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초'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1.16 20년전 군대, 말년 병장 죽이는 낙서 놀이는? by 진리 탐구 탐진강 (55)
  2. 2009.12.25 20년 전 화이트 크리스마스, 직접 경험한 4땅굴 발견 관통했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32)
  3. 2009.08.30 군대 신교대 얼차려와 목숨 건 전초 각서 by 진리 탐구 탐진강 (18)
  4. 2009.06.20 군대에서 왕구렁이에게 복수당했던 공포의 실화... by 진리 탐구 탐진강 (44)
  5. 2009.04.18 20년전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찾고보니 by 진리 탐구 탐진강 (29)
  6. 2009.02.18 블로거뉴스가 20년전 전우들을 찾아주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10)


"천하무적 짱가도 내 앞에선 고철"

태권V가 짱가를 마구 때리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태권V와 짱가의 모습을 실제 그림으로 그려 실감나게 낚서를 한 장면이 인상적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덧붙여 '임자 만날 날 있을 걸.'이란 의미심장한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궁금하겠지요? 제가 20년전 군대를 제대할 무렵에 후배나 동료 전우들이 회상록에 그린 낙서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책상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군대 회상록을 들추어보다가 전우들의 낙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앞에서 짱가는 저의 군대시절 별명입니다. 당시 힘좋고 기술좋은 작업반장이었던 저를 전우들은 '짱가'라고 불렀습니다. 짱가는 그 시절 사람들이 좋아했던 로보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런 짱가를 힘으로 눌러주고 싶던 후배 전우가 로보트 태권V 주인공을 그려 우스꽝스런 만화를 그린 것입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 짜 짱가 엄청난 기운이 (야!)'로 시작되는 노래인 우주소년 짱가의 주제곡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단번에 알 것 같습니다.

                                지난 1970년대 추억의 로보트 3인방, 짱가-태권V-황금박쥐 모습

그런 만화 낙서를 보니 군시절 추억이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여름철 폭우가 내려 작전도로가 유실되면 저와 친구인 J는 둘이서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저는 돌쌓는 기술로, J는 엄청난 괴력의 힘으로 돌을 날라 순식간에 도로를 복구했습니다. 강원도 철책에 폭설이 내리면 언제나 제일 앞에 서서 저와 J는 눈을 치웠습니다. 군대 작업의 달인, 환상의 짝꿍 듀엣이었습니다.
 
무시무시하던 선배도 말년 병장이 되면 후배들의 장난감이 되는 이유  

그래서 후배 전우들은 저와 J의 존재가 고맙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했나 봅니다. 그런 것들이 낚서로 표출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헤어지는 아쉬움과 친근감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낙서를 살펴볼까요?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을 놀리는 낚서도 눈에 띄었습니다.
"말년의 고뇌여~ 가는 날까지 우리들에게 갈굼 당할 걸 생각하니 힘드시겠지."
"짱가씨 결혼할 거니? 짱가 왈 내비둬, 이렇게 살다 껌에 붙어 갈겨."
"짱가씨. 집에서 전화왔어요. 집에 오지 말라고."
"웃기지 마. 나도 때 빼고 광 내면 미스코리아 화장실 청소라도 할 수 있다  뭐라고라~"


군대 회상록 낚서판에 동료 전우들이 말년 병장을 향해 한 마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장면

낙서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후배들이 말년 병장인 저를 갖고 노는 것 같은 구절들이 묻어나 보입니다. 사실 군대에서 제대 앞둔 말년 병장은 후배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한창 때 무시무시한 선배였다 하더라도 말년은 후배들에게 당해주면서 정겨움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하나의 전통과 같았습니다. 그것이 남자들의 세계를 지탱하는 하나의 정과 훈훈한 의리였습니다.

잠깐 퀴즈?
낙서에 나온 것인데 아래 각각 질문의 답은 무엇일까요?

1.창녀가 가장 좋아하는 야채는?

2.남녀 혼성 이부 합창은 순한국말로 하면?
3.브라자를 순한국말로 하면?

