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3.24 시골 1등→서울 40등→1등 공부방법 '집중력' 문제였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60)
  2. 2010.01.02 겨울 밤에 요강과 낮에 키가 필요했던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46)
  3. 2009.01.07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호랑이를 잡을 수 있을까? by 진리 탐구 탐진강 (2)


얼마 전, 이웃 블로거이신 따뜻한 카리스마님의 글을 읽고 뜻한 바 있어 블로그 자서전을 써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떤 이야기를 써야할지 아직 감이 잡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왕 결심했으니 용두사미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볼까 합니다.

개인의 일생을 담는 만큼 자서전 이야기가 다른 분들에게는 삶의 궤적이 달라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넉넉한 마음으로 상대방 입장에서 그 인생의 족적을 이해주는 아량과 배려를 부탁드리며 첫번째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이미 제 블로그의 글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첩첩산중 산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에 나올 만한 초가집에서 살면서 유년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전기도 없고 라디오 TV도 없었습니다. 나무로 가마솥에 밥을 짓고 그 군불로 방을 데워 살았습니다. 이쯤되면 40대 나이의 분들은 대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옛날 초가집에 살던 선조들 이야기를 검색신공으로 찾아보면 알 듯 하니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공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에게 공부하면 어머니의 영향이 가장 큽니다. 어머니는 홀로 저를 낳고 논밭을 일구며 소까지 키우며 20대를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가 병역을 기피해 서울서 수년간 도피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6살까지 '애비없는 자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홀로 저를 키우면서도 늘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동화책은 언강생심이었습니다. 구술로 어머니가 이야기해준 전래동화가 유년시절 남아있는 공부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날 공책 한권을 구해왔습니다. 그리고 '가나다라' 국문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당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아마도 7살부터 국어를 공부한 것 같습니다. 그 때 산골마을에서 초등학교 입학 전에 공부를 가르치는 가정은 없었습니다. 산간오지 산골 마을의 당시 부모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졸업도 못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도 노동력의 대상이지 공부를 가르칠 엄두도 못했던 시절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저도 다른 산골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흘러간 유행가 가사처럼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고사리 손에 낫을 들고 땔감 나무를 베고 소에게 먹일 소꼴을 베야 했습니다. 아이 때부터 혼자 고생하는 어머니를 돕는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되면 호롱불 밑에서 어머니에게 한글을 배웠습니다. 한글을 익히며 구구단 산수를 배웠습니다.

저는 9살이 되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왜 9살에 학교를 갔냐구요? 당시 산골마을에서는 모두 9살에 학교에 갔습니다. 큰 비가 내리면 산골 계곡에 순식간에 물이 불어 나이 어린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늦게 학교를 보냈던 이유입니다. 자동차도 없던 신작로, 늘 한적한 길을 따라 2Km 이상을 까만 고무신 신은 아이들이 걸어서 그렇게 학교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한 후 한글을 쓸 줄 아는 학생은 저 밖에 없었습니다. 유치원은 물론 어떤 공부시설도 없었으니 입학하고 처음 '가나다라'를 배웠던 시골 학교였습니다. 전교생 100명도 안되는 시골학교에서 줄곧 1등이었습니다. 한개 학년에 하나의 학급만 있었으니 급장(반장)이었습니다. 그러다 2학년에 되고 2학기에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큰아버지가 적극 서울 유학을 권했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서울에 온 후 시내 종로의 교동초등학교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서울은 역시 달랐습니다. 첫 시험을 치렀는데 반에서 40등 정도였습니다. 당시 한 반이 60명 가량이었으니 하위권 성적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사귄 친구들도 중하위권 친구들이었습니다. 저는 30등과 40등 사이를 계속 오갔습니다. 당시 큰어머니는 종로에서 세탁소를 운영하셨습니다. 세탁소에 딸린 방에서 기거하던 시절이라 공부할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4학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집이 당시 서울의 달동네 서대문 홍은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잠시 버스를 타고 교동초등학교를 다녔으나 갑자기 학군이 생겨 홍은동의 홍제초등학교로 전학을 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큰집은 단칸방 신세였습니다. 친구도 없고 전학을 하니 고향의 어머니 생각만 가득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혼자서 책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역사 책을 좋아했습니다. 당시 과외가 유행이었지만 과외를 받을 처지가 아닐 정도로 궁핍하고 가난했습니다.

