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11.30 난생 처음 김장 김치 담가본 남자 '여자 마음 알겠더라' by 진리 탐구 탐진강 (117)
  2. 2009.10.20 군대 간 아들, 아버지와 어머니 눈물의 차이 by 진리 탐구 탐진강 (66)
  3. 2009.03.09 벌교 주먹이시던 아버님이 약해지신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9)


주말을 맞이해 주말농장 텃밭의 김장 무와 배추를 모두 수확했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동안 정들었던 텃밭과도 이제는 잠시 이별이라 생각하니 조금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텃밭의 채소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농부가 밭을 탓하지 않는 것은 그 만큼 정성과 노력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땅은 씨앗을 뿌리고 땀을 쏟는 만큼 결실을 맺는 것 같습니다. 무작정 씨앗만 뿌려놓고 농작물 수확만 기다리는 것은, 공부하지 않고 시험성적이 좋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땅과 주말농장 텃밭 농사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많이 배우는 것 같습니다. 매주 주말이면 텃밭에 가서 땀흘리고 정성을 다해 가꾼 결실을 수확하는 기쁨은 아들 딸 자식을 기르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듯 합니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부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땅에서 소중한 쌀을 비롯한 농산물을 공급해주는 농부에 대한 고마움도 느꼈습니다.

그러면, 일년 농사를 마무리하는 김장 무와 배추 수확을 비롯한 김장 담그기를 직접 체험하고 느낀 점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땅은 땀과 정성을 쏟는 만큼 수확의 결실로 보답한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의 주말농장 텃밭에는 일년 농사 마지막 수확의 무와 배추가 남아 있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텃밭의 모습입니다. 수확하기 바로 직전입니다. 갑자기 영하의 날씨가 무와 배추의 잎을 시들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위에도 무와 배추는 용케 이겨냈습니다.


주말농장에는 겨울 추위를 이겨내는 대파와 함께 비닐하우스에서 동장군을 피해 배추가 숨어있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텃밭의 대파와 비닐하우스의 배추입니다. 요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농작물입니다. 아마도 주변에서 고깃집을 하는 음식점에서 기르는 작물이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텅빈 주말농장을 지켜주는 최후의 농사인 셈입니다.


텃밭에서 막 수확을 끝낸 무와 배추를 마대자루에 담아 아파트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수확한 무와 배추를 텃밭에서 아파트 집으로 나르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예상 외로 올해는 수확이 좋았습니다. 제가 주말농장을 한지 3년째이다보니 농사짓는 솜씨가 늘었던 것 같습니다. 사진에서 보면 일부만 보여주고 있지만 마대 자루로 무는 네개의 포대였고 배추는 50포기가 넘었습니다. 

올해는 풍년인 셈입니다. 김장 무와 배추는 아래층에 사시는 장모님 댁으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김장 담그기 작업이 시작됩니다. 아내와 작은 처형 그리고 처제 등이 모두 모여 김장을 담그기로 했습니다. 저는 수확하고 옮기는 일이 주요 임무였습니다.

김장 담그기는 예술작품을 완성하는 산고의 고통이었다

무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무청을 만들고 김장 배추는 노란 속살을 드러낼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아파트 베란다로 옮겨진 배추와 무는 다듬는 작업부터 시작됐습니다. 무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다시 무채로 재정리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추는 바깥쪽 잎들을 다듬어서 노란 속들을 모아 차곡차곡 쌓아두었습니다. 여기서 남은 무 잎과 배추 잎은 말려서 시레기를 만드는데 사용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시레기국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게 더 탐이 납니다.


