어요.


선희는 연필로 글씨를 또박또박 예쁘게 쓰는 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여학생 다운 착한 심성과 함께 문장 실력이 우수한 편이었습니다. 같은 반 남자 아이들에게 편지를 빼앗겨 간신히 되찾았다는 내용은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당시 편지 보낸 시기는 1989년 10월이었습니다.)

당시 군대시절에 저는 위문편지를 상병 때 한 번 이외에는 받지를 못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위문편지가 선희가 보낸 셈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위문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남학생이어서 그런지) 군인에게 답장을 받아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이 어린 마음에 속상한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제가 군인일 때는 선희에게 정성껏 답장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희는 당시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엄마와 남동생 셋이서 살고 있었나 봅니다. 선희가 보낸 사진 중에 아빠는 없고 가족 셋이 찍은 사진이 있었고 산소에 남동생과 함께 앉아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선희는 아빠도 없이 자라다보니 일찍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던 듯 합니다. 가족사진을 여러장 편지와 함께 보내주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던 기억입니다.


당시에 갑자기 땅굴 수색 등 작전과 맞물려 혼란스러워지면서 어쩌다가 사진을 돌려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강원도 중동부전선에는 9월에 첫 눈이 내리고 다음해 5월까지 지긋지긋하게 눈이 내릴 정도였던 기억입니다. 그 기간동안에 제4땅굴 수색 작전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이라고 선희에게 가족 사진을 돌려주고 싶은데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군대에서는 볼 수 없는 추억이겠지만 군생활 회상록에 남겨진 '선희의 국군 아저씨 위문편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선희에게 가족사진이라도 돌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 보내지 못했지만, 선희가 보고싶어했던 당시 군인 아저씨들 사진입니다. 늦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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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