다음 해 5학년이 됐습니다. 어느 날 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 아이가 생일 파티에 남자 여자 아이들을 초청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초대했습니다. 저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화가 나서 그 아이의 집에 쳐들어 갔습니다. 문전박대당했고 저희들의 항의로 생일파티는 난장판이 났습니다. 서울에 유학와서 첫번째 커다란 일탈이었습니다. 여자 아이 엄마와 우등생 친구들에게 심한 욕설을 들었습니다.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뭐하는 짓이야"
"거지같은 양아치 **들아, 꺼져!"

그 날 이후 저는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 공부 잘하는 것들아, 한번 해보자' 마음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서 교과서를 외웠습니다. 큰 소리로 책을 읽었습니다. 5학년 중간고사는 여전히 30등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실망스런 등수였습니다. 그러나 좌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동안 공부를 너무 안했기에 기초가 부족했습니다.

그 해 겨울 기말고사에서 드디어 20등대에 처음 진입했습니다. 한번 공부 습관이 생기다보니 재미를 느끼게 시작했습니다. 5학년 기말고사에는 10등대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친구들도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큰아버지 몰래 가정통신문 성적표에 도장을 찍어서 담임에게 제출할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반에서 늘 1등을 하던 여자 아이 K가 3등으로 밀려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속으로 좋아하던 아이였습니다. 크리스마스에 그 아이에게 카드를 쓴 후 책상서랍에 몰래 넣었습니다. 수줍던 시골 소년으로서는 엄청난 용기였습니다.
"OO아, 너무 속상해 하지마. 너는 다음에 1등할 수 있을 거야. 크리스마스 잘 보내."



그 후 그 여자 아이 K에게 카드를 받았습니다.
"고마워. 너도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 너 공부 못하는 줄 알았는데 등수 많이 올랐더라. 열심히 해."

사실 예상하지 못한 K의 크리스마스 카드 답장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받아본 여자의 크리스마스 카드였습니다. 당시 카드가 보편화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K의 카드는 설레게 했습니다. '그래. 더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속으로 또 다짐했습니다.

다시 6학년에 올라갔습니다. K는 다행스럽게 같은 반이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10등 안에 처음 진입했습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 첫 성적표를 들고 낙담하고 좌절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놀랐습니다. 반에서 6등이었습니다. 장족의 발전이었습니다. K는 1등이었습니다. 속으로 내 일 처럼 기뻤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렀습니다.

미처 상상하지 못한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적은 제가 1등이었습니다. 도저히 서울 학생들과 경쟁해 1등은 할 수 없다고 아예 포기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책상서랍 안쪽에 누군가 보낸 편지가 있었습니다. 짝사랑하던 K였습니다.
"탐진강, 1등 축하해. 너 정말 대단하구나. 나도 기뻐. 곧 중학생이 되는구나. 중학교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자." 

시골 초등학교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후 종로의 교동초등학교와 홍은동 홍제초등학교에 이르는 초등학생 시절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K와는 그 후 어떻게 됐냐구요? 과연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상위권을 유지했을까요? 아쉽지만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공부 잘하는 비결
-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하는 습관을 키워주어야 한다
- 공부하라고 잔소리 하는 것 보다 부모가 먼저 책읽는 모습을 보여주자
- 아이가 공부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 (맹모삼천지교)
- 책읽을 때는 소리내어 읽고 연습장에 써보는 연습을 한다
- 목표를 정하고 끈기와 집중력을 갖고 공부한다
-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자
- 꾸준히 노력하는 자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된다
- 교과서만 충실히 해도 충분히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
- 서로 격려하는 선의의 경쟁자를 두고 공부를 해보자


* 앞에서 언급했듯이 좌절과 도전의 자서전 기록입니다. 그냥 어떤 삶의 궤적인지 그대로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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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요강과 키를 아시나요? 요즘 사람들은 아마도 잘 모르는 물건들일 것입니다. 한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옛날 그 시절 추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새해를 맞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니 더욱 그리워지는 풍경이 있습니다. 겨울 밤에 필수였던 요강과 밤에 이불에 오줌싸면 벌받았던 키가 특히 생각납니다.

요강은 겨울에 방이나 마루에 두고 오줌을 누는 간이 화장실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은 화장실 시절이 잘 되어 있어 요강이 하찮은 존재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40여년전만 해도 해도 우리 선조들은 대부분 초가집에 살았습니다.

초가집은 흙으로 벽을 만들었기에 겨울에 웃풍이 심했습니다. 개량한 집이나 벽돌 가옥에 살았더라도 역시나 웃풍이 심했습니다. 과거 전통 가옥은 화장실이 내부에 없었고 집 밖에 별도로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강은 한 겨울의 필수 품목이었습니다. 요강은 놋쇠나 양은 또는 사기와 같은 재질을 이용해 작은 단지처럼 만들었습니다.

