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0.01.18 20대 군인이 철책선에서 시인이 되는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95)
  2. 2010.01.16 20년전 군대, 말년 병장 죽이는 낙서 놀이는? by 진리 탐구 탐진강 (55)
  3. 2009.06.26 독사에 물린 선임하사 'DMZ서 구출하라' by 진리 탐구 탐진강 (39)
  4. 2009.06.20 군대에서 왕구렁이에게 복수당했던 공포의 실화... by 진리 탐구 탐진강 (44)
  5. 2009.06.17 DMZ 수색대 짬장의 작살, 김일성고기 잡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62)
  6. 2009.04.23 면회금지 철책선에 애 엄마가 잠입한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35)
  7. 2009.04.18 20년전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찾고보니 by 진리 탐구 탐진강 (29)


스무살 무렵이면 우리나라 남자들은 군대를 가야 합니다. 정말 꽃다운 나이입니다. 청춘의 끓는 피가 넘치는 시절입니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나라에 산다는 것도 서러운데 젊은 청춘을 군대에서 허송세월로 보낸다는 아픔도 클 것입니다.

제가 청춘을 보냈던 군대는 철책선을 넘나드는 DMZ 비무장지대 수색대였습니다. 미군과 북한군에 의해 1953년 정전협정이 이루어진 이후 비무장지대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연 그대로가 보존된 천혜의 보고입니다. 원래는 정전협정상 무장 군인이 비무장지대에 오가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 모두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무장 군인들이 비무장지대 내에서 수색 매복이나 GP(최전방 경계초소)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고 GP 근무 초병이 왕따나 고립된 공간의 외로움에 못이겨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 바 있습니다. 저는 군대시절에 최전선 비무장 지대를 오가는 특수임무를 하다보니 혼자서 생각할 일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주말에 군대 회상록을 보다가 제가 쓴 시를 발견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졸작이지만 그래도 젊은 날의 초상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졸작이지만 그 당시 시를 소개합니다.


사태리

낮은 자락의 물안개가
산맥을 거머준다.

마의 계곡엔 구름이 흐르고
날선 보도처럼 우뚝 선 거봉.

잠시 눈을 떼면
학을 탄 신선의 모습을 놓칠까.

마음 졸이는 곳, 사태리

크게 숨쉬는 옥녀탕
열목어가 무리짓고

기암을 갈라져 솟구치는 폭포 너머
철없는 새끼 노루를 유혹하는
더덕 향기 짙은 산맥, 산맥

도라지꽃 만발한 들판
하늘 넘치는 제비나비 떼

전선의 섬뜩한 기운보다
노송의 고고한 절개가 넘치는 곳

사태리,
장려한 자연의 아름다움이여.

아마도 1989년경 쓴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 사태리는 강원도 양구의 비무장지대 근처 계곡 지명 이름입니다. 민간인이 없는 계곡에 오직 수색소대원들이 살았던 곳입니다. 마의 계곡, 옥녀탕 등을 비롯한 아름다운 풍광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비경들이 즐비하고 노루 토끼 멧돼지 등 야생동물들과 더덕 다래 머루 도라지 등 산열매가 넘쳐나던 곳이었습니다. 열목어, 금강초롱을 비롯한 동식물 천연기념물도 많았습니다. 순수의 자연은 사람을 아름다운 생각으로 정화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젊은 군인들이 시인이나 문학청년이 되기도 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비무장지대라면 당장 총부리를 서로 겨누고 준전시상태의 살벌한 곳인데 말입니다. 사실 비무장지대 수색 매복은 죽음을 각오한 목숨 건 작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비무장지대를 오갔습니다. 그렇지만 비무장지대를 나와 막사로 오면 청년들이 온순하고 순수한 청년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 눈으로 목격한 아름다운 자연의 장관을 수양록에 적기도 했습니다. 수양록은 군인들의 일기입니다. 아무리 전쟁 상태나 다름없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비무장지대의 아름다운 모습은 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쓴 시도 그러한 느낌과 감상으로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소년이나 소녀들이 한 때 문학에 빠지듯이 군대 간 청년들도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는 셈입니다. 시와 문학이 순수함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장르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 20대 초반의 추억을 회상해보니 그 때는 순수의 청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세파에 찌들은 스스로를 되돌아보면 아쉽기도 합니다. 어쩌겠어요? 그것이 인생이라면. 그렇지만 소중한 추억과 순수의 마음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살아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순수 청춘의 추억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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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천하무적 짱가도 내 앞에선 고철"

태권V가 짱가를 마구 때리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태권V와 짱가의 모습을 실제 그림으로 그려 실감나게 낚서를 한 장면이 인상적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덧붙여 '임자 만날 날 있을 걸.'이란 의미심장한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궁금하겠지요? 제가 20년전 군대를 제대할 무렵에 후배나 동료 전우들이 회상록에 그린 낙서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책상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군대 회상록을 들추어보다가 전우들의 낙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앞에서 짱가는 저의 군대시절 별명입니다. 당시 힘좋고 기술좋은 작업반장이었던 저를 전우들은 '짱가'라고 불렀습니다. 짱가는 그 시절 사람들이 좋아했던 로보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런 짱가를 힘으로 눌러주고 싶던 후배 전우가 로보트 태권V 주인공을 그려 우스꽝스런 만화를 그린 것입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 짜 짱가 엄청난 기운이 (야!)'로 시작되는 노래인 우주소년 짱가의 주제곡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단번에 알 것 같습니다.

