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1.01.06 경운기 운전 중 벼랑 추락 아버지, 구사일생 기적 이야기 by 진리 탐구 탐진강 (102)
  2. 2010.02.07 얼짱 강윤수는 왜 F1 포뮬러 카레이서가 됐을까? by 진리 탐구 탐진강 (30)
  3. 2009.10.20 군대 간 아들, 아버지와 어머니 눈물의 차이 by 진리 탐구 탐진강 (66)
  4. 2009.10.12 어머니 첫 해외여행 허락한 아버지의 변심 이유는? by 진리 탐구 탐진강 (88)
  5. 2009.07.30 군대가는 아들 뒤 아버지의 눈물을 봤다면... by 진리 탐구 탐진강 (40)
  6. 2009.05.08 강남 부자의 어버이날 효도선물 '줄기세포'(?) by 진리 탐구 탐진강 (51)
  7. 2009.05.07 자식위해 평생 불구가 되신 어머님 전상서 by 진리 탐구 탐진강 (86)
  8. 2009.05.01 대만 갑부의 딸과 결혼한 친구의 비결 '선교'(최종편) : 술집에서 선교사 활동? by 진리 탐구 탐진강 (47)
  9. 2009.04.03 뇌출혈로 중환자실 입원한 삼촌 생각하니... by 진리 탐구 탐진강 (30)
  10. 2009.03.09 벌교 주먹이시던 아버님이 약해지신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9)


구사일생(九死一生)이란 말이 딱 맞는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 연말에 있었던 저희 아버지의 실화입니다.

불과 며칠 전 이야기입니다. 지난 해 12월 연말, 여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평소 연락도 하지않던 여동생이 낮에 회사로 전화를 한 것입니다. 무슨 급한 일이 있나 싶어 업무를 하다 휴대폰을 받았습니다. 휴대폰을 받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빠, 아버지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셨데..."
"뭐야?"

"천만 다행이야. 목숨은 구하셨어. 그런데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 치료받고 있어."
"어떻게 된 거야?"

"경운기 운전하고 마을 다녀오다가 낭떠러지에 추락했다는 거야."
"그래서?"

"얼마 전, 시골에 눈이 많이 내렸잖아. 그날 저녁이었는데...(이하 생략)...."
"병원에 계신거야?"

"아니, 통원 치료하신데. 집에 누워계시는데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어야 되나 봐. 그리고 병원비는 내가 마침 보험든 것이 있어 그것으로 가능해."
"정말 다행이다. 어머니에게 전화해 봐야 겠다."

      어버지의 자가용 경운기는 농사 일꾼이기도 하고 아이들이 시골에 가면 가장 타고 싶은 보물이다

자초지총은 이랬습니다. 아버지는 산골 외딴 집에 살고 계십니다. 올해 연세가 73세이시지만 정정하신 편입니다. 그런데 사고가 난 날, 멀리 마을에서 회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가용인 경운기를 몰고 2km나 떨어진 마을 회의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오후 눈이 엄청나게 내렸습니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처럼 마을 회의에 참석하신 아버지를 위해 저녁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호의를 뿌리치지 못하고 저녁 식사를 한 후 경운기를 몰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눈은 20cm가 넘게 쌓였습니다. 자주 다니던 비포장 신작로 길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걱정을 했지만 항상 잘 다니던 길이라 아무 일 없었을 줄 믿었습니다. 워낙 고집도 센 분이라 말리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눈이 많이 쌓여 있는 야간이라 길이 분간이 잘 안가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을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산악지대라서 좁고 구불구불 했습니다. 폭설이 내린 야간 눈길은 최악의 상황이었지요. 특히나 산길에 접어들자 눈은 더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어디가 길이고 산인지 헷갈릴 수 밖에 없었지요.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산길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혼자 경운기를 몰고 한참 달렸습니다. 그런데 경운기가 갑자기 덜컹 하면서 산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아버지도 경운기와 함께 벼랑으로 떨어졌습니다. 순간 아버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경운기는 산길 아래로 떨어지면서 두 동강이 났습니다. 경운기 동력이 있는 머리 부분과 짐을 싣는 트레일러가 충격으로 분리가 되어 추락한 것입니다.

                     눈 덮인 경운기의 모습은 농촌마을의 진풍경이다 (사진 출처 : 임현철 님)

경운기가 두 동강이나 추락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경운기가 분리되며 튕겨져 나왔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경운기에 깔릴 위험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습니다. 아버지는 크게 충격은 받았지만 눈이 많이 내려 그나마 완충작용을 했습니다. 인적이 없는 산길 낭떠러지 아래 추락한 아버지의 몸은 점점 체온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깊은 낭떠러지는 아니었습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아버지는 그 날 휴대폰도 집에 두고 가셨습니다. 산비탈 아래 떨어진 아버지가 그대로 방치돼 있으면 얼어서 돌아가실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평상시 밤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던 그 산길을 어떤 낯선 사람이 후레쉬를 들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도 아닌 외지인이었습니다. 낯선 외지 사람은 눈이 많이 내리자 혼자 걸어서 마을로 내려가던 길이었습니다.

외지인은 산길 아래서 경운기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게 됐습니다. 경운기가 분리됐지만 동력장치는 여전히 돌고 있었던 것이지요. 외지인은 후레쉬를 산 아래로 비춰봤습니다. 두 동강 난 경운기 사이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외지인은 비탈 아래로 겨우 내려가 기절한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아버지는 희미하게 의식이 있었지만 말도 하지못할 정도로 기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119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119 응급차는 오지 않았습니다. 밤 중에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의 응급차가 산골 길에 올 리가 만무했습니다. 외지인도 기다리다 지쳐갔습니다. 더 지체하면 아버지의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습니다. 또 한번 기적이 생겼습니다. 밤에는 전혀 자동차도 지나가지 않던 산길에 자동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이 산골에 자동차로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경운기가 유일한 교통수단인 오지의 마을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이다

외지인을 긴급히 자동차를 멈추고 마을 사람과 아버지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라 위험한 이동일 수 있었지요. 그렇다고 방치할 수 없는 긴급상황이라 빨리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읍내 병원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 어머니는 마을 주민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는 병원에 도착한 후 점차 의식과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갈비뼈와 허리 부분에 응급조치를 한 후 붕대를 감고 병원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의사는 폭설이 쌓인 곳에 떨어져 심각한 골절상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셈입니다. 아버지는 강골이어서 그런지 다른 노인들에 비해 회복이 빠른 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며칠 후 병원을 나섰습니다. 의사는 더 입원해야 하지만 통원치료하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외딴 집에 돌아와 계속 누워 계셔야 했습니다. 전혀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지요. 그 사이 또 폭설이 내렸습니다. 자동차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산골은 고립된 것이지요. 따라서 아버지는 통원 치료를 위해 나갈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병원에서 준 약을 먹고 회복을 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후 길이 풀리자 병원도 다녀왔습니다.



어머니는 "니 아버지 고집은 알아줘야 한다. 그래도 천운이 따랐나 보다. 구사일생이 따로 없구나. 너무 걱정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도 처음에는 꼼짝도 못하고 끙끙 앓더니 이제는 "약기운이 잘 듣나 보다"고 하십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이란 말이 딱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구사일생은 '
아홉 번 죽을 뻔하다 한 번 살아남'을 뜻하는데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난 것을 의미하지요. 아버지는 하루 밤 사이에 여러 번 생사의 위기에서 기적처럼 생환해 오신 것입니다.

