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3.24 시골 1등→서울 40등→1등 공부방법 '집중력' 문제였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60)
  2. 2009.08.30 야생 산머루, 10배의 성분과 효능 만났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41)
  3. 2009.08.09 땡칠이 황구의 사진 본능 '심오한 개 시리즈 최후판(?)' by 진리 탐구 탐진강 (46)
  4. 2009.08.01 대왕 지네의 습격과 막내 남동생의 사연 by 진리 탐구 탐진강 (19)
  5. 2009.06.27 11살때 홀로 산을 넘다 만난 여름밤 귀신불의 공포 추억 by 진리 탐구 탐진강 (45)
  6. 2009.05.07 자식위해 평생 불구가 되신 어머님 전상서 by 진리 탐구 탐진강 (86)


얼마 전, 이웃 블로거이신 따뜻한 카리스마님의 글을 읽고 뜻한 바 있어 블로그 자서전을 써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떤 이야기를 써야할지 아직 감이 잡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왕 결심했으니 용두사미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볼까 합니다.

개인의 일생을 담는 만큼 자서전 이야기가 다른 분들에게는 삶의 궤적이 달라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넉넉한 마음으로 상대방 입장에서 그 인생의 족적을 이해주는 아량과 배려를 부탁드리며 첫번째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이미 제 블로그의 글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첩첩산중 산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에 나올 만한 초가집에서 살면서 유년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전기도 없고 라디오 TV도 없었습니다. 나무로 가마솥에 밥을 짓고 그 군불로 방을 데워 살았습니다. 이쯤되면 40대 나이의 분들은 대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옛날 초가집에 살던 선조들 이야기를 검색신공으로 찾아보면 알 듯 하니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공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에게 공부하면 어머니의 영향이 가장 큽니다. 어머니는 홀로 저를 낳고 논밭을 일구며 소까지 키우며 20대를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가 병역을 기피해 서울서 수년간 도피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6살까지 '애비없는 자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홀로 저를 키우면서도 늘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동화책은 언강생심이었습니다. 구술로 어머니가 이야기해준 전래동화가 유년시절 남아있는 공부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날 공책 한권을 구해왔습니다. 그리고 '가나다라' 국문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당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아마도 7살부터 국어를 공부한 것 같습니다. 그 때 산골마을에서 초등학교 입학 전에 공부를 가르치는 가정은 없었습니다. 산간오지 산골 마을의 당시 부모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졸업도 못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도 노동력의 대상이지 공부를 가르칠 엄두도 못했던 시절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저도 다른 산골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흘러간 유행가 가사처럼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고사리 손에 낫을 들고 땔감 나무를 베고 소에게 먹일 소꼴을 베야 했습니다. 아이 때부터 혼자 고생하는 어머니를 돕는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되면 호롱불 밑에서 어머니에게 한글을 배웠습니다. 한글을 익히며 구구단 산수를 배웠습니다.

저는 9살이 되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왜 9살에 학교를 갔냐구요? 당시 산골마을에서는 모두 9살에 학교에 갔습니다. 큰 비가 내리면 산골 계곡에 순식간에 물이 불어 나이 어린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늦게 학교를 보냈던 이유입니다. 자동차도 없던 신작로, 늘 한적한 길을 따라 2Km 이상을 까만 고무신 신은 아이들이 걸어서 그렇게 학교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한 후 한글을 쓸 줄 아는 학생은 저 밖에 없었습니다. 유치원은 물론 어떤 공부시설도 없었으니 입학하고 처음 '가나다라'를 배웠던 시골 학교였습니다. 전교생 100명도 안되는 시골학교에서 줄곧 1등이었습니다. 한개 학년에 하나의 학급만 있었으니 급장(반장)이었습니다. 그러다 2학년에 되고 2학기에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큰아버지가 적극 서울 유학을 권했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서울에 온 후 시내 종로의 교동초등학교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서울은 역시 달랐습니다. 첫 시험을 치렀는데 반에서 40등 정도였습니다. 당시 한 반이 60명 가량이었으니 하위권 성적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사귄 친구들도 중하위권 친구들이었습니다. 저는 30등과 40등 사이를 계속 오갔습니다. 당시 큰어머니는 종로에서 세탁소를 운영하셨습니다. 세탁소에 딸린 방에서 기거하던 시절이라 공부할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4학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집이 당시 서울의 달동네 서대문 홍은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잠시 버스를 타고 교동초등학교를 다녔으나 갑자기 학군이 생겨 홍은동의 홍제초등학교로 전학을 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큰집은 단칸방 신세였습니다. 친구도 없고 전학을 하니 고향의 어머니 생각만 가득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혼자서 책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역사 책을 좋아했습니다. 당시 과외가 유행이었지만 과외를 받을 처지가 아닐 정도로 궁핍하고 가난했습니다.

