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8.28 대학생 전방입소 거부, 연병장서 시위 그 후... by 진리 탐구 탐진강 (54)
  2. 2009.08.23 김대중 맏아들 김홍일, 눈물의 장례식 감동 by 진리 탐구 탐진강 (41)
  3. 2009.06.03 서울대 교수들 민주주의 요구 시국선언 전문과 1987년 6월 항쟁 by 진리 탐구 탐진강 (13)
  4. 2009.05.18 5.18 광주항쟁, 어머니와 친구의 그 날... by 진리 탐구 탐진강 (100)


1980년대 대학가는 매일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던 시절입니다. 당시는 공포의 군사독재 정권 시대였습니다.

대학생이 된 이후 그들은 엄청난 갈등을 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배웠던 사실들이 엄청나게 달랐던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알면서 부조리와 불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정의감이 불타오르던 시기였습니다.


대학가 시위에는 무차별 최루탄 난사와 백골단의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전투경찰과 달리 백골단은 하얀 헬맷을 쓰고 몽둥이를 들고 가장 앞으로 뛰어나와 공격을 했기에 백골단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최루탄이아 백골단 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일 잡혀가면 엄청난 구타와 폭력이  행해졌던 시절임을 생각하며 겁없던 젊은 대학생들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은 당시 1학년 때 문무대에 입소해 군사훈련을 받았고, 2학년 때는 최전방 부대에서 전방 입소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군사독재 시절의 군사교육에 대한 거부감이 컸습니다. 1986년에는 서울대 학생이던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민주주의 쟁취 및 전방입소 거부를 외치며 분신 자살을 하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당시 폭압적 정권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대학생들의 전방입소를 강제화했습니다. 거부하면 강제로 입대를 시켰고 교련과목 학점이 주어지지 않았고 군복무 단축 혜택도 없었습니다. 

전경들이 대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있고 뒤에는 하얀 헬맷을 쓴 백골단이 서 있다.

그 다음 해인 1987년은 역사적인 민주화 항쟁이 전국 대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이 대거 참여해 일어난 해입니다. 그런데 그 해에도 대학생들의 전방입소 거부 움직임은 계속 벌어졌습니다. 입소가 몇일간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방 입소를 하면서도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고 반독재 구호가 난무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도 교내 운동장에서부터 반독재 구호와 함께 시작된 시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학생들은 태운 버스가 최전방 군부대의 연방장에 멈췄습니다. 완전 무장 군인들이 연병장에 내린 대학생들을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사단장이 대학생들이 나와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연병장에서도 연좌농성을 하면서 반독재 구호를 외쳤고 민중 가요를 다 함께 부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군사독재라는 이유로 사단장과의 악수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두려움을 모르는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군대에서 그것은 순진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내 군인들과 조교들의 폭력과 얼차려가 시작됐습니다. 군대에서 반항은 가차없는 폭력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유와 진리를 추구한다는 상아탑은 아니었던 시절이었고 군대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고분고분해질 수 밖에 없었던 셈입니다. 기선을 제압한 조교가 크게 외쳤습니다.
"여기가 어딘 줄 아나?"
"...(침묵)..."

"여긴 그 악명높은 삼청교육대다. 어디에도 도망갈 곳이 없다. 도망가면 사살이다."
"...(허걱)..."

대학생들은 놀랐습니다. 삼청교육대라면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무력으로 장악한 후 사회정화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불법 군대 입소시켜 무자비한 폭력과 훈련을 시켰던 곳입니다. 인권은 전혀 없던 곳이었습니다. 가장 악명높은 강원도 최전방의 삼청교육대가 바로 거기 였습니다.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인 강원도 양구의 백두산부대였습니다. 기가 눌린 대학생들은 온통 까마득한 산으로 둘러싸인 연병장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삼청교육대 시절의 훈련방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훈련이었습니다. 