만약 경운기가 두 동강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면, 눈 쌓인 곳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리고, 밤 중에서 낯선 이가 산길을 걸어가지 않았다면, 자동차가 야밤에 마침 그 곳을 지나가지 않았다면 어떠 했을까 끔찍하기만 합니다. 정말 하늘의 기적이나 다름없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낭떠러지에 추락하는 그 순간에 얼마나 아찔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버지는 산골에서 벼농사 밭농사는 물론 표고버섯 재배와 토종 벌꿀도 생산하면서 살고 계십니다. 산길이 대부분이다보니 경운기 운전은 항상 위험합니다. 오래 전에도 가파른 산길에서 경운기가 곤두박질 치면서 위험한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 때도 경운기에서 신속히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좁고 지반이 약한 비포장 도로 산길은 트레일러가 전복 위험에 처할 정도로 열악한 상태이다

한편으로, 시골 길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좀 더 안전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 봅니다. 작년에 시골 집 근처 도로에서 광산을 오가는 트레일러가 전복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평탄한 길이었지만 좁고 지반이 약해 생긴 사고였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고 열악한 신작로 길로 남아있는 오지입니다. 산골 오지일수록 우선순위를 높여 국가사회적 복지가 고려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앞으로 며칠 후면 아버지의 73세 생신이십니다. 매년 그래왔듯이 누이와 형제 가족들 모두가 시골 집에 모일 것입니다. 올해 아버지 생신은 어느 해 보다 부모님에 대한 소중함과 더불어 가족애의 이야기가 넘칠 것 같습니다. 기적같은 구사일생으로 아버지가 살아계심에 온 가족이 기쁨의 눈물을 마음 속에 흘릴 수 있겠지요.

그 뿐이 아닙니다. 올해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하신지 50년, 금혼식이 있는 해입니다. 여름에는 친척일가를 비롯 마을 주민들 모두가 다 함께 하는 큰 잔치를 마련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온 가족이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다녀 올 예정입니다. 아버지는 한량처럼 사시며 어머니를 늘 힘들게 하시던 모습이 저의 기억 속에 항상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버지에게 못했던 말이 있습니다. 아버님께 처음으로 고백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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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무한도전 카레이서 특집에 교관으로 모습을 보인 유경욱과 강윤수가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나 강윤수는 국내 유일의 현역 여자 포뮬러 레이서 선수로서 실력 뿐만 아니라 미녀 얼짱의 외모도 갖춰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대개 카레이서하면 남자를 연상시키는데 여자로서 카레이서라는 것도 신기한데 얼짱 카레이서라는 것은 뭇 사람들의 폭발적 관심으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다면 강윤수는 도대체 누구이고 왜 카레이서가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가지 자료를 찾아보니 강윤수는 1985년 11월생으로 만 24세입니다. 강윤수가 처음 운전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라고 하니 벌써 운전 경력이 10년이나 되는 셈입니다.

강윤수가 운전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당시 카센터를 하고 있어 자동차 운전과 수리에 일찍 호기심이 들었던 때문입니다. 강윤수는 단지 운전이 아니라 스피드에도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강윤수는 이미 고등학교 2학년 때 KKG 코리아카트대회 야마하B 클래스에서 종합 3위의 성적을 거두며 여성 레이서로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어, 강윤수는 2005년 BAT GT 챔피언십 1800클래스에서 연속 우승한 데 이어 종합 우승도 거머쥔 바 있습니다. 세계적인 카레이서 선수로 나아가는데 있어 진일보한 셈입니다. 2007년에는 CJ 슈퍼레이스 1800클래스에서 준우승을 비롯해 우승과 준우승을 여러차례 기록하면서 2008년에는 CJ레이싱팀에 입단했습니다.
 

F-B(포뮬러B)란?
강윤수가 출전하는 BAT 포뮬러-B 자동차 경주에서는 최고 속도인 시속 190km를 내며 달립니다. 시속 190km의 속도라고 하면 일반 사람들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동차 경주는 레이서의 몸이 차체 밖으로 드러나 바람을 맞아가며 달리는 포뮬러-B 경주에서는 체감속도가 2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비행기 이륙 가능 속도를 뛰어넘는 시속 380km로 날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 속도인 셈입니다. 국내의 포뮬러-B(배기량 1800cc, 120마력)는 유럽 등에서 인기 높은 포뮬러-1(보통 700마력)과 비교할 때 소형에 속하는 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차량의 개조는 없이 국산 엔진에 웨스트사에서 제작한 차체를 얹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강윤수는 인디500(인디애나폴리스 500마일 레이스)을 여자 레이서로는 최초로 완주함으로써 '여자 슈마허'로 불리기도 한 다이카 패트릭을 꿈꾸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6000cc급 '머신'을 탄 바 있는데 국내에 단 7명 뿐이라고 하니 대단한 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윤수는 154센티미터의 작은 체구이지만 꿈과 야망은 매우 크다 하겠습니다.  강윤수는 다이카 패트릭과 질주해 보고 싶은 것이 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강윤수가 여자로서 카레이서 도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미 강윤수는 카레이서 출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먄서 초등학교 때부터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윤수가 본격적으로 레이서를 준비한 것은 고교 2학년 때인데 아버지도 적극 권유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어머니도 강윤수가 레이서가 된다는 것에 대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격려했다고 합니다.

강윤수가 대학 전공도 자동차학과로 정한 것도 자동차의 구조나 정비에 대해 더 체계적으로 알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강윤수는 매일 거르지않고 체력 훈련을 하며 그렇게 10년을 레이서로 살아 온 셈입니다. 강윤수는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레이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강윤수 선수는 국내 유일한 여성 레이서라는 것이 외롭고 안타까운 일일 것 같습니다. 외국에는 여자 카레이서도 많은데 우리나라는 보수적인 문화로 인해 여자들의 도전은 거의 없는 불모지이기 때문입니다.

무한도전 F1 특집은 이전 여자 복싱에 그러했듯이 비인기 스포츠종목에 대한 관심과 응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현재는 혼자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 강윤수를 잇는 세계적 여성 레이서도 많이 등장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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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이 옷을 여미게 합니다. 가을도 깊어가면서 단풍도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맘 때가 되면 군대에서의 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을 각각 따로 느낄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오늘은 그 시절에 비로소 가슴으로 느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과 사랑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때는 1980년 중반이었습니다. 치열했던 대학 2년의 시간들을 추억하며 군대에 가야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암흑같은 군사 독재와 맞서 대학가의 민주화 항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군대를 가기 전 까지 어머니 일을 도왔습니다. 저는 한량이셨던 아버지를 지독하게 싫어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어느정도 마음을 잡고 일을 했습니다. 표고버섯 재배였습니다. 산 등성이에서 일해야 하기에 매우 위험힌 작업이었습니다. 겨울에는 참나무를 베고 봄에 버섯종균을 넣은 후 나무를 세워두는 과정이었습니다.

과거 이야기부터 해야 겠습니다. 제가 본 유년시절의 아버지는 늘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었습니다. 결혼 후 5년동안 군대를 기피해 도피생활을 했던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제가 5살 때 였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그 때부터 언제나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힘들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임신했을 때 홀로 일하고 오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오던 소꼴에 꽂아둔 낫이 떨어져 무릎의 힘줄이 끊어지는 중상을 당했습니다. 산골이라 병원도 못가고 평생 불구가 된 것이었습니다.

아침 태양의 햇살은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에 반짝였다

저는 나중에 고등학생 시절에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더 컸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표고버섯 재배를 함께 했습니다.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시라는 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는 일하시면서도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저는 대들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러지 못하도록 타일렀습니다.