                                지난 1970년대 추억의 로보트 3인방, 짱가-태권V-황금박쥐 모습

그런 만화 낙서를 보니 군시절 추억이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여름철 폭우가 내려 작전도로가 유실되면 저와 친구인 J는 둘이서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저는 돌쌓는 기술로, J는 엄청난 괴력의 힘으로 돌을 날라 순식간에 도로를 복구했습니다. 강원도 철책에 폭설이 내리면 언제나 제일 앞에 서서 저와 J는 눈을 치웠습니다. 군대 작업의 달인, 환상의 짝꿍 듀엣이었습니다.
 
무시무시하던 선배도 말년 병장이 되면 후배들의 장난감이 되는 이유  

그래서 후배 전우들은 저와 J의 존재가 고맙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했나 봅니다. 그런 것들이 낚서로 표출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헤어지는 아쉬움과 친근감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낙서를 살펴볼까요?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을 놀리는 낚서도 눈에 띄었습니다.
"말년의 고뇌여~ 가는 날까지 우리들에게 갈굼 당할 걸 생각하니 힘드시겠지."
"짱가씨 결혼할 거니? 짱가 왈 내비둬, 이렇게 살다 껌에 붙어 갈겨."
"짱가씨. 집에서 전화왔어요. 집에 오지 말라고."
"웃기지 마. 나도 때 빼고 광 내면 미스코리아 화장실 청소라도 할 수 있다  뭐라고라~"


군대 회상록 낚서판에 동료 전우들이 말년 병장을 향해 한 마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장면

낙서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후배들이 말년 병장인 저를 갖고 노는 것 같은 구절들이 묻어나 보입니다. 사실 군대에서 제대 앞둔 말년 병장은 후배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한창 때 무시무시한 선배였다 하더라도 말년은 후배들에게 당해주면서 정겨움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하나의 전통과 같았습니다. 그것이 남자들의 세계를 지탱하는 하나의 정과 훈훈한 의리였습니다.

잠깐 퀴즈?
낙서에 나온 것인데 아래 각각 질문의 답은 무엇일까요?

1.창녀가 가장 좋아하는 야채는?

2.남녀 혼성 이부 합창은 순한국말로 하면?
3.브라자를 순한국말로 하면?

당시 군대에서 유치한 문답 놀이 정도 됐었나 봅니다. 지금 살펴보니 그 때는 저런 저질 유치 개그가 유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방위에 대한 당시 이야기도 낙서에 나왔습니다.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오는 방위에 대한 유머(?) 장난이 아닌가 생각되는 낚서였습니다.

방위란?(낙서 버전)
1.전쟁시 적진 깊숙히 침투하여 면사무소를 접수한다
2.전쟁시 적진 깊숙히 침투하여 예비군을 통제한다
3.전쟁시 도시락을 지참 9시에 출근하여 5시 반에 퇴근한다

방위의 임무 오리지날 버전
방위의 임무. 하나.
전쟁이 발발시 방위는 적진의 동사무소를 점령한다.
방위의 임무. 둘.
방위는 도시락통을 싸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도시락통을 흔들어 적의 레이더망을 교란한다.
방위의 인무. 셋.
방위는 아무리 전쟁이 치열하거나 해도 아침 9시에 근무해서 저녁 5시에 퇴근한다.
방위의 임무. 넷.
방위는 일부러 적의 포로로 잡혀가 적의 식량을 축낸다.
방위의 임무. 다섯.

전쟁발발시 적진 깊숙히 침투하여 여군들을 몽땅 꼬신다.


남방한계선을 넘어 최전선 철책을 넘나들며 비무장지대를 호령하던 전초 수색대들의 생활은 고단하고 힘들었습니다. 항상 삶과 죽음의 사선을 오가는 비무장지대 수색과 매복은 긴장과 서스펜스나 다름없었습니다. 순간 잘못 길을 가면 지뢰지대이고 잠깐 졸다가는 북한군이 목을 베어갈 준전시상태였습니다.

체감온도 영하 40도 강추위의 비무장지대에서 매일 밤 13시간 매복 작전

그러다 보니 군기가 가장 센 곳이었습니다.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모든 개인 화기 무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태권도 및 특공무술을 비롯한 최강의 무예를 마스터해야 했습니다. 체감온도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한 겨울 맹추위에 비무장지대 매복은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1박2일에서 박찬호가 강호동을 포함 멤버들이 펼친 혹한기 실전캠프는 사실 '새 발의 피'였습니다.


