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0.03.23 아버지 친구의 딸과 맞선, 결혼해야 하나? by 진리 탐구 탐진강 (87)
  2. 2010.02.02 집 나간 들고양이 길들이는 3가지 방법 by 진리 탐구 탐진강 (57)
  3. 2009.11.13 수능 후 수험생이 꼭 해야 할 일 15가지 by 진리 탐구 탐진강 (95)
  4. 2009.10.20 군대 간 아들, 아버지와 어머니 눈물의 차이 by 진리 탐구 탐진강 (66)
  5. 2009.10.12 어머니 첫 해외여행 허락한 아버지의 변심 이유는? by 진리 탐구 탐진강 (88)
  6. 2009.07.30 군대가는 아들 뒤 아버지의 눈물을 봤다면... by 진리 탐구 탐진강 (40)
  7. 2009.07.27 부모 5명 모시는 천사표 아내의 결혼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83)
  8. 2009.05.08 강남 부자의 어버이날 효도선물 '줄기세포'(?) by 진리 탐구 탐진강 (51)
  9. 2009.04.13 아이들과 주말농장을 하는 세가지 장점 by 진리 탐구 탐진강 (25)


지금으로부터 16년전 제가 겪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1994년경입니다. 요즘 결혼은 대부분 연애결혼이 많지만 당시는 상대적으로 중매결혼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혼기가 찬 자식이 있으면 부모님은 맞선을 보라고 성화이곤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에 입사를 했습니다. 대학 때 사귀던 동갑내기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인연이 없었는지 그녀는 맞선 본 남자와 결혼해 버렸습니다. 입사 직전 백수 시절에 일어난 일인지라 저는 붙잡지도 못하고 후미진 선술집에서 쓰디쓴 소주 한 잔에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요즘 회사 입사는 당시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는 불행 중 다행인지 친구 따라 입사원서 넣았다가 합격을 했습니다. 여자친구와의 이별과 그녀의 결혼 소식을 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사회생활에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때는 매일 밤마다 코가 비뚫어지도록 술을 마셨고 아침에는 비몽사몽간에 출근하는 반복된 일상이었습니다.

어느 날, 시골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예. 잘 먹고 다녀요. 걱정마세요."

"이번 추석에 꼭 내려와라."
"회사 일이 많아서 못갈 수도 있어요."

"아니다. 바빠도 꼭 오거라. 아버지가 손꼽아 기다리신다."
"아버지가요. 신경도 안쓰시던 분이 무슨 일인가요?"

"너 추석에 선보란다. 군의원 딸이다. 군의원이 아버지 친구인데 선보기로 약속했단다."
"네? 약속이라구요? 저는 선 안봐요."  
(잠깐, 아버지는 산골 농촌마을의 이장이셨습니다. 제가 친구 분 딸과 내심 결혼했으면 바랬습니다.) 


"그럼 못쓴다. 아버지 갑계(동감모임) 친구랑 약조한 것인데 그럴 수 없잖냐. 나도 그 집과 친하단다."
"어머니까지 왜 그러세요."

"군의원도 아주 점잖고 좋은 분이다. 딸도 아주 참하고 예쁘더라. 꼭 추석에 와라."
"싫다니까요.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사진> 영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중 한 장면

이렇게 어머니와의 첫번째 전화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며칠 후 다시 전화를 해서 저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습니다. 또 거절을 했습니다. 몇 차례 거절을 하다가 곰곰 생각해보니 부모님께 불효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사랑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아 죄송스러웠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머니. 저 추석에 내려갈게요. 그런데 거기서 맞선은 안볼 겁니다."
"뭐라고? 맞선을 안본다고? 군의원 부부와 약속한 맞선인데..."

"그러니까요. 시골에서 부모님들과 함께 나와서 맞선보는 것은 싫다고요.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어요?"
"서울에서 회사다닌다고 하더라."

"잘 됐네요. 제가 추석 끝나고 그 여자랑 서울에서 따로 만날게요. 추석에 시골에 내려갈 거구요."
"그래도 양가에서 맞선보기로 약조한 것인데 어쩌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잘 말씀 좀 해주세요. 맞선을 안보는 게 아니라 둘이 만난다니까요."
"알았다. 아버지에게 이야기해 볼게."

어머니와 기나긴 신경전이 새로운 반전을 맞게 됐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추석에는 꼭 내려왔으면 하는 바람에 부응하면서도 양가 부모가 동석한 맞선 대신 둘만 따로 서울서 만나기로 하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결국 양가 부모도 제가 수정 제안한 만남을 수용했습니다.

제가 맞선을 처음에 거절했던 이유는 맞선을 보게 되면 저도 부담되지만 양가 부모도 고향에서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 나중에 서먹서먹한 사이가 될까 두려웠습니다. 부모님이 아는 집안의 맞선이란 결혼을 전제로 하는 것도 우려가 됐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시에 맞선에 대해 거부감이 심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학 시절 여자친구가 제가 백수시절에 갑자기 집안에서 선보라고 한다고 하더니 맞선본 남자와 곧장 결혼해 버렸던 아픈 맞선에 대한 기억도 작용했습니다. '나는 연애결혼해 복수할란다'는 아주 유치한 발상을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추석이 되고 고향에 갔습니다. 어머니에게 군의원 딸의 연락처를 넘겨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배려 존중하는 생활이다 <사진> 영화 한 장면

"우리 고장에서 가장 참한 규수란다. 너랑 결혼하면 집안의 경사일 것 같다."
"어머니.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무 부담주지 마세요."

"그래. 니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아까워서 그런다. 좋은 규수라고 읍내에 소문이 자자하다."
"알았어요. 서울에서 만나보고 말씀드릴게요."

그 후 어떻게 됐을까요? 물론 추석에 시골에 다녀온 직후 서울 경복궁에서 군의원 딸을 만났습니다.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나온 여자를 찾는 식으로 만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007데이트인가요? 경복궁 앞에서 만나 경회루를 비롯한 고궁을 거닐었습니다. 첫 만남인데 고궁을 거닐다니 무드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부모님이 만들어준 맞선을 빙자한 소개팅 데이트를 한 셈이 됐습니다. 혹시 부모님이 소개팅 시켜준 분 있나요?

그렇게 경복궁을 거닐다가 근처 찻집을 찾았습니다. 전통 찻집 하나를 골라 들어갔는데 이것은 시골마을의 찻집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냥 시골에서 만날 것을 서울에서도 하필 경복궁에서 데이트를 하고 찻집도 시골 분위기라니. 그리고 그녀에게 말을 꺼냈습니다.

"오늘 어땠어? 추운데 힘들지 않았어."
"아니요. 모처럼 경복궁도 둘러보고 재밌었어요."

"그런데 말이야. 나는 시골 부모님이 (결혼을 전제로 한) 맞선이 싫었어. 동생 만나서 오늘 즐거웠어."
"시골 부모님들이 많이 친하신가 봐요."

"그러게. 그런데 말이야..."
"......(침묵)....."

"우린 따지고 보면 고향 선후배잖아. 처음 만나긴 했지만. 그래서 우리 앞으로도 선배 후배로 지내자."
"예. 알았어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맞선도 애초부터 싫었지만 솔직히 제 스타일도 아니었습니다.(ㅠㅠ) 제 인생의 첫번째 맞선이자 부모님의 소개팅 데이트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부모님 성화에 못이겨 만나긴 했지만 한편으로 그녀에게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맞선녀 퇴짜놓기 만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 보다 나이가 3살이 적었기에 만난 직후 말을 놨습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제 할 이야기만 다한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반응이 궁금하다구요? 뭐, 어머니에게 한동안 계속 잔소리 들었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실망감이 컸습니다. 한동안 소주만 드셨다는 후문. 저는 그 후에도 2년간 여자 친구도 못사귀고 무적의 솔로부대 신세였습니다. 그 사이 군의원 딸은 다른 남자와 만나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어머니는 저만 보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야, 이 눔아. 결혼식에 가보니 사람들 마다 최고로 참한 규수라고 다 그러더라. 아까워 죽겠다."
"어머니. 짚신도 짝이 있잖아요. 곧 저도 좋은 여자 만나겠죠?"