당시 저는 다리를 절뚝 거릴 정도로 일을 했습니다. 마침내 군대를 가는 날이 왔습니다. 저는 집 앞에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시골 집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면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네 번 정도 버스가 다녔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산을 내려가는데 아버지를 계속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말없이 따라왔습니다. 

저는 "아버지 그만 들어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봤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뒤로 돌렸습니다. 그 때 저는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을 보았습니다. 이제 막 산꼭대기에는 떠오른 아침 태양의 햇살에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이 순간 반짝했습니다. 난생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렸지만 저는 이미 아버지의 눈물을 봤던 것입니다. 그렇게 강하신 분이셨던 아버지의 눈물은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군대를 향해 가면서 저는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화해를 했습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면회왔다가 아들 못만난 어머니의 눈물 

저는 강원도 중동부 전선에 있는 백두산부대의 비무장지대 수색대에 배속받았습니다. 위험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만큼 부대의 군기는 살벌했습니다. 신병 시절은 너무 괴롭고 힘든 훈련과 얼차려의 연속이었습니다. 수색대는 소대 단위로 생활했습니다. 산골짜기에 은밀하게 막사를 짓고 생활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강원도 산골은 급격히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훈련은 물론 물동이를 지고 물을 나르고 화목(불때는 나무)을 하고 짬밥을 버리는 등 잡일도 신병의 몫이었습니다.

어느 날, 열심히 물동이를 나르고 있는데 저를 부르는 소리가 멀리 막사에서 들렸습니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급히 뛰어가보니 부대 통신보안 전화를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전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영문도 모른체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라고 말하자 마자 어머니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어쩐 일이세요?"라고 묻자 어머니는 겨우 말문을 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한번 보기 위해서 머나 먼 남쪽에서 강원도 산골까지 산 넘고 물 건너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의 부대가 면회가 안되는 곳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아들이 입대 후 보냈던 안부 편지를 받고 무작정 아들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연대 본부를 찾아왔던 어머니는 아들의 면회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연대 본부에서 전화라도 연결해 주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저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저는 건강하게 잘 있어요."라며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어머니와 전화를 끊고 막사 뒤 후미진 곳에 혼자 앉아서 저는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1박 2일에 걸쳐 강원도 산골까지 오셨다가 아들 얼굴도 못보고 되돌아간 어머니가 안타까웠습니다. 나중에 휴가가서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맛있는 떡과 음식을 해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대본부의 병사들이 그 음식을 전달해주지 않고 그냥 배달사고를 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눈물흘리고 돌아서며 아들에게 음식을 전달해달라고 호소했을텐데 말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속 눈물과 어머니의 흐느끼는 눈물은 하나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근엄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약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대부분 그랬습니다. 가부장적인 농촌 사회에서는 특히나 그러했습니다. 아버지는 완고했고 어머니는 자애로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항상 희생만 하시는 어머니가 안타까웠고 호통만 치시는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겉으로는 강한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여렸습니다. 어머니는 숙명처럼 가족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렸고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보였지만 마음 속은 더 강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은 하나였습니다. 다만 그 표현이 달랐을 뿐입니다.

요즘은 아버지도 약해지셨는지 예전과 같지는 않습니다. 얼만 전에는 어머니가 여행을 다녀오시도록 배려하는 모습도 있으셨습니다. 칠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경운기를 몰고 농사일도 하시지만 과거와 달라지신 모습니다. 한편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다정해지신 것 같아 다행스럽지만 몸이 쇠약해지신 것 같은 아닌지 걱정도 듭니다.   

오늘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쌀 두 가마니 보냈다. 내일 도착할 거다."
"추수하느라 힘드셨겠어요."

"아니다. 막내가 와서 도와줘 잘 끝냈다."
"도움을 못드려 죄송해요." 
(막내 남동생은 지난해 결혼해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전화 좀 해라. 이번에 추수에다 표고버섯까지 나와서 고생했단다."
"네. 알겠어요."

어머니의 전화를 끊고 저는 잠시 멍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가장 걱정하는 분은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전화를 드렸습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별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심전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이 전해져 옵니다. 앞으로는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와도 자주 전화를 드려야 겠습니다. 저도 어느새 아버지를 닮았는지 표현이 서투른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 한 가정을 일구고 아버지가 되고나니 만감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글로 대신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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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얼마 전 어머니께서 첫 해외여행을 다녀오셨습니다. 해외여행을 한번 가자고 하면 아버지 눈치 때문에 주저하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신있게 해외여행에 나선 것입니다. 부모님은 시골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계십니다.

저녁에 퇴근해 아내에게 물어봤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어머니께서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 의아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놀라운 일인데."
"이모님들과 함께 중국 여행을 다녀오신데..."

"우리가 함께 해외여행 가지고 할 때는 안간다는 했는데."
"아버님이 이번에 다녀오시라고 했다는 거야."

"정말 의외인데..."
"막내 이모님이 환갑인데 자매들이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이모님 두 분을 포함 셋이서 중국 여행을 다녀오신 것입니다. 중국 여행은 막내 이모님의 아들이 주선을 했습니다. 여행 경비는 저와 동생들이 별도로 부쳐드렸습니다. 가능한 한 비용 걱정없이 다녀오실 수 있도록 형제들이 각각 경비를 넉넉하게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의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한번도 어머니가 여행가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집 떠나면 고생이라며 해외여행에 대해 거부감이 강했습니다. 더욱이 어머니 혼자서 여행가는 것에는 알러지 증상을 일으킬 정도로 완고했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의 불호령에 언제나 여행을 포기하곤 했었습니다. 아버지 혼자서는 밥도 못해 드시기 때문에 어머니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고 여행을 떠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 올해 여름휴가에 시골마을에서 온 가족들이 함께 모여 즐거운 한 때를 보내던 모습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어머니께서 여행을 떠나신다고 싱글벙글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예전의 모습이 아닌 듯 했습니다. 어머니는 집만 나오시면 아버지가 밥은 제대로 드실까, 시골집에서 키우는 개밥은 누가 줄까 늘상 걱정이 태산이셨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전혀 걱정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순순히 여행을 보내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완고하던 아버지께서 변심한 것 같습니다.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 사시는 모습을 지켜봤던 저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절대 해외여행을 가지도 않겠지만 어머니를 홀로 여행보내는 일은 없을 것 같다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칠순을 넘기면서 마음이 여려지신 듯 합니다. 산골 마을에서 젊은 시절부터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고집센 촌부의 대명사였던 아버지였습니다. 

저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그렇게 해외여행을 함께 가자고 했을 때는 아버지 핑계를 대며 거부하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이모님과 함께 해외 여행을 간다고 하니 서운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이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데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가득했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서는 두 분의 여동생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습니다. 언니로서 여동생들이 힘들 때에도 특별한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시절에 대한 회한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가부장적인 가장으로서 어머니를 늘 힘들게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이모님을 만나기 위해 여행 떠나는 것 마저 거절하던 시절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이모님들과 해외여행을 허락한 것은 천지개벽할 정도의 소식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형제들은 어머니께서 이모님들에게 늘 빚을 지고 사시는 듯 하였기에 이모님들과의 중국 여행을 축하해 드렸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님들은 중국 선양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중국 선양에서 사업을 하는 막내 이모의 아들이 현지 가이드가 되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해외여행이 중요하기 보다는 이모님들과 자매 셋이서 함께 있다는 사실자체가 더 행복한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들이 함께 여행한 것도 평생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 산골마을의 계단식 논과 조립식 주택으로 단장한 마을의 전경


중국 여행에서 귀국한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중국 잘 다녀오셨어요?"
"정말 가는 곳 마다 더럽더라."