당시 군대에서 유치한 문답 놀이 정도 됐었나 봅니다. 지금 살펴보니 그 때는 저런 저질 유치 개그가 유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방위에 대한 당시 이야기도 낙서에 나왔습니다.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오는 방위에 대한 유머(?) 장난이 아닌가 생각되는 낚서였습니다.

방위란?(낙서 버전)
1.전쟁시 적진 깊숙히 침투하여 면사무소를 접수한다
2.전쟁시 적진 깊숙히 침투하여 예비군을 통제한다
3.전쟁시 도시락을 지참 9시에 출근하여 5시 반에 퇴근한다

방위의 임무 오리지날 버전
방위의 임무. 하나.
전쟁이 발발시 방위는 적진의 동사무소를 점령한다.
방위의 임무. 둘.
방위는 도시락통을 싸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도시락통을 흔들어 적의 레이더망을 교란한다.
방위의 인무. 셋.
방위는 아무리 전쟁이 치열하거나 해도 아침 9시에 근무해서 저녁 5시에 퇴근한다.
방위의 임무. 넷.
방위는 일부러 적의 포로로 잡혀가 적의 식량을 축낸다.
방위의 임무. 다섯.

전쟁발발시 적진 깊숙히 침투하여 여군들을 몽땅 꼬신다.


남방한계선을 넘어 최전선 철책을 넘나들며 비무장지대를 호령하던 전초 수색대들의 생활은 고단하고 힘들었습니다. 항상 삶과 죽음의 사선을 오가는 비무장지대 수색과 매복은 긴장과 서스펜스나 다름없었습니다. 순간 잘못 길을 가면 지뢰지대이고 잠깐 졸다가는 북한군이 목을 베어갈 준전시상태였습니다.

체감온도 영하 40도 강추위의 비무장지대에서 매일 밤 13시간 매복 작전

그러다 보니 군기가 가장 센 곳이었습니다.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모든 개인 화기 무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태권도 및 특공무술을 비롯한 최강의 무예를 마스터해야 했습니다. 체감온도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한 겨울 맹추위에 비무장지대 매복은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1박2일에서 박찬호가 강호동을 포함 멤버들이 펼친 혹한기 실전캠프는 사실 '새 발의 피'였습니다.


전우들의 낚서판(좌)과 제가 그린 그림으로 수탉이 알에서 나온 코끼리 새끼를 본 후 암탉의 외도 의심

철책을 통과해 비무장지대 내에 들어선 순간 부터는 철처하게 자신과 전우들을 믿어야 했습니다. 군사분계션까지 도달해 겨울 매복작전을 펼칠 때면 몇 발자국만 가면 바로 북한 땅이었습니다. 아무리 방탄복과 완전군장을 한 상태에서 총탄을 장전하고 있는 최강 DMZ 수색대원도 오로지 혼자가 된 느낌의 순간에는 나약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료와 말도 못하니 눈빛만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어떤 과자나 담배도 피울 수 없고 심지어 오줌도 눌 수 없어 오줌통을 들고 들어가는 비무장지대 내의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전우와 동료를 신뢰해야만 비무장지대 수색 및 매복 작전은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겨울 매복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온 몸이 얼어서 새벽 무렵 철수할 시간은 지금도 불현듯 스쳐지나가고곤 합니다. 체감온도 40도 전후의 강추위에 밤새 13시간을 야외에서 뜬 눈으로 이틀에 하루 꼴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이 상상이 가시겠습니까? 잠시 회상에 젖었습니다.

