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5.31 노무현과 원칙과 가치 지킨 유시민의 눈물 생각해보니 by 진리 탐구 탐진강 (56)
  2. 2009.05.28 노무현 추모 지방 분향소, 학생 가족 대거 몰렸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20)
  3. 2009.05.18 5.18 광주항쟁, 어머니와 친구의 그 날... by 진리 탐구 탐진강 (100)


항상 변치않고 '정치적 가치'를 공유하며 노무현과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사나이, 유시민. 저는 유시민과 일면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올곧은 정신과 의리에 대해 탄복하곤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위기에 처하고 어려울 때 언제나 함께 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 곧바로 달려와 펑펑 눈물을 쏟던 유시민을 생각하니 대학시절의 기억이 뚜렷하게 떠오릅니다.

제가 유시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23년전 대학 입학 이후 였습니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저는 도서관에 책을 빌리기 위해 갔습니다. 여러 책들을 구경하다가 어떤 책 속에 꽂혀있던 수십 장의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였습니다.

그리고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를 단번에 읽었습니다. 20대 청년이 이토록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감동받았고 당시 군사독재의 진상을 알게 되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금기시 되었던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몰래 그 글을 읽어야 했습니다. 정당성과 도덕성이 없던 군사정권은 정권에 불리하면 무조건 금지시켰던 시기였습니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중에서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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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 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 민중 항쟁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 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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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이유서는 서울대 프락치사건에서 유시민은 주동자로 몰려 구속되면서 쓴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네크라소프의 시구를 인용한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얼마 전 유시민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봉하마을을 찾아 조문하면서 서럽게 울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정치인 노무현과 유시민은 어쩌면 닮아 있습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원칙도 소신도 없이 철새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따라 움직일 때 노무현과 유시민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국민과 민주주의 편에서 원칙과 소신을 지켰던 것입니다.

유시민에 대한 기억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국회에 의한 탄핵 시도에 오열하고 울분을 토하던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썪어빠진 환경에서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 올곧은 사람이었던 노무현과 '원칙과 소신의 지향점'을 지켜냈던 유시민이었습니다. 수많은 정적들의 비난과 편견들에 맞서싸우며  그 고난을 받아내고, 노무현 후보가 대한민국 대통령을 만들어냈던 그였기에 탄핵시 울분은 그 누구보다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시민의 눈물은 진정성의 산물이었습니다.

▲지난 2003년 3월 국회에서 탄핵 당시 오열하던 유시민 의원의 오열 모습

정치적 원칙과 소신 보다는 배신과 야합이 난무하던 우리나라의 후진적 정치무대에서 유시민과 같은 정치인이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노무현의 정치적 꿈과 이상은 아직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나라에서 앞서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노무현의 삶과 죽음은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한단계 발전하는데 있어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정치적 자산과 가치를 공유하던 유시민이 있다는 것은 국민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시민은 단심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주의 가치와 원칙을 공유한 인물이다

유시민을 생각하면서 문득 백원우 의원이 오버랩되어 지나갔습니다. 지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백원우 의원이 이명박 대통령 내외의 헌화가 시작되자 '사죄하십시오'라고 외치다 경호원들에게 끌려간 일이 있었습니다. 경호원에게 입이 틀어막힌 백원우 의원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입이 틀여막힌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들었습니다. 백원우 의원이 서울역 분향소에서 쓴 글이 있어 소개해 봅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죄인의 심정으로 지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죄인입니다.

그래서 목놓아 소리내어 울고 싶어도 울지못하는 죄인입니다.

그저 줄서서 조문하는 분들에게 물한잔 대접하고 싶어도 어찌하지 못하는 상주일뿐입니다.

마음속 눈물이 강물이 되어 바다에 이르고 있지만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머리속은 하얀 백지장이 되어 버리고 혀가 꼬이고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저는 그저 죄인입니다.