한 겨울의 간이 화장실, 요강의 소중한 추억

옛날 시골에서 한 밤 중에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을 가야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 난감합니다. 특히나 함박눈이 발목 깊이로 내린 밤이라고 상상해 보면 절망적입니다. 일명 푸세식 노천 화장실은 멀리 있고 전기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겨울 밤에 멀리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간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단지에 불과한 요강은 한 겨울 밤에 소중한 존재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여름에 시골 고향집에 갔더니 요강이 마당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조립식 주택을 사용하는지라 현대실 화장실이 내부에 있어 요강이 필요치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요강이 과거 그 시절 추억을 간직한 채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한 겨울 밤이 저절로 생각났습니다.

이불에 오줌 싸면 키를 쓰고 동네를 돌던 아이들 

그리고 헛간을 둘러보니 한 겨울 추억의 상징인 키가 보였습니다. 굉장히 오래 간만에 보는 물건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겨울 밤에 오줌이 마려우면 마루로 나가 요강에 오줌을 싸야 하는데 그냥 이불에 실례를 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침에 어머니는 어김없이 키를 머리에 쓰게 한 후 동네 마을을 돌며 소금을 얻어오게 했습니다.

원래 키는 팥이나 콩과 같은 밭 곡식의 쭉정이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역할을 하는 도구입니다. 주로 대나무나 고리버들과 같은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대나무나 고리버들을 쪼개서 앞 부분은 넓고 평평하지만 뒷 부분은 좁고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구부러져 있습니다. 키의 모습은 아래 사진을 참고하면 됩니다. 사용법은 뒷 부분을 잡고 넓은 키 안에 곡식을 털면 알곡과 쭉정이가 분리되게 되는 방식입니다.


대나무로 만든 키의 모습인데 좌측이 뒷 모습이고 우측이 앞의 모양으로 곡식을 터는 도구로 사용된다

사실 어린 아이가 키를 쓰고 동네를 돌면 소금을 얻으러 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면 옛날 선조들의 교육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매를 들거나 호통을 치기 보다는 스스로 창피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고 동네 어른들은 아이에게 소금을 건네주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용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공동체 교육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오줌싸면 키를 쓰고 소금을 얻어오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이들이 밤에 오줌을 싸면 귀가 붙어서 몸이 약하다고 하여 그 잡귀를 물리쳐 달라는 의미로 소금을 얻어 오게 했다고 합니다. 오줌싸는 버릇을 고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즉, 키를 씌워서 오줌을 쌌다는 것을 알리고 한의학적으로 소금이 신장에 좋기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소금이 귀한 물건의 의미도 있고  소금은 부패를 막아주고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아이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긴 셈입니다. 한편, 키를 쓰는 이유는 키 사이사이에 만들어진 구멍이 눈으로 보이게 해서 귀신을 쫓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겨울에 추억하는 시골 마을의 정겨운 풍경들 

신년에 여동생 집에서 동생들 가족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딸 아이들과 조카들에게 시골가고 싶은지 물어봤습니다. 겨울에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가서 비닐포대 눈썰매를 타고 싶다고 아우성입니다. 어느새 아이들도 시골이 가장 가고 싶은 곳이 되었습니다. 여름에는 냇가에서 물고기나 고동을 잡기도 하고 마음껏 수영을 할 수 있어 좋고, 겨울에는 낮은 산등성이 비탈에서 눈썰매를 마음껏 즐길 수 잇어 좋은 곳입니다.


도시의 아이들에게 갈 수 있는 시골 고향이 있다는 것도 행복인 것 같습니다. 지난 여름의 추억의 사진들입니다. 하루에 3번 정도 오지 산골마을을 운행하는 버스가 깊은 산 속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자동차에 등에가 앉아 있고 나무 토막 위로는 걸어다니는 벌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등에는 주로 소의 등짝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흡혈 곤충입니다. 걸어다니는 벌은 무슨 종류인지 날기를 싫어합니다.



표고버섯 참나무들이 햇빛을 가려져 있습니다. 표고버섯을 수확하면 건조기에 넣어 말립니다. 생버섯은 빨리 상하기 때문에 주로 건조해 버섯을 판매하게 됩니다.



이미 잘라버린 나무토막에서 새 순이 돋고 있는데 오동나무 잎사귀로 보입니다. 오른 쪽 사진은 장독대인데 어린 시절에는 커보였던 것이 어른이 되어 바라보는 장독대는 아주 작아 보입니다.



이끼가 잔뜩 낀 바위의 모습이고 오른 쪽은 산 속에 있는 독버섯입니다. 버섯은 아무 것이나 먹으면 안됩니다. 맑고 깨끗한 지역이라 우림지역 같은 정글도 있고 이끼 식물이나 고사리류 양치식물도 많습니다.



