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회'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10.20 군대 간 아들, 아버지와 어머니 눈물의 차이 by 진리 탐구 탐진강 (66)
  2. 2009.04.23 면회금지 철책선에 애 엄마가 잠입한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35)
  3. 2009.04.03 뇌출혈로 중환자실 입원한 삼촌 생각하니... by 진리 탐구 탐진강 (30)
  4. 2009.03.16 교도소에서 온 편지 "긍정적 삶 살겠습니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22)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이 옷을 여미게 합니다. 가을도 깊어가면서 단풍도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맘 때가 되면 군대에서의 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을 각각 따로 느낄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오늘은 그 시절에 비로소 가슴으로 느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과 사랑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때는 1980년 중반이었습니다. 치열했던 대학 2년의 시간들을 추억하며 군대에 가야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암흑같은 군사 독재와 맞서 대학가의 민주화 항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군대를 가기 전 까지 어머니 일을 도왔습니다. 저는 한량이셨던 아버지를 지독하게 싫어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어느정도 마음을 잡고 일을 했습니다. 표고버섯 재배였습니다. 산 등성이에서 일해야 하기에 매우 위험힌 작업이었습니다. 겨울에는 참나무를 베고 봄에 버섯종균을 넣은 후 나무를 세워두는 과정이었습니다.

과거 이야기부터 해야 겠습니다. 제가 본 유년시절의 아버지는 늘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었습니다. 결혼 후 5년동안 군대를 기피해 도피생활을 했던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제가 5살 때 였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그 때부터 언제나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힘들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임신했을 때 홀로 일하고 오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오던 소꼴에 꽂아둔 낫이 떨어져 무릎의 힘줄이 끊어지는 중상을 당했습니다. 산골이라 병원도 못가고 평생 불구가 된 것이었습니다.

아침 태양의 햇살은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에 반짝였다

저는 나중에 고등학생 시절에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더 컸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표고버섯 재배를 함께 했습니다.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시라는 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는 일하시면서도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저는 대들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러지 못하도록 타일렀습니다.


당시 저는 다리를 절뚝 거릴 정도로 일을 했습니다. 마침내 군대를 가는 날이 왔습니다. 저는 집 앞에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시골 집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면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네 번 정도 버스가 다녔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산을 내려가는데 아버지를 계속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말없이 따라왔습니다. 

저는 "아버지 그만 들어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봤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뒤로 돌렸습니다. 그 때 저는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을 보았습니다. 이제 막 산꼭대기에는 떠오른 아침 태양의 햇살에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이 순간 반짝했습니다. 난생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렸지만 저는 이미 아버지의 눈물을 봤던 것입니다. 그렇게 강하신 분이셨던 아버지의 눈물은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군대를 향해 가면서 저는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화해를 했습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면회왔다가 아들 못만난 어머니의 눈물 

저는 강원도 중동부 전선에 있는 백두산부대의 비무장지대 수색대에 배속받았습니다. 위험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만큼 부대의 군기는 살벌했습니다. 신병 시절은 너무 괴롭고 힘든 훈련과 얼차려의 연속이었습니다. 수색대는 소대 단위로 생활했습니다. 산골짜기에 은밀하게 막사를 짓고 생활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강원도 산골은 급격히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훈련은 물론 물동이를 지고 물을 나르고 화목(불때는 나무)을 하고 짬밥을 버리는 등 잡일도 신병의 몫이었습니다.