다시 낙서 이야기로 넘어가 봅니다. "티파니왈 흔들자고"라는 낙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에도 티파니가 있나 본데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추가] 댓글을 보니 1980년말 티파니(Tiffany Renee Darwish)라는 미국 팝가수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써니텐 광고에서 '흔들어 주세요'로 유명해 이 같은 낙서를 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갈 때 죽을 때 까지 똥침 놀 거다"
"기분이다. 아줌마, 단무지 하나 더 주세유"
"너 지금 가면 안올거지 그지?"
"뭐 같은 인생 간편히 살자고."
"집에 가서 잠만 자지 말고 여자 구해 장가 갈 궁리나 해라"
"수고했다 뺑이 치느라고"
"엿먹고 조총을 쏴라"

후배들의 낚서 중에는 지금에 와서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낙서를 보니 똥침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오랜 전통을 지닌 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 20년전 군대에서도 유행하던 놀이는 똥침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르는 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위의 낙서 중 '뺑이친다'는 말은 힘들게 고생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군대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일 것입니다.


제가 직접 그린 DMZ 수색대 마크(좌)와 후배 전우들이 회상록에 넣어준 자신들의 사진 모습

지난 20년전 군대에서 동료 전우들의 낙서를 보면서 20대의 용광로같은 젊은 시절이 그리워졌습니다. 지금은 편하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지만 당시는 눈덮힌 야외 들판에서 판초우의 한 장으로 밤새 추위를 이기고 생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최악의 악조건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겨울 이겨냈던 DMZ 비무장지대 수색대원들은 결코 동장군 강추위에도 쓰러질 수 없었습니다.

나 자신과 가족과 친구를 위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완수해야 했습니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남북한은 물론 지구촌을 배회하던 아픈 역사 현장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남자들만의 의리와 정을 나누고 그 자릴 지켰습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싹튼 우정과 동료애는 말년 병장을 사회로 보내야 하는 아쉬움으로 추억의 낚서를 회상록에 남겼던 것입니다. 20년만에 20대 청춘 시절을 회상하며 그 당시의 낚서를 보니 수많은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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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온 누리에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성탄절 크리스마스입니다. 오늘은 제가 군대에서 직접 경험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이야기 할까 합니다. 그 때는 1989년 12월 25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금으로부터 바로 20년 전 그 날 입니다. 

강원도 양구 최전방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습니다. 군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외롭고 쓸쓸한 날입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을 거쳐 크리스마스 날에도 시추대의 지하 시추 작업은 계속 됐습니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한국군과 공동 시추작업을 하던 미군들이 모두 휴가를 갔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추작업이 한창인 장소는 이미 지하에 땅굴 이상 징후가 거의 확실하게 포착된 곳이었습니다. 미군이 휴가 간 사이 국군 단독으로 북한 땅굴을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그래서 밤새 하얀 눈 속에서 시추작업을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하에서 북한의 땅굴 굴착 이상음이 들리다

그런데 언제부터 땅굴 이상 징후를 발견했을까요? 그 해 8월이었습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이었습니다. 전초 수색대는 북한의 땅굴 가능성이 큰 지역을 중심으로 매일 수색과 지하 청음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주로 낮에는 주요 지점에 뚫어 둔 시추공의 수위(지하수의 높이)를 재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밤낮으로 24시간 지하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청취하는 청음 탐지활동을 벌였습니다. 백두산부대 전초 수색대의 작전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날, 지하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하에 매설한 마이크로폰으로부터 포착된 소리는 일정 간격으로 굴착기 소음과 유사하게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지속적으로 계속 들렸습니다. 전초 수색대는 지하에서 북한의 땅굴 작업 소리로 추정되는 이상 징후를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당시 육군본부 시추대와 미군 시추대가 현장에 출동했습니다. 1980년대는 미군 시추대 장비가 좋아 한국군이 미군에 의존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부터 땅굴 이상 징후 탐지 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지하 시추공 뚫는 작전이 계속 전개됐습니다. 시추대의 시추공 뚫는 장비는 하와이 사막에서 지하 깊숙한 곳의 우물을 파는 용도였지만 땅굴 탐지에도 사용되던 것입니다. 

미군의 지하 투시 카메라를 시추공에 빠뜨리다

전초 수색 소대가 조용히 지내던 곳에 다른 군인들이 나타나면서 여러 사건과 에피소드도 많이 발생했습니다. 먼저 미군과의 에피소드 한 토막입니다. 수색 소대는 매일 시추공 의 수위를 재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저희 분대가 미군들과 조우를 했습니다.