인권이 말살된 시절의 삼청교육대 훈련은 무자비했다

실제 소위 휴전선 철책에서 야간 근무도 이루어졌고,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GP에도 들어가야 했습니다. 4월의 강원도 산악은 너무 추었습니다. 실제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군사적 대결의 분위기에서 대학생들에게 극도의 긴장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난생 처음 최전방에서 훈련받는 대학생들은 가족들과 친구들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나이의 군인들과 대학생들이 같은 내무반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해야하는 암울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로서 공감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깊은 산 속에서 자유를 잃었지만 결국은 다가 올 희망과 미래였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런 전방입소 훈련이 끝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지긋지긋한 강원도 양구의 전방입소가 끝나고 친구들에게 한마디했습니다. "강원도 양구를 향해 오줌도 누지 않겠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내 5월이 오고 6월이 다가왔습니다. 5월은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달이라 대학가는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해 6월은 전국에서 들불처럼 민주화항쟁이 일어났습니다. 대학생들을 필두로 시민들이 대거 동참했습니다. 군대라는 특수성을 이용해 장기 군사정권을 획책했던 독재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전방입소 군사훈련이 결국 대학생들에게 아무런 특효약이 되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 다음 해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이제 군대도 많이 좋아졌겠지 하는 기대도 했습니다. 처음 입대해 준비하는 곳은 춘천 102보충대였습니다. 하필이면 강원도 춘천이란 말인가. 그 후 실제 훈련을 받는 부대가 배치됐는데 강원도 양구 백두산부대였습니다. 이런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춘천 소양호를 건너 배를 타고 더블백을 물고 산을 넘어 백두산부대에 도착했습니다. 조교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얼차려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전 해 대학생 전방입소에서 받았던 그 연병장이었습니다. 이미 기선을 제압한 조교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OO대학 출신 손 들어! 어서!"

저는 손을 들었습니다. 다른 몇 명도 손을 들었습니다. 다시 조교의 비장한 한 마디가 들렸습니다.
"너희들은 죽었다고 복창한다. 작년 여기 연병장에서 기억나는가? 앞으로 튀어 나와!" 

삼청교육대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군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으로 대상자들을 검거하기 위한 군경 합동작전의 명칭이 '삼청작전'이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국보위는 1981년 1월까지 4차에 걸쳐 6만 755명을 불법으로 강제 체포했습니다. 피검거자들은 보안사령부를 비롯한 심사위원회에서 A B C D 4등급으로 분류되어 A급 3,252명은 군법회의 회부되었고, B급과 C급 3만 9,786명은 각각 4주교육 후 6개월간 노역과 2주의 교육 후 풀려나야 했습니다.

정통성이 없던 군사정권이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했지만 삼청교육 입소자들 가운데는 반체제 인사를 비롯해 억울하게 검거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의 4주간 교육은 군부대 연병장 둘레에 헌병을 배치하고 엄중한 총기 무장 감시 속에서 무차별 구타와 폭력이 자행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현재 밝혀진 것만으로도, 당시 삼청교육대에 끌려 가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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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대중 전(前) 대통령의 영결식과 운구 의식 그리고 안장식이 국장으로 거행됐습니다. 장엄하고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장례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눈물나는 장면도 많았습니다. 

특히 맏아들인 장남 김홍일 전 국회의원의 모습은 감동의 눈물을 심어주었습니다. 김홍일은 파킨슨병으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비록 몸이 불편하더라도 장남으로서 아버지를 위한 책임감과 의지의 발로일 듯 합니다.

사실 김홍일은 아버지의 서거 이후 극도로 쇠약해졌기 때문에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 몸 상태가 좋지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김홍일 전 의원은 의사가 극구 만류할 정도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김홍일은 영결식에 참석했습니다.