전우들의 낚서판(좌)과 제가 그린 그림으로 수탉이 알에서 나온 코끼리 새끼를 본 후 암탉의 외도 의심

철책을 통과해 비무장지대 내에 들어선 순간 부터는 철처하게 자신과 전우들을 믿어야 했습니다. 군사분계션까지 도달해 겨울 매복작전을 펼칠 때면 몇 발자국만 가면 바로 북한 땅이었습니다. 아무리 방탄복과 완전군장을 한 상태에서 총탄을 장전하고 있는 최강 DMZ 수색대원도 오로지 혼자가 된 느낌의 순간에는 나약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료와 말도 못하니 눈빛만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어떤 과자나 담배도 피울 수 없고 심지어 오줌도 눌 수 없어 오줌통을 들고 들어가는 비무장지대 내의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전우와 동료를 신뢰해야만 비무장지대 수색 및 매복 작전은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겨울 매복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온 몸이 얼어서 새벽 무렵 철수할 시간은 지금도 불현듯 스쳐지나가고곤 합니다. 체감온도 40도 전후의 강추위에 밤새 13시간을 야외에서 뜬 눈으로 이틀에 하루 꼴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이 상상이 가시겠습니까? 잠시 회상에 젖었습니다.

다시 낙서 이야기로 넘어가 봅니다. "티파니왈 흔들자고"라는 낙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에도 티파니가 있나 본데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추가] 댓글을 보니 1980년말 티파니(Tiffany Renee Darwish)라는 미국 팝가수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써니텐 광고에서 '흔들어 주세요'로 유명해 이 같은 낙서를 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갈 때 죽을 때 까지 똥침 놀 거다"
"기분이다. 아줌마, 단무지 하나 더 주세유"
"너 지금 가면 안올거지 그지?"
"뭐 같은 인생 간편히 살자고."
"집에 가서 잠만 자지 말고 여자 구해 장가 갈 궁리나 해라"
"수고했다 뺑이 치느라고"
"엿먹고 조총을 쏴라"

후배들의 낚서 중에는 지금에 와서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낙서를 보니 똥침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오랜 전통을 지닌 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 20년전 군대에서도 유행하던 놀이는 똥침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르는 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위의 낙서 중 '뺑이친다'는 말은 힘들게 고생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군대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일 것입니다.


제가 직접 그린 DMZ 수색대 마크(좌)와 후배 전우들이 회상록에 넣어준 자신들의 사진 모습

지난 20년전 군대에서 동료 전우들의 낙서를 보면서 20대의 용광로같은 젊은 시절이 그리워졌습니다. 지금은 편하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지만 당시는 눈덮힌 야외 들판에서 판초우의 한 장으로 밤새 추위를 이기고 생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최악의 악조건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겨울 이겨냈던 DMZ 비무장지대 수색대원들은 결코 동장군 강추위에도 쓰러질 수 없었습니다.

나 자신과 가족과 친구를 위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완수해야 했습니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남북한은 물론 지구촌을 배회하던 아픈 역사 현장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남자들만의 의리와 정을 나누고 그 자릴 지켰습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싹튼 우정과 동료애는 말년 병장을 사회로 보내야 하는 아쉬움으로 추억의 낚서를 회상록에 남겼던 것입니다. 20년만에 20대 청춘 시절을 회상하며 그 당시의 낚서를 보니 수많은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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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군대 시절 이야기입니다. 지난 1980년대 후반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 여름날이었습니다. 비무장지대에 군사령관이 방문한다는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GP(Guard Post)를 방문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 군사령관이 방문하면 GP나 수색중대는 한바탕 난리가 납니다. 의전이나 경계 근무 등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드디어 군사령관이 DMZ(비무장지대)내 방문의 날이 왔습니다. GP 경계 뿐만 아니라 DMZ에는 수색과 도로 경계조가 투입되었습니다. 저는 수색분대로 투입됐습니다. 그리고 수색분대는 K선임하사가 분대장이었습니다. 차량경계조는 중대장이 직접 지휘했습니다. 거의 수색중대 수준의 DMZ 작전인 셈입니다.

수색분대가 철책선을 통과해 DMZ에 먼저 투입됐습니다. 사전에 DMZ 수색로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요충지에 근거지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여름날의 더위는 강렬했습니다. 한참 수색 중인데 길가에 독사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상당히 큰 까치 살모사였습니다. 까치 살모사는 독성이 강해 매우 위험합니다. 당시 저는 병장이었고 저격수였습니다. 선임하사에게 아주 작은 소리로 신호를 보냈습니다.
"잡을~까요?"
"그래 잡자."