"우리집 장손이자 장남인 너에게 그 규수 만큼 좋은 여자가 또 있겠냐? 맏며느리감으로 최고더라."
"귀에 못이 박히겠어요. 그만 좀 하세요. 알았어요."

"그래서 그런데 내가 맞선 볼 여자를 하나 더 염두해 두고 있단다. 한번 만나보자."
"뭐라구요? 또 맞선이요? 어머니. 제가 졌어요. 잘못했어요. 다음 추석에 결혼할 여자 데려올게요."

그리고 저는 그 해 추석에는 여자를 데리고 시골에 갔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구요?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서 그 때부터 솔로부대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간절하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아무 생각없이 흥청망청 친구들과 술만 마시러 다니던 제가 어머니의 맞선 이야기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떠보니 여자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마음에 든 여자 앞에서는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숙맥이던 제가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자가 바로 지금의 아내입니다.(^^) 물론 부모님도 지금껏 맏며느리가 최고라고 하십니다. 고맙습니다.
솔로부대 탈출의 교훈 핵심 포인트
- 간절하면 꿈이 이루어진다. 결혼도 스스로 간절해야 한다.
-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만고의 진리이다. (그런가?)
- 결혼은 남자하기 나름이다. 자신감을 갖고 내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올인하라.
-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 물질이 아니라 결혼에 대해 준비된 책임감이다.
- 내가 배려하면 상대방도 배려한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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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부모님이 살고 계신 시골 고향집에 가면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사실 부모님은 산골 마을에서 떨어져 외딴집에 두 분이 사십니다. 그래서 밤에는 들짐승이 산에서 내려오기도 합니다. 부모님은 대문도 담벼락도 없는 집에서 살고 계시는 지라 황색 개 한 마리와 토종닭 세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개는 집을 지키는 역할과 외로운 아버지 어머니의 벗과 같은 역할도 합니다. 물론 토종닭은 평상시 계란을 낳아주는 역할도 있지만 유사시 가족들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각설하고 오늘은 들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말에 시골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해가 저물고 땅거미가 지는 무렵이었습니다. 논과 밭이 이어지는 길목에 서있는데 산 속에서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갑자기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래도 참을성있게 고양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응시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내 산 속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야옹"하면서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고양이 모습을 보니 완전히 산고양이나 들고양이는 아닌 듯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키우는 고양이도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은 고양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고양이를 키운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들고양이가 놀라지 않게 움직이지 말고 천천히 응대하라


저는 고양이가 무슨 일인가 싶어 기다렸습니다. 고양이 소리가 나면 같은 소리를 내어 응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고양이가 서서히 산비탈을 내려왔습니다. 제가 움직이면 고양이가 놀라 도망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고양이가 놀라지 않게 사람은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제가 어린 시절에 자연스럽게 터득한 경험입니다.

역시나 고양이가 산비탈을 내려와 밭에 있는 저에게 점차 다가왔습니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고양이는 가만히 서서 자신을 부르는 저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고양이의 몸 상태를 살펴보니 상당히 배가 고픈 듯 했습니다. 배가 홀쭉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땅거미 지는 무렵에 산 속에서 산비탈을 내려오는 들고양이 한 마리가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먹을 것을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천천히 자리를 피해 집에 있는 쇠고기찜을 몇점 가져왔습니다. 고양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고양이를 향해 고기 몇점을 보여주며 먹으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고양이는 경계심 속에서 서서히 다가와 고기를 물어 제꼈습니다. 굶주린 들고양이입니다.

먹을 것으로 유인해 경계심을 풀도록 하고 먹는 동안 지켜보기만 하라

들고양이는 먹는 동안에 사람이 다가가면 놀라서 도망갈 수 있습니다. 일단 고양이가 먹을 것을 먹는 동안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둘째 남동생의 큰 아들이 갑자기 멀리서 달려오자 고양이가 화들짝 놀라 산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배가 고팠는지 고기 몇점을 갖다주자 허겁지겁 먹던 고양이가 아이가 뛰어오자 경계하고 있다

어머니가 무슨 일인가 싶어 왔습니다. 어머니는 아마도 앞산 중턱에 사는 마을 사람의 집에서 나와서 들고양이가 된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거기에 사람이 살았는데 병환으로 병원에 간 후 아무도 돌보지 않게되자 들고양이가 되어 떠돌고 있는 듯 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고양이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산 비탈 나무 그늘에 숨어잇던 고양이가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집을 탈출해 들고양이가 되었다면 아직은 완전히 야생 상태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양이에게 고기를 더 갖다주면서 계속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어느정도 배가 부른 고양이가 사람에게 다가와 친밀감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히 경계심을 푼 것은 아닙니다. 제가 고양이의 등과 배를 만져주자 가만히 있었습니다. 여전히 집고양이의 특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집 나가 들고양이가 된 것은 등과 배를 만져주면 집고양이 특성을 보인다

고양이가 점차 순한 집고양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집으로 데려가려 하면 거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아마도 들과 산에서 지내면서 집에 대해 거부감이 생긴 듯 합니다. 집에는 개가 지키고 있어 무서워 하는지도 모릅니다. 개와 고양이가 앙숙이듯이 말입니다.

다시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더 주었더니 편안하게 먹습니다. 고양이는 이제 저와 친해졌습니다. 아이들에게도 경계심이 없어졌습니다. 아이들과도 친근감있게 대해 줍니다.


들고양이가 배가 부르고 사람과 친해지면서 등을 쓰다듬어도 그냥 가만히 편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고양이와 친해진 아이들도 신난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고양이는 집고양이가 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입니다. 지금은 집 보다는 야생에 더 편해진 들고양이 특성이 더 강합니다.


들고양이가 마치 집고양이 처럼 먹을 것을 먹다가 벽돌에 몸을 비비기도 하며 장난도 치고 있다

오늘은 들고양이가 포식하는 날입니다. 아이들이 고양이가 먹을 것을 갖다주면 잘 먹자 계속 고기와 키조개 조각을 가져다 줍니다. 고양이는 아이들이 준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른 듯 합니다. 더 이상 먹지는 못합니다. 고양이는 먹을 만큼만 먹는 동물입니다. 개가 배가 터지도록 먹지만 고양이는 자신이 배가 부르면 식사를 중단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양이는 배가 부르자 벽돌에 몸을 비비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여유도 생긴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산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아쉬워 했지만 야생에 익숙해진 고양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산 속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까지 제가 본 장면입니다.

다시 산으로 돌아간 들고양이, 여자 친구와 함께 돌아오다

그런데 나중에 아이들에게 들어보니 들고양이가 다시 내려왔는데 하얀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왔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흰고양이는 여자친구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멋지게 생긴 얼룩 고양이를 탑(가수)이라는 별명을, 하얀 고양이는 예쁘게 생겨 김태희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 후 고양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날도 기다렸지만 산으로 돌아간 고양이는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서울로 돌아갈 때 까지는 적어도 그랬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음식을 구걸할지도 모릅니다. 다행스럽게 들고양이가 도둑 고양이는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들고양이 체험이었습니다. 요즘 도시의 경우 버려지는 길고양이들도 많은 것 같은데 동물들을 쉽게 내버리는 세태가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번에 사람이 사랑을 베풀면 야생의 동물도 그것을 안다는 것도 더불어 알게 됐던 소중한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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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 중의 하나가 시험일 듯 합니다. 그 중에서도 고3 수험생들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초절정 울트라 스트레스의 결정판이 될 것입니다. 이제 수능이 끝나고 시원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야 겠습니다. 