다음 해 5학년이 됐습니다. 어느 날 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 아이가 생일 파티에 남자 여자 아이들을 초청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초대했습니다. 저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화가 나서 그 아이의 집에 쳐들어 갔습니다. 문전박대당했고 저희들의 항의로 생일파티는 난장판이 났습니다. 서울에 유학와서 첫번째 커다란 일탈이었습니다. 여자 아이 엄마와 우등생 친구들에게 심한 욕설을 들었습니다.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뭐하는 짓이야"
"거지같은 양아치 **들아, 꺼져!"

그 날 이후 저는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 공부 잘하는 것들아, 한번 해보자' 마음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서 교과서를 외웠습니다. 큰 소리로 책을 읽었습니다. 5학년 중간고사는 여전히 30등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실망스런 등수였습니다. 그러나 좌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동안 공부를 너무 안했기에 기초가 부족했습니다.

그 해 겨울 기말고사에서 드디어 20등대에 처음 진입했습니다. 한번 공부 습관이 생기다보니 재미를 느끼게 시작했습니다. 5학년 기말고사에는 10등대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친구들도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큰아버지 몰래 가정통신문 성적표에 도장을 찍어서 담임에게 제출할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반에서 늘 1등을 하던 여자 아이 K가 3등으로 밀려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속으로 좋아하던 아이였습니다. 크리스마스에 그 아이에게 카드를 쓴 후 책상서랍에 몰래 넣었습니다. 수줍던 시골 소년으로서는 엄청난 용기였습니다.
"OO아, 너무 속상해 하지마. 너는 다음에 1등할 수 있을 거야. 크리스마스 잘 보내."



그 후 그 여자 아이 K에게 카드를 받았습니다.
"고마워. 너도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 너 공부 못하는 줄 알았는데 등수 많이 올랐더라. 열심히 해."

사실 예상하지 못한 K의 크리스마스 카드 답장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받아본 여자의 크리스마스 카드였습니다. 당시 카드가 보편화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K의 카드는 설레게 했습니다. '그래. 더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속으로 또 다짐했습니다.

다시 6학년에 올라갔습니다. K는 다행스럽게 같은 반이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10등 안에 처음 진입했습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 첫 성적표를 들고 낙담하고 좌절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놀랐습니다. 반에서 6등이었습니다. 장족의 발전이었습니다. K는 1등이었습니다. 속으로 내 일 처럼 기뻤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렀습니다.

미처 상상하지 못한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적은 제가 1등이었습니다. 도저히 서울 학생들과 경쟁해 1등은 할 수 없다고 아예 포기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책상서랍 안쪽에 누군가 보낸 편지가 있었습니다. 짝사랑하던 K였습니다.
"탐진강, 1등 축하해. 너 정말 대단하구나. 나도 기뻐. 곧 중학생이 되는구나. 중학교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자." 

시골 초등학교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후 종로의 교동초등학교와 홍은동 홍제초등학교에 이르는 초등학생 시절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K와는 그 후 어떻게 됐냐구요? 과연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상위권을 유지했을까요? 아쉽지만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공부 잘하는 비결
-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하는 습관을 키워주어야 한다
- 공부하라고 잔소리 하는 것 보다 부모가 먼저 책읽는 모습을 보여주자
- 아이가 공부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 (맹모삼천지교)
- 책읽을 때는 소리내어 읽고 연습장에 써보는 연습을 한다
- 목표를 정하고 끈기와 집중력을 갖고 공부한다
-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자
- 꾸준히 노력하는 자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된다
- 교과서만 충실히 해도 충분히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
- 서로 격려하는 선의의 경쟁자를 두고 공부를 해보자