선임하사는 보기 드문 까치 살모사라서 탐이 났던 것 같습니다. 제가 K-1 개머리판으로 살모사의 머리를 눌러 제압하고 살모사를 잡았습니다. 산 채로 생포한 것입니다. 그러자 선임하사가 까치 살모사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수색분대는 까치 살모사를 생포한 후 매복 요충지로 이동했습니다. 그 때부터는 군사령관이 도로를 무사히 지나 GP에 이르는 도로를 경계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선임하사는 지루했습니다. 사실 이런 수색 경험이 많은 선임하사였습니다. 몇개월 후면 전역을 고려하던 선임하사였습니다.

얼마를 기다리자 군사령관이 DMZ의 작전 도로를 지나갔습니다. GP에서 나오기까지 상당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선임하사는 살모사를 만지작 만지작 하고 있었습니다. 선임하사가 독사를 다룬 경험이 많아서 걱정은 안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만큼은 불안해 나즈막히 말했습니다.
"선임하사님, 조심하세요"
"괜찮아."



얼마 시간이 지났습니다. 선임하사는 살모사를 왼손으로 잡았다가 오른손으로 잡았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모사를 좌우 손으로 옮기던 중 선임하사가 순간 살모사를 놓쳤습니다. 그러자 살모사가 선임하사의 손을 곧바로 물었습니다. 중요한 작전 중에 선임하사가 맹독성 살모사에 물린 것입니다. 당장 수색을 중단하고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독사에 물린 손의 팔꿈치 부분은 단단히 묶고 물린 곳의 피를 빨아냈습니다. 

그리고 무전병을 통해 긴급히 도로경계 수색분대 차량을 수배했습니다. 군사령관이 GP를 빠져나가면 도로 차량경계조 차량으로 군병원에 호송할 계획이었습니다. 군사령관이 마침내 GP를 나와 DMZ을 벗어나 철책 밖으로 통과했습니다. 곧바로 차량경계조에 선임하사를 태우고 DMZ을 빠져나갔습니다.

이미 선임하사의 손은 엄청나가 부어있었고 선임하사는 맹독에 의해 거의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갔습니다. 차량경계조는 강원도 산골에서 멀리 군통합병원으로 달렸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 필사적으로 군트럭 모양의 차량경계 수색조가 병원에 도착한 것입니다. 선임하사를 긴급히 호송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수많은 군인들과 사람들이 몰려와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모습으로 쳐다 봤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모인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쳐다보는 겁니까?"
"...(조용)..."

질문에 오히려 더 놀라는 듯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눈길을 피했습니다. 우리들끼리 쳐다봤습니다. 아뿔싸. 우리 수색분대는 수색 중 복장과 완전무장 상태로 그대로 병원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 분대는 전쟁상태의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탄복에 총알 장전된 각종 개인화기, 기관총이 장착된 도로경계차량, 수류탄과 대검을 매단 수색복장 등은 일반 군인들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저희는 장전된 개인화기와 무장을 해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DMZ을 지나 철책의 통문을 통과하면 장전된 총알 등 무장을 해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시의 군병원까지 완전무장 상태로 왔으니 다른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DMZ 작전 중이었습니다. DMZ에서만 있다보니 여긴 처음이라..."

다행히 선임하사는 치료를 잘 끝내고 무사히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소대원들이 한 마디씩 했습니다.
"말년에는 구르는 낙엽도 조심하라고 하시더니...앞으로 낙엽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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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군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1년전 일입니다. 강원도 양구의 산악지대에는 유난히 구렁이가 많았습니다. 비무지대 전초 수색대는 특히 구렁이와 자주 마주쳤습니다.

어느 날, DMZ 차량 경계를 마친 분대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막사를 향해 고참들이 도로에서 소리를 쳤습니다. 차량 경계조가 도로에서 뭔가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당신 신병이었던 저를 비롯한 동료들이 도로를 향해 달려 내려갔습니다. 멀리서도 도로에 걸쳐있는 커다란 물체가 보였습니다. 직감적으로  초대형 구렁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하나의 분대 요원들이 구렁이의 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구렁이는 도로를 지나 바로 아래 냇물을 지나 반대편을 향했습니다. 다시 차량 경계조는 냇가에 내려가 K-1 소총 개머리판으로 구렁이를 눌렀습니다. K-1 소총은 개머리판이 약간 둥그렇게 구부러져 있어 구렁이 몸통을 누르기가 용이했습니다. 여러 명이 구렁이 몸통의 머리 부근에서 꼬리에 이르기 까지 누르고 있었습니다. 2미터가 넘어 보였습니다. 모두가 난생 처음 보는 초대형 구렁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이 때 저를 비롯한 신병들이 도착했습니다. 막사에서 가져온 대형 포대를 구렁이의 머리 맡에 벌리고 밀어넣기 시작했습니다. 부대원들이 간신히 구렁이를 포대에 집어넣는데 성공했습니다. 고참들은 진 땀을 흘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저와 신병들은 다시 낑낑대며 산중턱에 있던 막사로 초대형 구렁이가 담긴 포대를 옮겼습니다.