어쨌든, 그 동안 수능 공부하느라 고생한 수험생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보냅니다. 때론 아쉬움도 남고 한편으로는 힘들었던 추억들도 되살아 날 것입니다. 저도 돌이켜보면, 지난 1980년대 중반에 대입 학력고사를 치른 후 예상보다 시험을 못본 것 같아 가슴앓이하던 때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시험을 끝낸 후 집에 돌아와 이불을 둘러쓰고 아쉬움의 분루를 삼켰던 기억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어차피 지나간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빨리 떨쳐 일어나 또 다른 도전에 나서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수능의 뒤안길에서 마무리를 잘하고 앞으로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수험생을 둔 고3 부모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고 합니다.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힘든 생활인 셈입니다. 부모님 뿐일까요? 함께 공부한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 그리고 주변 이웃들도 마찬가지로 함께 고뇌를 나눈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수능을 끝내고 그간 마무리와 함께 수험생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봅니다. 조금이라고 미래를 설계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수능 후 수험생이 해야 할 일 5가지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자

수능은 수험생만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자녀의 시험이 곧 자신의 일인 것 처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따러서 수능 공부를 위해 숨죽이며 뒷바라지 해준 부모님을 위해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모님을 꼭 안아드리고 고마움을 표시하면 아버지 어머니도 기뻐할 것입니다. 아들이라면 부모님께 큰 절을 드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편지를 써서 마음을 전하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시험 결과에 관계없이 소중한 아들 딸을 위해 정성을 다해 주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3 자녀를 둔 부모가 느끼는 심적 고통도 수험생 못지않게 크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자식의 건강을 위해 음식 하나라도 신경쓰고, 공부에 방해될까 두려워 숨소리마저 조심하셨을 것입니다. 수능 스트레스로 인해 짜증내는 자식이 밉더라도 참고 견디셨을 것입니다. 가족은 하나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푹 쉬어보자

수능이 끝나면 지친 심신으로 인해 맥이 풀리고 잠이 올 것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마음껏 잠을 자는 것도 좋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쉴 수 있는 시간입니다. 친구들과 놀고 싶은 생각도 간절하겠지만 일단 지친 심신부터 추스린 후 놀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이라도 푹 쉬면서 몸을 회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능 이후 시간은 넉넉합니다.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하자

고등학교 선생님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가장 많이 생각나는 선생님은 고등학교 시절 함께 고생하고 걱정해주던 선생님일 것입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있었기에 어렵고 힘든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재수생이라면 학원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소중한 분일 수 있습니다. 수능이 끝나면 주변 사람들을 잊고 자신만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면 그 선생님은 평생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친척들과 이웃들을 찾아 인사해 보자

수능 공부하느라 일가 친척을 찾지 못한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가족과 더불어 친척들도 소중합니다. 멀리서 걱정해주는 분들 중에는 친척들도 한마음일 것입니다.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가족과 친척들입니다. 평소 자주 왕래하며 얼굴을 잊지않도록 노력해야 할 대상이 바로 친척들입니다. 나이가 한 살이라도 적을 때 자주 만나야 나이가 들어도 서먹하지 않답니다. 그리고 주변 이웃들과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대학 입시 정보를 찾아보자

어느정도 수능 후 주변 사람들과 시간을 가졌다면 대학 입시를 위한 준비도 해야 겠습니다. 요즘은 학원이나 학교에서 입시 설명회도 자주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피할 수 없는 길인 만큼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보고 적절한 입시 전략을 구상해보는 시간도 가져야 겠습니다. 조급하지말고 천천히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면 좋을 듯 합니다. 늘 끝이 있으면 또 다른 시작이 있습니다.

 수험생이 해보면 좋은 일 10가지

1. 멋진 몸매 가꾸기

젊은 시절에 멋진 몸매는 청춘의 특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몸매는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수능 후 희망사항 첫번째가 몸매가꾸기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수험생활 동안 10시간 이상 의자에 앉아있어 몸의 상태나 균형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능 후 기간이야말로 몸매만들기의 절호의 찬스입니다. 매일 아침 조깅과 줄넘기를 하는 것도 좋고 자신이 배워보고 싶던 특기나 운동을 통해 몸매를 가꿔 볼 수도 있습니다.

2. 당일치기 여행

그 동안 못해본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습니다. 너무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가까운 곳으로의 당일치기 여행은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수능 준비로 약해진 심신을 단련하고 소중한 추억도 만들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의 감상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디카를 지참하고 여행의 기록을 남기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블로그에 여행 일기를 올려서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도 보람이 있을 듯 합니다.

3. 운전면허 따기

요즘은 운전면허도 필수가 되고 있습니다. 드디어 운전대를 잡아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보통 한두 달 걸리는 운전면허 취득과정은 수능 후 3개월간의 여유시간과도 적절합니다. 필기시험을 먼저 공부한 후 운전면허학원에서 실기 연습을 하여 기능시험과 도로주행까지 마친다면 어엿한 드라이버가 됩니다. 당장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있지만 않더라도 나중을 위해 미리 운전면허를 따둔다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4. 솔로부대 탈출

수험생들이 수능 후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연애일 것입니다. 공부하느라 미뤘던 이성친구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수험생들 모두 비슷할 듯 합니다. 이제는 솔로에서 벗어나 누구나 여자친구 남자친구와 같은 이성친구가 그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학에 들어가 이성친구를 사귀면서 낭만 속의 캠퍼스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솔로부대 탈출을 위해서는 친구들과 서로 도와가며 잦은 미팅 자리를 만들어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소개팅이 성공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잘 안되면 부담도 있답니다. 다 함께 즐기는 미팅도 있으니 선택은 자유입니다.

5. 외국어 공부하기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특기가 있다는 것은 생활의 지혜입니다. 수능을 위한 재미없는 외국어 공부는 끝났지만 지금부터는 철저히 나를 위한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영어 토익이나 회화 공부도 좋고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과 같이 자신이 한번쯤 여행하고 싶은 나라의 언어를 선택해 공부하는 것도 좋습니다. 해외여행에서 외국인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그날까지 열공 모드에 다시 돌입하는 것도 미래를 준비하는 보람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외국어에 관심이 있는 분은 특히 일찍부터 꾸준히 공부하면 나중에 큰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

6. 문화생활 즐기기

수험표의 특권이 있습니다. 수험생들은 무료나 할인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이 많습니다. 영화, 연극, 뮤지컬 등 그동안 수능 준비로 누리지 못했던 문화생활을 마음껏 즐겨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학에 입학하는 날까지 절대 수험표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수능 이후에 수험생들을 위한 각종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으니 각종 정보를 잘 살표보셔야 합니다. 신분증과 수험표를 함께 제시하면 다양한 혜택을 받을수 있으므로 꼭 놓치지 말았으면 합니다.

