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11.14 어머니가 보내준 감 박스에 눈물 삼킨 사연 by 진리 탐구 탐진강 (29)
  2. 2010.09.18 빅토리아 쩍벌녀 굴욕이라니? 언론이 문제! 연예인 별명에 대한 단상 by 진리 탐구 탐진강 (10)
  3. 2009.05.07 자식위해 평생 불구가 되신 어머님 전상서 by 진리 탐구 탐진강 (86)


며친 전 회사에서 회의 중인데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회의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휴대폰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이폰 스마트폰입니다. 아이폰애 찍힌 전화번호를 살펴보니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낮에 저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회의 중 밖으나 나와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아이고. 집으로 전화를 한다는 것을 잘못 걸었구나."

"집에는 왜요? 급한 일 있으세요."
"아니, 오늘 장에 갔다가 아들 생각나서 감을 샀어. 한 박스 택배로 보냈다. 알려주려고."

"도시에도 감 많은데요. 안그러셔도 되는데요."
"감이 아주 좋더라. 한 박스에 만원 밖에 안해서 두 박스 샀단다."

"어머니, 보내신 감 잘 먹을게요."
"그래. 아이들하고 잘 먹어라."

어머니는 여전히 자식 생각 뿐입니다. 전화를 끊고나서 여러가지 상념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어머니는 혼자서 농사 일을 거의 다 하셨습니다. 저를 낳으실 당시에 낫에 무릎을 심하게 다쳐 한쪽 다리가 거의 불구나 다름없습니다. 그렇지만 불편한 다리로 소도 키우고 농사 일도 하고 자식들도 공부시켰습니다. 그 당시는 아버지가 도회지에 돈 벌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과거 저희 시골 농촌 아니 산촌은 초가집이었습니다. 밥은 가마솥에 나무 땔감을 태워 지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참으로 억척스런 삶을 사셨던 것이지요. 저는 어린 마음이지만 그런 어머니를 항상 애처롭게 생각했습니다. 어리지만 낫을 들고 논둑을 베고 나무를 하고 소에게 먹일 소꼴을 베기도 했습니다. 벼농사 밭농사도 어머니와 함께 했습니다. 고사리 손이지만 뭔가 돕고 싶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산 중턱에 있던 집 뒷동산에 감이 익어갔습니다. 엄청나게 큰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감나무의 높이가 5층 이상의 건물은 족히 됐습니다. 그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감을 따곤 했습니다. 제가 그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땄습니다. 대나무의 끝을 갈라서 감따는 도구로 이용했지요. 감나무가 너무 커 땅에서는 딸 수가 없었지요. 감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감을 모조리 땄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다칠까 걱정이었습니다. 그 감나무는 마을 청년들도 못올라갈 정도로 높이 솟아 있었어요.

"얘야, 그만 따라.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지 마라."
"아니요. 괜찮아요. 조금만 더 딸게요."

"그래도 위험하다. 이제 내려와라."
"엄마, 저 감나무 안 무서워요. 여기 끝에만 따면 돼요."

사실 그 때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감 하나라도 더 따고 싶었습니다. 어머니와 겨울 내내 함께 먹을 간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겨울에는 농한기라서 먹을 것을 비축해 두었습니다. 벼와 곡식을 추수하면 모두 장에서 팔아야 했습니다. 적은 돈이라도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집에서 먹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겨우 먹을 소량의 식량만 남겼습니다. 저에게 겨울 간식은 고구마와 감이었습니다. 고구마와 감은 별도의 대나무 울타리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배고프면 하나씩 빼먹곤 했지요.



큰 감나무에서 딴 감이 쌀가마니로 10 가마니가 넘었습니다. 겨울 내내 먹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감이 식량이나 다름없었지요. 그래서 감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모든 감을 다 땄던 것입니다. 감을 대나무 울타리 안에 두면 점차 홍시로 변해 갔습니다. 때론 곶감을 만들어 놓기도 했지요. 감나무 오르는 것이 어린 나이에 쉽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위해 제가 혼자서도 도울 수 있는 일 중 하나였습니다.