난생 처음 얼떨결에 김장 김치의 양념속을 만드는 작업에 돌입한 남자의 속놀림이 바쁘게 움직인다

아내가 저녁에 김장 준비를 하러 간 사이에 저는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낮에 무리한 상태라 몸이 나른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장모님 집으로 호출을 했습니다. 아래 층에 내려가보니 추가로 주문한 김장용 배추 상자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족이 김장 김치를 먹어야 하기에 텃밭의 배추 만으로는 다소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김장용 배추 상자를 베란다로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현재 힘을 쓰는 마당쇠 역할을 할 사람이 저 밖에 없었던 터라 기꺼이 즐겁게 상자를 날랐습니다. 그런데 장모님이 이미 준비된 재료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김장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무채와 고춧가루 그리고 새우 젓갈, 생새우, 다진 마늘과 생강, 까나리 액젓, 찹쌀 풀, 쪽파, 대파, 갓 등 각종 재료를 섞는 일이었습니다. 김장 속양념만 10여가지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시골 고향에서 부모님이 고추 가루를 보내주셔 이번 김장에 요긴하게 활용했습니다.
 
건강이 다소 좋지않은 장모님이 고생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소매를 걷어부치고 나섰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힘껏 재료들을 버무렸습니다. 재료들을 한꺼번에 넣고 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넣고 계속 뒤집어주는 작업인지라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했지만 김장 속양념을 다지는 일이 거듭됨에 따라 기진맥진해졌습니다.

한참 동안을 몇차례 작업하는 동안에 이마에는 땀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땀이 얼굴을 적셔 자주 땀을 훔쳐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밤 12시가 되서야 끝났습니다. 김장 담그는 일은 가족 건강 음식을 만드는 정성은 물론 하나의 예술작품을 완성하는 장인정신이 있어야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보니 온몸이 땀에 젖어있어 샤워를 시원하게 했습니다. 이제서야 정신이 들 정도였습니다.

멋모르고 덤볐다가 큰 고생을 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김장 준비를 완료하고 나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직접 김장을 담그는데 일조했다는 뿌듯함이었습니다. 여자들이 만들어주는 음식만 먹다가 가족 모두를 위해 김장 담그기를 직접 해보니 여자의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밥상이 앉아 편안하게 식사를 하지만 거기에는 여자들의 정성이 듬뿍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주부들의 고생을 만분의 일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뜻깊은 날입니다.

김장 속양념과 겉절이 김치로 즐기는 가족 파티의 즐거움


전날 만든 김장양념을 꺼내서 드지어 본격적으로 김장 배추 김치를 담그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루 밤이 지나고 다시 본격적인 김장 담그기 후반전이 시작됐습니다. 전반전 김장 준비를 전날 저녁에 했다가 하루 밤을 지나서 잘 간이 든 김장 속양념을 배추에 적절히 버무려 주는 작업입니다. 어떤 집은 양념속과 배추를 곧바로 버무리기도 하지만 저희 장모님은 하루 밤을 새우고 다음날 배추 김치를 담그는 순서로 진행했습니다. 김장 담그는 전통은 대가족 문중이나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른 조리법과 요리법이 있는가 봅니다.

김장 속양념도 어떤 집은 배즙이나 양파를 넣기도 한다고 합니다. 젓갈도 멸치젓이나 창란젓 토하젓 어리굴젓 새우육젓 갈치젓 등 다양한 것도 김장 양념이 얼마나 다양한지 짐작케 합니다. 이제는 김장 담그는 법을 마스터한 것 같습니다. 김장을 다 담근 후에 시식도 하고 김장양념이나 겉젖이 김치에 막걸리 한잔 하는 재미도 일품입니다.
 

김장 양념이 완성된 후 막걸리와 함께 노란 배추속에 굴과 치킨을 싸서 음주의 시간을 갖고 있다

전날 밤 12시가 넘어 김장양념에 굴과 배추 속을 싸먹었습니다. 여기에 막걸리를 마시는 기분은 최고의 별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늦은 밤에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하루 일과를 끝내고 김장양념과 배추속에 굴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셔보는 재미는 현장에서 느껴보지 않으면 모를 환상의 묘미입니다. 게다가 치킨 닭에다 김장양념과 함께 배추를 싸먹는 것도 특별한 안주였습니다.


김장 김치를 모두 끝낸 후 가족 모두가 모여 막걸리와 보쌈 안주로 즐거운 만찬을 즐기고 있다

드디어 모든 김장 담그기 작업이 끝났습니다. 여기에는 처갓집 식구들이 대부분 함께 모였습니다. 올해 김장 담그기에 사용한 배추만도 100여 포기는 될 듯 싶습니다. 온 가족이 가정 마다 김장 김치를 나누었습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김장을 담그는 일은 가족애를 더욱 끈끈하게 해주었습니다.