* 앞에서 언급했듯이 좌절과 도전의 자서전 기록입니다. 그냥 어떤 삶의 궤적인지 그대로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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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에 시골에서 만난 산머루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름 휴가를 맞이해 시골에 갔습니다.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보니 계곡 방향에는 덩굴 식물들이 많았습니다. 어릴 적에 산에서 놀던 기억이 있어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덩굴에 파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입니다. 머루였습니다. 산머루 또는 산포도라고 하는 열매입니다. 머루는 포도과에 속하는 넝쿨성 목본식물로100∼1,300m 지역의 산기슭에서10m 안팎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제가 살던 시골이 산골이다보니 산머루를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 따먹던 산머루를 발견하니 반가웠습니다. 사실 처음 보는 사람은 산머루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파란 열매 상태에서는 먹을 수 있는 열매인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파란 열매가 익어서 와인 빛깔의 자주색 모습을 띠게 되면 어느정도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아직은 익지않은 산머루였기에 맛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작은 열매이지만 산머루가 익은 상태에서는 약간 신맛이 나지만 거의 포도맛을 보여줍니다. 어린 시절, 산에서 만나면 신났던 추억의 산마루를 보면서 많은 상념에 젖어 봤습니다. 기념으로 찍은 산머루의 야생의 모습을 감상해 보실까요.

포도의 조상, 산머루는 10배 이상 농축된 성분과 효능


산머루의 효능은 동의보감을 비롯한 전통의학에도 나와 있기도 합니다. 산머루는 칼슘, 인, 철분, 회분 및 안토시아닌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보혈 강장 및 자양 효과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머루는 식용, 관상용, 약용으로 쓰이며, 열매는 머루주를 담그고 관상용으로는 정원수, 과수로 심을 수 있습니다. 약용으로는 예로부터 열매로 종창, 종화, 화장, 동상, 식욕촉진, 해독, 보혈, 폐질환, 유종안질 무독증, 지갈, 이뇨, 두통, 요통, 두풍, 대하증, 양혈, 폐염, 폐결핵, 허약증 등에 널리 사용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머루는 포도의 조상으로 10배 이상 농축 되어 있어 효과가 매우 우수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포도의 원조격인 머루는 칼슘, 인, 철분, 회분 등의 성분이 포도보다 10배 이상 성분이 높고 특히 항산화작용을 하는 안토시아닌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기도 합니다. 머루의 효과는 저혈압, 혈액순환, 부인병에 좋고 성장기 어린이 두뇌발달에 도움을 주며 머루의 신맛은 식욕촉진과 소화촉진을 돕는 알칼리성 식품입니다. 또한 불면증, 변비, 피로회복, 숙취,피부 미용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산머루는  보통 산 속의 응달 지역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산머루는 냇가 근처에서 발견됐습니다. 아마도 냇가 근처의 계곡에 응달 지역이라 산머루가 자생하는 듯 합니다.


산머루는 머루주를 담그면 맛이 좋습니다. 포도주를 야생 산머루로 담근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산골에서도 야생 산머루가 흔하지않고 다량을 따는 일도 힘들어 주로 머루주를 담그는 일은 어렵습니다. 주로 매실주를 담그곤 합니다. 이번 여름휴가에도 매실주를 많이 마셨습니다. 냇가에서 매실주와 함께 유유자적하는 분위기도 일품입니다.


머루의 크기는 콩알만 합니다. 일반 포도에 비해 엄청나게 작은 셈입니다. 그래서 머루가 달려있는 모습을 보면 작은 포도송이를 보듯이 앙증맞기도 합니다. 이제 산머루가 익어가는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날씨가 한 여름을 지나면서 산머루가 익어가는 모습이 작은 포도송이처럼 보인다.[자료사진]

머루와 다래는 산골 소년의 추억입니다. 산골에서 머루와 다래는 시골 아이들의 간식이 되고 했기 때문입니다. 과자도 사탕도 없던 시절, 소중한 머루와 다래는 그 만큼 소중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도 산머루를 먹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산머루의 농축된 효능은 건강을 지켜준 자연의 선물이었습니다. 산머루를 보면서 야생의 다래, 산딸기 등이 생각났습니다. 아직도 야생의 산머루는 그 자리를 지키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가운 산머루를 만나서 즐거운 추억이 된 여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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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집에는 똥개 한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 똥개는 집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방문하거나 지나가는 차량이 있으면 카랑카랑하게 짖어대는 개. 똥개라지만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셈입니다. 시골 마을에서 개는 사람과 공존하는 가족과 같은 존재입니다.