"중국 가셨는데 좋은 곳 많이 못가셨어요?"
"우리나라가 좋더라. 외국에 가보니 우리나라가 깨끗하고 좋은지 알겠더라."

어머니께서는 빨리 한국에 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모님들과 첫 해외여행이라서 즐겁기도 했겠지만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잠시라도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도 항상 아버지 걱정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완고하고 집안 일도 안하시고 성질도 급하신 분입니다. 어머니는 항상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떨어져 지내시면 아버지 걱정이 태산같습니다.

아버지와 다시 통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없는 동안 식사는 잘 하셨어요?"
"막내가 집에 와서 밥해 줘 잘 지냈다."

그랬습니다. 부모님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 사는 막내 남동생이 시골집까지 출퇴근을 한 것입니다. 막내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데 일부러 아버지를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수씨가 그렇게 하도록 조언을 했을 듯 합니다. 마음씨 착한 막내 동생 내외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해외여행을 허락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가부장적 사고로 표현도 못하시고 자신의 고집만으로 평생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식들이 모두 결혼하고 나서 마음이 조금씩 변했던 모양입니다. 이제는 어머니와 두 분만 남게 되자 서로를 더욱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 가족들이 고추밭에서 이른 고추를 따기 위해 이동하는 장면


게다가 칠순을 넘기시면서 예전과 같은 기백도 조금 약해지신 듯 합니다. 아버지께서 이제는 어머니를 위해 여행도 권유하실 만큼 달라진 모습에 감동을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께서 언제나 기운넘치는 모습을 점차 잃는 듯 하여 아쉬움도 교차합니다. 평생을 유아독존과 같이 고개를 숙이지않고 살아오신 아버지께서 이제는 어머니를 위해 배려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독립영화 '워낭소리'를 보면서 부모님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산골마을에서 평생 살면서도 도시와는 담을 쌓고 지내시던 아버지. 어머니는 늘 불만을 표시하지만 아버지의 고집과 한 마디에 조용히 순종하며 살아오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이모님들과 즐거운 한 때를 허락하셨습니다. 사랑을 표현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연일지 모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저는 다시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아니, 해외여행 안간다고 하시더니 가실 생각을 하셨어요?"
"이제는 가보고 싶더라."

저는 어머니의 한 마디에 다시 한번 반성을 했습니다. 과거 안가신다고 하셔도 계속 어머니와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한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 독립영화 워낭소리는 가족과 고향 그리고 부모님을 생각하게 한다


"어머니, 다음에는 꼭 우리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가자구요."
"그러자구나."

"어머니 칠순이 곧 다가오니 아버지와 함께 가요."
"그래. 아버지가 안가시려고 할 것 같기는 하지만."

"저희가 설득하겠습니다."
"너희들이 그리 해보렴."

어머니께서 이렇게 자신있게 말씀하신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가족들과 여행하자고 하면 뒤로 빼시던 어머니께서 이제는 주저없이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아버지를 믿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옹고집 인생이 변심을 하자 어머니께서 기운이 넘치시는 듯 합니다. 다가오는 어머니 칠순에는 부모님을 비롯 온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도 이제는 손주들을 비롯 함께 여행가는 것에 대해 거부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어머니의 자신감은 이미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행복한 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이제는 서로 사랑과 배려도 표현하면서 사세요.

오늘 당장 사랑한다 말해보세요.

樹 欲 靜 而 風 不 止(수욕정이풍부지)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쳐주지 않고

子 欲 養 而 親 不 待(자욕양이친부대)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네
<論語> 나오는 구절입니다.

돈을 벌면 잘 해드려야지,
성공해서 잘 해드려야지...하면 늦습니다.

부모님은 돈을 많이 번 아들,
크게 성공한 딸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고생하며 노력하는 그대로의 자식을
기다리며 행복해 하십니다.

‘아버님이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이 순간을 어머니가 지켜보셨더라면... "
하는 순간이 오기 전에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십시요.

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것이 언제였나요?
어머니를 안아 드린 것이 언제였나요?

오래전에 우리가 받았던 것을 돌려 드릴 때입니다.
손톱을 깎아 드리고, 발을 씻겨 드리고,
등을 밀어 드리고, 어깨를 주물러 드리세요.
부엌에서 설거지하시는 어머니 등 뒤에서
살짝 안아보세요.

처음은 어색하겠지만, 얼른 용기를 내보세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이
서로의 가슴에 물결 칠 것입니다.

우리는 쑥스러움 때문에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오.

- 고도원의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해드려야 할 45가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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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 시절부터 학창 시절까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존재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자리도 불안했습니다. 일방적인 아버지의 호통이 시작되지 않을까 걱정하곤 했습니다.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제가 다섯 살이 되던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혼자서 저를 낳고 키웠습니다. 아버지는 군대 입영을 거부했습니다. 당시는 1960년대 시기였습니다. 신혼 시절에 아버지를 잡으러 산골 마을로 군인들이 닥쳤습니다. 아버지는 초가집 벽을 부수고 산속으로 도망갔습니다. 그 후 어머니는 혼자서 농사일을 하고 혼자 저를 낳아 길러야 했던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벌교에서 주먹 대장이었고 돌아온 마을과 읍내에선 호랑이였습니다.

    다섯 살 아들이 아버지에게 날린 주먹과 첫 만남

    제가 처음 아버지를 본 모습도 불청객으로 느꼈을 듯 합니다. 다섯 살 때, 아버지는 밥상 앞에서 어머니에게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얼굴에 그만 주먹을 날렸습니다. 아버지는 호랑이같은 눈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이 놈이 어디다가..." 저는 부엌 문으로 나와 마당을 지나 도망갔습니다. 한참 달리다 마당 입구에서 되돌아보니 아버지는 집 앞에서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첫번째 전투였을지 모릅니다.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으면 싸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늘 당하기만 했습니다. 바보같이 왜 당하기만 하냐고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마다 어머니는 자식들 걱정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서울 큰 집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서울 구경 시켜준다는 큰 아버지를 따라 나선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큰 집에 자식이 없어 제가 서울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비관하던 학창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걱정은 힘겹지만 이겨내야 했습니다.

    방학 때 마다 혼자서 시골을 찾았습니다. 한 여름날에도 어머니의 농사 일을 도와 논둑을 베고 땔감 나무를 했습니다. 저의 얼굴에는 항상 땀이 범벅이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농사 일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읍내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날도 많았습니다. 한량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어머니 혼자 힘든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집에 땔감이 떨어져도 아버지는 태평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아버지와 멱살을 잡고 싸울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며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산 속에 있는데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하라 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어느새 1980년대 중반 대학에 갔습니다. 암흑과 같던 군사 독재 시절에 치열한 대학시절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군대를 가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대학 2년을 마치고 난 뒤었습니다. 군대를 가기 전 까지 어머니 일을 도왔습니다. 농가 부채는 1억원에 달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는 아버지가 어느정도 마음을 잡고 일을 했습니다. 표고버섯 재배였습니다. 산 등성이에서 일해야 하기에 위험했습니다. 겨울에는 참나무를 베고 봄에 버섯종균을 넣은 후 나무를 세워두는 과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힘든 일을 하면 더 화를 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화풀이 대상이 어머니가 되었지만 어머니는 늘 참았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장성한 제가 있어 아버지는 예전보다 심하게 가지는 않았습니다. 여름이 왔습니다. 비가 온 후 버섯이 엄청나게 나왔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지게를 등에 지고 엄청난 버섯을 산길을 타고 집으로 날랐습니다. 어머니는 버섯을 따고 부자는 쉴새없이 버섯을 날랐습니다. 하루종일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가다보니 얼굴에 소금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가장 힘든 노동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고된 일로 다리를 절뚝거리는 저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산 위에 떠오른 태양의 햇살은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에 반짝였다