7. 자신의 멋을 가꿔보자 

공부하느라 자신을 가꾸는데 소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청춘 시절을 멋지게 보내기 위해 이제는 세련된 패션과 뷰티 센스를 익혀두는 것도 방법입니다. 먼저 아이쇼핑이나 잡지, 쇼핑사이트 등을 통해 패션 트렌드와 코디법을 파악해보며 스스로 잘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히 여학생들은 메이크업이나 하이힐에 익숙해지도록 미리 연습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8. 아르바이트 해보기

수능 후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효과적으로 보내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필수사항은 아니지만 노동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고 사회경험도 쌓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시간을 아르바이트로 보내려는 수험생이 많아지면서 허위 과장된 채용광고도 많으므로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9. 독서와 글쓰기

수능이 끝나면 지긋지긋 하던 야간 자율학습도 없고 여유시간이 많아 신나게 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논술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경우라면 열심히 준비해야 합니다. 글쓰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만큼 매일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문 사설이나 칼럼을 자주 읽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수능을 핑계로 그동안 소홀히 했던 독서에 힘을 쏟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독서는 논술에 대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정한 마음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읽는 것으로 만들어집니다.

10. 파워 블로거 도전

대부분 미니홈피나 블로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운영하지는 못했을 듯 합니다. 이제는 오랜기간 동안 방치됐던 미니홈피와 블로그를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일촌과 이웃들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내고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등 새로운 자료로 업데이트 합니다. 책, 요리, 음악 등 자신의 특기를 살려 파워 블로거로 도전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파워블로거에 도전한다면 포털의 블로그가 아닌 티스토리와 같은 전문성있는 블로그를 개설해 꾸준히 운영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긍정적으로 잘 생각해보면 수험생이 할 수 있는 일도 많은 것 같습니다. 수험생이 부럽다는 문구처럼 정말 보람있는 생활은 마음먹기 달렸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수험생들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제 또 다른 시작과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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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이 옷을 여미게 합니다. 가을도 깊어가면서 단풍도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맘 때가 되면 군대에서의 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을 각각 따로 느낄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오늘은 그 시절에 비로소 가슴으로 느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과 사랑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때는 1980년 중반이었습니다. 치열했던 대학 2년의 시간들을 추억하며 군대에 가야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암흑같은 군사 독재와 맞서 대학가의 민주화 항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군대를 가기 전 까지 어머니 일을 도왔습니다. 저는 한량이셨던 아버지를 지독하게 싫어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어느정도 마음을 잡고 일을 했습니다. 표고버섯 재배였습니다. 산 등성이에서 일해야 하기에 매우 위험힌 작업이었습니다. 겨울에는 참나무를 베고 봄에 버섯종균을 넣은 후 나무를 세워두는 과정이었습니다.

과거 이야기부터 해야 겠습니다. 제가 본 유년시절의 아버지는 늘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었습니다. 결혼 후 5년동안 군대를 기피해 도피생활을 했던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제가 5살 때 였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그 때부터 언제나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힘들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임신했을 때 홀로 일하고 오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오던 소꼴에 꽂아둔 낫이 떨어져 무릎의 힘줄이 끊어지는 중상을 당했습니다. 산골이라 병원도 못가고 평생 불구가 된 것이었습니다.

아침 태양의 햇살은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에 반짝였다

저는 나중에 고등학생 시절에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더 컸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표고버섯 재배를 함께 했습니다.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시라는 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는 일하시면서도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저는 대들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러지 못하도록 타일렀습니다.


당시 저는 다리를 절뚝 거릴 정도로 일을 했습니다. 마침내 군대를 가는 날이 왔습니다. 저는 집 앞에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시골 집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면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네 번 정도 버스가 다녔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산을 내려가는데 아버지를 계속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말없이 따라왔습니다. 

저는 "아버지 그만 들어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봤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뒤로 돌렸습니다. 그 때 저는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을 보았습니다. 이제 막 산꼭대기에는 떠오른 아침 태양의 햇살에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이 순간 반짝했습니다. 난생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렸지만 저는 이미 아버지의 눈물을 봤던 것입니다. 그렇게 강하신 분이셨던 아버지의 눈물은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군대를 향해 가면서 저는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화해를 했습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면회왔다가 아들 못만난 어머니의 눈물 

저는 강원도 중동부 전선에 있는 백두산부대의 비무장지대 수색대에 배속받았습니다. 위험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만큼 부대의 군기는 살벌했습니다. 신병 시절은 너무 괴롭고 힘든 훈련과 얼차려의 연속이었습니다. 수색대는 소대 단위로 생활했습니다. 산골짜기에 은밀하게 막사를 짓고 생활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강원도 산골은 급격히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훈련은 물론 물동이를 지고 물을 나르고 화목(불때는 나무)을 하고 짬밥을 버리는 등 잡일도 신병의 몫이었습니다.

어느 날, 열심히 물동이를 나르고 있는데 저를 부르는 소리가 멀리 막사에서 들렸습니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급히 뛰어가보니 부대 통신보안 전화를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전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영문도 모른체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라고 말하자 마자 어머니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어쩐 일이세요?"라고 묻자 어머니는 겨우 말문을 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한번 보기 위해서 머나 먼 남쪽에서 강원도 산골까지 산 넘고 물 건너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의 부대가 면회가 안되는 곳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아들이 입대 후 보냈던 안부 편지를 받고 무작정 아들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연대 본부를 찾아왔던 어머니는 아들의 면회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연대 본부에서 전화라도 연결해 주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저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저는 건강하게 잘 있어요."라며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어머니와 전화를 끊고 막사 뒤 후미진 곳에 혼자 앉아서 저는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1박 2일에 걸쳐 강원도 산골까지 오셨다가 아들 얼굴도 못보고 되돌아간 어머니가 안타까웠습니다. 나중에 휴가가서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맛있는 떡과 음식을 해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대본부의 병사들이 그 음식을 전달해주지 않고 그냥 배달사고를 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눈물흘리고 돌아서며 아들에게 음식을 전달해달라고 호소했을텐데 말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속 눈물과 어머니의 흐느끼는 눈물은 하나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근엄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약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대부분 그랬습니다. 가부장적인 농촌 사회에서는 특히나 그러했습니다. 아버지는 완고했고 어머니는 자애로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항상 희생만 하시는 어머니가 안타까웠고 호통만 치시는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겉으로는 강한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여렸습니다. 어머니는 숙명처럼 가족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렸고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보였지만 마음 속은 더 강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은 하나였습니다. 다만 그 표현이 달랐을 뿐입니다.

요즘은 아버지도 약해지셨는지 예전과 같지는 않습니다. 얼만 전에는 어머니가 여행을 다녀오시도록 배려하는 모습도 있으셨습니다. 칠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경운기를 몰고 농사일도 하시지만 과거와 달라지신 모습니다. 한편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다정해지신 것 같아 다행스럽지만 몸이 쇠약해지신 것 같은 아닌지 걱정도 듭니다.   

오늘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쌀 두 가마니 보냈다. 내일 도착할 거다."
"추수하느라 힘드셨겠어요."

"아니다. 막내가 와서 도와줘 잘 끝냈다."
"도움을 못드려 죄송해요." 
(막내 남동생은 지난해 결혼해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전화 좀 해라. 이번에 추수에다 표고버섯까지 나와서 고생했단다."
"네. 알겠어요."

어머니의 전화를 끊고 저는 잠시 멍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가장 걱정하는 분은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전화를 드렸습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별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심전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이 전해져 옵니다. 앞으로는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와도 자주 전화를 드려야 겠습니다. 저도 어느새 아버지를 닮았는지 표현이 서투른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 한 가정을 일구고 아버지가 되고나니 만감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글로 대신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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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얼마 전 어머니께서 첫 해외여행을 다녀오셨습니다. 해외여행을 한번 가자고 하면 아버지 눈치 때문에 주저하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신있게 해외여행에 나선 것입니다. 부모님은 시골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계십니다.