예전부터 시골집에서는 항상 개를 키웠습니다. 백구, 황구 등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곤 했습니다. 지금은 황구 한 마리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황구는 대문도 담벼락도 없는 외딴 집에서 개는 가족의 안전도 지켜주는 경호원 역할도 해줍니다.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 산짐승이나 도둑으로부터 집안을 보호하는 책임도 도맡아 하는 것입니다.

황구는 여름휴가를 맞이 해 사람들이 붐비자 반가운 모양입니다. 이미 휴가차 방문시 우리들을 몇번 봤던 터라 황구는 짖지는 않았습니다. 황구도 가족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초등학생 시절에 키웠던 백구는 거의 오리(약 2Km) 밖에서도 사람을 알아보고 뛰어 올 정도였습니다. 당시 백구는 목줄도 없어 마음껏 산과 들을 뛰놀았는데 지금의 황구는 묶여있어 아쉽기도 합니다.

시골집 앞의 풍경입니다. 대문도 울타리도 없습니다. 지금도 시골 마을은 대문이나 울타리가 없는 집이 많습니다. 오른쪽에 황구가 사는 개집이 있습니다.

황구가 앞발 펴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원하게 몸풀기를 한 황구가 사람이 다가오자 반가워 합니다.

황구가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합니다. 유행하던 '심오한 개시리즈'로 치자면 '개 메롱' 정도의 제목일 듯 합니다. 그렇지만 일어서서 앞발을 들고 자세를 취한 것이니 일반 '개 메롱' 보다는 높은 '개 고난도 메롱'이라 할 만 합니다. 한편으로 땡칠이가 된 황구의 모습입니다.

황구가 카메라를 향해 앞 발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황구가 일어서서 앞 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더 이상 '심오한 개 시리즈는 없다'라고 선언하는 듯 합니다. 자신의 머리를 가린 황구의 모습이 마치 부끄러워 얼굴 가린 사람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카메라 촬영을 포기했습니다. {추가} 댓글에 보니 '개인촌'이란 표현을 제안했는데 얼핏 괜찮은 듯 합니다.(^^)

시골집의 또 다른 식구인 황구의 모습은 언제나 아이들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황구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순한 황구는 개구쟁이 아이들의 등쌀에도 항상 즐겁게 놀아줍니다. 어린 시절에는 백구나 황구는 어른이 되어서도 늘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곤 합니다.

이제는, 보너스로 '심오한 개 시리즈'의 주요 몇 장면을 소개합니다. 이미 본 사진이겠지만 모르는 분을 위해 서비스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개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담긴 것들입니다.
개낑겨
 개헌터
 개판

 개굽신

 개그네

 개념상실

 개부끄

 개졸려
 개이불
 개홍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개탈모

개티즌

개수녀

개코스

 개바라기

 개사자

개타짜

사용자 삽입 이미지개극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개돼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개이클

 개랠리

 개간지

 개장사

 개팔자

 개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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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를 맞이해 온 가족들이 모처럼 함께 모였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막내 남동생이 결혼함에 따라 3남 1녀가 모두 결혼해 함께 모인 것입니다. 고속도로에서는 갑자기 국지성 집중폭우가 내려 운전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고속도로에 그토록 강력한 폭우는 처음이었습니다. 시골로 가는 길은 때론 교통체증으로, 때론 잡중폭우로 힘들었지만 한편으로 나중에 추억이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각각 사는 곳은 다르지만 가족이 함께 모이니 부모님이 가장 흐뭇해 하십니다. 노부부가 살던 산골 마을의 외딴 집은 자식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면서 시끌벅쩍 하기 시작합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한 둘째 남동생이 가장 먼저 도착했고 막내 남동생이 저녁에 가장 늦게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가족들이 모두 모여 모깃불을 피우고 즐겁게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화장실에 들어갔던 누이 여동생이 깜짝 놀라 뛰쳐나왔습니다.
"으악, 지네다. 대왕 지네가 나타났어."



커다란 지네가 화장실 벽을 타고 내려왔던 것입니다. 시골 생활에 익숙한 막내 남동생이 가장 먼저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막내 남동생이 화장실을 습격한 대왕 지네와 사투(?)를 벌였습니다.