    그리고 군대를 가야 하는 날이 왔습니다. 저는 집 앞에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시골 집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면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네 번 정도 버스가 다녔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산을 내려가는데 아버지를 계속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말없이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 그만 들어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봤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뒤로 돌렸습니다. 그 때 저는 보았습니다. 이제 막 산꼭대기에는 아침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태양의 햇살에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이 순간 반짝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렸지만 저는 이미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군대가는 아들이 걱정됐습니다. 계속 아들 뒤를 따라오며 잠시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아들에게 보여주기 싫었지만 저는 햇살에 비친 아버지의 눈물 한방울이 빛나는 것을 봤습니다. 난생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렇게 강하신 분이셨던 아버지의 눈물은 충격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군대를 향해 가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화해를 했습니다.

    독립영화 '워낭소리'는 어쩌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단한 삶과 닮아 있습니다. 부모님 세대는 자신의 삶 보다는 자식들을 위해 늘 헌신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표현에 인색했고 어머니는 항상 자식을 사랑으로 감싸주셨습니다. 첨단 문명이나 도시 사회에서 보면 워낭소리의 노부부의 삶은 한편으로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부부의 삶에는 가족이 있고 마음의 고향이 있습니다.  슬프고 괴롭고 힘들더라도 안식과 위안이 되는 곳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은 바로 부모님입니다. 이제 아버지도 기력이 약해지고 어머니도 몸이 아프시곤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어보니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번 여름휴가에도 자식들과 손주들 기다릴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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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저녁에 퇴근하니 두 딸아이가 색종이로 정성껏 만든 카네이션을 내놓았습니다. 큰 딸은 카네이션이 담긴 편지를 건네주었고, 작은 딸은 빨간 카네이션을 만들어 가슴에 붙여주었습니다. 이제 두 딸이 많이 컸나 봅니다. 출근 할 때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가야 하나 고민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요즘은 모내기 등 농사철이나 바쁜신가 봅니다. 장남의 전화를 받은 어머머는 무척 반가운 목소리이셨습니다. 무뚝뚝한 아버지도 건강 걱정해주는 아들의 전화에 내색은 안하시만 기분이 좋은신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밝고 쾌활한 두 손녀딸의 목소리를 듣고나니 부모님은 더욱 상기되셨나 봅니다.

    아내는 시골의 부모님을 비롯해 장모님 등 어르신들에게 어버이날을 맞아 작지만 얼마의 효도 용돈을 송금했습니다. 이미 지난 주말에는 큰 집에 들어 용돈을 드리고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는 자식이 없어 장손이 제가 돌보는 처지인지라 아내는 여러모로 장손의 며느리로서 고생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부모님은 물론 친지들까지 챙길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밝은 얼굴로 어버이날이나 경조사를 잘 챙겨주는 아내가 고맙습니다.


    ▲ 두 딸아이가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과 아빠 엄마에게 쓴 편지 

    최근 어버이날과 가정의 달을 맞이해 부모님이나 어르신들께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 착안해 각종 효도 선물이 저 마다의 장점을 내세우며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건강식품이나 효도관광, 연예인 디너쇼 등이 고가의 효도선물이었지만 요즘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첨단(?) 선물이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

    그 중 하나가 '효도 성형'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효도 성형은 '주름 성형'인데, 특히 눈가 주름과 눈 밑 불룩한 지방 덩어리를 없애는 수술이라고 합니다. 보톡스와 같은 주사요법도 어르신들을 위한 효도 상품이라고 합니다. 실버시대에 따라 조금이라도 젊고 아름답게 보이려는 것은 부모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점에서 가격적인 부담이 크지 않다면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효도선물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습니다. 카네이션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상품권이 효도선물로 추가되었습니다. 여행이나 여가 생활의 욕구가 커지면서 효도관광도 등장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건강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건강검진이 유행했습니다. 그 후에는 효도폰과 효도성형이 또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어떤 뉴스에 의하면 어버이날 효도선물로 '줄기세포 보관 서비스'가 등장해 주로 강남 일대의 부유층을 중심으로 인기라고 합니다. 한국줄기세포은행에서 제공하는 '셀뱅킹' 서비스가 그것입니다. 줄기세포 선물은 가격이 180만원대인데 이미 가입자만 3천명 정도라고 합니다. 가입자는 강남 지역 비중이 70%를 차지할 정도라고 합니다.

    셀뱅킹은 사람의 말초 혈액에서 성체줄기세포를 추출해 50년간 보관해주는 서비스입니다. 근육, 간, 신장, 심장 등 다양한 장기로 분화가 가능한 성체줄기세포를 보관해두면 어르신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효도선물도 생명공학을 이용한 줄기세포 보험시대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일반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부담스런 가격으로 인해 선택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효도선물도 '부익부빈익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기술이 발전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면 앞으로 줄기세포가 많은 사람들에게 효도선물로 각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은 어떤 자식들이나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줄기세포 효도선물은 실제로 도움이 된다면 의미있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다만 빠른 기간내 저렴한 가격에 상용화와 대중화를 위한 한단계 진일보한 기술 발전이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어버이날이 되면 불효를 하는  것 같아 고민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고향에 자주 찾아뵙지 못한 이유로, 경제적으로 어려워 변변한 효도 선물이나 용돈을 드리지 못하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걱정을 많이 하는 세대가 바로 현재의 대학생들일 수 있습니다. 경제불황으로 취업도 어렵고 아르바이트 자리 마저 부족한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태를 반영한 것인지, 최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는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빨리 취업하는 것"이 1위(약 37%)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다음이 "장학금이나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학비 부담을 덜어드리는 것"이 2위(23%)였습니다. 이는 곧 대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부모님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드리는 것을 최고의 효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무한경쟁에 내몰려 힘들고,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으로 괴롭고,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힘겨운 시절인 것 같습니다. 모두가 보다 행복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물질적인 것이 효도나 행복이라는 등식에만 고정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모님은 고마운 전화 한 통화, 직접 찾아뵙고 같이 식사하는 자리, 정성이 담긴 선물 등에도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담긴 정성과 사랑이 오래토록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어진다면 무엇보다도 큰 행복일 것입니다.

    효도 쿠폰의 행복

    작년 이맘 때, 두 딸아이가 어버이날이라고 '효도 쿠폰'을 준 일이 있습니다.

    효도 쿠폰에는 구두 닦아주기 5회, 거실 청소하기 5회, 안마해주기 3회, 뽀뽀해 주기 3회 등과 같은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아빠나 엄마가 필요할 때마다 해당 쿠폰을 아이들에게 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학교 선생님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래서 작년 오월에는 아이들이 준 '효도 쿠폰'을 이용해 두 딸아이가 닦아주는 구두도 신어보고, 안마도 자주 받아보는 행복이 넘쳤습니다. 

    돈이 아니더라도 가족들 사이의 작은 배려가 큰 행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행복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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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칠순이 다 되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계십니다. 호랑이같은 아버지와 함께 부부의 연을 맺은 이후 어머니는 청춘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자식들은 대도시에서 결혼해 살고 있고, 막내 남동생이 가까운 도시에서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곤 합니다.