저녁에 퇴근해 아내에게 물어봤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어머니께서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 의아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놀라운 일인데."
"이모님들과 함께 중국 여행을 다녀오신데..."

"우리가 함께 해외여행 가지고 할 때는 안간다는 했는데."
"아버님이 이번에 다녀오시라고 했다는 거야."

"정말 의외인데..."
"막내 이모님이 환갑인데 자매들이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이모님 두 분을 포함 셋이서 중국 여행을 다녀오신 것입니다. 중국 여행은 막내 이모님의 아들이 주선을 했습니다. 여행 경비는 저와 동생들이 별도로 부쳐드렸습니다. 가능한 한 비용 걱정없이 다녀오실 수 있도록 형제들이 각각 경비를 넉넉하게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의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한번도 어머니가 여행가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집 떠나면 고생이라며 해외여행에 대해 거부감이 강했습니다. 더욱이 어머니 혼자서 여행가는 것에는 알러지 증상을 일으킬 정도로 완고했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의 불호령에 언제나 여행을 포기하곤 했었습니다. 아버지 혼자서는 밥도 못해 드시기 때문에 어머니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고 여행을 떠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 올해 여름휴가에 시골마을에서 온 가족들이 함께 모여 즐거운 한 때를 보내던 모습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어머니께서 여행을 떠나신다고 싱글벙글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예전의 모습이 아닌 듯 했습니다. 어머니는 집만 나오시면 아버지가 밥은 제대로 드실까, 시골집에서 키우는 개밥은 누가 줄까 늘상 걱정이 태산이셨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전혀 걱정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순순히 여행을 보내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완고하던 아버지께서 변심한 것 같습니다.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 사시는 모습을 지켜봤던 저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절대 해외여행을 가지도 않겠지만 어머니를 홀로 여행보내는 일은 없을 것 같다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칠순을 넘기면서 마음이 여려지신 듯 합니다. 산골 마을에서 젊은 시절부터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고집센 촌부의 대명사였던 아버지였습니다. 

저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그렇게 해외여행을 함께 가자고 했을 때는 아버지 핑계를 대며 거부하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이모님과 함께 해외 여행을 간다고 하니 서운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이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데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가득했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서는 두 분의 여동생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습니다. 언니로서 여동생들이 힘들 때에도 특별한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시절에 대한 회한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가부장적인 가장으로서 어머니를 늘 힘들게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이모님을 만나기 위해 여행 떠나는 것 마저 거절하던 시절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이모님들과 해외여행을 허락한 것은 천지개벽할 정도의 소식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형제들은 어머니께서 이모님들에게 늘 빚을 지고 사시는 듯 하였기에 이모님들과의 중국 여행을 축하해 드렸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님들은 중국 선양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중국 선양에서 사업을 하는 막내 이모의 아들이 현지 가이드가 되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해외여행이 중요하기 보다는 이모님들과 자매 셋이서 함께 있다는 사실자체가 더 행복한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들이 함께 여행한 것도 평생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 산골마을의 계단식 논과 조립식 주택으로 단장한 마을의 전경


중국 여행에서 귀국한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중국 잘 다녀오셨어요?"
"정말 가는 곳 마다 더럽더라."

"중국 가셨는데 좋은 곳 많이 못가셨어요?"
"우리나라가 좋더라. 외국에 가보니 우리나라가 깨끗하고 좋은지 알겠더라."

어머니께서는 빨리 한국에 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모님들과 첫 해외여행이라서 즐겁기도 했겠지만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잠시라도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도 항상 아버지 걱정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완고하고 집안 일도 안하시고 성질도 급하신 분입니다. 어머니는 항상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떨어져 지내시면 아버지 걱정이 태산같습니다.

아버지와 다시 통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없는 동안 식사는 잘 하셨어요?"
"막내가 집에 와서 밥해 줘 잘 지냈다."

그랬습니다. 부모님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 사는 막내 남동생이 시골집까지 출퇴근을 한 것입니다. 막내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데 일부러 아버지를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수씨가 그렇게 하도록 조언을 했을 듯 합니다. 마음씨 착한 막내 동생 내외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해외여행을 허락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가부장적 사고로 표현도 못하시고 자신의 고집만으로 평생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식들이 모두 결혼하고 나서 마음이 조금씩 변했던 모양입니다. 이제는 어머니와 두 분만 남게 되자 서로를 더욱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 가족들이 고추밭에서 이른 고추를 따기 위해 이동하는 장면


게다가 칠순을 넘기시면서 예전과 같은 기백도 조금 약해지신 듯 합니다. 아버지께서 이제는 어머니를 위해 여행도 권유하실 만큼 달라진 모습에 감동을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께서 언제나 기운넘치는 모습을 점차 잃는 듯 하여 아쉬움도 교차합니다. 평생을 유아독존과 같이 고개를 숙이지않고 살아오신 아버지께서 이제는 어머니를 위해 배려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독립영화 '워낭소리'를 보면서 부모님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산골마을에서 평생 살면서도 도시와는 담을 쌓고 지내시던 아버지. 어머니는 늘 불만을 표시하지만 아버지의 고집과 한 마디에 조용히 순종하며 살아오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이모님들과 즐거운 한 때를 허락하셨습니다. 사랑을 표현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연일지 모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저는 다시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아니, 해외여행 안간다고 하시더니 가실 생각을 하셨어요?"
"이제는 가보고 싶더라."

저는 어머니의 한 마디에 다시 한번 반성을 했습니다. 과거 안가신다고 하셔도 계속 어머니와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한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 독립영화 워낭소리는 가족과 고향 그리고 부모님을 생각하게 한다


"어머니, 다음에는 꼭 우리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가자구요."
"그러자구나."

"어머니 칠순이 곧 다가오니 아버지와 함께 가요."
"그래. 아버지가 안가시려고 할 것 같기는 하지만."

"저희가 설득하겠습니다."
"너희들이 그리 해보렴."

어머니께서 이렇게 자신있게 말씀하신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가족들과 여행하자고 하면 뒤로 빼시던 어머니께서 이제는 주저없이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아버지를 믿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옹고집 인생이 변심을 하자 어머니께서 기운이 넘치시는 듯 합니다. 다가오는 어머니 칠순에는 부모님을 비롯 온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도 이제는 손주들을 비롯 함께 여행가는 것에 대해 거부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어머니의 자신감은 이미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행복한 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이제는 서로 사랑과 배려도 표현하면서 사세요.

오늘 당장 사랑한다 말해보세요.

樹 欲 靜 而 風 不 止(수욕정이풍부지)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쳐주지 않고

子 欲 養 而 親 不 待(자욕양이친부대)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네
<論語> 나오는 구절입니다.

돈을 벌면 잘 해드려야지,
성공해서 잘 해드려야지...하면 늦습니다.

부모님은 돈을 많이 번 아들,
크게 성공한 딸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고생하며 노력하는 그대로의 자식을
기다리며 행복해 하십니다.

‘아버님이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이 순간을 어머니가 지켜보셨더라면... "
하는 순간이 오기 전에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십시요.

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것이 언제였나요?
어머니를 안아 드린 것이 언제였나요?

오래전에 우리가 받았던 것을 돌려 드릴 때입니다.
손톱을 깎아 드리고, 발을 씻겨 드리고,
등을 밀어 드리고, 어깨를 주물러 드리세요.
부엌에서 설거지하시는 어머니 등 뒤에서
살짝 안아보세요.

처음은 어색하겠지만, 얼른 용기를 내보세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이
서로의 가슴에 물결 칠 것입니다.

우리는 쑥스러움 때문에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오.