지네는 남동생이 휘두른 쓰레받기 공격을 몇대 맞았습니다. 그리고 지네는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납짝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죽은 듯이 보였던 지네는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대왕 지네의 수많은 발들을 살펴보니 조금씩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남동생은 이내 지네의 머리에 마지막 최후의 일격을 가했습니다. 저녁에 가족들의 공간을 습격한 지네는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사실 남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개구리, 뱀 등을 잡는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남동생에 물었습니다.
"야, 무섭지 않냐? 왜 그렇게 용감하냐?"
"어릴 때 부터 개구리도 잡고 뱀도 많이 잡았잖아."



"왜 그렇게 많이 잡았냐?"

"큰 형도 알다시피 학생 시절에 용돈이 없었잖아. 그런데 뱀이나 개구리를 잡아서 팔면 돈이 됐어."

사실 가난한 산촌 마을에서 여름에는 뱀을 잡고, 겨울에는 식용 개구리를 잡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일입니다.
그러나 10여년 전만 해도 산골에 뱀이나 개구리를 사러오는 장사꾼들이 있었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매제가 이야기를 거들며 막내 남동생에 말했습니다.
"예전에 시골에 처음 왔을 때 고마웠어."
"아, 개구리..."

그 개구리 사건은 매제가 시골에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처음 왔을 때 일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개구리를 잡아서 구워먹던 자리에 매제가 함께 있었습니다. 막내는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개구리를 동네 다른 아이가 먹으려 하자 막내 남동생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답니다.
"야, 이거 우리 매형 꺼야. 내 놔. 주글라고. @@$$%%"

매제는 처음 시골에 와서 그렇게 막내 남동생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당시 외롭던 매제에게는 천군만마와 같던 초등학생 막내 남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도 매제가 시골에 오면 언제나 함께 물고기도 잡고 시골 정취를 가르쳐주던 아이였습니다. 지금은 누이와 결혼해 당시 막내 남동생과 비슷한 나이의 초등학교 고학년 남자 아이 둘을 두고 있습니다. 막내 남동생에게 남다른 추억을 간직한 매제일 것입니다.

누이 여동생은 뱀이나 개구리와 함께 놀던 막내가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매제와 누이의 결혼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막내였습니다.
그런 막내 남동생이 이번에는 대왕 지네를 잡았습니다. 누이 여동생을 놀라게 한 대왕 지네를 가장 먼저 달려와 제압한 것입니다.

누이와 매제에게는 막내 남동생이 늘 든든한 후원자인 셈입니다. 한 여름밤의 가족 휴가에서 잊지못할 추억 하나를 대왕 지네가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누이 좋고 매제 좋은' 막내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막내 남동생의 인해 다시 가족들에게 평화로운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산골 마을의 '골목 대장' 막내 남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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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에 홀로 산속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마도 11살 때 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이 넘었습니다. 당시 서울로 일찍 유학(?)을 왔고 큰집에 기거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혼자서 서울에서 시골 고향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지방 대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차비를 아끼기 위해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몇번 정도 오는 시골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장터행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시골 장터는 5일장이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이라서 5일장 장날에 맞춰 시골 마을에 가는 날을 정했습니다. 그 날도 5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다소 안도하고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터행 시외버스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보니 시외버스에는 혼자서 타고 있었습니다
.

운전기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학생. 어디까지 가나?"
"장터요."

"그래. 그럼 여기서 내려."
"네. 여기는 장터가 아닌데요."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장터야. 어서 내려."
"얼마나 걸리나요?"

"아마 20분만 걸어가면 장터야."
"네."

어쩔 수 없이 저는 내렸습니다. 운전기사의 말을 듣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20분을 걸어가도 장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저녁노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버스에 어린 아이 한명만 타고 있자 종점까지 가지 않고 저를 내리라고 하고 버스를 되돌려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30년전에 여름 납량특집으로 유명했던 '전설의 고향'의 한 장면


장터에서도 2시간을 넘게 걸어서 산을 몇개 넘어가야 시골 고향 마을이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장터에서 고향마을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산길을 넘어가야 하는데 이미 장터가 끝날 시기였습니다.

무조건 달렸습니다. 장터에서 고향 사람들을 못만나면 혼자서 산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장터나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장날은 끝난 상태였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장이 끝나고 이미 마을로 떠나고 없었습니다.

여름 날도 이미 저물고 어둠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산길을 혼자서 넘기로 했습니다. 산길은 빨리 어두워졌습니다. 나무 막대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산길에는 뱀이나 산짐승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일종의 호신용이었습니다.