심각한 몸상태에도 초인적 정신력으로 안장식까지 맏아들 책임감 

김홍일은 영결식 참석 후 몸 상태가 더 안좋아졌습니다. 30도를 웃도는 햇볕과 무더위 속에서 오랜 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파킨슨병을 앓고있는 김홍일에게 무척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김홍일은 심각한 몸상태로 인해 안장식은 불참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버지 김대중의 마지막 가는 길을 끝까지 지킨 맏아들 김홍일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김홍일은 안장식에도 나타났습니다. 초인적인 의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김홍일은 안장식에서 직접 헌화는 물론 허토 의식에도 참여했습니다. 안장된 관 위에 삽으로 흙으로 덮는 허토 의식까지 참여할 정도로 아버지를 향한 맏아들의 심정은 눈물겨운 장면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영면할 수 있도록 아픈 몸을 이끌고 초인적 정신력을 발휘한 감동의 장면이었습니다.

김홍일은 영결식과 안장식에서 심지어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일어서 헌화를 하고픈 장면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지만 일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런 장남 김홍일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감동과 함께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최근 더욱 수척해진 몸으로 병마에 시달리는 김홍일은 맏아들 노릇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신촌세브란스 병원의 의료진도 만류할 정도였지만 김홍일은 평생 한이 될 수있는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던 것입니다. 아버지 김대중을 위한 아들 김홍일의 모습은 그래서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는 김홍일의 과거와 현재 모습이 안타깝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기 이후 김홍일의 달라진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과거 건장한 풍채는 사라지고 삐쩍 마른 몸과 불편한 얼굴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김홍일은 몸상태가 안좋아 병원에 입원 중인 상황에서도 입원한 아버지 김대중을 위해 3번이나 병문안을 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김홍일은 아버지의 임종 순간에도 "아버지"를 3번 부르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김홍일은 말을 못할 정도였지만 아버지를 향한 모습은 달랐던 것입니다.

고문 후유증 파킨슨병 얻었지만 끝까지 아버지 지킨 아들의 감동

김홍일은 지난 1981년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이 발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당시 아버지인 김대중은 억울한 내란음모사건의 누명을 쓰고 사형 구형이 처해지고 아들인 김홍일은 군사정권에 의한 불법 구금과 고문을 받아 허리와 등 그리고 신경 계통을 심하게 다쳤다고 합니다. 지난  군사정권 시절에 얼마나 야만적인 폭력 행태가 벌어졌는지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김홍일은 현재 파킨슨병으로 신경세포가 점차 소실되어 몸이 마비되고 떨리는 현상으로 휠체어에 의지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이동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장 안타까워 했다는 장남 김홍일. 김대중은 큰 아들이 자신을 돕다가 군사정권의 모진 고문과 탄압으로 몸쓸 병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언제나 걱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김홍일은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장남으로서 의젓하게 지켰습니다. 비록 불편한 몸이지만 결코 병원에만 머물 수 없었던 김홍일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아버지 김대중을 지킨 맏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김홍일에게 많은 국민들은 뜨거운 감동과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생전에 아꼈다는 손자 김종대 군이 할아버지 영정을 들고 있다
김대중과 아들들 그리고 고난의 가족사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3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이 그들입니다. 김대중은 차용애 여사와 사이에 홍일과 홍업을 낳았으나 일찍이 사별하고 이희호 여사를 만나 홍걸을 낳았습니다. 아버지인 김대중이 정치적 탄압과 고난을 당할 때 아들들도 마찬가지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어머니인 이희호 여사는 역경 속에서도 남편이자 동지인 김대중을 뒷바라지하고 혼자서 아들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김홍일은 아무 영문도 모른체 대학원 1학년 시절에 박정희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에 끌려 가서 모진 고문과 온갖 시국사건 누명과 핍박 속에서 고초를 당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도 신군부에 납치돼 엄청난 고문을 당한 이후 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게 됩니다.

김홍업과 김홍걸도 어린 시절을 힘겹게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장성한 후에도 억센 풍파와 맞서야 하는 시대적 아픔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집안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던 어버지 김대중에게는 효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희호 여사가 남편과 아들들을 지키며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


김대중과 이희호 여사 그리고 세 아들들(좌), 병환 중에도 안장식에 참여해 허토하는 장남 김홍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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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년전 군사독재 정권 시절, 1987년의 봄은 교수들을 비롯한 지식인 집단에서 시국선언의 형태로 민주주의 요구가 못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서울대를 비롯해 고려대 연세대 등 전국 교수들이 민주화 요구를 시국선언으로 발표합니다. 이 시국선언문들은 곧바로 각 대학의 대자보로 옮겨졌습니다. 대학생들은 "교수님. 힘네세요" 라고 응원하면서 민주주의의 열망을 반영했습니다.