비무장지대에는 2미터 이상의 왕구렁이가 간혹 나타나곤 한다

고참들은 구렁이를 잘 보관해 두라고 했습니다. 당시 우리 수색 소대의 고참들은 몰래 구렁이를 땅군들에게 팔아서 큰 돈을 챙겼습니다. 이번 구렁이는 엄청나게 커서 100만원이 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21년전 100만원이면 지금으로 따지면 500만원 이상이 되는 큰 돈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구렁이는 30만원~50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구렁이를 포대 두개를 겹쳐 단단히 밀봉을 해서 막사 옆의 창고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벌써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대원들은 저녁 식사를 한 후 취침시간이 되자 모두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저의 온 몸을 칭칭 감은 구렁이가 느겨졌습니다. 너무나 강력한 구렁이의 힘이 온 몸을 조여왔습니다. 거의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구렁이는 밤새 온 몸을 감고 꼼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거의 숨을 못쉴 정도의 눌림에 밤새 구렁이에게 칭칭 감겨 있었습니다.

눈을 떴습니다. 아침이었습니다. 어제 밤에 저를 감고있었던 구렁이는 꿈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고로 달려갔습니다. 저와 신병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포대 속에 있어야 할 구렁이가 없었습니다. 구렁이는 포대 두 개를 뚫고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포대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재질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도 없는 구렁이가 포대 두 개를 뚫고 나간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 모두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소대원들과 어제 밤에 있었던 구렁이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구렁이에게 밤새 온 몸이 감겨서 죽을 듯한 꿈을 꿨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소대원 전원이 같은 꿈을 꿀 수 있는지 무섭기만 했습니다. 구렁이가 요물이라고 했는데 정말 사실이구나 하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건 구렁이 복수다"라고 고참 한명이 말했습니다. 모두가 공포에 떨었습니다.

악어도 통째로 잡아먹는다는 비단구렁이와 태국의 소년 친구(?)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소대원 한 명 두 명이 갑자기 체해서 몸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저도 체해서 한 동안 하늘이 노랬습니다. 거의 모든 소대원이 함께 체했습니다. 어떻게 동시에 체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의아했습니다. 그 당시 처음 발생한 단체 급체 사건이었습니다.  왕고참이 말했습니다.
"어제 잡은 구렁이의 복수가 틀림없다. 엄청난 크기와 포스가 비범치 않았다."
"그러면 앞으로 복수가 계속 될까요?

"모를 일이다. 구렁이는 잡지 말자.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소대원들은 왕고의 충고에 따라 그 날 이후 구렁이를 보더라도 피해다녔습니다. 사실 전초 수색소대는 비무장지대를 출입하기 때문에 여름이면 매일 구렁이를 보다시피 했습니다. 우리 수색소대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곳이라 비무장지대나 인근 산악지내는 구렁이들의 낙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길가에서 구렁이를 보고서도 모른 체 지나가곤 했습니다. 구렁이는 먼저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는 순한 동물이었습니다.

구렁이와 관련된 수색소대의 일화는 그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초대형 구렁이 사건을 겪으면서 구렁이와는 가급적 상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너무 무서운 한 여름밤의 구렁이 꿈과 급체 사건으로 공포에 떨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초대형 구렁이의 창고 탈출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구도 없는 구렁이가 밀봉된 포대를 두개나 뚫고 어떻게 감쪽같이 탈출했는지. 구렁이는 영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예로부터 구렁이에 대한 설화가 많은 이유일 것입니다.

요즘 농촌이나 산촌에도 구렁이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획을 했기 때문에 거의 씨가 마른 것입니다. 비무장지대는 천연 자원의 보고입니다. 앞으로 통일이 된다면 비무장지대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남겨두어도 좋은 곳일 듯 합니다. 수십년간의 천혜의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곳은 비무장지대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비무장지대에서 머루 다래를 따먹던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구렁이와 살모사의 차이
구렁이는 알을 낳아서 새끼를 부화시키고, 살모사는 새끼를 그냥 낳습니다. 구렁이는 기본적으로 매우 크고 길지만 살모사는 길이가 짦은 편입니다. 구렁이는 독이 없지만 몸통으로 휘감아 조이는 힘이 엄청나고 살모사는 독이 있어 물리면 치명적입니다. 특히 까치살모사는 신경독과 출혈독을 모두 갖고 있어 매우 위험합니다. 구렁이의 머리는 타원형으로 생겼지만 살모사는 약간 삼각형 모양입니다. 여름철에 물가나 풀과 잡목이 우거진 곳에서는 독사에 주의해야 겠습니다.