    그러나, 장남인 제가 자주 부모님을 찾아뵙지도 못해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다리 한쪽이 불편하십니다. 어머니가 불편하신 다리로 평생 산골에서 힘든 농사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제게는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불행하게도 예기치 못한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절게 된 사연과 혼자서 저를 키운 새색시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은 까마득한 두메산골입니다. 아직도 온통 산으로 뒤덮인 고향은 비포장도로를 통해 하루에 세 번 버스가 다닐 정도로 산골 오지입니다. 부모님은 산골 외딴집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름 휴가 만큼은 시골 집에 동생들 가족들과 일정을 맞춰서 함께 가곤 합니다.

    어머니는 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으신 분이셨고 아버지는 초등 교육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지난 1960년대는 교육 환경이 매우 열악한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시골 마을에 잠시 머물던 시절에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을 '주먹자랑 하지 말라'고 알려진 벌교에서 지냈던 분으로 엄청난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결혼 후 신혼 시절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는 군대 입영을 기피한 상태였는데 아버지를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에서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헌병대를 피하기 위해 초가집의 흙벽을 무너뜨리고 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 후 아버님을 몇년 동안을 도시에서 숨어지냈습니다. 당시에는 군대에 간 후 사망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군대 기피가 많았다고 합니다.

    갑자기 어머니는 새색시가 생과부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홀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고 땔감을 구해 생활해야 했습니다. 당시 시골집은 초가집이었고 나무 땔감으로 밥을 짓고, 소꼴을 베어 소를 키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전기도 가스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녁엔 방에 호롱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미 임신 중이었습니다. 혼자서도 힘든데 홀몸이 아닌 상태로 논농사 밭농사를 짓고 소까지 키워야 하는 고난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겹게 일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혼자서 열심히 밭 일을 하다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서둘러 밭에서 일을 끝내고 머리에는 소꼴을 가득 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사고가 터졌습니다. 길가에 뻗은 칡넝쿨에 걸려 어머니가 넘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넘어지던 중 머리에 인 소꼴에서 낫이 떨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낫은 어머니 앞에 날이 선 상태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예리한 낫의 날에 닿아버렸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로 어머니는 무릎의 힘줄이 끊기는 대형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사고를 당하고도 치료를 할 병원도 없었습니다. 곁에는 아버지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당시 저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어머니는 무거운 몸이다보니 칡넝쿨에 걸려 균형을 잡지 못한데다 낫을 피하지 못해 다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임신한 상태에서 수술을 하는 것도 몸 속의 아이에게 해가 될까봐 못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그 사고로 인해 한 쪽 다리가 불편한 불구가 되셨습니다. 그러한 몸으로 어머니는 다시 농사를 짓고 혼자서 저를 낳아서 길렀습니다. 지금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갓 결혼 후 남편도 없이 무려 5년을 그렇게 농사도 짓고 저를 키웠던 것입니다. 저는 아가 시절을 마당이나 밭을 기어다니면서 놀았다고 합니다. 마당에서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나 닭과 함께 놀고, 밭에서는 지렁이가 친구였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도 일을 하고 계시고, 밭에 가서도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워낭소리는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저의 유년 시절은 밤낮으로 어머니 밖에는 없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호롱불 밑에서 제게 한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5살 때 처음 어버님이 고향으로 돌아오셨지만 저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신 후에도 집안 일은 하지않고 한량으로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싹텄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마음의 화해가 어느정도 되었고, 아버지도 나이가 들면서 과거와 달리 농사 일이나 집안 일도 했습니다.

    제 나이가 5~6세 정도일 때도 저는 동네 아이들과 산에 올라가 고사리 손으로 나무를 하곤 했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것은 오직 어머니 일을 돕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저의 일을 돕는 역할이었습니다. 청소년기 시절에도 방학 동안 내내 어머니가 하시는 일을 돕는데 땀을 흘리곤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제가 어머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 때부터 어머니 혼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돕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왜 다리 하나가 불편하게 되셨는지 얘기를 처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어머니가 다리를 절면서 걷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불구가 된 것이 모두 제 탓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어머니를 보면, 그 젊은 시절에 임신한 몸으로 어떻게 다리가 잘리는 고통을 참고 이겨냈는지 가슴이 아프곤 합니다. 제가 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늘 변함없이 생각하는 정신적 지주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벼가 익어가는 여름 날, 논둑을 걸으면서 저에게 하신 말씀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단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어머님은 소중한 등불과 같았습니다. 제가 방황하거나 잘못 가려하면 언제
    나 등대처럼 저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다리가 잘리는 듯한 고통을 어떻게 참고 견디셨습니까. 그리고 홀로 저를 어떻게 키우셨나요.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고생만 하셨습니다. 특히 홀로 키웠던 저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 유년시절의 기억 마저 희미하지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힘든 일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자주 연락도 못드려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해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지금은 자식들도 모두 결혼해 잘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어머니의 귀중한 가르침과 사랑 덕분입니다.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은 어머니가 그리워집니다. 언제나 힘을 주시는 어머님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찾아뵙겠습니다. 밤낮으로 기온차가 큰 데 건강 조심하세요.

    언제나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해보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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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친구 K가 대만 갑부의 외동딸을 만나서 소설같은 사랑을 하게 된 사연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첫번째 이야기가 나간 이후 매일 많은 분들이 다음 편을 기대해 주셨습니다. 이번 최종편은 브라질에서 대만을 거쳐 한국까지 오게 된 이야기입니다. 1부와 2부를 못보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대만 갑부의 딸과 결혼한 친구의 비결 '편지'(1부)
    대만 갑부의 딸과 결혼한 친구의 비결 '골라'(2부) : 성당에서 둘 만의 결혼식

    대만행 비행기를 탄 K와 S는 꼭 축복받은 결혼을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대만에서  재력가인 S의 아버지는 외동딸이 사랑을 택해 브라질로 몰래 떠나버린 후 상심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분노 보다는 자신이 반대하는 한국 남자 K를 위해 몰래 야반도주하듯이 브라질로 도망쳐버린 딸에 대한 배신감이 컸습니다.
     
    K와 S는 초조한 마음으로 대만에 도착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장인어른과의 만남은 K에게 배수의 진을 친 심정이었습니다. 드디어 K는 S의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K는 무릎을 끓고 S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 누구 보다도 따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

    S의 아버지는 이미 엎지러진 물이 되어버린 딸의 사랑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두 사람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K는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다시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따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S의 아버지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브라질서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나?"
    "옷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자네가 브라질에서 옷장사로 최고가 된 후 다시 나를 찾아오게. 그러면 인정해 주겠네."
    "예,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K는 장인어른의 제안에 한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자신도 있었습니다. S의 아버지는 자수성가로 갑부가 된 분이었습니다. 순순히 K를 인정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지만 S가 고생을 통해 뭔가 깨닫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K와 S는 대만을 떠나 다시 브라질로 돌아왔습니다. K는 대만으로 떠날 때 보다 더 비장한 마음으로 브라질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K는 브라질로 돌아오자 마자 더 열심히 "골라 골라"를 외치며 장사에 몰두했습니다. 잠자는 시간 마저 줄여가면서 옷장사에 올인했습니다. 점점 K의 옷가게는 번창해 갔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한인 사회에서도 K의 옷장사로의 성공이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한인들 중에 옷장사를 하는 분들이 꽤 있었는데 K로부터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몰려오기도 했습니다. K는 마음이 넉넉한 친구라서 브라질의 한인들에게 비법 전수는 물론 한인들의 여러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를 못했습니다.