모두가 서로의 고생을 격려하면서 겉절이 김장 김치와 김장양념을 돼지 보쌈과 함께 먹었습니다. 이날은 처남이 공수해온 토속 막걸리가 준비됐습니다. 김장김치와 보쌈을 즐기는 재미 또한 일품이었습니다. 겉절이 김치에 햅쌀로 만든 밥을 먹는 것도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별미입니다. 겉절이 김치를 손으로 찢어서 밥 숟가락에 얹어서 먹어본 사람은 충분히 감이 올 것입니다.

이렇게 김장 담그기 대장정이 끝났습니다. 이번에 김장은 제가 난생 처음으로 시작에서 끝까지 동참해 체험한 날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의미있는 김장 담그기 행사였습니다. 그리고 주부들이나 아내 그리고 어머니가 김장 담그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체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인스턴트 김치나 김치 공장의 김장김치를 사먹는 일이 많지만 직접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직접 김장 김치를 담가보는 것도 커다란 추억이 될 듯 합니다. 아이들은 그들대로 교육적 효과도 큰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올해 김장 담그기는 우리 가족들에게 매우 의미있는 일이 된 것만으로 보람을 느낀 추억이 될 것입니다. 아직 김장을 담그지 않은 분들은 가족과 함께 즐거운 김장 담그기에 도전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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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이 옷을 여미게 합니다. 가을도 깊어가면서 단풍도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맘 때가 되면 군대에서의 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을 각각 따로 느낄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오늘은 그 시절에 비로소 가슴으로 느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과 사랑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때는 1980년 중반이었습니다. 치열했던 대학 2년의 시간들을 추억하며 군대에 가야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암흑같은 군사 독재와 맞서 대학가의 민주화 항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군대를 가기 전 까지 어머니 일을 도왔습니다. 저는 한량이셨던 아버지를 지독하게 싫어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어느정도 마음을 잡고 일을 했습니다. 표고버섯 재배였습니다. 산 등성이에서 일해야 하기에 매우 위험힌 작업이었습니다. 겨울에는 참나무를 베고 봄에 버섯종균을 넣은 후 나무를 세워두는 과정이었습니다.

과거 이야기부터 해야 겠습니다. 제가 본 유년시절의 아버지는 늘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었습니다. 결혼 후 5년동안 군대를 기피해 도피생활을 했던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제가 5살 때 였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그 때부터 언제나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힘들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임신했을 때 홀로 일하고 오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오던 소꼴에 꽂아둔 낫이 떨어져 무릎의 힘줄이 끊어지는 중상을 당했습니다. 산골이라 병원도 못가고 평생 불구가 된 것이었습니다.

아침 태양의 햇살은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에 반짝였다

저는 나중에 고등학생 시절에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더 컸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표고버섯 재배를 함께 했습니다.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시라는 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는 일하시면서도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저는 대들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러지 못하도록 타일렀습니다.


당시 저는 다리를 절뚝 거릴 정도로 일을 했습니다. 마침내 군대를 가는 날이 왔습니다. 저는 집 앞에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시골 집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면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네 번 정도 버스가 다녔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산을 내려가는데 아버지를 계속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말없이 따라왔습니다. 

저는 "아버지 그만 들어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봤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뒤로 돌렸습니다. 그 때 저는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을 보았습니다. 이제 막 산꼭대기에는 떠오른 아침 태양의 햇살에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이 순간 반짝했습니다. 난생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렸지만 저는 이미 아버지의 눈물을 봤던 것입니다. 그렇게 강하신 분이셨던 아버지의 눈물은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군대를 향해 가면서 저는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화해를 했습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면회왔다가 아들 못만난 어머니의 눈물 

저는 강원도 중동부 전선에 있는 백두산부대의 비무장지대 수색대에 배속받았습니다. 위험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만큼 부대의 군기는 살벌했습니다. 신병 시절은 너무 괴롭고 힘든 훈련과 얼차려의 연속이었습니다. 수색대는 소대 단위로 생활했습니다. 산골짜기에 은밀하게 막사를 짓고 생활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강원도 산골은 급격히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훈련은 물론 물동이를 지고 물을 나르고 화목(불때는 나무)을 하고 짬밥을 버리는 등 잡일도 신병의 몫이었습니다.