국내산 황구렁이의 알낳은 모습(좌)과 국내산 까치살모사의 공격 직전 장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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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고기를 아시나요?
지금으로부터 20년전 군대 같은 소대에 1주일 고참 K가 있었습니다. 하루만 빨라도 깍듯이 고참으로 모셔야 하는 특수부대(?)였습니다. K는 비무장지대 수색정찰대인 우리 소대의 짬장이었습니다. 짬장은 주방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군대에서 자주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비무장지대 수색대는 소대단위로 별도로 산 속에 은거해 생활했습니다.

K는 지독한 산골의 오지에서 자랐던지라 빵도 먹지 못했습니다. K는 인스턴트 식품류들을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과도하게 특이한 식성의 고참이었습니다. 전방에서는 아침 식단이 빵이었는데 짬장인 자신이 먹지못하기 때문에 아침마다 K는 자신만의 채식 식단을 별도로 하나 더 준비하곤 했습니다. 소대원들이 빵을 먹는 시간에 K는 자신의 특별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어느 여름 날, 짬장 K가 DMZ 수색에 나섰습니다. 강원도 양구 중동부 전선의 계곡 물 속에는 소위 '김일성 고기'로 불리는 물고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K는 수색 전날부터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수색에 나선 K가 완전 군장과 별도로 몰래 준비한 것은 물고기 사냥용 작살이었습니다.
 
그 날은 너무 더웠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에 수색을 한다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비무장지대의 계곡을 지나던 참이었습니다. 짬장 K가 드디어 작살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평생 처음 맛보는 특별식을 제공하겠다."
"...네..."

수색대원들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짬장 K는 병장 고참이었을 때라서 수색대를 이끌던 시기였습니다. K는 저격병 및 M60 기관총 사수 부사수 등 몇명을 주변 경계 근무를 시킨 후 곧바로 계곡의 웅덩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방탄복 등 완전 무장도 해제하고 팬티만 입고 작살을 들고 물 속으로 유유히 헤엄쳐 갔습니다.

얼마 후 K가 작살에 커다란 물고기를 명중시켜 물에서 나왔습니다. 군대에서 김일성고기라고 불리는 물고기였습니다. 양구 산악지대 계곡에는 김일성고기가 많이 살았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김일성고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물이 차가운 지역인 양구 등 이북에만 서식하는 물고기였습니다. K는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몇번을 거듭하며 엄청난 수의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신기에 가까운 작살 수렵 실력이었습니다. 우리 수색대원들은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속으로 탄성을 질렀습니다. 비무장지대 내에서는 말을 해도 안되고 담배를 피워도 안되는 지역입니다. 물론 작살로 물고기 잡아도 안됩니다. 그러나 가끔 일탈도 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것 이외에도 구렁이를 잡거나 물찬(?) 더덕을 캐는 일도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데 그 일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습니다.

K가 다시 물 속에서 나왔습니다. 작살에 팔뚝만한 김일성고기 2마리가 동시에 잡혔습니다. 화투로 치면 1타2피인 셈입니다. 그렇게 어느 한 여름날 수색대는 물가에 있었습니다. 비무장지대 적군 수색은 안하고 물고기 수색만 한 셈이었습니다. 김일성고기를 잡았으니 전혀 근무를 안한 것은 아닙니다만...  K의 물고기 사냥이 끝나고 수색대원들은 황급히 비무장지대를 빠져나왔습니다.

열목어는 강원도 중동부 지역 부근부터 이북의 차가운 물에서만 서식하는 산천어 종류이다

막사에 도착하기 전 냇가에서
K가 드디어 요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수색대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건 김일성고기가 아니다."
"그럼 무슨 물고기입니까?"

"열목어. 천연기념물이다"
"...(허걱)..."

우리는 말문을 닫았습니다. 천연기념물을 이렇게 많이 포획했으니 천벌을 받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물고기를 먹는다는 기대감 등 각자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실 강원도 양구지역 1급수의 깨끗한 물에는 김일성고기라고 불리는 산천어가 많이 있었습니다. 물이 맑고 차가운 곳이라서 그런지 남쪽 지방과 같이 물고기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몇종의 산천어 부류가 주로 서식했습니다.

김일성고기를 열목어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잘못된 용어이기는 합니다. 눈이 튀어나와 망둥어처럼 생긴 물고기를 부대원들은 김일성고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수색대원들은 열목어와 김일성고기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열목어와 김일성고기는 산천어 형제뻘 정도 되는 셈입니다. 강원도 양구 지역의 열목어는 눈이 빨개서 김일성고기로 불리게 됐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김일성고기는 백두산 천지에 김일성이 산천어를 풀어서 서식하게 해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일성은 생전에 백두산에서 기른 산천어를 보양식으로 즐겨 먹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날 우리 수색대원들은 짬장 K가 만든 열목어 회를 실컷 먹었습니다.
천연기념물을 먹었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그런데 비무장지대에서는 정전협정상 천연기념 포획에 대한 위반 규정은 없지 않을까요?)