- 고도원의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해드려야 할 45가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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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유년 시절부터 학창 시절까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존재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자리도 불안했습니다. 일방적인 아버지의 호통이 시작되지 않을까 걱정하곤 했습니다.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제가 다섯 살이 되던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혼자서 저를 낳고 키웠습니다. 아버지는 군대 입영을 거부했습니다. 당시는 1960년대 시기였습니다. 신혼 시절에 아버지를 잡으러 산골 마을로 군인들이 닥쳤습니다. 아버지는 초가집 벽을 부수고 산속으로 도망갔습니다. 그 후 어머니는 혼자서 농사일을 하고 혼자 저를 낳아 길러야 했던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벌교에서 주먹 대장이었고 돌아온 마을과 읍내에선 호랑이였습니다.

    다섯 살 아들이 아버지에게 날린 주먹과 첫 만남

    제가 처음 아버지를 본 모습도 불청객으로 느꼈을 듯 합니다. 다섯 살 때, 아버지는 밥상 앞에서 어머니에게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얼굴에 그만 주먹을 날렸습니다. 아버지는 호랑이같은 눈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이 놈이 어디다가..." 저는 부엌 문으로 나와 마당을 지나 도망갔습니다. 한참 달리다 마당 입구에서 되돌아보니 아버지는 집 앞에서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첫번째 전투였을지 모릅니다.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으면 싸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늘 당하기만 했습니다. 바보같이 왜 당하기만 하냐고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마다 어머니는 자식들 걱정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서울 큰 집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서울 구경 시켜준다는 큰 아버지를 따라 나선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큰 집에 자식이 없어 제가 서울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비관하던 학창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걱정은 힘겹지만 이겨내야 했습니다.

    방학 때 마다 혼자서 시골을 찾았습니다. 한 여름날에도 어머니의 농사 일을 도와 논둑을 베고 땔감 나무를 했습니다. 저의 얼굴에는 항상 땀이 범벅이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농사 일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읍내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날도 많았습니다. 한량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어머니 혼자 힘든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집에 땔감이 떨어져도 아버지는 태평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아버지와 멱살을 잡고 싸울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며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산 속에 있는데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하라 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어느새 1980년대 중반 대학에 갔습니다. 암흑과 같던 군사 독재 시절에 치열한 대학시절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군대를 가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대학 2년을 마치고 난 뒤었습니다. 군대를 가기 전 까지 어머니 일을 도왔습니다. 농가 부채는 1억원에 달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는 아버지가 어느정도 마음을 잡고 일을 했습니다. 표고버섯 재배였습니다. 산 등성이에서 일해야 하기에 위험했습니다. 겨울에는 참나무를 베고 봄에 버섯종균을 넣은 후 나무를 세워두는 과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힘든 일을 하면 더 화를 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화풀이 대상이 어머니가 되었지만 어머니는 늘 참았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장성한 제가 있어 아버지는 예전보다 심하게 가지는 않았습니다. 여름이 왔습니다. 비가 온 후 버섯이 엄청나게 나왔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지게를 등에 지고 엄청난 버섯을 산길을 타고 집으로 날랐습니다. 어머니는 버섯을 따고 부자는 쉴새없이 버섯을 날랐습니다. 하루종일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가다보니 얼굴에 소금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가장 힘든 노동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고된 일로 다리를 절뚝거리는 저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산 위에 떠오른 태양의 햇살은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에 반짝였다

    그리고 군대를 가야 하는 날이 왔습니다. 저는 집 앞에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시골 집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면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네 번 정도 버스가 다녔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산을 내려가는데 아버지를 계속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말없이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 그만 들어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봤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뒤로 돌렸습니다. 그 때 저는 보았습니다. 이제 막 산꼭대기에는 아침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태양의 햇살에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이 순간 반짝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렸지만 저는 이미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군대가는 아들이 걱정됐습니다. 계속 아들 뒤를 따라오며 잠시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아들에게 보여주기 싫었지만 저는 햇살에 비친 아버지의 눈물 한방울이 빛나는 것을 봤습니다. 난생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렇게 강하신 분이셨던 아버지의 눈물은 충격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군대를 향해 가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화해를 했습니다.

    독립영화 '워낭소리'는 어쩌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단한 삶과 닮아 있습니다. 부모님 세대는 자신의 삶 보다는 자식들을 위해 늘 헌신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표현에 인색했고 어머니는 항상 자식을 사랑으로 감싸주셨습니다. 첨단 문명이나 도시 사회에서 보면 워낭소리의 노부부의 삶은 한편으로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부부의 삶에는 가족이 있고 마음의 고향이 있습니다.  슬프고 괴롭고 힘들더라도 안식과 위안이 되는 곳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은 바로 부모님입니다. 이제 아버지도 기력이 약해지고 어머니도 몸이 아프시곤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어보니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번 여름휴가에도 자식들과 손주들 기다릴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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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아내는 종손의 며느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종손의 며느리는 챙겨야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서 제사는 물론 경조사를 모두 챙겨야 합니다. 사실 대가족을 모두 챙기면서 생활한다는 것이 요즘 시대에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내는 부모를 무려 5명이나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제 부모가 4명이고 아내의 어머니 1명을 포함해 모두 5명이나 됩니다. 저에게는 저를 낳아준 부모와 키워준 부모가 각각 있습니다. 아내는 아버지가 나이 50이 넘어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 홀로 자식들을 키웠다고 합니다. 아내는 딸 넷에다 아들 하나인 집안의 셋째 딸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언제나 5명의 부모를 모셔야 하는 일에 대한 부담이 큰 편입니다. 제 친부모님은 시골 농촌에 살고 계시고 저를 키워준 부모님은 서울에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장모님은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바로 아래 층에 살고 계십니다. 저를 키워 준 부모님은 사실 큰 아버지 내외이신데 슬하에 자식이 없어 제가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 모시면서 함께 지냈고 거기서 공부를 했습니다.

    대가족의 장손의 며느리로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아내는 늘 밝은 모습입니다.

    장모님은 셋째 딸인 아내와 마음이 잘 맞는 편입니다. 결혼 후에는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지금은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장모님은 우울증도 심했고 심장이 좋지않아 몇년전 중환자실에 입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장모님이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진단을 받기도 했습니다. 수술을 하더라도 신장에 투석을 하면서 길어야 5년을 살 것이란 청천벽력같은 의사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술도 하지않고 장모님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십니다.

    당시 저는 어차피 수술할 것이라면 수술 대신 기다려보자고 했었습니다. 다행히 장모님은 점차 회복되어 중환자실에서 퇴원해 저희 아파트에 몇일간 머물렀습니다. 제가 제안했던 일입니다. 저희 아파트에 머무르는 동안 장모님의 건강은 더욱 좋아졌습니다. 그 후 저는 장모님이 아예 저희 아파트 단지로 이사하는 것을 권했습니다. 아내가 있는 곳에 가깝게 사신다면 더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장모님은 건강하십니다.

    제가 장모님을 모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 때문입니다. 저는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저와 결혼해 준 아내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아내는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생활을 서울에서 보냈으니 서울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내는 도회지 느낌이 충만한 여자였습니다. 아내는 당시 저를 만난 이후 저의 궁핍하고 불행한 삶을 알았지만 저와의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가족은 언제나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되는 사랑과 희망입니다.