어느 날, 열심히 물동이를 나르고 있는데 저를 부르는 소리가 멀리 막사에서 들렸습니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급히 뛰어가보니 부대 통신보안 전화를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전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영문도 모른체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라고 말하자 마자 어머니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어쩐 일이세요?"라고 묻자 어머니는 겨우 말문을 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한번 보기 위해서 머나 먼 남쪽에서 강원도 산골까지 산 넘고 물 건너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의 부대가 면회가 안되는 곳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아들이 입대 후 보냈던 안부 편지를 받고 무작정 아들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연대 본부를 찾아왔던 어머니는 아들의 면회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연대 본부에서 전화라도 연결해 주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저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저는 건강하게 잘 있어요."라며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어머니와 전화를 끊고 막사 뒤 후미진 곳에 혼자 앉아서 저는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1박 2일에 걸쳐 강원도 산골까지 오셨다가 아들 얼굴도 못보고 되돌아간 어머니가 안타까웠습니다. 나중에 휴가가서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맛있는 떡과 음식을 해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대본부의 병사들이 그 음식을 전달해주지 않고 그냥 배달사고를 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눈물흘리고 돌아서며 아들에게 음식을 전달해달라고 호소했을텐데 말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속 눈물과 어머니의 흐느끼는 눈물은 하나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근엄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약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대부분 그랬습니다. 가부장적인 농촌 사회에서는 특히나 그러했습니다. 아버지는 완고했고 어머니는 자애로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항상 희생만 하시는 어머니가 안타까웠고 호통만 치시는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겉으로는 강한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여렸습니다. 어머니는 숙명처럼 가족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렸고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보였지만 마음 속은 더 강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은 하나였습니다. 다만 그 표현이 달랐을 뿐입니다.

요즘은 아버지도 약해지셨는지 예전과 같지는 않습니다. 얼만 전에는 어머니가 여행을 다녀오시도록 배려하는 모습도 있으셨습니다. 칠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경운기를 몰고 농사일도 하시지만 과거와 달라지신 모습니다. 한편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다정해지신 것 같아 다행스럽지만 몸이 쇠약해지신 것 같은 아닌지 걱정도 듭니다.   

오늘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쌀 두 가마니 보냈다. 내일 도착할 거다."
"추수하느라 힘드셨겠어요."

"아니다. 막내가 와서 도와줘 잘 끝냈다."
"도움을 못드려 죄송해요." 
(막내 남동생은 지난해 결혼해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전화 좀 해라. 이번에 추수에다 표고버섯까지 나와서 고생했단다."
"네. 알겠어요."

어머니의 전화를 끊고 저는 잠시 멍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가장 걱정하는 분은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전화를 드렸습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별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심전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이 전해져 옵니다. 앞으로는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와도 자주 전화를 드려야 겠습니다. 저도 어느새 아버지를 닮았는지 표현이 서투른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 한 가정을 일구고 아버지가 되고나니 만감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글로 대신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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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저녁에 '딩동'하고 초인종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골에서 부모님께서 찹쌀 한 가마와 옥수수 종자를 택배로 보내셨던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물었더니 "주말농장하려고 어머님께 옥수수 종자를 부탁드렸는데 함께 보내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버님은 1950년대 청소년 시절을 벌교에서 생활하셨습니다. 큰 아버님이 벌교에서 고등학교를 다니셨고 아버님은 함께 기거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벌교는  고등학교가 있던 거의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인근 농촌 마을이나 멀리 떨어진 산골에서도 벌교로 학교를 보내야 했습니다. 큰 아버님과 아버님은 시골에서 벌교로 유학을 간 셈입니다.