어느 날, 열심히 물동이를 나르고 있는데 저를 부르는 소리가 멀리 막사에서 들렸습니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급히 뛰어가보니 부대 통신보안 전화를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전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영문도 모른체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라고 말하자 마자 어머니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어쩐 일이세요?"라고 묻자 어머니는 겨우 말문을 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한번 보기 위해서 머나 먼 남쪽에서 강원도 산골까지 산 넘고 물 건너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의 부대가 면회가 안되는 곳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아들이 입대 후 보냈던 안부 편지를 받고 무작정 아들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연대 본부를 찾아왔던 어머니는 아들의 면회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연대 본부에서 전화라도 연결해 주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저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저는 건강하게 잘 있어요."라며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어머니와 전화를 끊고 막사 뒤 후미진 곳에 혼자 앉아서 저는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1박 2일에 걸쳐 강원도 산골까지 오셨다가 아들 얼굴도 못보고 되돌아간 어머니가 안타까웠습니다. 나중에 휴가가서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맛있는 떡과 음식을 해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대본부의 병사들이 그 음식을 전달해주지 않고 그냥 배달사고를 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눈물흘리고 돌아서며 아들에게 음식을 전달해달라고 호소했을텐데 말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속 눈물과 어머니의 흐느끼는 눈물은 하나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근엄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약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대부분 그랬습니다. 가부장적인 농촌 사회에서는 특히나 그러했습니다. 아버지는 완고했고 어머니는 자애로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항상 희생만 하시는 어머니가 안타까웠고 호통만 치시는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겉으로는 강한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여렸습니다. 어머니는 숙명처럼 가족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렸고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보였지만 마음 속은 더 강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은 하나였습니다. 다만 그 표현이 달랐을 뿐입니다.

요즘은 아버지도 약해지셨는지 예전과 같지는 않습니다. 얼만 전에는 어머니가 여행을 다녀오시도록 배려하는 모습도 있으셨습니다. 칠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경운기를 몰고 농사일도 하시지만 과거와 달라지신 모습니다. 한편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다정해지신 것 같아 다행스럽지만 몸이 쇠약해지신 것 같은 아닌지 걱정도 듭니다.   

오늘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쌀 두 가마니 보냈다. 내일 도착할 거다."
"추수하느라 힘드셨겠어요."

"아니다. 막내가 와서 도와줘 잘 끝냈다."
"도움을 못드려 죄송해요." 
(막내 남동생은 지난해 결혼해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전화 좀 해라. 이번에 추수에다 표고버섯까지 나와서 고생했단다."
"네. 알겠어요."

어머니의 전화를 끊고 저는 잠시 멍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가장 걱정하는 분은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전화를 드렸습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별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심전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이 전해져 옵니다. 앞으로는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와도 자주 전화를 드려야 겠습니다. 저도 어느새 아버지를 닮았는지 표현이 서투른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 한 가정을 일구고 아버지가 되고나니 만감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글로 대신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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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시절에 아이 엄마와 군인 아저씨의 특별한 면회의 사연을 이야기 할까 합니다. 당시 제가 근무하던 부대는 철책선 부근에서 별도로 막사 생활을 하는 수색소대였습니다. 일반적으로 GOP 철책선에  근무하는 군인들과는 달리 최전방 DMZ 수색소대는 소대 단위로 별동대 처럼 은밀한 곳에 1개 소대가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특수 작전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80년대 중후반의(20여 년 전의) 군대에서는 최전방 철책선이나 비무장지대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면회나 외출 외박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GOP 철책선의 군인들은 6개월 단위로 후방 부대와 임무 교대를 하게되면 면회나 외박 등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DMZ 수색소대는 1년 365일을 비무장지대나 철책선 근처에서만 훈련과 작전을 하는 임무인지라 면회 외박은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오직 휴가만이 유일하게 민간인(?)을 볼 수 있었습니다. 휴가는 수색소대원들 모두가 단체로 휴가를 갔습니다.

그러나, 단체 휴가를 다녀온 후로 길게는 9개월을 비무장지대나 철책선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면회가 안되는 줄 모르고 아들을 만나러 왔다가 그냥 울고돌아간 어머니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저희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저는 통신보안 군대 전화로 연대본부에 오신 어머니와 짧은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저는 통화한 뒤 몰래 막사 뒤에 숨어서 소리없이 눈물을 삼켰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지금부터 입니다. 철책선 밖에서 수색 훈련이나 작전을 수행하던 시절, 어느 날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산 속이라 날이 일찍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소대장이 K상병과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K상병은 저보다 고참이었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군대에 온 늦깎이 군인이었습니다. 소대장은 K상병에게 무슨 사연을 듣고난 후 상당히 당황한 모습으로 잠시 번뇌에 싸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후 소대장은 결단을 했는지 긴밀하게 K상병에게 지시를 했습니다.