그 중 미군 한 명은 시추공 주위에서 지하 암석층의 카메라 촬영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지하 카메라 촬영 작업을 돕겠다고 나섰더니 흔쾌히 미군은 동의했습니다. 지하 시추공 밑으로 카메라를 집어넣는 작업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카메라가 시추공 안에서 뭔가에 걸려 빼지도 넣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추공에 수위를 재던 도르래로 카메라를 꺼내려고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도르래의 끈에 카메라가 걸린 듯 했습니다. 그 후 힘차게 도르래를 감아서 밧줄을 끌어 올렸습니다. 두 팔에 잔뜩을 힘을 주고 도르래를 끌어올리는데 갑자기 뚝 하면서 밧줄과 카메라 연결 줄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카메라가 시추공 안으로 완전히 빠져 버린 것입니다. 미군이 '오 마이 갓' 소리를 크게 지르더니 발라당 땅바닥에 누워 버렸습니다. 너무 놀랐던 것입니다. 미군은 뭐라고 씨부렁 씨부렁 거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자신의 장비를 잃어버려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됐다는 것 같았습니다.

미군은 직업 군인이라서 각자 자신의 장비를 구매해 사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하 암석층을 투시해 촬영하는 특수 카메라라서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라는 것입니다. 미군은 다시 카메라를 구입하려면 자신의 월급에 크게 마이너스가 발생한다면서 거의 눈물을 쏟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미군의 표정은 그야말로 황당하고 어이없어 했습니다. 우리들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 도와주려 하다 발생한 사건이라서 미군은 이해는 하는 편이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날에 시추공이 4땅굴을 관통하다

다시 크리스마스 날 이야기로 돌아와 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도 한국군들으 계속 시추공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환호성이 들렸습니다. 시추장비에 뚫던 시추공이 4땅굴을 관통해 지하수가 순식간에 땅굴로 빠져나가며 그 지역의 지하수 수위가 낮아졌습니다. 북한 4땅굴은 지하 200미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새벽 하늘에는 하얀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이 단독 임무 수행으로 북한 제4땅굴을 발견한 것입니다. 북한 땅굴은 주로 서부 전선에 발견됐는데 중동부전선에 땅굴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지역이 바로 강원도 양구 펀치볼 근처입니다.
 
땅굴 발견이라는 기쁨도 잠깐 이었습니다. 윤군본부에서는 현장에 대해 긴급 비상 상황을 선포하고 북한 선제공격을 대비한 비상 경계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북한 공격을 비롯 비상시 시나리오 별로 방어 대응 훈련도 병행했습니다. 그 때 부터 더욱 힘든 비상 경계 상황이 지루하게 지속되었습니다.

이제는 북한 땅굴 위치가 확인된 만큼 우리 군대가 북한 4땅굴까지 굴착해 가는 역갱도 공사를 시작해야 할 시점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시기는 겨울을 지나 다음 해 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광산 파는 장비인 TBM(Tunnel Boring Machine)이 투입되야 했습니다. 그 전에 미확인 지뢰지대가 많아 지뢰제거 작업을 통해 TBM 장비가 들어가고 여러 군인들을 위한 막사 건설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땅굴을 수직으로 관통한 후 해당 지역에는 공병대, 수단 수색대, 특공대 등 여러 군인들이 대거 투입됐습니다. 당시 저는 군사령관 표창으로 포상 휴가를 갈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휴가 가는 저를 대신해 중대본부에서 한 명이 파견나왔습니다. 그런데 중대본부 한 명과 윤군본부 병사가 공동으로 경계 근무하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해가 바뀐 것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중대본부와 윤군본부가 함께 2인 1조로 한 쌍인 우결(우리 결혼했어오) 두 사람은 깊은 산골엔 길가의 풀이나 사물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북한의 제 4 땅굴 발견 공로로 참모총장 표창을 받고 있는 장면