    저는 총각 시절 저와 결혼한 여자들은 불행한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했었습니다. 그래서 불행을 제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와 사귀던 여자에게 솔직히 말했습니다.
    "나는 부모가 4명이다. 그래도 나와 같이 결혼해 살 수 있겠니? 나는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

    당시 그 여자는 그래도 저와 결혼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아내입니다. 나중에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왜 나와 결혼했어? 보잘 것 없는 나에게."
    "당신이 불쌍했어. 나라도 당신을 도와주고 싶었어. 그리고 날 굶겨죽이지는 않겠던데. (깔깔깔)"

    그랬습니다. 아내는 청년 시절의 제가 불쌍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제가 당시에 다소 염세주의적인 사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만난 이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이후 저는 불행이 아닌 행복의 시작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주말농장 텃밭에서 옥수수를 따서 맛있는 별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개 희망이 없다면 염세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내를 만나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내는 5명의 부모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의 4명의 부모님에게는 사랑스런 맏며느리입니다. 그리고 장모님에게는 사랑스런 딸이고 믿음직한 사위의 아내입니다. 아니, 장모님은 저를 장남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와 아내는 5명의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맏며느리가 된 이후 저희 대가족은 자주 모이곤 합니다. 아내가 늘 챙기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많아 무뚝뚝하던 가족들이었지만 이제는 함께 모이면 웃음이 많아졌습니다. 저도 그래서 장모님을 부모님과 같이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팔불출이라 생각하더라도, 저는 아내를 천사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와 가족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천사와 같은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가족이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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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저녁에 퇴근하니 두 딸아이가 색종이로 정성껏 만든 카네이션을 내놓았습니다. 큰 딸은 카네이션이 담긴 편지를 건네주었고, 작은 딸은 빨간 카네이션을 만들어 가슴에 붙여주었습니다. 이제 두 딸이 많이 컸나 봅니다. 출근 할 때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가야 하나 고민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요즘은 모내기 등 농사철이나 바쁜신가 봅니다. 장남의 전화를 받은 어머머는 무척 반가운 목소리이셨습니다. 무뚝뚝한 아버지도 건강 걱정해주는 아들의 전화에 내색은 안하시만 기분이 좋은신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밝고 쾌활한 두 손녀딸의 목소리를 듣고나니 부모님은 더욱 상기되셨나 봅니다.

    아내는 시골의 부모님을 비롯해 장모님 등 어르신들에게 어버이날을 맞아 작지만 얼마의 효도 용돈을 송금했습니다. 이미 지난 주말에는 큰 집에 들어 용돈을 드리고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는 자식이 없어 장손이 제가 돌보는 처지인지라 아내는 여러모로 장손의 며느리로서 고생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부모님은 물론 친지들까지 챙길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밝은 얼굴로 어버이날이나 경조사를 잘 챙겨주는 아내가 고맙습니다.


    ▲ 두 딸아이가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과 아빠 엄마에게 쓴 편지 

    최근 어버이날과 가정의 달을 맞이해 부모님이나 어르신들께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 착안해 각종 효도 선물이 저 마다의 장점을 내세우며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건강식품이나 효도관광, 연예인 디너쇼 등이 고가의 효도선물이었지만 요즘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첨단(?) 선물이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

    그 중 하나가 '효도 성형'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효도 성형은 '주름 성형'인데, 특히 눈가 주름과 눈 밑 불룩한 지방 덩어리를 없애는 수술이라고 합니다. 보톡스와 같은 주사요법도 어르신들을 위한 효도 상품이라고 합니다. 실버시대에 따라 조금이라도 젊고 아름답게 보이려는 것은 부모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점에서 가격적인 부담이 크지 않다면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효도선물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습니다. 카네이션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상품권이 효도선물로 추가되었습니다. 여행이나 여가 생활의 욕구가 커지면서 효도관광도 등장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건강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건강검진이 유행했습니다. 그 후에는 효도폰과 효도성형이 또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어떤 뉴스에 의하면 어버이날 효도선물로 '줄기세포 보관 서비스'가 등장해 주로 강남 일대의 부유층을 중심으로 인기라고 합니다. 한국줄기세포은행에서 제공하는 '셀뱅킹' 서비스가 그것입니다. 줄기세포 선물은 가격이 180만원대인데 이미 가입자만 3천명 정도라고 합니다. 가입자는 강남 지역 비중이 70%를 차지할 정도라고 합니다.

    셀뱅킹은 사람의 말초 혈액에서 성체줄기세포를 추출해 50년간 보관해주는 서비스입니다. 근육, 간, 신장, 심장 등 다양한 장기로 분화가 가능한 성체줄기세포를 보관해두면 어르신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효도선물도 생명공학을 이용한 줄기세포 보험시대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일반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부담스런 가격으로 인해 선택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효도선물도 '부익부빈익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기술이 발전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면 앞으로 줄기세포가 많은 사람들에게 효도선물로 각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은 어떤 자식들이나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줄기세포 효도선물은 실제로 도움이 된다면 의미있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다만 빠른 기간내 저렴한 가격에 상용화와 대중화를 위한 한단계 진일보한 기술 발전이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어버이날이 되면 불효를 하는  것 같아 고민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고향에 자주 찾아뵙지 못한 이유로, 경제적으로 어려워 변변한 효도 선물이나 용돈을 드리지 못하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걱정을 많이 하는 세대가 바로 현재의 대학생들일 수 있습니다. 경제불황으로 취업도 어렵고 아르바이트 자리 마저 부족한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태를 반영한 것인지, 최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는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빨리 취업하는 것"이 1위(약 37%)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다음이 "장학금이나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학비 부담을 덜어드리는 것"이 2위(23%)였습니다. 이는 곧 대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부모님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드리는 것을 최고의 효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무한경쟁에 내몰려 힘들고,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으로 괴롭고,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힘겨운 시절인 것 같습니다. 모두가 보다 행복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물질적인 것이 효도나 행복이라는 등식에만 고정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모님은 고마운 전화 한 통화, 직접 찾아뵙고 같이 식사하는 자리, 정성이 담긴 선물 등에도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담긴 정성과 사랑이 오래토록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어진다면 무엇보다도 큰 행복일 것입니다.

    효도 쿠폰의 행복

    작년 이맘 때, 두 딸아이가 어버이날이라고 '효도 쿠폰'을 준 일이 있습니다.

    효도 쿠폰에는 구두 닦아주기 5회, 거실 청소하기 5회, 안마해주기 3회, 뽀뽀해 주기 3회 등과 같은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아빠나 엄마가 필요할 때마다 해당 쿠폰을 아이들에게 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학교 선생님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래서 작년 오월에는 아이들이 준 '효도 쿠폰'을 이용해 두 딸아이가 닦아주는 구두도 신어보고, 안마도 자주 받아보는 행복이 넘쳤습니다. 

    돈이 아니더라도 가족들 사이의 작은 배려가 큰 행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행복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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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창한 일요일을 맞아 우리 가족을 비롯해 4가구 형제 가족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사는 곳은 모두 지역이 다르지만 모처럼 모여서 '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이제는 막내 동생도 결혼을 한 상태라서 가족들이 모이면 예전보다 화기애애합니다. 막내 부부를 제외하면 모두 각각 두 아이들을 가진 부모들이다보니 아이들에게 뭔가 추억을 남겨주는 일도 보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식사 후 모두 함께 주말농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총출동했습니다. 우리집 두 아이만 있을 때 보다 여러 아이들이 모이니 더 열심히 아이들이 땅을 갈고 채소를 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주말농장을 함께 하면 좋은 장점들이 많습니다. 몇가지 장점들을 소개합니다.

    아이들에게 노동의 신성함을 비롯 풍부한 정서를 심어줍니다.

    꼬마 아이 농군이 밭을 갈고 있습니다. 이제 5살 아이지만 누나 형들과 함께 하는 농사 일이 재미있는지 연신 밭을 가는 재미에 빠져 있습니다. 자연과 함께 하는 노동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도시의 삭막한 생활을 벗어나 땅을 밟고 농작물을 재배함으로써 우리가 먹는 먹거리가 소중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효과가 큰 셈입니다.