[이준익 감독 영화 '님은 먼 곳에' 2008년작]
(베트남전에 참전한 남편을 면회하기 위해 위문공연단으로 자원한 아내를 소재로 한 영화)

그 날 밤에 K상병은 막사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K상병은 저녁에 조용히 막사를 빠져나가 산등성이를 타고 마을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사연인즉, K상병은 군대 입대하기 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K상병 부부는 아이도 하나를 낳았습니다. 사랑스런 아내와 간난 아이를 두고 군대에 입대한 K상병은 항상 아내와 아이에 대한 그리움에 괴로와 했습니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내는 너무나 남편이 보고싶어 아이를 안고 강원도 최전방으로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부부는 이미 편지를 통해 비밀리에 만날 작전 계획까지 마련해 두었습니다. 몇날 몇시에 수색소대 막사로부터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만나는 계획이었습니다. 거의 첩보작전에 가까운 감행이었습니다. 아내는 무사히 아이를 데리고 마을로 잠입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K상병은 막상 D데이가 왔을 때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내와 편지를 주고 받을 때는 몰래 하룻밤을 잠깐 마을에 다녀오면 아무도 모를 것이란 생각이었지만 막상 D데이가 되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만일 소대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막사를 빠져나갔다가 발각될 경우 탈영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K상병은 사실대로 이실직고하고 소대장의 선처를 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소대장은 원칙대로 한다면 절대 K상병을 마을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소대장은 K상병에게 도로를 통해 마을로 가지말고 산등성이 수색로를 타고 마을에 몰래 다녀올 수 있도록 지시를 한 것이었습니다. K상병도 모험이었지만 소대장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결단이었습니다.

K상병이 마을로 내려간 길은 일반 군인들은 모르는 수색소대원들 만의 비밀 개척로였습니다. 소대 회식을 할 경우 마을에 몰래 내려가 소주를 추진해 오던 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K상병은 몰래 마을에 내려가 그토록 보고싶던 아내와 아가를 만나 애틋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소대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무치고 보고싶었으면 K상병과 아내는 이토록 무모할 수 있는 만남을 추진했을까.

당시 K상병이 몰래 마을로 내려가 아내와 아가를 만난 사연은 우리 소대원 이외에는 전혀 모르는 야사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소대장의 나이 보다 K상병이 나이가 더 많았습니다. 보통 소대장을 소위나 중위가 맡게되는데, 대학원을 졸업하고 온 K상병 정도면 한두 살 이상이 더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군대는 나이와 상관없이 계급에 의한 위계질서가 중요합니다. 소대장이 면회 불가 원칙을 고수했다면 K상병은 아내와 아이를 눈 앞에 두고 만나지 못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대장은 나름대로 자신의 군생활 명운이 걸린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지만, K상병의 사연도 인간적으로 고려해 배려심을 갖고 현명한 판단을 해주었기때문 입니다.

군대에는 수많은 사연의 군인들이 많습니다. 보고싶은 여자친구가 변심한 것을 알고 탈영하는 군인이 있는 것도 그 젊음의 끊는 피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탈영은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K상병과 같이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늦깎이로 입대해 고생하고 제대하는 경우는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보는 광경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K상병 처럼 결혼 후 입대한 경우는 최전방 보다는 후방부대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해주는 제도를 시행하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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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낮에 경기도 안산에 살고계신 작은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평소 전화가 없던 작은 아버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뭔가 긴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지금까지 평생을 고생을 하면서 가족들을 위해 헌신해 온 분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이세요?"라고 묻자, 작은 아버지는 "K가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했다.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전화했다."고 했습니다. K는 작은 아버지의 남동생입니다. 저에게는 작은 아버지(삼촌) 중 한 분입니다.
 