그런데 두 병사는 산딸기를 따러가다 미확인 지뢰 지대로 빠져 결국 지뢰를 밟고 말았습니다. 중대장은 저녁 11가 넘어 늦은 시간에 사건 현장에서 중대본부로 돌아왔습니다. 중대장은 휴가자들은 그대로 보내 주었습니다. 지뢰에 밟은 죽은 전우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4땅굴 수색 중 셰퍼드 군견이 지뢰를 밟아 죽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건과 사연이 있던 당시 4땅굴 역갱도 공사였습니다. 모두 이야기하기엔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 일단 여기까지입니다.

20년전 오늘은 크리스마스입니다. 함박눈이 탐스럽게 날리는 그 날이었습니다. 당시 군인들은 크리스마스의 감흥을 느낄 겨를도 없이 4땅굴 지하 관통 작업을 벌였고 결국 성공한 것입니다. 직접 경험한 일이라서 그런지 이맘 때면 당시 군인들이 보고 싶기도 합니다. 특히 화이트 크리스마스에는 유난히 4땅굴 발견 당시 시절이 스쳐 지나갑니다. 미군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휴가를 갔는데 한국군은 남아서 땅굴 탐사를 계속 했던 잔인한 날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아서 4땅굴은 한국군이 처음 발견부터 지하 시추공 관통 그리고 역갱도 공사까지 전 과정을 수행한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추억은 무엇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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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지금은 군대문화도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1980년대 군대는 얼차려를 빙자한 가혹행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심각한 가혹행위로 인해 군대를 탈영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하는 사건도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과거 20여년전 군대의 얼차려는 어떠했을까? 그것은 최근에도 역사와 전통 속에서 이어지는 경우도 있을 듯 합니다.

강원도 최전방 부대의 신병교육대(신교대)로 간 당시는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논산 신교대로 갔다면 그렇지 않았을텐데 최전방 신교대로 배치받은 신병들은 지지리 복도 없는 셈이었습니다. 전방 부대 신교대에서 얼차려는 기합과 가혹행위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나 다름없었습니다. 조교들이 곧 즉결심판하는 악마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 여름 8월 군번이라 무더운 햇볕 속에서 훈련받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신교대에 첫 날 도착하자 조교의 무자비한 얼차려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등 초보적인 얼차려였습니다. 이후 대가리 박어, 대가리 박고 왼발 들고 오른손 들어, 두 손 깎지 끼고 엎드려 뻗쳐 등 응용 얼차려로 기진맥진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말 운도 없었던 것이 그곳은 대학생 전방입소 최전방 부대였고 과거 삼청교육대로 악명을 떨쳤던 신교대였습니다.

한 바탕 얼차려의 고통이 끝나고 잔뜩 겁먹은 신병들은 일장 훈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빨간 모자를 쓰고 가슴에 호랑이 마크를 달고 있는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위풍당당한 체구와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 그야말로 위압감을 주는 군인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조교가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이름을 호명하는 사람은 앞으로 튀어나온다."
"김OO, 이OO, 박OO...탐진강"

비무장지대 수색매복 전초대, 죽음의 각서를 쓰다

탐진강도 이름이 호명됐습니다. 도대체 첫 날부터 왜 이렇게 빠지지않고 이름이 불린단 말인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름이 호명된 신병은 25명 가량 됐습니다. 모두 긴장했습니다. 그리고 호랑이 마크를 단 군인을 따라 갔습니다. 걸어 가는 도중에 현역 군인이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습니다. "전초구만. 고생 좀 하겠네."하면서 야릇한 미소가 느껴졌습니다. 우리들은 후미진 곳의 막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침상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짧고 굶은 전초 중대장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중대장 : "너희들은 전초다. 위험한 곳에서 근무한다. 그러나 남자로 태어나 멋진 군생활을 할 수 있다."
중대장 : "그럼, 지금부터 나눠준 종이에 싸인을 한다. 자신없는 자는 지금 나가도 좋다."

