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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25 이종범 나지완의 눈물, 기아 V10 감동이었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38)
  2. 2009.06.06 '바람의 아들' 이종범, 프로야구 신화였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13)


기아 타이거즈가 SK 와이번즈를 꺾고 우승했습니다. 나지완의 9회말 역전 끝내기 홈런으로 6대 5의 짜릿한 승리였습니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사상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기아와 SK는 한국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누가 우승하느냐의 승패를 떠나 프로야구 자체를 즐긴다면 그야말로 즐거운 승부였습니다.
 
스포츠가 아름다운 것은 각본없는 드라마나 다름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거기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이번 한국시리즈의 감동의 남자의 눈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승자도 울었고 패자도 울었습니다. 승자는 감격과 환희의 눈물이었고 패자는 아쉬움과 아픔의 눈물이었습니다.

지난 1982년 처음 탄생한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2009년 한국시리즈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역사가 될 것 같습니다. 그 감동의 현장에서 만나는 남자들의 눈물과 감동을 살펴보겠습니다.

야구천재 '종범신' 이종범의 눈물은 가을의 전설이었다

이종범은 프로야구사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사실 이종범은 작년 2008년을 끝으로 은퇴하라는 주변의 조언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종범은 그라운드에서 실력으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이종범의 자존심은 프로야구 역사의 명가 '해태 타이거즈'의 부활과 일맥상통합니다.
 
이종범이 타이거즈 10회 우승의 감격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장면

비록 기아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했지만 이종범은 호랑이 군단의 적통으로 자존심이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는 무려 9번의 한국 프로야구 우승에 빛나는 한국 프로야구의 명가였습니다. 이종범은 마지막 남은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선수였습니다. 나이도 가장 많은 최고참이었습니다.

야구천재 이종범도 나이와 세월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주전 경쟁에서 후배들에게 밀려 벤치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라운드에서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우승을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이종범은 묵묵히 후배들을 격려하며 12년 만의 우승을 위해 솔선수범했습니다.


기아 타이거즈 후배들은 최고참 영웅 이종범을 헹가레치며 예를 갖췄다

그리고 결국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의 환희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이종범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종범의 눈물이 값진 이유는 바로 아무도 가지않는 길에서 홀로 도전해 인간 승리를 이뤄 낸 감동의 드라마였기 때문입니다. 왜 은퇴하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놀라운 투지와 도전정신이 감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종범은 1990년대 전성기 시절 수비 능력이 가장 뛰어난 유격수이면서도 타격왕-최다안타-도루왕 등을 모두 차지할 정도였고 심지어 홈런왕 경쟁에서도 빠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1997년 이종범은 30홈런-60도루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투수는 선동렬, 타자는 이승엽, 그러나 야구는 이종범'이란 표현으로 야구천재 이종범의 진가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500도루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종범의 눈물은 가을의 전설이었습니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눈물이었습니다. 후배 선수들과 부둥켜 안고 흘리는 이종범의 눈물은 한국 프로야구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저에게는 무엇보다 가슴찡한 장면이었습니다. 불굴의 투지로 포기하지않고 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만든 이종범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10회 도전 10회 우승, 한국 프로야구의 명가 타이거즈의 신화

1982년 탄생한 한국 프로야구 역사는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0년대 최강의 전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던 삼성 라이온즈와 다른 팀들을 압도적으로 제압하고 거의 대부분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회 연속 우승이란 대기록도 세웠습니다. 야구의 제갈공명이란 평가를 받고있는 김응용 감독을 비롯해 투수와 타자에서 걸출한 스타들이 배출했습니다.

투수에는 '국보급 투수'로 불리는 선동렬을 비롯해 김정수, 차동철, 문희수 등이 활약했고 타자에는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 김준환 등 김씨들이 맹활약했습니다. 잠시 침체의 늪에 빠졌던 해태는 1990년대 중반 이종범, 이대진, 한대화 등의 활약으로 1996년과 1997년 연속 우승을 했던 것입니다.

                                조범현 감독이 스승인 김성근 감독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해태 타이거즈는 무려 9번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한국시리즈 9번 참가, 9번 모두 우승을 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시리즈에 나가면 절대로 패배란 없었습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팀이었습니다.
 