산길에 들어서자 갑자기 풀숲에서 산새가 소리를 지르며 날아갔습니다. 움찔했습니다. 소름이 돋았습니다.
조금 후 길가에서 뱀 한마리가 지나갔습니다. 더욱 무서워졌습니다. 식은 땀이 흘렸습니다.

앞만 보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습니다. 더 어두어지기 전에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산길을 한참 걸었습니다.
드디어 첫번째 산고개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한숨을 돌렸습니다. 갈대가 산고개에는 많았습니다. 밤하늘에는 흐린 구름 사이로 반달이 떴습니다.

달빛을 바라보다 산중턱을 보니 무덤이 하나 보였습니다
.
무덤을 보니 무서움이 밀려왔습니다. 당시 '전설의 고향'이 여름 납량특집으로 방송되던 시절이라서 산속에서 만난 무덤의 공포는 컸습니다. 구미호가 무덤 위에 서서 저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엄청난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다시 뛰었습니다. 그런데 신발이 벗겨졌습니다. 달리던 속도로 인해 신발은 저 뒤에 있었습니다. 뒤돌아 달려가 신발을 들고 다시 뛰었습니다.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한참을 달리자 두번째 산고개에 도착했습니다. 산고개에는 거친 바람이 불었습니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발 아래 뭔가 밟혔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죽은 토끼의 발이었습니다. 산짐승에 잡아먹힌 토끼의 발만 남았던 것입니다. 다시 계속 달렸습니다.

마침내 마을의 불빛이 보였습니다.
그 마을은 할머니가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냇가의 돌다리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렇게 돌다리를 모두 건넜습니다. '아, 이제는 살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고생했던 생각에 마지막 산고개를 향해 뒤돌아봤습니다. 산고개에는 파란 불빛이 강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산고개의 파란 불빛에 눈이 고정되었습니다. 파란 불빛이 산고개에서 움직였습니다. 저의 눈은 파란 불빛의 움직임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발길이 저절로 그 산고개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속에서는 '산고개로 가면 안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발길은 산길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머리 속 생각과 몸이 따로 놀았습니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안되는데' 이렇게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발길은 전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고 산고개의 파란 불빛만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눈으로 본 '파란 불빛'은 너무나 아름다운 광채였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은 '파란 불빛을 보면 안돼'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탐진강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냇가에 물을 기르러 들렸다가 손자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할머니집으로 와서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파란 불빛은 무엇이었어요?"
"그건 귀신불이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예전 6.25 전쟁때 산고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단다. 그 이후로 날씨가 흐린 밤에는 귀신불이 나타난단다." [할머니는 도깨비불(인불)을 귀신불로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준 후레시를 들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삼촌도 있었지만 차마 같이 가자고 말을 못했습니다. 할머니집에서 20분 정도 신작로를 걷고 산중턱으로 가야 부모님이 사시는 고향집이었습니다. 고향집에 가는 동안에는 도깨비불의 잔상과 호랑이가 오버랩되어 머리 속을 어지럽혔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습니다. 결국 고향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이제서야 마음이 푸근해 졌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무서웠던 한 여름밤, 산속의 공포 추억이 그렇게 잠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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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칠순이 다 되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계십니다. 호랑이같은 아버지와 함께 부부의 연을 맺은 이후 어머니는 청춘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자식들은 대도시에서 결혼해 살고 있고, 막내 남동생이 가까운 도시에서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곤 합니다.

그러나, 장남인 제가 자주 부모님을 찾아뵙지도 못해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다리 한쪽이 불편하십니다. 어머니가 불편하신 다리로 평생 산골에서 힘든 농사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제게는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불행하게도 예기치 못한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절게 된 사연과 혼자서 저를 키운 새색시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은 까마득한 두메산골입니다. 아직도 온통 산으로 뒤덮인 고향은 비포장도로를 통해 하루에 세 번 버스가 다닐 정도로 산골 오지입니다. 부모님은 산골 외딴집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름 휴가 만큼은 시골 집에 동생들 가족들과 일정을 맞춰서 함께 가곤 합니다.