그러자 우리 동료 중 1명이 포기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후환이 두려워 그렇게 못했습니다. 전초 중대장이 나눠준 종이는 그야말로 '군생활 중 죽더라고 스스로 책임진다'는 각서였습니다. 신교대에 오자마자 이상한 부대에서 호명해 죽음의 각서를 쓰다니 참 복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전초대는 소위 민정경찰대로 비무장지대 안에서 수색 매복, 땅굴탐지, GP 정찰 등 작전 임무를 맡고 있었던 특수 부대였습니다.

각서를 쓰고 나오는 24명의 신병들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습니다. 그것은 정말 다가올 죽음의 전주곡에 불과했습니다. 전초로 사전에 차출된 신병들은 신교대 훈련이 끝나며 전초중대로 자대 배치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신병 훈련장으로 돌아 온 우리들은 조교들의 얼차려와 함께 파란만장한 지옥훈련이 시작됐습니다.

군대 얼차려 중 한강철교의 한 장면인데 엎드려 다리를 다른 사람 어깨 위에 올리고 있다

신교대의 얼차려는 한강철교, 원산폭격, 대가리 박고 기어가기 등 다양했습니다. 이런 얼차려는 응용편으로 가면 인간의 한계, 또는 인간성의 말살로 이어졌습니다. 정상적 훈련 이외의 생활에서 얼차려는 가혹했습니다. 그것의 실상은 가혹행위였습니다. 모기회식, 치약 뚜껑에 머리 박기, 식판 입에 물로 오리걸음 등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미 군대를 다녀 온 당시의 분들은 생생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군대 얼차려, 기합과 가혹행위 그 경계는 무엇일까?

어느 날 동기 중 친한 녀석인 J가 사고를 쳤습니다. 저녁에 화장실에 가던 J가 야간 근무 중인 신병들을 만났습니다. 암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러자 J는 "난 조교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어두운 곳이라 신병들은 누군지 분간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화장실 안에 진짜 조교가 볼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조교 중 가장 악질인 조교였습니다. 조금 후 조교가 우리 내무반으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늦은 밤이라 신병들은 이미 침상이 잠을 청하던 시간이었습니다.


조교 : "모두 기상!"
조교 : "어떤 새끼야? 화장실서 조교라고 한 놈 앞으로 나와!"

친구 J는 두려움에 선뜻 앞으로 못나갔습니다. 조교는 다시 외쳤습니다.
조교 : "안나오면 너희들 오늘 다 죽는 날이다. 빨리 나와!"

J가 앞으로 나갔습니다. 조교의 주먹이 J에게 날아갔습니다. 쓰러지면 일으켜 세워 다시 주먹을 날렸습니다. 침상 앞에서 서있는 우리들은 살벌한 광경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조교는 M16 소총을 들더니 개머리판으로 J의 가슴을 가격했습니다. 지켜보는 저는 조교를 향해 주먹을 한 대 날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는 신교대가 아니던가. 그러나 악명높은 조교는 폭력을 예사로 즐기던(?) 악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우리 내무반 신병들은 그대로 서서 밤을 새웠습니다. 조교는 연대책임으로 우리 내무반 신병들은 잠을 재우고 않고 서있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립니다. 

일요일이 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일요일엔 종교 행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불교를 선택했습니다. 불교는 신교대 밖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처 사찰로 갔습니다. 거기에 일반 현역 병사들도 함께 종교 행사를 했습니다. 도착한 사찰에서 긴장감에 앉아있는데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전초 손 들어!"

저는 손을 들었습니다. 야릇한 미소를 던지며 그 현역병은 말했습니다.
"너희들 고생이 많다. 그런데 나중에 보자. 그래도 여기가 좋을 거야."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복도 없지. 그리고 나중에 사찰에서 다른 현역병으로부터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얼마 전 전초부대가 비무장지대 수색 중 지뢰를 밟아 1명이 죽고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공포감이 다가왔습니다.