[추가] 열목어는 맛은 그다지 없었습니다. 젊고 배고팠던 20대 초반의 군인 시절이라서 무엇이든 식성이 좋았던 터라 주는 대로 잘 먹었을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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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시절에 아이 엄마와 군인 아저씨의 특별한 면회의 사연을 이야기 할까 합니다. 당시 제가 근무하던 부대는 철책선 부근에서 별도로 막사 생활을 하는 수색소대였습니다. 일반적으로 GOP 철책선에  근무하는 군인들과는 달리 최전방 DMZ 수색소대는 소대 단위로 별동대 처럼 은밀한 곳에 1개 소대가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특수 작전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80년대 중후반의(20여 년 전의) 군대에서는 최전방 철책선이나 비무장지대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면회나 외출 외박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GOP 철책선의 군인들은 6개월 단위로 후방 부대와 임무 교대를 하게되면 면회나 외박 등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DMZ 수색소대는 1년 365일을 비무장지대나 철책선 근처에서만 훈련과 작전을 하는 임무인지라 면회 외박은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오직 휴가만이 유일하게 민간인(?)을 볼 수 있었습니다. 휴가는 수색소대원들 모두가 단체로 휴가를 갔습니다.

그러나, 단체 휴가를 다녀온 후로 길게는 9개월을 비무장지대나 철책선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면회가 안되는 줄 모르고 아들을 만나러 왔다가 그냥 울고돌아간 어머니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저희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저는 통신보안 군대 전화로 연대본부에 오신 어머니와 짧은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저는 통화한 뒤 몰래 막사 뒤에 숨어서 소리없이 눈물을 삼켰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지금부터 입니다. 철책선 밖에서 수색 훈련이나 작전을 수행하던 시절, 어느 날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산 속이라 날이 일찍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소대장이 K상병과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K상병은 저보다 고참이었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군대에 온 늦깎이 군인이었습니다. 소대장은 K상병에게 무슨 사연을 듣고난 후 상당히 당황한 모습으로 잠시 번뇌에 싸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후 소대장은 결단을 했는지 긴밀하게 K상병에게 지시를 했습니다.

[이준익 감독 영화 '님은 먼 곳에' 2008년작]
(베트남전에 참전한 남편을 면회하기 위해 위문공연단으로 자원한 아내를 소재로 한 영화)

그 날 밤에 K상병은 막사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K상병은 저녁에 조용히 막사를 빠져나가 산등성이를 타고 마을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사연인즉, K상병은 군대 입대하기 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K상병 부부는 아이도 하나를 낳았습니다. 사랑스런 아내와 간난 아이를 두고 군대에 입대한 K상병은 항상 아내와 아이에 대한 그리움에 괴로와 했습니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내는 너무나 남편이 보고싶어 아이를 안고 강원도 최전방으로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부부는 이미 편지를 통해 비밀리에 만날 작전 계획까지 마련해 두었습니다. 몇날 몇시에 수색소대 막사로부터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만나는 계획이었습니다. 거의 첩보작전에 가까운 감행이었습니다. 아내는 무사히 아이를 데리고 마을로 잠입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K상병은 막상 D데이가 왔을 때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내와 편지를 주고 받을 때는 몰래 하룻밤을 잠깐 마을에 다녀오면 아무도 모를 것이란 생각이었지만 막상 D데이가 되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만일 소대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막사를 빠져나갔다가 발각될 경우 탈영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K상병은 사실대로 이실직고하고 소대장의 선처를 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소대장은 원칙대로 한다면 절대 K상병을 마을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소대장은 K상병에게 도로를 통해 마을로 가지말고 산등성이 수색로를 타고 마을에 몰래 다녀올 수 있도록 지시를 한 것이었습니다. K상병도 모험이었지만 소대장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결단이었습니다.

K상병이 마을로 내려간 길은 일반 군인들은 모르는 수색소대원들 만의 비밀 개척로였습니다. 소대 회식을 할 경우 마을에 몰래 내려가 소주를 추진해 오던 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K상병은 몰래 마을에 내려가 그토록 보고싶던 아내와 아가를 만나 애틋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소대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무치고 보고싶었으면 K상병과 아내는 이토록 무모할 수 있는 만남을 추진했을까.

당시 K상병이 몰래 마을로 내려가 아내와 아가를 만난 사연은 우리 소대원 이외에는 전혀 모르는 야사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소대장의 나이 보다 K상병이 나이가 더 많았습니다. 보통 소대장을 소위나 중위가 맡게되는데, 대학원을 졸업하고 온 K상병 정도면 한두 살 이상이 더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군대는 나이와 상관없이 계급에 의한 위계질서가 중요합니다. 소대장이 면회 불가 원칙을 고수했다면 K상병은 아내와 아이를 눈 앞에 두고 만나지 못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대장은 나름대로 자신의 군생활 명운이 걸린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지만, K상병의 사연도 인간적으로 고려해 배려심을 갖고 현명한 판단을 해주었기때문 입니다.