특히 군사정권의 고문에 의한 박종철 학생의 죽음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그 진실이 폭로되면서 종교계까지 들불처럼 불타올랐습니다. 그리고 이한열 학생이 전경들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민주주의 열망은 더욱 가열차게 불타오릅니다. 전국 대학생들은 1987년 6월 10일을 전후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국 곳곳에서 전개하고 시민들이 학생들을 지지하면서 결국 군사독재 정권에 6. 29 선언을 통해 항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9년 6월 오늘, 서울대 교수 124명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우리가 한 눈을 파는 사이 독재의 그늘은 드리워지고, 그렇게 역사는 반복되는가 봅니다.

이한열 열사가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후 6월 항쟁의 도화선인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서울대 교수들의 민주주의 요구 시국선언 전문]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는 국민적 화합을 위해 민주주의의 큰 틀을 지켜나가야 한다


우리 국민은 누구나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큰 아픔을 겪고 있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 길게 늘어선 조문 행렬은 단지 애도와 추모의 물결만은 아니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착잡하기 이를 길 없는 심경으로 나라의 앞날을 가슴속 깊이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서 각계각층의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전직 대통령의 국민장을 치러낸 것을 계기로 우리 모두는 새로운 길을 열고 있으며 또 열어야만 한다.

지난 수십 년간 온갖 희생을 치러가며 이루어낸 민주주의가 어려움에 빠진 현 시국에 대해 우리들은 깊이 염려하고 있다. 작년 '촛불집회'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소환장이 남발되었고 온라인상의 활발한 의견교환과 여론수렴이 가로막혔으며, 이미 개정이 예고된 집회 관련 법안들의 독소조항도 시민사회의 강한 비판에 부딪히고 있다.

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 또한 훼손되었다. 주요 방송사가 바람직하지 못한 갈등을 겪는가 하면, 국회에서 폭력사태까지 초래한 미디어 관련 법안들은 원만한 민주적 논의절차를 거쳤다고 말하기 어렵다. 여야의 동의로 지난 3월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가 국민적 합의 도출을 위해 출범했지만, 여당 측 위원들이 회의 공개나 국민여론 수렴을 반대함으로써 위원회는 표류하고 있다. 국민 다수가 언론법 처리 강행 방침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를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런 흐름은 민주주의의 기반인 언론의 자유를 허물어뜨리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뿐 아니다. 현직 대법관의 '촛불집회' 재판 개입 사건에서 보듯이, 현 정권은 사법부의 권위와 독립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에 상처를 입혔으며, 그에 따라 재판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전국 법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민여론에 따라 일단 포기했던 '한반도 대운하'는 '4대강 살리기'로 탈바꿈하여 되살아나고 있으며, 지난 십여 년 동안 대북정책이 거둔 성과도 큰 위험에 처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목숨을 끊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할 때 집회의 강제 해산과 노동자 대량연행과 구속으로 맞서는 일 또한 구시대적 대처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정치노선의 차이나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 존중과 민주적 원칙의 실천이다. 모든 국민의 삶을 넉넉히 포용하는 열린 정치를 구현하는 정부의 노력이 참으로 절실한 시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직 대통령 관련 검찰 수사 과정 또한 이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검찰은 국가원수를 지낸 이를 소환조사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3주가 지나도록 사건 처리 방침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추가 비리 의혹을 언론에 흘림으로써 전직 대통령과 가족에게 견디기 힘든 인격적 모독을 집요하게 가했다. 이는 엄정한 공직자 비리 수사라고 하기 곤란하며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되돌아보면 지난 1월 용산 철거민 농성에 대한 무모한 진압으로 빚어진 참사는 올해 벌어질 갖가지 퇴행적 사건을 예고했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으며, 검찰이 수사기록 중 핵심적인 대목의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재판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월 22일 서울 서부지법 민사12부가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이 "세입자의 재산권, 주거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한다"며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사실에 주목하면서 현 정부의 근본적인 자기 성찰을 기대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가 전직 대통령에 대한 범국민적 애도 속에 주어진 국민적 화해의 소중한 기회를 잘 살리고 국민의 뜻에 부응하기를 우리는 간절히 희망하며, 다음의 구체적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1.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다. 이 대통령이 스스로 나서서 국민 각계각층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정치를 선언해야 한다. 더불어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다른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를 진심으로 국정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1. 현 정부는 민주사회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1. 현 정부는 전직 대통령 관련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하며, 정적이나 사회적 약자에게만 엄격한 검찰 수사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1. 현 정부는 용산 참사의 피해자에 대해 국민적 화합에 걸맞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경제 위기 하에서 더 큰 어려움에 처한 비정규직 노동자 등 소외계층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현 집권층이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에서 타오르고 있는 민주적 요구에 대해 진지하고 성의있게 대응함으로써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국민적 화합과 연대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큰 길로 나아가는 전환점으로 삼을 것을 간곡히 바란다.