조문오시는 분들에게 하염없이 죄송하고 너무너무 감사할 뿐입니다.
2009년 5월 26일 서울역에서 국회의원 백원우

유시민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지난 1980년대부터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이르기까지 많은 상념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순간은 속일 수 있어도 수십년에 걸쳐 속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거짓말과 위선에 속아 왔습니다. 이제는 진정으로 국민과 민주주의를 위해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았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들이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비열하고 야비한 정치인은 걸러내고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정치인은 지켜내는 감시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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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지방 분향소를 가봤습니다. 서울이나 봉하마을에 주로 뉴스가 집중되다보니 지방 소식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습니다. 경기도 고양시 화정역 부근의 분향소의 야간 풍경은 그야말로 추모의 물결이었습니다. 수원역도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몰려 30분 이상 기다려야만 조문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광주 부산 등 다른 지역도 대체로 유사한 패턴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전국적으로 정부 지정 및 민간 분향소가 약 300여개라고 보도가 되었지만 실제는 훨씬 많은 500여개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됩니다. 공식 발표된 분향소 이외에도 전국 대학이나 민간 단위의 분향소가 전국 곳곳에 더 많이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분향소 집계에서 빠져있는 곳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론에 보도된 전국 300만명의 조문객 보다 많은 국민들이 분향소를 찾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공식 집계 이외에 전국 곳곳에 민간 분향소 늘어

실제로 고양시 화정역 부근의 분향소도 공식 발표된 장소에 포함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늦은 밤에 까지 계속 조문객이 몰렸습니다. 주로 초등학생을 비롯한 가족 단위와 중고등학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특히, 조문객들은 노란 종이에 고인의 명복을 빌고 각오를 다지는 다양한 추모의 글을 남겼습니다. 노란 종이로 분향소 주변을 전부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사진은 휴대폰으로 찍어서 화질이 좋지 않습니다.)

가족 단위 조문객들은 아이들에게 바람직하고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줄 수 있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노란 종이에 조문객들 마다 추모의 글을 남겼는데 노란 종이들이 모여 거대한 노란 물결을 연상케 했습니다.
더위가 피해 저녁에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 단위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조문에 많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광장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영상을 보는 학생들과 시민들도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조문을 하고 난 후 어린 학생들과 어른들은 각각 노란 종이에 추모의 글을 썼습니다.

"대통령 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하세요" "존경합니다." 등 다양한 추모의 글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아가와 함께 온 주부들의 유모차 부대도 조문에 대거 참여해 조문 행렬이 모든 계층에서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유모차 부대는 주로 낮에 특히 많았지만 밤에도 가족들끼리 자주 눈에 보였습니다. (위 사진은 낮의 모습으로 이재준 님 참조)

가족들이나 중고등학생들이 지방 분향소에 대거 몰린 것은 지리적으로 조문하기에 용이한 것이 이유일 것입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하나의 교육적 차원에서 부모들이 함께 데리고 나온 것도 한 몫 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숙연한 모습으로 조문을 하고 노란 종이에 정성껏 추모의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부산역 광장 분향소의 추모 열기(좌측)와 광주시민합동분향소의 조문객들 행렬 모습(우측)


오늘 밤 최대의 조문객, 전국 분향소에 몰릴 듯

이러한 분향소는 야간을 포함해 대부분 24시간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밤에 최대의 조문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조문객이 몰린 기록이 될 것입니다. 특히 자발적으로 시민들이 조문 대열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는데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 정부가 지정한 분향소에는 한가하지만 시민들이 만든 분향소에는 몇시간을 기다려서라도 분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믿지 못하겠고 시민들의 진정성에 자발적인 공감이 모아지고 있는 셈입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을 경찰이 봉쇄하자 오히려 전국적으로 지방 추모제는 확산되어 가기도 합니다. 정부가 막을수록 시민들은 더욱 자발적인 조문과 추모제 참여를 가속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은 서울 경복궁에서 영결식(오전 11시)과 시청앞 광장에서 노제(오후 1시)가 열릴 예정입니다. 이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이 땅에서 보내드려야 할 마지막 밤과 아침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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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30년이 지났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그 날이 다시 오면. 그 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저는 당시 큰집에서 기거하며 일찍이 서울 유학을 했었습니다.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에 총격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이웃 아줌마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하고 스스로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장갑차와 군인들의 서울 입성,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저는 중학교를 가려면 늘 청와대 앞 길을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그 길에는 장갑차가 보였습니다. 완전 무장한 군인들도 보였습니다. 5월도 그랬습니다. 당시는 왜 군인들과 장잡차가 청와대 앞에 그토록 많이 지키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인 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1979년 전두환은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1980년 체육관에서 대통령에 오른다]

오월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큰집에 전남대에 다니던 친척 형이 올라왔습니다. 그 후부터는 그 형은 도무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큰집의 다락방에 늘 숨어지냈던 것입니다. 언제 닥칠지 모를 군인들의 검거를 피해 다락방에 하루종일 숨어있었습니다. 저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왜 그랬을까? 당시는 광주 지역 대학생이면 모두 잡아갔던 시절이었습니다.