군대에는 수많은 사연의 군인들이 많습니다. 보고싶은 여자친구가 변심한 것을 알고 탈영하는 군인이 있는 것도 그 젊음의 끊는 피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탈영은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K상병과 같이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늦깎이로 입대해 고생하고 제대하는 경우는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보는 광경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K상병 처럼 결혼 후 입대한 경우는 최전방 보다는 후방부대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해주는 제도를 시행하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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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얼마 전 남북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에서 산불이 발생해 몇일간 계속 번졌습니다. 북한측에서 화공작전으로 산불을 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사실 비무장지대에서 산불이 일어나면, 맞불을 놔서 꺼지게 하거나 그냥 비가 와서 자연적으로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이번 산불도 다행히 최근에 비가 와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 비무장지대라는 특수한 환경이 존재합니다. 제가 군대 시절에 비무장지대에 근무했기 때문에 실제로 남북분단의 현실을 누구보다 피부로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화 'JSA(공동경비구역)'은 비무장지대 내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이 겪는 에피소드를 다소 과장되게 표현을 했지만 어느정도 상황을 묘사한 측면도 있습니다.

비무장지대는 군인이라도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구역입니다. 특별하게 출입증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이 비무장지대를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전협정상 군인들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무장출입증도 까다로운 심사절차에 의해 승인된 극히 일부의 특수 군인에게만 발급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비무장지대 출입증이 발급된 사람은 여러가지로 선택되고 검증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군대시절 생각이 나서 지난 20년전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찾아봤습니다. 예전 군생활회상록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비무장지대 출입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는 민정경찰대, 수색중대, 전초대, 수색정찰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것 같습니다.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 출입증 앞면과 뒷면 모습]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 상용 출입증'이란 명칭과 함께 '이 출입증은 민간행정 및 구제사업 제관서에 소속된 사람의 사용에 한함'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 출입증 소지자는 비무장지대 남경계선의 통과 및 비무장지대 남반부에서의 이용에 대한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 비무장지대 북쪽 부분을 출입하는데는 유효하지 않다.'고 부연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뒷면에는 영어로 똑같은 내용이 씌여 있었습니다. 이미 20여년이 지난 아주 오래 전 과거이지만 젊은 시절에 목숨을 걸고 비무장지대를 누비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갔습니다. 


아쉬운 것은 남한의 경우 '군인'이 비무장지대를 출입하기 위해서는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을 위한 인원으로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유엔군사령부, 흔히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같은 허가를 받은 군인을 '민정경찰(DMZ Police)'이라고 표현합니다. 북한은 '민경대'라고 합니다.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정전협정에 기인합니다.

지난 1953년 7월 27일, 미국
과 북한, 중국이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6.25 전쟁이 끝나고 남과 북 사이에는 휴전선인 군사분계선(MDL)이 생겼습니다. 당시 남한은 배제된 상태에서 정전협정문에 서명이 된 것입니다. 정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으로 2Km, 북으로 2Km 각각 사이의 땅이 바로 비무장지대입니다. 말 그대로 하면 군사적인 무장을 하면 안되는 지역인 셈입니다. 그리고 남북한은 비무장지대가 끝나는 지점에 철책을 만들어 대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① 어떤 군인이나 민간인도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북 각 지역 사령관의 특정한 허가가 있어야 하며(정전협정 제1조 제8항), ②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에 관계되는 인원과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를 얻은 인원이 아니면 비무장지대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정전협정 제1조 제9항). 또한 ③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진다(정전협정 제10항).

궁금증이 생겨서 북한의 비무장지대 출입증은 어떻게 생겼는지 검색을 해보니 하나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정전협정에 따른 문구는 없고 비무장지대 출입증의 소지자 신분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소비자는 북한의 민경대 소속 군인일 것입니다. 영화 JSA에서 남북한 병사는 아마도 이러한 신분증을 각각 소지하고 있었을 듯 합니다. 


     [좌측이 북한의 비무장지대 출입증 모습]

우리나라가 남북분단 국가라는 상징적인 장소가 비무장지대라면 비무장지대 출입증은 젊은 군인들이 온몸으로 분단의 현실을 느끼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무장지대에는 미확인 지뢰지대들이 도처에 위험이 산재해 있습니다.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선을 넘나드는 곳입니다. 뉴스에서도 여러번 보도된 GP에서 총기사건이 바로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군대 시절에는 어떻게 무시무시한  공포의 비무장지대에서 살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오싹하기만 합니다.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민족의 아픔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 같아 상념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전쟁을 잠시 중단한 개념인 휴전에 의한 정전협정이 아니라 진정으로 남과 북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종전으로 바꿔 평화협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습니다. 언제까지 동족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야 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서로 같은 민족으로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도 큰 진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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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