그러나, 해태는 IMF 위기로 인해 모기업이 퇴출 위기에 빠지고, 결국 기아가 2001년 타이거즈를 그대로 인수하게 됐습니다. 해태에서 기아로 모기업이 바뀌면서 우여곡절을 겪었던 타이거즈는 약체팀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그 이전에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팔려가고 선동열, 이종범 등 주력 선수들도 일본 프로야구나 다른 팀들로 이적하고 없었습니다.

기아가 인수한 이후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활약하던 이종범이 복귀하고 다시 정비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빨빠진 호랑이 신세였던 타이거즈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종범은 한국 야구 대표팀 선수로도 항상 많은 활약을 펼쳤다

이종범은 마지막 투혼과 자존심을 2009년 시즌에 걸었습니다. 후배들을 이끌며 야구 명가 타이거즈의 부활을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09년 한국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 이래로 10번째 우승입니다. 1997년 우승 이후 12만의 우승입니다. 그리고 10번 도전, 10번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것입니다. 한국 시리즈에 나서면 단 한번도 우승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기아의 첫 우승이 아니냐는 의견을 말하기도 합니다. 10승, 즉 V10이 아니지 않느냐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명백하게 기아의 우승을 V10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아가 해태 타이거즈를 그대로 인수하는 양수도 방식으로 창단했기 때문입니다.완전히 새로 창단한 것이 아니라 해태를 그대로 인수한 형태라는 것입니다.

                       메이저리그 출신 최희섭도 고난의 길을 회상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기아의 V10은 단지 10회 우승이라는 자체의 의미도 큽니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은 프로야구 출범 초기부터 선수층도 얇고 약체의 팀으로 평가받던 해태가 불굴의 투지와 강력한 팀워크를 발휘해 우승의 고지에 오른 과정입니다. 거기에는 김응용 감독에 이은 조범현 감독의 리더십도 작용했지만 선동열, 이종범, 김성한, 이호성 등 당시 선수들의 리더십도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2009년 한국 시리즈, 진한 감동을 준 남자의 눈물과 우정

나지완은 마지막 끝내기 홈런을 친 후 덕아웃의 선수들에게 먼저 얼굴을 향했습니다.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은 일제히 뛰어나와 감격의 물세례를 했습니다. 관중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나지완은 눈물을 흘리며 그라운드를 돌아 홈으로 들어왔습니다. 1982년 원년 우승을 한 OB(두산)이 김유동의 끝내기 홈런으로 감격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나지완은 동료들의 샴페인 세례 속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최희섭, 김상엽의 그늘에 가려있던 나지완은 시즌 동안 2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팀내 3위의 거포였었습니다. 나지완은 룸메이트로 친형처럼 대해주었던 최희섭에게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계속 흘렸습니다. 환희와 감격의 눈물일 것입니다. 나지완은 기자단 투표에서 MVP로 선정된 후 한국시리즈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투수 로페즈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훈훈함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용규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용규가 나지완과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흘리는 눈물은 무엇보다 감동적이었습니다. 우승에 대한 관중들에게 대한 감사의 인사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최고참이자 정신적 지주인 이종범의 눈물은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그 동안 모진 아픔과 고독 속에서 역경과 도전을 이겨내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낸 승리의 결정판이었습니다.


이용규가 이종범과 굳게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채병용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있다

승자도 울었지만 패자도 울었습니다. SK의 마지막 투수였던 채병용은 마운드에서 내려오면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패자였지만 채병용도 최선을 다한 한국 시리즈였습니다. 또한 감동적인 장면은 기아의 조범현 감독이 스승인 김성근 감독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인 조범현 감독의 모습에서 진정한 스포츠 정신과 사제간의 예의와 우정을 보는 듯 했습니다. 가슴이 찡했습니다.

그렇게 2009년 가을의 전설은 남자의 눈물 속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환희와 눈물과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번 2009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승자도 패자도 그리고 관중도 프로야구 팬들도 모두 가을의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남자의 눈물이 뜨겁게 가슴을 울리는 명승부였습니다.