어머니는 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으신 분이셨고 아버지는 초등 교육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지난 1960년대는 교육 환경이 매우 열악한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시골 마을에 잠시 머물던 시절에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을 '주먹자랑 하지 말라'고 알려진 벌교에서 지냈던 분으로 엄청난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결혼 후 신혼 시절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는 군대 입영을 기피한 상태였는데 아버지를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에서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헌병대를 피하기 위해 초가집의 흙벽을 무너뜨리고 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 후 아버님을 몇년 동안을 도시에서 숨어지냈습니다. 당시에는 군대에 간 후 사망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군대 기피가 많았다고 합니다.

갑자기 어머니는 새색시가 생과부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홀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고 땔감을 구해 생활해야 했습니다. 당시 시골집은 초가집이었고 나무 땔감으로 밥을 짓고, 소꼴을 베어 소를 키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전기도 가스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녁엔 방에 호롱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미 임신 중이었습니다. 혼자서도 힘든데 홀몸이 아닌 상태로 논농사 밭농사를 짓고 소까지 키워야 하는 고난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겹게 일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혼자서 열심히 밭 일을 하다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서둘러 밭에서 일을 끝내고 머리에는 소꼴을 가득 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사고가 터졌습니다. 길가에 뻗은 칡넝쿨에 걸려 어머니가 넘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넘어지던 중 머리에 인 소꼴에서 낫이 떨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낫은 어머니 앞에 날이 선 상태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예리한 낫의 날에 닿아버렸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로 어머니는 무릎의 힘줄이 끊기는 대형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사고를 당하고도 치료를 할 병원도 없었습니다. 곁에는 아버지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당시 저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어머니는 무거운 몸이다보니 칡넝쿨에 걸려 균형을 잡지 못한데다 낫을 피하지 못해 다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임신한 상태에서 수술을 하는 것도 몸 속의 아이에게 해가 될까봐 못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그 사고로 인해 한 쪽 다리가 불편한 불구가 되셨습니다. 그러한 몸으로 어머니는 다시 농사를 짓고 혼자서 저를 낳아서 길렀습니다. 지금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갓 결혼 후 남편도 없이 무려 5년을 그렇게 농사도 짓고 저를 키웠던 것입니다. 저는 아가 시절을 마당이나 밭을 기어다니면서 놀았다고 합니다. 마당에서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나 닭과 함께 놀고, 밭에서는 지렁이가 친구였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도 일을 하고 계시고, 밭에 가서도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워낭소리는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저의 유년 시절은 밤낮으로 어머니 밖에는 없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호롱불 밑에서 제게 한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5살 때 처음 어버님이 고향으로 돌아오셨지만 저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신 후에도 집안 일은 하지않고 한량으로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싹텄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마음의 화해가 어느정도 되었고, 아버지도 나이가 들면서 과거와 달리 농사 일이나 집안 일도 했습니다.

제 나이가 5~6세 정도일 때도 저는 동네 아이들과 산에 올라가 고사리 손으로 나무를 하곤 했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것은 오직 어머니 일을 돕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저의 일을 돕는 역할이었습니다. 청소년기 시절에도 방학 동안 내내 어머니가 하시는 일을 돕는데 땀을 흘리곤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제가 어머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 때부터 어머니 혼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돕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왜 다리 하나가 불편하게 되셨는지 얘기를 처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어머니가 다리를 절면서 걷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불구가 된 것이 모두 제 탓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어머니를 보면, 그 젊은 시절에 임신한 몸으로 어떻게 다리가 잘리는 고통을 참고 이겨냈는지 가슴이 아프곤 합니다. 제가 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늘 변함없이 생각하는 정신적 지주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벼가 익어가는 여름 날, 논둑을 걸으면서 저에게 하신 말씀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단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어머님은 소중한 등불과 같았습니다. 제가 방황하거나 잘못 가려하면 언제
나 등대처럼 저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다리가 잘리는 듯한 고통을 어떻게 참고 견디셨습니까. 그리고 홀로 저를 어떻게 키우셨나요.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고생만 하셨습니다. 특히 홀로 키웠던 저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 유년시절의 기억 마저 희미하지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힘든 일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자주 연락도 못드려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해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지금은 자식들도 모두 결혼해 잘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어머니의 귀중한 가르침과 사랑 덕분입니다.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은 어머니가 그리워집니다. 언제나 힘을 주시는 어머님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찾아뵙겠습니다. 밤낮으로 기온차가 큰 데 건강 조심하세요.

언제나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해보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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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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