    브라질에서 K의 옷장사는 성공적인 사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K의 "골라 골라" 다국어 메들리는 성공의 보증수표와 같았습니다. K는 사업이 번창해 갈수록 조금만 더 고생하면 S의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S도 사업의 번창에 따라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일요일에는 둘 만의 결혼식을 거행한 신부님의 성당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영화 'Love Story' 한 장면]

    그러나, 불행은 예기치 않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잘 나가던 K의 의류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한 순간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K와 S가 그토록 희망을 꿈꾸던 의류 사업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습니다. K가 너무 한인들을 믿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K의 옷장사가 성공을 거두자 K에게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접근한 한인들이 사기를 친 것이었습니다. K는 한인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자금들을 쉽게 빌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 한인들이 돈을 빌려간 후 만기가 되어도 갚지않고 도피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K의 의류 사업은 한꺼번에 밀려오는 자금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도가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K와 S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한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대만에 갈 수가 없게 되거나, 다시 처음부터 사업을 일으키려면 수많은 세월이 필요할 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좌절과 포기를 모르던 K도 자신감을 잃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패배감일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희망이 사라진 S는 더 힘든 나날들이었습니다.

    K와 S는 늘 믿음과 용기를 주던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신부님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K와 S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잠시나마 K와 S는 신부님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용기를 얻어 성당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 전화가 왔습니다. S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만에 계신 S의 아버지였습니다.
    "요즘 몸은 건강하니?"
    "네. 아버지."

    "왜 목소리가 힘이 없니?"
    "아니예요. 아버지가 웬 일로 전화를 주셨어요?"

    "사랑하는 내 딸아. 힘들면 힘들다고 왜 말을 못하니?"
    "......"
    S는 눈물이 날 것 같아 도저히 전화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Love Story / Taylor Swift]

    "K를 바꿔주라. 딸아."
    "네, 접니다. 어르신."

    "브라질 생활 정리하고 대만으로 돌아오게."
    "네. 아닙니다."

    "자네의 브라질 생활을 다 알고 있다네. 의류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도 알고 있고 사업이 부도난 것도 다 알아."
    "네. 어떻게..."

    "브라질서 사업하는 지인들로부터 소식을 수시로 듣고 있었어. 자네의 사업 수완과 성공을 이미 듣고 있었어. 자네가 최근에 사업이 부도난 것은 자네의 잘못은 아니잖아. 너무 사람 믿지 말게. 그만 내 딸과 함께 대만으로 돌아오게. 자네가 이겼네."
    "장인어른...."

    K와 S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K와 S는 브라질 생활을 접고 대만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K는 다시 재기해 성공한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장인어른은 두 사람의 사랑과 결혼을 인정한 상태이니 고집을 피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S가  브라질 생활을 힘들어하고 대만의 고향 생각을 많이 해 더 이상 브라질에 머물기는 힘든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S의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두 사람의 브라질 생활을 거의 다 알고 있었습니다. S의 아버지는 브라질의 지인들을 통해 사랑하는 딸이 잘 지내는지 늘 궁금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K의 사람 됨됨이와 사업 수완을 멀리서 지켜봤던 대만의 장인어른은 K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갑작스런 부도로 인해 S가 상심하고 괴로와 하는 모습을 더 이상 못본체 할 수 없었습니다.

    대만에 도착한 K와 S는 거기서 새로운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장인어른의 사업에 참여하기 보다는 선교사의 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장인어른도 같은 종교라서 적극 후원했습니다. S의 아버지는 당분간 두 사람이 홀가분하게 그 동안의 고생을 잊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기도 했습니다. K는 대만의 오지를 돌며 선교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K와 S가 심적으로 안정을 찾고 행복한 시간을 다시 보내게 된 셈이었습니다.

    몇년의 세월이 지난 후, K는 한국과의 무역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부산과 대만을 오가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부산에 머무르는 기간도 많았습니다. 무역사업도 했지만 주말을 이용해 K는 선교사 일도 병행했습니다. K는 무엇이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친구였습니다. 한국 남자 K와 대만 갑부의 딸 S는 브라질서 시작해 대만을 거쳐 한국에 이르는 사랑과 행복을 함께 했던 것입니다.


    [영화 'Love Story' 한 장면]

    저는 K가 몇년전 한국에 도착했을 때 대학 1학년때 친구들과 함께 캠퍼스 앞의 주점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K가 대학을 중퇴하고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지 15년여가 지난 후 처음이었습니다. 그와 밤새도록 그 동안의 해외에서의 삶과 S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생활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K는 술을 한잔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학 때 주당이던 K가 아니었습니다. 선교활동하면서 술은 완전히 끊었다는 것입니다. K에게 물었습니다.
    "야. 그런데 너 어디서 선교를 하냐?"
    "주로 술집에서..."


    "장난하냐? 술집에서 선교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나는 남들이 다 하는 곳 보다는 비록 힘들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한단다."

    "그런데 술을 한잔도 하지 않고 어떻게 선교가 가능하냐?"
    "지금까지 한 잔도 안했잖아. 물 한잔으로 이렇게 있잖아."

    저와 친구들은 도저히 K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밤새도록 대학교 앞으로 주점을 돌며 K를 시험했습니다. 새벽 5시가 되었건만 K는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술 한잔도 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물이나 콜라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친구들이 이미 지치고 졸려서 몸을 가눌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K가 한마디 했습니다.

    "이래도 못믿겠냐?"
    "K야. 우리들이 졌다. 이제 집에 가자."

    친구 K의 러브스토리 3부작 최종편은 여기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어떤 분은 요즘같은 현실에 어찌 K와 S의 순수한 사랑이 가능한지 놀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K와 S의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표현상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K는 정말 지독한 녀석입니다. 다시 만나면 부산 도착 후 선교 이야기를 들어봐야 겠습니다. 많은 관심을 갖고 K와 S의 국경과 신분을 뛰어넘는 러브스토리를 읽어주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5월의 연휴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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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제 낮에 경기도 안산에 살고계신 작은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평소 전화가 없던 작은 아버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뭔가 긴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지금까지 평생을 고생을 하면서 가족들을 위해 헌신해 온 분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이세요?"라고 묻자, 작은 아버지는 "K가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했다.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전화했다."고 했습니다. K는 작은 아버지의 남동생입니다. 저에게는 작은 아버지(삼촌) 중 한 분입니다.
     
    작은 아버지에게 지금 상태는 어떤지 다시 질문하자, 이미 수술을 했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라고 합니다. 의사의 이야기로는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어느정도 의식은 돌아왔지만 말을 하지도 못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당장 면회라도 가보려고 하자, 작은 아버지는 '지금은 면회도 하루에 두 번만 되고 의식도 없으니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작은 아버지에게 위로를 드렸지만 작은 아버지는 마음이 많이 울적하신 것 같았습니다. 주말에 병원을 찾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는 작은 아버지와 전화를 한 후 상념에 쌓였습니다. K삼촌이 뇌출혈로 쓰러진 것도 마음이 아픈 일이지만 작은 아버지를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현재 심각한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는 할머님을 모시고 살고 계십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K삼촌 마저 뇌출혈로 중환자실에 입원했으니 작은 아버지의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K삼촌은 결혼했지만 이혼한 후 혼자서 딸 하나를 키우면 살고 있었기에, 작은 아버지는 K삼촌의 딸도 함께 키워야 할 상황입니다.