기아 타이거즈가 받을 한국시리즈 우승 상금은?

2009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펼쳐 관중 수입도 대단합니다. 총 16경기, 41만262명의 관중이 운집한 '2009 CJ마구마구 프로야구'의 포스트 시즌 수익금은 모두 70억 4천여 만원의 수입을 올렸다고 합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총수익금 중 약 40%를 운영비로 사용하고, 나머지 42억 3천여 만원을 1~4위팀에 배당금으로 지급하게 됩니다. 올해 페넌트레이스 우승팀인 기아(KIA) 타이거즈는 그 중에서 20%인 8억 4천여 만원을 받은데 이어 한국시리즈 우승팀 몫으로 16억 9천여 만원을 추가로 받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기아 타이거즈의 총상금은 역대 최고액인 25억 3천여 만원에 이른다는 계산입니다. 이어 SK 와이번스는 한국시리즈 준우승 상금으로 8억 4천여 만원, 3위와 4위인 두산 베어스와 롯데 자이언츠는 각각 5억 7천여 만원과, 3억 3천여 만원을 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기아 타이거즈는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상금에서도 대박을 친 셈입니다. 승리의 여신은 기아에게 마지막 미소를 보여주었는데 상금도 엄청난 차이가 한 끝 차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한국시리즈 7차전 옥의 티, 심판의 오심
 
기아가 우승해서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지만 심판의 오심은 문제인 듯 합니다. 1대 3으로 지고있던 상황에서 기아 이용규가 포수 김상훈에게 홈으로 송구한 공이 SK선수를 먼저 태그했으나 심판의 오심으로 세이프 선언이 되면서 1대 5까지 벌어지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기아는 이에 굴하지않고 9회말 역전 끝내기 홈런으로 6대 5라는 아슬아슬한 승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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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드디어 국내 프로야구 통산 500도루와 1000득점에 성공했습니다. 이종범은 '바람의 아들'을 탄생시킨 '(기아)타이거즈'의 광주 홈팬들 앞에 대기록을 선사하며 감격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프로야구의 전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제가 프로야구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프로야구에 많은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1990년대 프로야구는 최고의 국민 스포츠 시대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최고의 명문 구단은 해태 타이거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 삼성 두산 등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한 구단들에 비해 해태 타이거즈는 가난한 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종범을 비롯한 선수들에게는 최고를 향한 꿈이 있었습니다.

꿈을 향해 달리던 이종범의 근성과 도전정신, 그것은 '바람의 아들' '야구 천재' '수비의 귀재' '야구 9단' 등 수많은 별명이 그를 상징해 줍니다. 우리나라 야구 역사상 100년에 한번 나올 수 있는 유격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번에 이종범이 500도루와 1000득점을 달성한 것은 여러가지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 중 사실상 최다 도루 대기록 달성
이종범의 500 도루는 표면적으로는 히어로즈의 전준호의 500도루에 이어 두번째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따져보면 이종범이 한국 프로야구 선수로는 사실상 최다 도루의 기록을 세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종범은 국내 프로야구를 떠나 지난 1998년부터 일본 주니치에 입단해 3년 반동안 53개 도루를 성공시킨 바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 기록을 합하면 개인적으로는 이종범은 553개의 도루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이다. 국내 최다기록은 전준호가 보유하고 있는 549개이지만, 일본기록까지 더한다면 사실상 최다 기록은 이종범이 보유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의 전력 질주 모습(주니치 시절)

이종범의 이 날 기록은 프로데뷔 17년, 한국 프로야구 14시즌 만에 거둔 대기록입니다. 일본 주니치에서의 프로야구 시즌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국내 프로야구에서 더 많은 대기록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종범이 1루 주자로 진출하는 것 만으로 투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경기에서 차지하는 진가를 가늠케 합니다.

이종범은 지난 1993년 해태 타이거즈 입단과 함께 무려 73도루(2위)를 성공시켜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과 함께 첫 해부터 대도의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해인 1994년에는 타율 3할9푼3리의 기록과 함께 사실상 깨지기 힘든 84도루를 성공시켰습니다. 그 이후 이종범은 극내 프로야구에서 통산 네 차례의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한 바 있습니다. 