마당에서 옥수수를 쪄먹거나 국을 끓이는 간이 화로(?)입니다. 저녁에 캠프 파이어나 모깃불을 만들어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을 구워먹는 재미도 좋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경운기 드라이브를 준비하는 아버지 모습입니다. 그 옆에는 낫이나 칼을 가는 도구 숫돌이 있습니다. 마당에는 햇볕에 고추를 말리기도 하고, 정미기를 이용해 벼를 쌀로 만들기도 합니다.   



저녁에 모깃불을 피우며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고, 감자 고구마 옥수수와 같은 작물을 구워먹던 아이들입니다. 오늘도 아이들은 꿈을 꿉니다. 두 딸의 잠자는 모습이 똑같이 닮아 있습니다. 아이들이 지난 여름 날을 추억하며 다시 겨울에 시골에 갈 꿈을 꾸며 잠들었습니다.

이번 달 말에 아버지 생신을 맞이해 온 가족들이 시골에 가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신나서 활짝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아이들에게 고향은 맑고 고운 정서를 심어주는 교육의 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꿈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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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오늘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것은 솔직히 자살행위이다. 무턱대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호랑이에게 잡아 먹힐 수 있다. 왜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나?

아버지는 지난 70년대 겨울철 농한기가 되면 겨울철에 생계를 위해 노루, 꿩, 멧돼지, 오소리  등 야생 동물을 수렵하셨다. 겨울철 농한기에, 아버지가 밤샘 수렵에 나가면 나의 할 일은 오소리 잡는 아버지의 새벽 식사를 전달해 일이었다. 오소리를 잡으려면 밤새 오소리가 살고있는 바위 동굴 앞에서 불을 피우고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새벽에 어느 계곡의 바위 계곡에 계신 아버지를 걱정해 도시락을 만들어 주셨다.

겨울 어느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아버지 새벽밥을 챙겨 어느 바위 계곡의 바위굴에 가게 됐다. 공교롭게도, 그 날 새벽에 오소리가 굴 속을 튀어나와 나를 파란빛이 번쩍이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오소리는 굴 앞에서 사냥꾼들이 쳐놓은 쇠꼬챙이를 벗어나 바위 굴 앞의 작은 공터에서 자신을 잡으려한 사람들을 향해 이글거리는 파란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오소리의 그 눈빛은 너무나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워 온몸이 얼어붙은 정도였다.  

오소리를 잡으려면 오소리 굴 앞에서 연기가 많이 나도록 불을 피우고 몇일이든 계속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오소리가 연기를 피해 굴 밖으로 나오면 쇠꼬챙이로 오소리를 잡는 것이다. 오소리를  기다리다가 오소리가 바위 굴 앞의 쇠꼬챙이들을 피해 헤치고 나오면 놓칠 수 밖에 없다. 내가 본 오소리는 용케도 쇠꼬챙이를 피해 바위 굴을 나와 잠시 굴 앞의 평지에서 나와 사람들을 응시하다가 산으로 도망가 버렸던 것이다. (참고로, 너구리 잡는 방법도 오소리 잡는 방법도 비슷하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안에서 '너구리 잡냐?'는 이야기는 연기를 피워 너구리를 잡는 사냥에서 유래된 말이다.)


나의 아버지는 과거 70년대 야생 동물을 수렵하는 고수였던 것이다. 지금은 절대 오소리, 노루, 멧돼지 등 야생동물을 잡지 않으신다. 너무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아버지는 당시 겨울철 농한기에는 야생동물 수렵을 통해 팔아야만 생계가 유지가 되었던 때문이다.

나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안되고 굴 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해 그 때 굴 입구에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소리를 잡으려면 오소리 굴 앞에서 계속 기다려야 한다. 오소리 굴 앞에서 연신 연기를 피워야 한다. 오소리를 잡으려면 결국 연기를 피우고 마냥 기다려하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제 시골 마을은 겨울철 농한기이다. 아버지는 이제는 오소리를 잡지 않으시지만 겨울이 되니 어린 시절 오소리 잡던 옛날 그 시절이 생각난다.

결론적으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안되고, 호랑이 굴 앞에서 연기를 피우고 밖으로 나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호랑이를 잡겠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무턱대고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가는 호랑이 밥이 될 수 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호랑이를 굴 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하는 불을 피워 부채를 부쳐 연기를 굴 속으로 계속 밀어넣고 결국 호랑이가 굴 밖으로 나올 때 쇠꼬챙이 등 도구를 이용해 잡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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