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색중대'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09.23 군대 갔다오면 태권도 유단자가 되는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86)
  2. 2009.06.26 독사에 물린 선임하사 'DMZ서 구출하라' by 진리 탐구 탐진강 (39)
  3. 2009.04.18 20년전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찾고보니 by 진리 탐구 탐진강 (29)
  4. 2009.02.22 20년전 군대 위문편지 보낸 선희에게 by 진리 탐구 탐진강 (17)
  5. 2009.02.18 블로거뉴스가 20년전 전우들을 찾아주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10)


우리나라 남자들 중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대부분 태권도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군대에서 태권도로 인해 많은 추억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아픈 기억이지만 지나면 추억이 되나 봅니다.
 
지난 1980년대 군대는 다소 무지막지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수색중대 백골소대 자대배치를 받자마자 소대장의 특명이 떨어졌습니다.
"앞으로 1주일 후 태권도 승단심사가 있다. 신병들은 모두 통과하도록 한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1주일 연습하고 태권도 승단 심사를 통과하라니.' 당시 소대에는 이미 1~2주 전에 자대배치를 받은 신병 고참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수색소대는 비무장지대 투입 전 훈련을 앞두고 대거 신병을 뽑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는 단 1일만 군번이 빨라도 고참 대우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동기 J는 소대의 막내였습니다.

아침부터 태권도 훈련이 시작됐습니다. 교관인 병장 고참이 소리쳤습니다.
"사회에서 태권도 해본 사람 있나?"
"네, 일병 J. 해봤습니다."
(참고로, 전초수색중대는 DMZ 출입 특수성을 감안해 처음부터 이병은 건너뛰고 일병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몇 단인가?"
"2단입니다."

"다른 운동도 잘하는 것 있나?"
"검도가 3단입니다."

제 동기 J는 곧바로 열외가 됐습니다. 그리고 태권도 조교가 됐습니다. 저는 엄청 부러운 눈길로 J를 바라봤습니다. 소대 단위 생활이니 뭔가 잘하면 특별히 열외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 바둑을 좀 두었기에 고참이나 외부에서 장교 방문시 담당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날부터 지옥 훈련이 시작됐습니다.
'인정 사정 볼 것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바로 다리찢기부터 시작했습니다. 조교 1명이 다리를 벌리고 교관이 위에서 어깨를 눌러버렸습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루종일 다리찍기만 계속 했습니다.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이 계속 됐습니다.

동기 J는 저를 보면서 안타까운 눈빛만 보냈습니다. 그래도 J가 있어 든든했습니다. 한 마디라도 서로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을 주고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8월말의 태양 햇살은 낮에는 엄청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강원도 산악지대라 밤에는 매우 추워졌습니다.

저녁에 계곡의 냇가로 씻으러 갔습니다. 하루종일 퇴약볕에 굴러서 온 몸이 땀과 흙에 쩔어있었습니다. 신병 고참들이 옷을 벗었습니다. 그런데 허벅지 뒷부분이 모두 시퍼랬습니다.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거의 발목 뒤에서 엉덩이 부근까지 파랗게 피멍이 든 모습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태권도때문이었습니다. 저희 보다 일찍 온 신병 고참들은 그 전부터 태권도 훈련을 받았던 겁니다. 그런데 강제로 다리를 찢다보니 실핏줄이 다 터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리가 피멍으로 얼룩졌던 것입니다. 정말 온 몸이 오싹한 모습이었습니다. 눈으로 그 광경을 보면 아찔합니다. 그 다음날 저도 그렇게 피멍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일주일 간의 연습이 계속 됐습니다. 다리찢기에서 시작된 태권도 훈련은 발차기를 비롯 품세와 대련 등 전과정을 마스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단 심사의 날이 됐습니다. 중대장은 최전방이다보니 태권도 승단 심사는 1년에 1번 기회가 올까말까 할 정도라고 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수색중대에서 20명 정도가 승단 심사를 봤던 것 같습니다. 짧은 훈련으로 과연 승단이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절반 정도는 승단에 성공했습니다. 저는 보기좋게 탈락했습니다. 1주일 훈련으로 승단한다는 것도 기적을 꿈꾸는 일이었습니다. 얼차려 엄청 받았습니다. 탈락도 서러운데 얼차려까지. J는 그 날 저에게 많은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러나 그 날이 한이 되었습니다. 태권도 최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날 이후 매일 남몰래 태권도 훈련을 했습니다. 새벽이나 저녁에 혼자서 나무를 세워두고 발차기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매일 거의 거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나서 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습니다. 언제나 태권도 수련은 빠짐없이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중대본부에 특별 휴가를 받아 하루 묵게 되었습니다. 중대장이 갑자기 전원 소집했습니다. 휴가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태권도 심사가 갑자기 있으니 모두 다음 날 심사에 참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태권도는 부대의 전투력측정에 포함되는 항목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합격하라는 특명이었습니다. 저는 얼떨결에 태권도 심사를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태권도 대련은 자신있는데 품세는 문제였습니다. 혼자서 품세는 연습할 수 없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왔습니다. 발차기는 자신있게 했습니다. 다행히 품세는 여러 사람이 함께 했는데 자리가 뒷줄이었습니다. 반 박자 늦게 앞 사람을 따라서 했습니다. 반 박자 동작은 늦었지만 힘있고 화려한 절도와 기술은 자신있게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특공무술도 마스터한 상태라 기술은 저를 비롯한 수색중대 요원들이 모두 뛰어난 편이었습니다.