한편, 이 날 2번타자 겸 우익수로 선발 출전한 이종범은 6회말 1사후 선두타자로 나서 삼성 배영수를
상대로 깨끗한 좌익수 옆 안타를 날렸고, 이종범은 관중들의 " 뛰어! " 라는 함성 속에서 볼카운트 2-2에서 5구째를 던지는 순간 2루 도루를 감행해 역사적인 기록 달성에 성공했습니다. 이종범은 도루성공과 함께 자신이 예고한 대로 2루 베이스를 들어올려 자축했고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소 경기 1000득점에도 성공
이종범은 최다 도루 대기록과 함께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소 경기 1000득점의 기록도 동시에 세웠습니다. 이 날 이종범은 최희섭의 중전 적시타로 홈까지 밟아 통산 4번째이자 최소경기 1000득점도 함께 기록한 것입니다. 이종범에게는 도루 기록과 함께 기쁨이 두배가 된 셈입니다.

이종범은 1000득점은 1439경기 만에 달성한 것인데 종전 기록은 삼성의 양준혁이 보유하고 있던 1522경기였습니다. 무려 83경기나 앞당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야구에서 득점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감안해보면 이종범의 존재 가치는 빛날 수 밖에 없습니다.

1996년 WBC 한국-일본의 경기, 이종범이 결승타를 친 후 장면

이종범과 타이거즈의 한국 프로야구 9회 우승 신화
이종범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0년대 해태 타이거즈는 무시무시했습니다. 당시 해태타이거즈는 김응용 감독을 중심으로 이종범을 비롯해 스타 선수들이 즐비했습니다. 

당시 타이거즈는 초호화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한 것은 아니었지만 강력한 팀웍을 바탕으로 한 근성과 집중력이 뛰어났습니다. 신인 선수들은 타이거즈에 입단하게 되면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호랑이'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타이거즈 우승 신화를 이끌던 1990년대 선수들을 살펴보면 투수에는 선동렬 이강철 조계현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타자에는 이종범을 포함 김성한 이순철 한대화 홍현우 김봉연 김무종 등이 활약했습니다. 이들 선수들은 얇은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뭉쳐 매번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홈팬들의 열정적인 응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해태 타이거즈는 9번이나 우승을 하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결국 김응용 감독의 리더십, 선수들의 혼연일체 팀웍, 그리고 팬들의 열정적 응원 등이 삼위일체가 된 프로야구사의 신화였습니다.

이종범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살아있는 전설
이종범의 500도루 대기록은 과거 1990년대 프로야구 팬들에게도 큰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당시에는 대중 스포츠가 프로야구 이외에는 드물었기 때문에 어떤 스포츠 보다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종범을 비롯해 걸출한 프로야구 스타들이 많았습니다. 대중들은 프로야구를 보면서 웃고 울었습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프로야구 경기는 하루종일 화제의 이슈였던 시절입니다.

이미 1990년대 스타 선수들은 은퇴를 했거나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종범은 여전히 현역 선수로 멋진 경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종범은 나이가 마흔에 도달하고 있는데 젊은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가르고 있다는 점에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종범이 대망의 500도루 기록을 달성하는 장면과 팬서비스로 2루 베이스를 들고 있는 모습

특히, 이종범은 한국 프로야구를 세계 속의 프로야구로 한단계 업그레이드했습니다. 1990년대 한국 프로야구는 미국 일본 등의 프로야구에 비하면 역사도 짧고 수준도 다소 낮은 편이었습니다. 이종범은 과감하게 일본 프로야구로 진출해 후배들이 나아갈 수 있는 미래와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주니치 시절에 여러 병마와 싸우느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 진정한 프로가 가야 하는 방향을 마련해준 것입니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 박찬호가 진출하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이승엽이 과감한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종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입니다.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하기 보다는 힘들지만 어려운 길에 도전했던 이종범. 그는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에 있어 하나의 '신화'입니다. 그리고 그 신화는 계속 될 것입니다. 이종범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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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