    뇌출혈이란?
    뇌출혈(중풍)은 머리로 흐르는 피의 흐름이 오작동을 일으켜 머리 속에서 출혈을 일으키는 증상입니다.뇌출혈이 일어나면 곧 의식을 잃고 까무라치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의식을 잃거나 사망할 수 있습니다. 뇌출혈로 인한 후유증의 하나로 뇌출혈된 반대쪽에 반신마비가 오는 것이며 안면신경마비, 언어장애, 팔다리 이완성 마비 등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한국에서 30대 이상 성인의 사망원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뇌졸중의 대표적인 질환입니다. 고혈압과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 중 하나입니다. 최근 5년간 투병하다 사망한 유명 탤런트 김흥기 씨도 뇌출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저희 아버지와 배가 다른 형제입니다. 아버지를 비롯한 3남 1녀를 (이미 돌아가신) 첫째 할머니가 낳았고, 그리고 작은 아버지를 비롯한 3남 2녀가 있으니 모두 6남 3녀의 대가족으로 매우 복잡한 가족관계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버지는 둘째이시고 작은 아버지는 넷째이십니다.

     
    그래서 작은 아버지가 자신을 낳아준 할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며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당뇨병으로 병간호도 벅찬데 K삼촌 마저 뇌출혈로 거동을 하지 못해 그 가족들을 돌봐야 할 처지입니다. 가난한 살림에 대부분의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도전이 계속되는 셈입니다.

    저도 힘닿는 대로 돕겠지만 직접 환자들과 가족들을 돌보며 살아야 하는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안됩니다. 왜 불행은 한 사람에게 한꺼번에 덮치는지 야속하기만 합니다. 

    저에게 삼촌들은 학창시절에 언제나 의지가 되는 존재였습니다. 당시 시골 생활이 모두 어려웠지만 그래도 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고있던 저를 위해 삼촌들은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곤 했습니다. 특히, 작은 아버지는 온 가족들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습니다.

    큰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그다지 평탄한 삶을 이루지 못했지만, 성실하고 온화한 작은 아버지는 언제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건달 생활을 하던 K삼촌의 마음을 잡아주고, 당시 권투선수였던 막내 삼촌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새롭게 출발하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작은 아버지의 인생은 참으로 힘들도 어려운 삶이었지만 결코 고난에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분에게 하늘도 무심한 것 같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만 가능한 정성을 다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K삼촌이 뇌출혈 환자의 특성상 비록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않더라도 빨리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가 비록 힘들지만 용기를 잃지마시고 힘을 내셨으면 합니다. 많은 상념과 생각이 교차하는 시간들입니다.

    건강 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듯 합니다. 고혈압이 있으신 분들은 특히나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적당한 운동도 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뇌출혈은 50~60대 이상의 고령에서 흔하며, 특히 요즘같은 환절기에 잘 발생할 수 있으니 건강해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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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저녁에 '딩동'하고 초인종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골에서 부모님께서 찹쌀 한 가마와 옥수수 종자를 택배로 보내셨던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물었더니 "주말농장하려고 어머님께 옥수수 종자를 부탁드렸는데 함께 보내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버님은 1950년대 청소년 시절을 벌교에서 생활하셨습니다. 큰 아버님이 벌교에서 고등학교를 다니셨고 아버님은 함께 기거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벌교는  고등학교가 있던 거의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인근 농촌 마을이나 멀리 떨어진 산골에서도 벌교로 학교를 보내야 했습니다. 큰 아버님과 아버님은 시골에서 벌교로 유학을 간 셈입니다.


    아버님은 당시 벌교에서 주먹을 좀 쓰셨다고 합니다. 과거부터 벌교하면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벌교에서는 젊은 청년들은 물론 청소년들 사이에도 결투(?)가 많았나 봅니다. 아버님은 외지에 유학가서 남들에게 구박받지 않고 강한 남자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항상 체력 단련을 했다고 합니다.
     
    시골 고향 집에 오면, 나무로 직접 만든 평행봉에서 항상 운동을 하셨습니다. 이소령이 혼자서 무예를 익히는 수련과도 흡사할 것입니다. 벌교에서 당시 청년이던 큰 아버님과 아버님은 함께 다니면서 주먹으로 벌교 지역을 평정하셨다고 합니다. 특히, 아버님은 힘과 체력이 좋아서 5일장이 열리면 씨름대회에 나가서 1등도 여러번 했다고 합니다. 어머님께 전해들은 이야기라서 정확한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산골 고향으로 돌아오신 아버님은 잠시 고향집에 놀러왔던 어머님을 만나 결혼하셨습니다. 외조부모께서 반대하신 결혼이었지만 거의 막무가내로 결혼식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아버님의 기개(?)는 어떤 사람들도 막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 외조부모님은 집안의 평안을 위해 결혼에 승락했다고도 합니다.


    [영화 워낭소리 : 촌로 부부의 모습은 부모님을 연상케 한다.]


    아버님은 결혼 후에도 시골 마을에서 호랑이로 불리셨습니다. 아버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뜻대로 가정과 마을을 호령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량으로 생활했던 것입니다. 간혹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지게에 나무를 지고오시면 산딸기를 칡잎에 싸오곤 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따온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땐 저는 아버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늘상 어머님께 호통치던 모습에 대한 반발심만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희는 매년 여름이 가족들이 모두 시골에 모여 휴가를 보냅니다. 작년 여름에 자식들이 휴가를 시골에 모였는데 아버님은 어머님을 힘들게 하셨습니다. 그 후 자식들은 어머님 편으로 전부 합세해 아버님이 고립된 적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장성했고 결혼까지 한 상황에서 아버님의 처사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머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으니 당시 아버님의 상실감이 컸을 것입니다. 어버님은 아버님 걱정에 다시 시골에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칠순이 되신 아버님을 위해 형제자매 가족들이 함께 고향에 모였습니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앙금도 모두 풀고 다시 가족들이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예전보다 많이 힘이 없어보이시는 아버님을 보니 송구스런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는 자식들에게 곡식들을 자동차에 실어주시면서, 어머님은 올해 여름에도 시골에 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직도 아버님은 칠순 나이에 시골 마을 이장을 맡고 계십니다. 젊은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찹쌀 한 가마와 옥수수 종자를 받았습니다. 아내가 부탁드린 것은 옥수수 종자 뿐인데 찹쌀 한 가마도 보내신 것입니다. 사실 찹쌀 한 가마는 아버님이 보내라고 하신 것일 듯 합니다. 아버님은 언제나 그러셨습니다. 어머님에게 옥수수만 보내지 말고 참쌀 한 가마도 함께 보내라고 하셨을 분입니다. 자식들과 어머님 앞에서는 늘 근엄한 모습이었지만 돌아서면 한없이 자식들을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말씀으로 표현을 못하는 산골 마을의 전형적인 아버님이셨습니다.
     
    아버님이 보내주신 찹쌀 한 가마를 보면서 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젊은 청년시절의 기개를 항상 잃지안고 호령하시던 아버님이 이제는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예전에 비해 아버님이 어머님께 조금은 부드러워 지신 것 같아 다행이지만 한편으로 약해지신 아버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벌교에서 주먹을 자랑하던 열혈 남아였던 아버님이 이제는 마을에서도 예전과 같은 호랑이 모습은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아버님의 자존심은 예전부터 '쌀'이었습니다. 아무리 한량이라고 하시더라도, 논농사는 반드시 당신이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항상 가장 품질좋은 쌀 농사를 짓곤 했습니다. (지금은 표고버섯 재배를 비롯해 여러가지 일들도 하십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쌀을 보내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아버님이 보낸 '찹쌀'은 그 이상의 마음이 담긴 선물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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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