다시 신교대로 돌아왔습니다. 동기 한 명이 냇가 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어제까지 저기에 있던 소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소는 다리가 세 개 였습니다. 다리가 세 개인 이유는 발목지뢰를 소가 밟아 다리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은 들은 소식으로는 다리가 세 개인 소는 도살되었다고 합니다. 큰 비가 내리면 냇가를 통해 북한으로부터 발목지뢰가 흘러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8월의 태양 아래 치열한 신교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대 배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배치받은 곳은 전초중대의 백골소대였습니다.
이런 젠장, 백골소대는 바로 지뢰밟아서 1명이 사망했다는 그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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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군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1년전 일입니다. 강원도 양구의 산악지대에는 유난히 구렁이가 많았습니다. 비무지대 전초 수색대는 특히 구렁이와 자주 마주쳤습니다.

어느 날, DMZ 차량 경계를 마친 분대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막사를 향해 고참들이 도로에서 소리를 쳤습니다. 차량 경계조가 도로에서 뭔가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당신 신병이었던 저를 비롯한 동료들이 도로를 향해 달려 내려갔습니다. 멀리서도 도로에 걸쳐있는 커다란 물체가 보였습니다. 직감적으로  초대형 구렁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하나의 분대 요원들이 구렁이의 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구렁이는 도로를 지나 바로 아래 냇물을 지나 반대편을 향했습니다. 다시 차량 경계조는 냇가에 내려가 K-1 소총 개머리판으로 구렁이를 눌렀습니다. K-1 소총은 개머리판이 약간 둥그렇게 구부러져 있어 구렁이 몸통을 누르기가 용이했습니다. 여러 명이 구렁이 몸통의 머리 부근에서 꼬리에 이르기 까지 누르고 있었습니다. 2미터가 넘어 보였습니다. 모두가 난생 처음 보는 초대형 구렁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이 때 저를 비롯한 신병들이 도착했습니다. 막사에서 가져온 대형 포대를 구렁이의 머리 맡에 벌리고 밀어넣기 시작했습니다. 부대원들이 간신히 구렁이를 포대에 집어넣는데 성공했습니다. 고참들은 진 땀을 흘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저와 신병들은 다시 낑낑대며 산중턱에 있던 막사로 초대형 구렁이가 담긴 포대를 옮겼습니다.

비무장지대에는 2미터 이상의 왕구렁이가 간혹 나타나곤 한다

고참들은 구렁이를 잘 보관해 두라고 했습니다. 당시 우리 수색 소대의 고참들은 몰래 구렁이를 땅군들에게 팔아서 큰 돈을 챙겼습니다. 이번 구렁이는 엄청나게 커서 100만원이 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21년전 100만원이면 지금으로 따지면 500만원 이상이 되는 큰 돈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구렁이는 30만원~50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구렁이를 포대 두개를 겹쳐 단단히 밀봉을 해서 막사 옆의 창고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벌써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대원들은 저녁 식사를 한 후 취침시간이 되자 모두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저의 온 몸을 칭칭 감은 구렁이가 느겨졌습니다. 너무나 강력한 구렁이의 힘이 온 몸을 조여왔습니다. 거의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구렁이는 밤새 온 몸을 감고 꼼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거의 숨을 못쉴 정도의 눌림에 밤새 구렁이에게 칭칭 감겨 있었습니다.

눈을 떴습니다. 아침이었습니다. 어제 밤에 저를 감고있었던 구렁이는 꿈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고로 달려갔습니다. 저와 신병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포대 속에 있어야 할 구렁이가 없었습니다. 구렁이는 포대 두 개를 뚫고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포대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재질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도 없는 구렁이가 포대 두 개를 뚫고 나간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 모두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소대원들과 어제 밤에 있었던 구렁이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구렁이에게 밤새 온 몸이 감겨서 죽을 듯한 꿈을 꿨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소대원 전원이 같은 꿈을 꿀 수 있는지 무섭기만 했습니다. 구렁이가 요물이라고 했는데 정말 사실이구나 하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건 구렁이 복수다"라고 고참 한명이 말했습니다. 모두가 공포에 떨었습니다.