아마도 어머니는 이번 5일장에 가서 좋은 감을 보시고 제가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주말에 집에 있는데 아파트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택배요"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감 한 박스가 배달됐습니다. 거실에서 감 박스를 열어보니 먹음직스런 감이 가득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감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아내와 두 딸이 있어 제 컴퓨터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혼자 옛 생각을 하니 울컥하더군요. 아이들이 볼까 두려워 눈물을 삼켰습니다.

어머니가 보내준 감을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몇 개를 깎았지만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박스에 표시로는 10kg이었는데 갯수로는 100개 정도는 돼 보였습니다. 가까이 사시는 장모님과 이웃집에 몇개씩 나눠 드렸습니다. 다행히 두 딸도 감을 잘 먹었습니다. 대개 도시의 아이들은 초콜릿이나 사탕과 같이 너무 단 맛에 길들여져 감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요. 할머니가 보낸 감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따르던 아이들이었지요.

언제나 어머니는 자식들 걱정인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 마트만 가도 쉽게 감을 살 수 있지만 어머니가 보내주신 감은 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겨울나기를 하던 소중한 추억이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어머니가 정말 힘들 때 우리 가족을 지켜준 보물인 셈입니다. 부모님은 지금은 그래도 과거와 달리 금슬좋게 잘 지내십니다. 부모님은 가을 추수를 하면 매년 쌀과 고춧가루 등을 보내주시곤 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또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감 한 박스가 그것입니다. 곧 어머니의 생신입니다. 아내는 벌써 눈치를 챘습니다. 제게 말했습니다. "올해는 어머니 용돈을 두둑히 보내드려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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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제 방송된 '청춘불패'와 관련 인터넷 매체에 f(x)의 빅토리아의 표정을 다룬 기사가 하나 올라왔는데 제목과 내용이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지적하고자 합니다.

해당 문제의 기사는 마이데일리에서 처음 내보낸 것이었습니다. 기사는 "'벌레 질색' 빅토리아, 쩍벌녀로 등극?…입크기 '굴욕'"이란 제목과 함께 '빅토리아가 입을 쩍 벌린 모습으로 때아닌 굴욕적인 상황을 연출했다'며 빅토리아가 사마귀를 우연히 발견하고 놀란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벌레에 놀라 입을 크게 벌리고 놀란 모습을 언론매체가 이 쩍벌녀니, 굴욕이니 하는 단어 표현을 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네티즌이나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애교스런 별명을 만들어주는 것은 다소 이해할 수 있지만 언론사가 일방적으로 연예인 표정을 갖고 왜곡된 표현을 만드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빅토리아가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청춘불패의 장면은 이러했습니다. 청춘불패의 멤
버들은 땡볕 아래서 논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빅토리아도 천진하고도 진지한 모습으로 벼 사이의 잡초인 피를 솎아 내며 열심히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지요. 빅토리아는 송은이와의 대화에 열중하던 중 갑자기 눈앞에 있는 사마귀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입을 크게 벌린 장면이 화면에 잡혔던 것이지요.

해당 기사는 이 부분에 대해 "
평소 벌레를 천적으로 생각하는 빅토리아는 입을 최대한으로 벌리며 쩍벌녀의 위용(?)을 드러내며 거의 기절 직전의 모습을 카메라에 포착당해 다른 출연진들을 폭소케 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쩍벌녀의 위용(?)이라니. 기자의 국어 수준이나 정신세계가 의심스럽습니다.

마이데일리에 실린 빅토리아 모습

과연 상식적으로 굴욕이란 단어의 뜻과 저러한 상황이 맞는 것일까요? 누구나 놀란 상황이라면 빅토리아와 같은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으면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을까요? 빅토리아 입장에서 엄청나게 놀랄 수 밖에 없었겠지요? 빅토리아가 어떤 실수를 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실제로 벌레를 무척 싫어하는데 사마귀가 나타났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오히려 귀엽게 애교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요.

굴욕의 사전적인 의미만 봐도 전혀 상황이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굴욕[屈辱]이란 사전적 의미로 '남에게 억눌리어 업신여김을 받을 경우'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빅토리아가 사마귀로 인해 놀라는 상황과는 전혀 맞지않는 표현인 셈입니다. 해당 기자가 저런 상황을 맞았을 경우 굴욕이라고 표현한다면 화가 날 것입니다. 적절한 표현이어야 공감을 하지 않을까요?