2009. 6. 3.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서울대학교 교수 일동

서명자 명단 (2009년 6월 3일)
강우성 강진호 계승혁 고철환 구명철 구인회 권태억 김길중 김도균 김빛내리 김상종 김세균 김영민 김용익 김월회 김유용 김인걸 김장주 김재법 김종욱 김종일 김진수 김춘수 김현균 김혜란 김효명 남동신 류재명 모경환 문중양 민은경 박경숙 박동열 박명규 박배균 박태균 박현섭 박흥식 박희병 방민호 배은경 배철현 백도명 변현태 봉준수 성노현 손영주 송석윤 신광현 신종호 심봉섭 안광석 안삼환 양동휴 양현아 오명석 오석배 오순희 오용록 우희종 유용태 윤순진 윤여창 윤여탁 윤제용 이강재 이건수 이경우 이병민 이성중 이성헌 이애주 이인호 이일하 이창숙 이철범 이현숙 이형목 임호준 임홍배 장덕진 장승일 전종익 전태원 정근식 정용욱 정원규 정향진 조국 조영남 조현설 조형택 조흥식 최갑수 최권행 최무영 최영찬 최윤영 한상진 한숭희 한영혜 한인섭 한정숙 허원기 홍기선 홍성욱 홍승권 홍재성 홍진호 황상익

김명환(인문대) 김민수(미대) 김정욱(환경대학원) 김현진(인문대) 이건우(인문대) 이근(국제대학원) 이동수(환경대학원) 이상훈(사회대) 이용환(농생대) 이준호(자연대) 장진성(인문대) 전경수(사회대) 최병선(사회대) 최진영(사회대) 이상 124명

가나다 순 정리 (동명이인은 마지막에 나열하고 단과대 표시)

1987년 명동성당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시위 중인 대학생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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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30년이 지났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그 날이 다시 오면. 그 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저는 당시 큰집에서 기거하며 일찍이 서울 유학을 했었습니다.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에 총격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이웃 아줌마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하고 스스로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장갑차와 군인들의 서울 입성,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저는 중학교를 가려면 늘 청와대 앞 길을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그 길에는 장갑차가 보였습니다. 완전 무장한 군인들도 보였습니다. 5월도 그랬습니다. 당시는 왜 군인들과 장잡차가 청와대 앞에 그토록 많이 지키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인 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1979년 전두환은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1980년 체육관에서 대통령에 오른다]

오월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큰집에 전남대에 다니던 친척 형이 올라왔습니다. 그 후부터는 그 형은 도무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큰집의 다락방에 늘 숨어지냈던 것입니다. 언제 닥칠지 모를 군인들의 검거를 피해 다락방에 하루종일 숨어있었습니다. 저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왜 그랬을까? 당시는 광주 지역 대학생이면 모두 잡아갔던 시절이었습니다.