마지막은 대련이었습니다. 가장 자신있는 종목입니다. 그 동안 산 속에서 혼자 갈고닦은 발차기가 있었기에, 저는 뒤돌려차기, 이단옆차기 등 공중을 붕붕 날아다녔습니다. 저와 대련상대인 K병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탐진강, 살살해. 누구 죽일 일 있냐."
"그럼, 한번씩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면서 합시다."

결과는 합격입니다. 그 동안 한을 갖고 연습했는데 아주 쉽게 승단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여러 상념이 감돕니다. 대한민국 군대에 다녀오면 유단자가 많은 것은 다 이유가 있나 봅니다.

지금은 군대에서 태권도가 예전 만큼 필수적인 승단 심사 항목이 아닌 곳도 있다고는 합니다.
그런데, 과거 80년대는 태권도가 전투력측정의 평가대상이라서 군부대마다 가산점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부대장은 부대원들의 태권도 승단 결과에 신경을 많이 썼던 것입니다. 그 유래는 군대에 전투력 증강의 필수훈련으로 태권도가 채택된 것은 박정희 군사쿠데타 정권 집권 초기 시절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승단하지 못하면 병장 진급에 불이익이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특히 군대에 갔다오면 태권도 유단자가 많은 이유입니다. 사실 군화만 신어도 태권도 1단이라는 이야기도 있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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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군대 시절 이야기입니다. 지난 1980년대 후반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 여름날이었습니다. 비무장지대에 군사령관이 방문한다는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GP(Guard Post)를 방문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 군사령관이 방문하면 GP나 수색중대는 한바탕 난리가 납니다. 의전이나 경계 근무 등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드디어 군사령관이 DMZ(비무장지대)내 방문의 날이 왔습니다. GP 경계 뿐만 아니라 DMZ에는 수색과 도로 경계조가 투입되었습니다. 저는 수색분대로 투입됐습니다. 그리고 수색분대는 K선임하사가 분대장이었습니다. 차량경계조는 중대장이 직접 지휘했습니다. 거의 수색중대 수준의 DMZ 작전인 셈입니다.

수색분대가 철책선을 통과해 DMZ에 먼저 투입됐습니다. 사전에 DMZ 수색로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요충지에 근거지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여름날의 더위는 강렬했습니다. 한참 수색 중인데 길가에 독사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상당히 큰 까치 살모사였습니다. 까치 살모사는 독성이 강해 매우 위험합니다. 당시 저는 병장이었고 저격수였습니다. 선임하사에게 아주 작은 소리로 신호를 보냈습니다.
"잡을~까요?"
"그래 잡자."

선임하사는 보기 드문 까치 살모사라서 탐이 났던 것 같습니다. 제가 K-1 개머리판으로 살모사의 머리를 눌러 제압하고 살모사를 잡았습니다. 산 채로 생포한 것입니다. 그러자 선임하사가 까치 살모사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수색분대는 까치 살모사를 생포한 후 매복 요충지로 이동했습니다. 그 때부터는 군사령관이 도로를 무사히 지나 GP에 이르는 도로를 경계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선임하사는 지루했습니다. 사실 이런 수색 경험이 많은 선임하사였습니다. 몇개월 후면 전역을 고려하던 선임하사였습니다.