아버님은 당시 벌교에서 주먹을 좀 쓰셨다고 합니다. 과거부터 벌교하면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벌교에서는 젊은 청년들은 물론 청소년들 사이에도 결투(?)가 많았나 봅니다. 아버님은 외지에 유학가서 남들에게 구박받지 않고 강한 남자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항상 체력 단련을 했다고 합니다.
 
시골 고향 집에 오면, 나무로 직접 만든 평행봉에서 항상 운동을 하셨습니다. 이소령이 혼자서 무예를 익히는 수련과도 흡사할 것입니다. 벌교에서 당시 청년이던 큰 아버님과 아버님은 함께 다니면서 주먹으로 벌교 지역을 평정하셨다고 합니다. 특히, 아버님은 힘과 체력이 좋아서 5일장이 열리면 씨름대회에 나가서 1등도 여러번 했다고 합니다. 어머님께 전해들은 이야기라서 정확한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산골 고향으로 돌아오신 아버님은 잠시 고향집에 놀러왔던 어머님을 만나 결혼하셨습니다. 외조부모께서 반대하신 결혼이었지만 거의 막무가내로 결혼식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아버님의 기개(?)는 어떤 사람들도 막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 외조부모님은 집안의 평안을 위해 결혼에 승락했다고도 합니다.


[영화 워낭소리 : 촌로 부부의 모습은 부모님을 연상케 한다.]


아버님은 결혼 후에도 시골 마을에서 호랑이로 불리셨습니다. 아버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뜻대로 가정과 마을을 호령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량으로 생활했던 것입니다. 간혹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지게에 나무를 지고오시면 산딸기를 칡잎에 싸오곤 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따온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땐 저는 아버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늘상 어머님께 호통치던 모습에 대한 반발심만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희는 매년 여름이 가족들이 모두 시골에 모여 휴가를 보냅니다. 작년 여름에 자식들이 휴가를 시골에 모였는데 아버님은 어머님을 힘들게 하셨습니다. 그 후 자식들은 어머님 편으로 전부 합세해 아버님이 고립된 적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장성했고 결혼까지 한 상황에서 아버님의 처사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머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으니 당시 아버님의 상실감이 컸을 것입니다. 어버님은 아버님 걱정에 다시 시골에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칠순이 되신 아버님을 위해 형제자매 가족들이 함께 고향에 모였습니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앙금도 모두 풀고 다시 가족들이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예전보다 많이 힘이 없어보이시는 아버님을 보니 송구스런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는 자식들에게 곡식들을 자동차에 실어주시면서, 어머님은 올해 여름에도 시골에 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직도 아버님은 칠순 나이에 시골 마을 이장을 맡고 계십니다. 젊은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찹쌀 한 가마와 옥수수 종자를 받았습니다. 아내가 부탁드린 것은 옥수수 종자 뿐인데 찹쌀 한 가마도 보내신 것입니다. 사실 찹쌀 한 가마는 아버님이 보내라고 하신 것일 듯 합니다. 아버님은 언제나 그러셨습니다. 어머님에게 옥수수만 보내지 말고 참쌀 한 가마도 함께 보내라고 하셨을 분입니다. 자식들과 어머님 앞에서는 늘 근엄한 모습이었지만 돌아서면 한없이 자식들을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말씀으로 표현을 못하는 산골 마을의 전형적인 아버님이셨습니다.
 
아버님이 보내주신 찹쌀 한 가마를 보면서 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젊은 청년시절의 기개를 항상 잃지안고 호령하시던 아버님이 이제는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예전에 비해 아버님이 어머님께 조금은 부드러워 지신 것 같아 다행이지만 한편으로 약해지신 아버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벌교에서 주먹을 자랑하던 열혈 남아였던 아버님이 이제는 마을에서도 예전과 같은 호랑이 모습은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아버님의 자존심은 예전부터 '쌀'이었습니다. 아무리 한량이라고 하시더라도, 논농사는 반드시 당신이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항상 가장 품질좋은 쌀 농사를 짓곤 했습니다. (지금은 표고버섯 재배를 비롯해 여러가지 일들도 하십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쌀을 보내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아버님이 보낸 '찹쌀'은 그 이상의 마음이 담긴 선물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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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