문학소년이었던 착한 친구가 5월이 오자 눈물을 흘렸다

1980년대 중반, 저는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전두환 군사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되고서야 1980년 5월 광주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가에는 소위 '짭새(비밀 경찰)'들이 출몰하던 시기였습니다. 대학생들은 군사 독재에 항거해 독재와 맞서 싸웠습니다. 항상 대학 캠퍼스에는 최루탄이 난무하고 백골단 특수경찰들이 교정에 난입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대학교 입학식 장에 최루탄이 날아들면서 대학 생활을 처음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그 날의 광주 비디오도 처음 보게 됐습니다. 대학생들이 몰래 숨어서 비디오를 봐야만 했습니다. 언제라도 군사 정권은 대학생들은 강제로 잡아가던 살벌한 철권통치의 시절이었습니다. 군사정권에 항의하는 대학가의 시위는 5월을 맞아 치열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의 5월, 서울의 대학가는 광주출정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1980년 그 시절에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는 몇몇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항상 조용히 책만 읽던 문학소년이었습니다. 문인을 꿈꾸던 착한 친구였습니다. 대학가에 계속 되던 시위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런 친구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1980년 당시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 항쟁이 전국적으로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친구는 1980년 5월,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그리고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친구는 광주 시내에서 의료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친구는 그 당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했습니다. 어린 중학생의 눈으로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의해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리거나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은 큰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몇 년이 지나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월이 오면서 조용하던 친구는 처음으로 시위에 나섰습니다. 전투경찰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지 못하도록 대학들을 완전 봉쇄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전투경찰들의 포위망을 뚫고 서울 도심으로 진출했습니다. 군사독재의 타도와 민주주의를 목놓아 외쳤습니다. 군사독재에 대항한 전국 대학가 민주화 항쟁의 시작입니다. 
 
산골의 어머니를 찾아온 대학생들 '배가 고파요'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낭만이 아닌 시대적 갈등 속에서 보내고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일을 조금이라도 도와드려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대학생이 된 저에게 처음으로 1980년 어느 날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첩첩산중에서 농사를 짓고 사시는 어머니가 어떻게 1980년 5월을 알고 계신지 궁금했습니다. 철저하게 5월 광주는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진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언론도 군사정권에 의해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어머니가 저녁 밥을 짓고 있는데 5~6명의 대학생들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허름한 복장에 몰골이 말이 아닌 젊은이들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배가 고픈데 밥 좀 주세요."
"젊은이들은 누구세요?"

"저희는 대학생들입니다. 광주에서 산을 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학생들."

어머니는 그 대학생들을 통해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 의해 자행됐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알게 됐던 것입니다. 대학생들은 당시 무장 군인들의 총칼로부터 살아남기위해 산등성이를 계속 걸어서 산골 마을까지 왔습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산골에 도착한 학생들은 무작정 마을 이장님 집을 찾아 밥 좀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1980년 광주, 공수부대원들이 한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한번도 광주의 5월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생이 되고나서야 처음으로 그 당시의 대학생들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그 당시 대학생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 1980년 5월이 지나갈 무렵에 큰집의 다락방에 전남대에 다니던 친척 형이 숨어지내야 했는지, 친구는 그 당시 무엇을 목격했고 왜 눈물을 흘리는지 과거의 역사가 하나씩 조각이 맞추어지면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이미 30년이 지난 광주의 그 날 이야기로 제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치열한 1980년대 중반의 대학 시절을 보냈고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민주화를 쟁취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와 아이들과 평범하게 살아가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직장인입니다. 다시 5월 그 날이 오면, 지난 1980년 그 날에 대한 세가지 기억들이 오버랩되어 지나갑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5월 그 날의 역사입니다. 아직도 그 역사는 현재 진행행인지 모를 일입니다.

[참고 글]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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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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