또, 쩍벌녀에 대한 단어도 그렇습니다. 쩍벌녀는 일반적으로
쩍벌남에 빗대 말 그대로 여자가 다리를 심하게 벌리고 앉아있어 남에게 불편하개 해 피해를 주는 경우를 이릅니다. 가령 지하철에서 어떤 남자가 다리를 심하게 벌리고 앉아 옆사람들에게 다리가 닿아 기분이 좋지않게 하는 상황에서 적절한 표현이 쩍벌남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여자가 치마를 입은 상태에서 다리와 무릎을 벌리고 앉아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민망하고 눈살이 찌푸려지겠지요. 이러한 경우가 쩍벌녀에 해당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해당 기사는 벌레에 놀란 빅토리아의 입 표정을 마치 쩍벌녀라고 잘못된 표현을 했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경우를 언론사가 과장 오도해 표현한 경우입니다. 해당 언론사가 낚시질을 하더라도 상황에 맞게 표현한다면 모르겠지만 이런 황당한 표현은 비판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언어 남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빅토리아가 중국인 출신 f(X) 걸그룹 멤버 정도밖에 모릅니다. 그렇다고 빅토리아를 짱개라서 괜찮다는 식으로 인격 비하 표현을 하는 네티즌들의 댓글도 문제가 많습니다. 남의 불행을 악용해 타인에 대한 비하나 인격모독을 하는 것은 기본 상식이 부족하다 하겠습니다.

깝권 조권이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한 모습(이데일리 인용)

연예인에 대한 별명들이 요즘 유행입니다. 가령 '
깝권' 조권, '허당' 이승기, '꿀벅지' 유이, 2PM의 '짐승남' 옥택연, 카라의 '구사인볼트' 구하라, '여신' 박규리 등과 같은 경우입니다. 네티즌들이 만든 별명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중에는 언론이 앞장서 부추긴 경우도 있습니다. 꿀벅지의 경우는 언론이 과도하게 남용해 잘못된 사용 사례를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연예인의 별명은 쉽게 기억할 수 있고 친근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사용되면 오히려 부정적 이미지로 부작용을 주기도 합니다. 더 보기를 보면 아이돌 걸그룹의 별명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더보기

무한도전의 경우를 보면 유재석은 '1인자''메뚜기', 박명수는 '2인자' '박사장', 하하는 '꼬마', 노홍철은 '돌아이', 정형돈은 '미친 존재감', 정준하는 '쩌리짱' 등 별명이 있습니다. 예능프로그램이라서 친근하면서도 캐릭터를 잘 알 수 있도록 해주는 효과가 있지요.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야동순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별명은 연예인의 이미지를 고착화시켜 운신의 폭을 좁히는 기능도 하지만 박명수처럼 끊임없이 프로그램 성격이나 캐릭터 성격의 변화에 따라 별명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방식으로 별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연예인 별명이 하나의 트렌드인 시대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번 빅토리아 쩍벌녀 같은 경우는 언론이 잘못된 언어를 부추긴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언론은 바른 언어생활을 선도해야 할 사명과 책임감이 있습니다. 찌라시와 같은 언론매체라는 대중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언론 스스로 자정작용이 필요할 것입니다. 연예인의 별명도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예인과 별명에 대한 단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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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칠순이 다 되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계십니다. 호랑이같은 아버지와 함께 부부의 연을 맺은 이후 어머니는 청춘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자식들은 대도시에서 결혼해 살고 있고, 막내 남동생이 가까운 도시에서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곤 합니다.

그러나, 장남인 제가 자주 부모님을 찾아뵙지도 못해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다리 한쪽이 불편하십니다. 어머니가 불편하신 다리로 평생 산골에서 힘든 농사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제게는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불행하게도 예기치 못한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절게 된 사연과 혼자서 저를 키운 새색시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은 까마득한 두메산골입니다. 아직도 온통 산으로 뒤덮인 고향은 비포장도로를 통해 하루에 세 번 버스가 다닐 정도로 산골 오지입니다. 부모님은 산골 외딴집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름 휴가 만큼은 시골 집에 동생들 가족들과 일정을 맞춰서 함께 가곤 합니다.