작은 아버지에게 지금 상태는 어떤지 다시 질문하자, 이미 수술을 했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라고 합니다. 의사의 이야기로는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어느정도 의식은 돌아왔지만 말을 하지도 못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당장 면회라도 가보려고 하자, 작은 아버지는 '지금은 면회도 하루에 두 번만 되고 의식도 없으니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작은 아버지에게 위로를 드렸지만 작은 아버지는 마음이 많이 울적하신 것 같았습니다. 주말에 병원을 찾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는 작은 아버지와 전화를 한 후 상념에 쌓였습니다. K삼촌이 뇌출혈로 쓰러진 것도 마음이 아픈 일이지만 작은 아버지를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현재 심각한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는 할머님을 모시고 살고 계십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K삼촌 마저 뇌출혈로 중환자실에 입원했으니 작은 아버지의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K삼촌은 결혼했지만 이혼한 후 혼자서 딸 하나를 키우면 살고 있었기에, 작은 아버지는 K삼촌의 딸도 함께 키워야 할 상황입니다.

뇌출혈이란?
뇌출혈(중풍)은 머리로 흐르는 피의 흐름이 오작동을 일으켜 머리 속에서 출혈을 일으키는 증상입니다.뇌출혈이 일어나면 곧 의식을 잃고 까무라치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의식을 잃거나 사망할 수 있습니다. 뇌출혈로 인한 후유증의 하나로 뇌출혈된 반대쪽에 반신마비가 오는 것이며 안면신경마비, 언어장애, 팔다리 이완성 마비 등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한국에서 30대 이상 성인의 사망원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뇌졸중의 대표적인 질환입니다. 고혈압과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 중 하나입니다. 최근 5년간 투병하다 사망한 유명 탤런트 김흥기 씨도 뇌출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저희 아버지와 배가 다른 형제입니다. 아버지를 비롯한 3남 1녀를 (이미 돌아가신) 첫째 할머니가 낳았고, 그리고 작은 아버지를 비롯한 3남 2녀가 있으니 모두 6남 3녀의 대가족으로 매우 복잡한 가족관계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버지는 둘째이시고 작은 아버지는 넷째이십니다.

 
그래서 작은 아버지가 자신을 낳아준 할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며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당뇨병으로 병간호도 벅찬데 K삼촌 마저 뇌출혈로 거동을 하지 못해 그 가족들을 돌봐야 할 처지입니다. 가난한 살림에 대부분의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도전이 계속되는 셈입니다.

저도 힘닿는 대로 돕겠지만 직접 환자들과 가족들을 돌보며 살아야 하는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안됩니다. 왜 불행은 한 사람에게 한꺼번에 덮치는지 야속하기만 합니다. 

저에게 삼촌들은 학창시절에 언제나 의지가 되는 존재였습니다. 당시 시골 생활이 모두 어려웠지만 그래도 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고있던 저를 위해 삼촌들은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곤 했습니다. 특히, 작은 아버지는 온 가족들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습니다.

큰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그다지 평탄한 삶을 이루지 못했지만, 성실하고 온화한 작은 아버지는 언제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건달 생활을 하던 K삼촌의 마음을 잡아주고, 당시 권투선수였던 막내 삼촌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새롭게 출발하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작은 아버지의 인생은 참으로 힘들도 어려운 삶이었지만 결코 고난에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분에게 하늘도 무심한 것 같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만 가능한 정성을 다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K삼촌이 뇌출혈 환자의 특성상 비록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않더라도 빨리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가 비록 힘들지만 용기를 잃지마시고 힘을 내셨으면 합니다. 많은 상념과 생각이 교차하는 시간들입니다.

건강 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듯 합니다. 고혈압이 있으신 분들은 특히나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적당한 운동도 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뇌출혈은 50~60대 이상의 고령에서 흔하며, 특히 요즘같은 환절기에 잘 발생할 수 있으니 건강해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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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교도소에서 편지 한 통이 배달됐습니다. 천안 교도소에 수감 중인 청년 B씨의 편지였습니다. B는 제가 우연히 알게 된 젊은이입니다. B는 고등학교 때 오토바이 절도 혐의로 붙잡혀 교도소에 구속 수감된 상태입니다.