    직접 채소와 농작물을 재배해 먹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직접 무공해 채소와 농작물을 재배함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아이들도 자기들이 직접 가꾼 채소가 자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기대하는 마음이 큽니다. 이번에 상추, 방울토마토, 봄배추, 가지, 대파 등의 모종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얼갈이배추, 열무 등은 씨를 직접 뿌려 심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함께 참여해 심어서 그런지 부모들도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주말농장은 농약을 전혀 하지않는 유기농 재배를 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믿을 만한 먹거리도 제공합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화합의 장입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함께 모여서 가족 화합의 장을 자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어른은 어른들 대로 모여서 즐거운 시간들을 마련할 수 있고 우애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사시는 부모님이 계시면 효도 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채소들이 커감에 따라 함께 모여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아이들도 가족들과 함께 모이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모처럼 아이들은 물론 네 가구의 가족들이 즐겁고 유쾌한 추억들을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10평 정도의 텃밭인데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정도는 됩니다. 주말농장 텃밭에서 농작물과 채소가 커가는 모습과 같이 아이들은 꿈과 추억도 커져 갈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주말농장을 하는 재미에 빠져 보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 글] 팔 부러진 채 주말농장에서 삽질했던 사연

    [참고] 주말농장 임대받으려면

    주말농장은 서울 근교의 농지 중 경치가 좋고 일손 부족으로 농사를 짓기 힘든 경작지를 도시민에게 1년 단위로 임대, 주말에 와서 소규모로 채 소를 길러보며 전원생활을 하게끔 해주는 곳이다. 농장주가 자주 찾아오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작물을 돌봐주는 세심한 배려가 있고 부대시설 도 잘 돼있어 이용하기 편리하고 부담이 없다. 임대가격도 평당 1만원 내외여서 적은 비용으로도 가족과 함께 뿌듯한 주말을 자연속에서 보낼 수 있다. 게다가 직접 기른 무공해채소를 1년에 여러번 수확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농협이 전국 1백10여개의 농장을 가족들에게 연결시켜 주고 있고, 개인이 운영하는 농장도 있다. 그 밖에 아크리스백화점도 카드회원에 한해서 일정가격에 주말농장을 임대해주고 있다.

    처음 시작하는 가족들은 농장주, 농협 지도사의 도움을 받아 작물 재배방법을 배울 수 있고 재배가 간단한 상추, 쑥갓, 시금치 등의 채소류부터 기르면 된다. 꽃을 좋아하는 가족은 계절마다 다른 꽃을 가꾸어 보는 것도 좋다. 씨앗이나 종자, 비료 등은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거나 무료 로 주기도 하며 호미나 괭이같은 농기구도 무료로 빌려준다.

    농협은 일부지역에 한해 사과나무, 포도나무 등의 과실수, 꽃사슴도 분양한다.


    텃밭 크기는 4인 가족이면 5평, 평당 1만원 내외

    임대면적은 4인 가족이면 5평 정도가 적당하나 가족당 보통 10평까지 임대한다. 회원모집은 보통 3월에서 4월 초순까지이고 임대 가격은 평당 1 만원 내외. 포천이나 파주 등 조금 먼 지역은 더 싸게 분양받을 수 있다.

    개인농장의 경우는 대부분 한 계좌를 3~5평으로 하여 주말농장을 이용하는 가족이 밭을 일구고 가꾸는 데 부담스럽지 않게끔 분양하고 있다. 계 좌당 5만~10만원이고 농장에 따라 모종이나 씨앗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한다.

    회원모집은 4월 초순 농장개장식까지 하지만 주말농장을 이용하는 가족이 늘어나는 추세이므로 빨리 신청하는 것이 좋다.

    법인체인 양지말 가족농원은 5평의 텃밭과 유실수 두그루를 평생, 인근 산에 있는 30년생 잣나무를 10년간 임대해주는 형식으로 실버회원을 모 집하고 있다.

    승마장, 눈썰매장, 노래방, 숙박시설, 식당 등의 부대시설을 30~50% 싸게 이용할 수 있다. 회원비는 부가세를 포함해서 3백85만원으로 다소 비싸 지만 평생 이용이라는 이점이 있다.

    아크리스백화점은 카드회원에 한해 서초구 원지동에 위치한 주말농장을 3.5평단위로 7만원에 임대해준다. 3월 20일까지 신청하면 되고 씨앗과 농 기구도 무료로 제공한다. 부대시설로 별장도 있다.


    텃밭 돌보는 법은 걱정 없어요. 농장주가 도와준답니다.

    4월초에서 이듬해 3월말까지 이용할 수 있는 주말농장은 농장주가 경운기로 일군 밭고랑에 씨앗이나 모종을 심는 것으로 시작된다.

    4월 초순에 상추, 시금치, 쑥갓, 셀러리 등을 심어 6월 중순에 수확하고 5월 중순에는 고구마, 토마토를 심어 각각 9월 초순과 8월 초순에 거둘 수 있다. 김장무, 배추 등은 8월 중순에 파종하고 11월초에 거두어 김장을 담그는 데 쓸 수 있다. 농사경험이 없는 가족들을 위해 농장주가 상세 히 가르쳐 주고 가족들이 올 수 없는 때에는 작물을 돌봐준다.

    자녀로 하여금 직접 채소를 가꾸게 하고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체험학습으로 주말농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큰 장점이다. 또 직접 기 른 무공해채소를 먹거리로 쓸 수 있고, 맑은 공기속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주말농장의 큰 매력이다.


    교통이 편리한 수도권지역과 도시 주변에 위치

    교통이 편리한 것 또한 주말농장의 장점인데 농협의 경우 수도권에만 80여개가 있어 서울지역의 시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고 개인농장도 서초구에 밀집해 있어 가까운 곳을 임대하면 된다. 편리한 교통은 주말농장을 자주 찾고 싶은 사람에게는 큰 장점이고 복잡한 교통을 싫어하는 도시인들이 쉽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일부 주말농장은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학습장도 갖추고 있어 둘러볼 곳도 많다. 또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농촌지역 이기 때문에 공기가 맑고 깨끗하다. 농협 주말농장은 인근에 가볼만한 곳도 추천하고 있어 주말을 즐겁고 알차게 보낼 수 있다.


    과일나무나 꽃사슴을 분양하는 곳도 있다.

    농협 주말농장 중 일부는 텃밭 분양 이외에 과일나무, 꽃사슴도 분양한다.

    경기도 가평농협은 사과나무를 한 주당 7만원에, 화성의 서산농협은 포도나무를 한 주당 5만원에 분양하고 있다. 충남 아산 송악농협의 경우에는 2백만원을 농협에 예금하고 1년간 30만원 정도의 사양관리비를 부담하면 꽃사슴 한쌍을 일년간 분양받을 수 있다.


    부모님들에게는 주말농장을 효도선물로

    도시에서 소일거리 없이 지내는 부모가 있는 가족이라면 효도선물로도 주말농장을 활용할 수 있다.

    농협 주말농장의 경우는 각 지역의 농협으로, 개인주말농장은 농장주에게 전화로 분양신청을 하면 된다. 작년에 이용했던 회원들이 다시 신청하 는 경우가 많으므로 신규로 임대를 받고자 할 때는 가급적 빨리 신청하는 것이 좋다. 양지말가족농원은 회원자격으로, 아크리스백화점은 카드를 발급받아 회원이 되면 주말농장을 임대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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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