얼마를 기다리자 군사령관이 DMZ의 작전 도로를 지나갔습니다. GP에서 나오기까지 상당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선임하사는 살모사를 만지작 만지작 하고 있었습니다. 선임하사가 독사를 다룬 경험이 많아서 걱정은 안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만큼은 불안해 나즈막히 말했습니다.
"선임하사님, 조심하세요"
"괜찮아."



얼마 시간이 지났습니다. 선임하사는 살모사를 왼손으로 잡았다가 오른손으로 잡았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모사를 좌우 손으로 옮기던 중 선임하사가 순간 살모사를 놓쳤습니다. 그러자 살모사가 선임하사의 손을 곧바로 물었습니다. 중요한 작전 중에 선임하사가 맹독성 살모사에 물린 것입니다. 당장 수색을 중단하고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독사에 물린 손의 팔꿈치 부분은 단단히 묶고 물린 곳의 피를 빨아냈습니다. 

그리고 무전병을 통해 긴급히 도로경계 수색분대 차량을 수배했습니다. 군사령관이 GP를 빠져나가면 도로 차량경계조 차량으로 군병원에 호송할 계획이었습니다. 군사령관이 마침내 GP를 나와 DMZ을 벗어나 철책 밖으로 통과했습니다. 곧바로 차량경계조에 선임하사를 태우고 DMZ을 빠져나갔습니다.

이미 선임하사의 손은 엄청나가 부어있었고 선임하사는 맹독에 의해 거의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갔습니다. 차량경계조는 강원도 산골에서 멀리 군통합병원으로 달렸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 필사적으로 군트럭 모양의 차량경계 수색조가 병원에 도착한 것입니다. 선임하사를 긴급히 호송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수많은 군인들과 사람들이 몰려와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모습으로 쳐다 봤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모인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쳐다보는 겁니까?"
"...(조용)..."

질문에 오히려 더 놀라는 듯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눈길을 피했습니다. 우리들끼리 쳐다봤습니다. 아뿔싸. 우리 수색분대는 수색 중 복장과 완전무장 상태로 그대로 병원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 분대는 전쟁상태의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탄복에 총알 장전된 각종 개인화기, 기관총이 장착된 도로경계차량, 수류탄과 대검을 매단 수색복장 등은 일반 군인들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저희는 장전된 개인화기와 무장을 해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DMZ을 지나 철책의 통문을 통과하면 장전된 총알 등 무장을 해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시의 군병원까지 완전무장 상태로 왔으니 다른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DMZ 작전 중이었습니다. DMZ에서만 있다보니 여긴 처음이라..."

다행히 선임하사는 치료를 잘 끝내고 무사히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소대원들이 한 마디씩 했습니다.
"말년에는 구르는 낙엽도 조심하라고 하시더니...앞으로 낙엽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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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얼마 전 남북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에서 산불이 발생해 몇일간 계속 번졌습니다. 북한측에서 화공작전으로 산불을 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사실 비무장지대에서 산불이 일어나면, 맞불을 놔서 꺼지게 하거나 그냥 비가 와서 자연적으로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이번 산불도 다행히 최근에 비가 와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 비무장지대라는 특수한 환경이 존재합니다. 제가 군대 시절에 비무장지대에 근무했기 때문에 실제로 남북분단의 현실을 누구보다 피부로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화 'JSA(공동경비구역)'은 비무장지대 내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이 겪는 에피소드를 다소 과장되게 표현을 했지만 어느정도 상황을 묘사한 측면도 있습니다.

비무장지대는 군인이라도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구역입니다. 특별하게 출입증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이 비무장지대를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전협정상 군인들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무장출입증도 까다로운 심사절차에 의해 승인된 극히 일부의 특수 군인에게만 발급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비무장지대 출입증이 발급된 사람은 여러가지로 선택되고 검증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군대시절 생각이 나서 지난 20년전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찾아봤습니다. 예전 군생활회상록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비무장지대 출입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는 민정경찰대, 수색중대, 전초대, 수색정찰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것 같습니다.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 출입증 앞면과 뒷면 모습]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 상용 출입증'이란 명칭과 함께 '이 출입증은 민간행정 및 구제사업 제관서에 소속된 사람의 사용에 한함'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 출입증 소지자는 비무장지대 남경계선의 통과 및 비무장지대 남반부에서의 이용에 대한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 비무장지대 북쪽 부분을 출입하는데는 유효하지 않다.'고 부연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뒷면에는 영어로 똑같은 내용이 씌여 있었습니다. 이미 20여년이 지난 아주 오래 전 과거이지만 젊은 시절에 목숨을 걸고 비무장지대를 누비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갔습니다. 