어머니는 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으신 분이셨고 아버지는 초등 교육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지난 1960년대는 교육 환경이 매우 열악한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시골 마을에 잠시 머물던 시절에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을 '주먹자랑 하지 말라'고 알려진 벌교에서 지냈던 분으로 엄청난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결혼 후 신혼 시절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는 군대 입영을 기피한 상태였는데 아버지를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에서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헌병대를 피하기 위해 초가집의 흙벽을 무너뜨리고 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 후 아버님을 몇년 동안을 도시에서 숨어지냈습니다. 당시에는 군대에 간 후 사망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군대 기피가 많았다고 합니다.

갑자기 어머니는 새색시가 생과부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홀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고 땔감을 구해 생활해야 했습니다. 당시 시골집은 초가집이었고 나무 땔감으로 밥을 짓고, 소꼴을 베어 소를 키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전기도 가스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녁엔 방에 호롱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미 임신 중이었습니다. 혼자서도 힘든데 홀몸이 아닌 상태로 논농사 밭농사를 짓고 소까지 키워야 하는 고난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겹게 일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혼자서 열심히 밭 일을 하다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서둘러 밭에서 일을 끝내고 머리에는 소꼴을 가득 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사고가 터졌습니다. 길가에 뻗은 칡넝쿨에 걸려 어머니가 넘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넘어지던 중 머리에 인 소꼴에서 낫이 떨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낫은 어머니 앞에 날이 선 상태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예리한 낫의 날에 닿아버렸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로 어머니는 무릎의 힘줄이 끊기는 대형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사고를 당하고도 치료를 할 병원도 없었습니다. 곁에는 아버지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당시 저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어머니는 무거운 몸이다보니 칡넝쿨에 걸려 균형을 잡지 못한데다 낫을 피하지 못해 다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임신한 상태에서 수술을 하는 것도 몸 속의 아이에게 해가 될까봐 못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그 사고로 인해 한 쪽 다리가 불편한 불구가 되셨습니다. 그러한 몸으로 어머니는 다시 농사를 짓고 혼자서 저를 낳아서 길렀습니다. 지금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갓 결혼 후 남편도 없이 무려 5년을 그렇게 농사도 짓고 저를 키웠던 것입니다. 저는 아가 시절을 마당이나 밭을 기어다니면서 놀았다고 합니다. 마당에서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나 닭과 함께 놀고, 밭에서는 지렁이가 친구였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도 일을 하고 계시고, 밭에 가서도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워낭소리는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저의 유년 시절은 밤낮으로 어머니 밖에는 없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호롱불 밑에서 제게 한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5살 때 처음 어버님이 고향으로 돌아오셨지만 저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신 후에도 집안 일은 하지않고 한량으로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싹텄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마음의 화해가 어느정도 되었고, 아버지도 나이가 들면서 과거와 달리 농사 일이나 집안 일도 했습니다.

제 나이가 5~6세 정도일 때도 저는 동네 아이들과 산에 올라가 고사리 손으로 나무를 하곤 했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것은 오직 어머니 일을 돕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저의 일을 돕는 역할이었습니다. 청소년기 시절에도 방학 동안 내내 어머니가 하시는 일을 돕는데 땀을 흘리곤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제가 어머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 때부터 어머니 혼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돕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왜 다리 하나가 불편하게 되셨는지 얘기를 처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어머니가 다리를 절면서 걷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불구가 된 것이 모두 제 탓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어머니를 보면, 그 젊은 시절에 임신한 몸으로 어떻게 다리가 잘리는 고통을 참고 이겨냈는지 가슴이 아프곤 합니다. 제가 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늘 변함없이 생각하는 정신적 지주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벼가 익어가는 여름 날, 논둑을 걸으면서 저에게 하신 말씀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단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어머님은 소중한 등불과 같았습니다. 제가 방황하거나 잘못 가려하면 언제
나 등대처럼 저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다리가 잘리는 듯한 고통을 어떻게 참고 견디셨습니까. 그리고 홀로 저를 어떻게 키우셨나요.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고생만 하셨습니다. 특히 홀로 키웠던 저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 유년시절의 기억 마저 희미하지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힘든 일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자주 연락도 못드려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해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지금은 자식들도 모두 결혼해 잘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어머니의 귀중한 가르침과 사랑 덕분입니다.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은 어머니가 그리워집니다. 언제나 힘을 주시는 어머님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찾아뵙겠습니다. 밤낮으로 기온차가 큰 데 건강 조심하세요.

언제나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해보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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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