문학소년이었던 착한 친구가 5월이 오자 눈물을 흘렸다

1980년대 중반, 저는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전두환 군사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되고서야 1980년 5월 광주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가에는 소위 '짭새(비밀 경찰)'들이 출몰하던 시기였습니다. 대학생들은 군사 독재에 항거해 독재와 맞서 싸웠습니다. 항상 대학 캠퍼스에는 최루탄이 난무하고 백골단 특수경찰들이 교정에 난입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대학교 입학식 장에 최루탄이 날아들면서 대학 생활을 처음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그 날의 광주 비디오도 처음 보게 됐습니다. 대학생들이 몰래 숨어서 비디오를 봐야만 했습니다. 언제라도 군사 정권은 대학생들은 강제로 잡아가던 살벌한 철권통치의 시절이었습니다. 군사정권에 항의하는 대학가의 시위는 5월을 맞아 치열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의 5월, 서울의 대학가는 광주출정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1980년 그 시절에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는 몇몇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항상 조용히 책만 읽던 문학소년이었습니다. 문인을 꿈꾸던 착한 친구였습니다. 대학가에 계속 되던 시위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런 친구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1980년 당시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 항쟁이 전국적으로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친구는 1980년 5월,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그리고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친구는 광주 시내에서 의료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친구는 그 당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했습니다. 어린 중학생의 눈으로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의해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리거나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은 큰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몇 년이 지나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월이 오면서 조용하던 친구는 처음으로 시위에 나섰습니다. 전투경찰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지 못하도록 대학들을 완전 봉쇄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전투경찰들의 포위망을 뚫고 서울 도심으로 진출했습니다. 군사독재의 타도와 민주주의를 목놓아 외쳤습니다. 군사독재에 대항한 전국 대학가 민주화 항쟁의 시작입니다. 
 
산골의 어머니를 찾아온 대학생들 '배가 고파요'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낭만이 아닌 시대적 갈등 속에서 보내고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일을 조금이라도 도와드려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대학생이 된 저에게 처음으로 1980년 어느 날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첩첩산중에서 농사를 짓고 사시는 어머니가 어떻게 1980년 5월을 알고 계신지 궁금했습니다. 철저하게 5월 광주는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진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언론도 군사정권에 의해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어머니가 저녁 밥을 짓고 있는데 5~6명의 대학생들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허름한 복장에 몰골이 말이 아닌 젊은이들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배가 고픈데 밥 좀 주세요."
"젊은이들은 누구세요?"

"저희는 대학생들입니다. 광주에서 산을 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학생들."

어머니는 그 대학생들을 통해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 의해 자행됐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알게 됐던 것입니다. 대학생들은 당시 무장 군인들의 총칼로부터 살아남기위해 산등성이를 계속 걸어서 산골 마을까지 왔습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산골에 도착한 학생들은 무작정 마을 이장님 집을 찾아 밥 좀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1980년 광주, 공수부대원들이 한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한번도 광주의 5월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생이 되고나서야 처음으로 그 당시의 대학생들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그 당시 대학생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 1980년 5월이 지나갈 무렵에 큰집의 다락방에 전남대에 다니던 친척 형이 숨어지내야 했는지, 친구는 그 당시 무엇을 목격했고 왜 눈물을 흘리는지 과거의 역사가 하나씩 조각이 맞추어지면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이미 30년이 지난 광주의 그 날 이야기로 제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치열한 1980년대 중반의 대학 시절을 보냈고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민주화를 쟁취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와 아이들과 평범하게 살아가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직장인입니다. 다시 5월 그 날이 오면, 지난 1980년 그 날에 대한 세가지 기억들이 오버랩되어 지나갑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5월 그 날의 역사입니다. 아직도 그 역사는 현재 진행행인지 모를 일입니다.

[참고 글]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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