아쉬운 것은 남한의 경우 '군인'이 비무장지대를 출입하기 위해서는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을 위한 인원으로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유엔군사령부, 흔히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같은 허가를 받은 군인을 '민정경찰(DMZ Police)'이라고 표현합니다. 북한은 '민경대'라고 합니다.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정전협정에 기인합니다.

지난 1953년 7월 27일, 미국
과 북한, 중국이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6.25 전쟁이 끝나고 남과 북 사이에는 휴전선인 군사분계선(MDL)이 생겼습니다. 당시 남한은 배제된 상태에서 정전협정문에 서명이 된 것입니다. 정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으로 2Km, 북으로 2Km 각각 사이의 땅이 바로 비무장지대입니다. 말 그대로 하면 군사적인 무장을 하면 안되는 지역인 셈입니다. 그리고 남북한은 비무장지대가 끝나는 지점에 철책을 만들어 대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① 어떤 군인이나 민간인도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북 각 지역 사령관의 특정한 허가가 있어야 하며(정전협정 제1조 제8항), ②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에 관계되는 인원과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를 얻은 인원이 아니면 비무장지대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정전협정 제1조 제9항). 또한 ③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진다(정전협정 제10항).

궁금증이 생겨서 북한의 비무장지대 출입증은 어떻게 생겼는지 검색을 해보니 하나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정전협정에 따른 문구는 없고 비무장지대 출입증의 소지자 신분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소비자는 북한의 민경대 소속 군인일 것입니다. 영화 JSA에서 남북한 병사는 아마도 이러한 신분증을 각각 소지하고 있었을 듯 합니다. 


     [좌측이 북한의 비무장지대 출입증 모습]

우리나라가 남북분단 국가라는 상징적인 장소가 비무장지대라면 비무장지대 출입증은 젊은 군인들이 온몸으로 분단의 현실을 느끼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무장지대에는 미확인 지뢰지대들이 도처에 위험이 산재해 있습니다.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선을 넘나드는 곳입니다. 뉴스에서도 여러번 보도된 GP에서 총기사건이 바로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군대 시절에는 어떻게 무시무시한  공포의 비무장지대에서 살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오싹하기만 합니다.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민족의 아픔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 같아 상념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전쟁을 잠시 중단한 개념인 휴전에 의한 정전협정이 아니라 진정으로 남과 북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종전으로 바꿔 평화협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습니다. 언제까지 동족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야 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서로 같은 민족으로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도 큰 진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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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군대 복무 기간 동안에 사용했던 '군생활 회상록'을 꺼내 봤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은 백두산부대에서 소속 부대 배치 당시에 나누어주었던 일종의 앨범입니다. 지난 1988년에 입대했으니 이제 20년이 지났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은 이미 색도 바랬고 글자로 벗겨지는 등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을 넘기다가 초등학생의 '군군 아저씨에게'로 시작되는 위문 편지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선희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편지 내용은 남아 있는데 편지봉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희가 보낸 편지에는 자신과 함께 엄마와 남동생의 사진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약 6 장 정도되는 사진인데 어쩌면 소중한 자신의 가족사진일지도 몰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어졌습니다.

선희는 아마도 당시 대구의 어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편지 내용 중에도 성은 없고 그냥 선희라는 이름만 있었습니다. 편지 내용이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단어 구사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선희도 세월이 흘렀으니 서른살이 훨씬 넘었을 나이일 것입니다.

지금은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 편지를 보내는 일은 없어진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초등학생들이 위문편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제가 20년전 근무하던 곳은 강원도 최전방이라서 학생들 위문편지도 다른 후방 부대들을 거쳐 제일 마지막에 받을 수 있어 일부 초등학생들 편지만 겨우 도착했었습니다. 아예 못받는 경우도 있었으니 편지라도 하나 받으면 감개무량한 시기였습니다.
 