바쁜 일상과 B에 대한 배신감으로 책상 속에 넣어두었던 B의 편지를 오늘 다시 꺼냈습니다. B는 편지에서 "저는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라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B를 처음 알게 된 것은 3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B는 컴퓨터를 잘 하는 녀석이었습니다. 우연히 컴퓨터 모임에서 고등학생이던 B를 알게 됐습니다. 더벅 머리의 B는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 공부에 대한 열정은 뛰어났습니다. 
 
말이 별로 없어 무슨 고민이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B는 부모님이 두 분 모두 몸이 좋지 않아 가정 환경이 불우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환이 있었고, 어머니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 근근이 일을 해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의 가정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B에겐 동생도 있었습니다.

B는 그러한 불행한 가정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유일한 탈출구가 컴퓨터를 열심히 공부해 엔지니어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 보다 열심히 컴퓨터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B는 여전히 말이 없고 우울한 모습이었습니다. B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많았습니다. 저의 불행했던 과거가 생각나서 B에게 밥도 사주고 한번은 집에 재워준 적도 있었습니다.


[사진은 프로 레슬러 언더테이커 : 이 글과 직접 관련 없음]

그런데, 어느 날 B는 친구들과 어울려 동네의 오토바이를 훔치다 붙잡혔습니다. 지방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직접 교도소에 찾아가 면회도 한번 했습니다. 저는 B의 가정 환경을 알고 있고 아직 앞 길이 창창한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해 석방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써서 해당 법원 판사에게 보냈습니다. B를 알고있던 주변의 도움도 있어 다행히 B는 석방이 되었습니다.

B는 순천 교도소를 나오며 '앞으로 절대로 나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B를 믿었습니다. 한 동안 B는 마음을 잡고 다시 열심히 컴퓨터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어머니도 아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기가 원하는 꿈을 향해 노력하는 모습이 대견했습니다.

그러나, B는 보기 좋게 배신을 했습니다. 다시 오토바이 절도를 하다 경찰에 붙잡혀 구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몇개월이 지났습니다. 저는 B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한번 실수는 용서할 수 있지만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B는 거듭 용서를 빌었지만 마음이 돌아선 저는 모른 체 했습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B씨가 보낸 편지를 축소한 사진]


그런 B에게 또 편지가 온 것입니다. 저는 거의 1달간 편지 내용도 자세히 읽지않고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B의 편지를 읽어보니 "지난 날을 반성하면서 부끄럽지만 이렇게 몇 글자 적습니다."며 "앞으로 출소하면 2배로 공부를 하겠습니다."고 합니다. 또한, B는 제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면서 "항상 부정적으로 살면 그러한 것들이 끝이 보이지 않으므로, 저는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의 변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과거에 B에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살지 마라. 너만 불행해질 뿐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만일 신이 있다면, 신은 너에게 오히려 시련이라는 큰 선물을 준 것이라 생각해라. 너는 다른 사람들이 가져보지 못한 시련이라는 선물을 더 받은 것이니 고마운 일이 아니겠느냐. 남들이 갖지 못한 시련과 역경을 슬기롭게 이겨나가면 너에게 행운이 따라 올 것이다."라는 취지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천안 소년 교도소 정면 모습]


사실 제가 B에게 측은지심을 느꼈던 것은 저도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를 다니지 못할 정도의 시련을 겪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면부지의 B에게 정성을 들여 조언도 해주고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B에게 한번 배신을 당하고 나니 다시 B를 돕는다는 것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너무 바쁜 업무로 인해 B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다시 B를 생각하니 한편으로 마음이 아프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배신한 녀석에게 굳이 신경을 써야 하나 생각도 솔직히 듭니다. 저의 관심과 도움이 B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또 다시 배신한다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답장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저와 같은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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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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