먼저 간단히 당시 선희의 편지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저는 고향이 대구이고 대구에서 자라고 있어요. 먼저 우리 반의 여러 이야기를 말씀드릴께요. 저희 반에는 말썽장이들만 모여서 지내고 있어 그런지 언제나 덤벙대고 작은 사고도 가끔씩 일어난 답니다.

저번에는 교실에서 제기로 탁구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깨는 일이 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장난스러운 아이들을 용서해 주시기도 하셨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보내주신 편지를 내 친구가 빼앗아가서 아저씨와 나의 편지내용이 다른 아이들에게 들통날 뻔 하였지만, 내가 간신히 빼앗아 내용이 들통나지 않았어요.

아저씨, 휴전선을 지키실 때 북한 공산군과 마주보기도 하시죠. 그 때의 기분이 어떠세요. 저는 아저씨가 어떤 분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그리고 더 친해지고 싶어요.


선희는 연필로 글씨를 또박또박 예쁘게 쓰는 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여학생 다운 착한 심성과 함께 문장 실력이 우수한 편이었습니다. 같은 반 남자 아이들에게 편지를 빼앗겨 간신히 되찾았다는 내용은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당시 편지 보낸 시기는 1989년 10월이었습니다.)

당시 군대시절에 저는 위문편지를 상병 때 한 번 이외에는 받지를 못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위문편지가 선희가 보낸 셈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위문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남학생이어서 그런지) 군인에게 답장을 받아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이 어린 마음에 속상한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제가 군인일 때는 선희에게 정성껏 답장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희는 당시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엄마와 남동생 셋이서 살고 있었나 봅니다. 선희가 보낸 사진 중에 아빠는 없고 가족 셋이 찍은 사진이 있었고 산소에 남동생과 함께 앉아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선희는 아빠도 없이 자라다보니 일찍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던 듯 합니다. 가족사진을 여러장 편지와 함께 보내주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던 기억입니다.


당시에 갑자기 땅굴 수색 등 작전과 맞물려 혼란스러워지면서 어쩌다가 사진을 돌려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강원도 중동부전선에는 9월에 첫 눈이 내리고 다음해 5월까지 지긋지긋하게 눈이 내릴 정도였던 기억입니다. 그 기간동안에 제4땅굴 수색 작전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이라고 선희에게 가족 사진을 돌려주고 싶은데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군대에서는 볼 수 없는 추억이겠지만 군생활 회상록에 남겨진 '선희의 국군 아저씨 위문편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선희에게 가족사진이라도 돌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 보내지 못했지만, 선희가 보고싶어했던 당시 군인 아저씨들 사진입니다. 늦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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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제 군대시절 땅굴발견해 받은 참모총장상을 찾아보니 라는 글을 블로거뉴스에 포스팅했는데 메인에 떡하니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수백개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놀랍게도, 블로거뉴스가 20년만에 군대 시절의 그리운 전우들을 찾아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중에는 같은 21사단 백두산부대 출신 선후배 전우들은 물론 제4땅굴 발견과 특수 작전에 투입되었던 수색대, 공병대, 3군단, 육군본부 시추대 등 수많은 분들이 당시의 추억 속으로 달려왔습니다. 또한, 군대에 복무 중이거나 제대한 여러 예비역들이 같은 부대가 아니더라도 군대생활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대를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군대와 관련 다양한 분들의 댓글도 눈에 띄었습니다. 존경받는 참군인이신 당시 이준 사단장님의 자제분도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어떤 여자 분은 남자 친구를 21사단 수색대에 보낸 후 걱정했지만 용감하고 훌륭한 임무를 수행하는 남친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계기로 생각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가장 보람있는 것은 당시의 몇몇 전우들과 다시 재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수색중대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연락처를 많이 알게 되었고 전화를 통해 안부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선후배들이 별도의 카페도 운영 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전우들이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예전 전우들을 만나고 싶어도 연락처도 없어 별다른 도리가 없었는데, 블로거뉴스가 20년만에 전우들을 찾아주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많은 도움과 영감을 주신 zinicap님, 따뜻한 카리스마님, 해피아름드리님, 머니야머니야님 등 여러 블로거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반갑다, 전우야." "고맙다, 블로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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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