악어도 통째로 잡아먹는다는 비단구렁이와 태국의 소년 친구(?)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소대원 한 명 두 명이 갑자기 체해서 몸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저도 체해서 한 동안 하늘이 노랬습니다. 거의 모든 소대원이 함께 체했습니다. 어떻게 동시에 체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의아했습니다. 그 당시 처음 발생한 단체 급체 사건이었습니다.  왕고참이 말했습니다.
"어제 잡은 구렁이의 복수가 틀림없다. 엄청난 크기와 포스가 비범치 않았다."
"그러면 앞으로 복수가 계속 될까요?

"모를 일이다. 구렁이는 잡지 말자.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소대원들은 왕고의 충고에 따라 그 날 이후 구렁이를 보더라도 피해다녔습니다. 사실 전초 수색소대는 비무장지대를 출입하기 때문에 여름이면 매일 구렁이를 보다시피 했습니다. 우리 수색소대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곳이라 비무장지대나 인근 산악지내는 구렁이들의 낙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길가에서 구렁이를 보고서도 모른 체 지나가곤 했습니다. 구렁이는 먼저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는 순한 동물이었습니다.

구렁이와 관련된 수색소대의 일화는 그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초대형 구렁이 사건을 겪으면서 구렁이와는 가급적 상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너무 무서운 한 여름밤의 구렁이 꿈과 급체 사건으로 공포에 떨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초대형 구렁이의 창고 탈출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구도 없는 구렁이가 밀봉된 포대를 두개나 뚫고 어떻게 감쪽같이 탈출했는지. 구렁이는 영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예로부터 구렁이에 대한 설화가 많은 이유일 것입니다.

요즘 농촌이나 산촌에도 구렁이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획을 했기 때문에 거의 씨가 마른 것입니다. 비무장지대는 천연 자원의 보고입니다. 앞으로 통일이 된다면 비무장지대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남겨두어도 좋은 곳일 듯 합니다. 수십년간의 천혜의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곳은 비무장지대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비무장지대에서 머루 다래를 따먹던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구렁이와 살모사의 차이
구렁이는 알을 낳아서 새끼를 부화시키고, 살모사는 새끼를 그냥 낳습니다. 구렁이는 기본적으로 매우 크고 길지만 살모사는 길이가 짦은 편입니다. 구렁이는 독이 없지만 몸통으로 휘감아 조이는 힘이 엄청나고 살모사는 독이 있어 물리면 치명적입니다. 특히 까치살모사는 신경독과 출혈독을 모두 갖고 있어 매우 위험합니다. 구렁이의 머리는 타원형으로 생겼지만 살모사는 약간 삼각형 모양입니다. 여름철에 물가나 풀과 잡목이 우거진 곳에서는 독사에 주의해야 겠습니다.

국내산 황구렁이의 알낳은 모습(좌)과 국내산 까치살모사의 공격 직전 장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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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얼마 전 남북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에서 산불이 발생해 몇일간 계속 번졌습니다. 북한측에서 화공작전으로 산불을 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사실 비무장지대에서 산불이 일어나면, 맞불을 놔서 꺼지게 하거나 그냥 비가 와서 자연적으로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이번 산불도 다행히 최근에 비가 와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 비무장지대라는 특수한 환경이 존재합니다. 제가 군대 시절에 비무장지대에 근무했기 때문에 실제로 남북분단의 현실을 누구보다 피부로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화 'JSA(공동경비구역)'은 비무장지대 내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이 겪는 에피소드를 다소 과장되게 표현을 했지만 어느정도 상황을 묘사한 측면도 있습니다.

비무장지대는 군인이라도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구역입니다. 특별하게 출입증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이 비무장지대를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전협정상 군인들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무장출입증도 까다로운 심사절차에 의해 승인된 극히 일부의 특수 군인에게만 발급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비무장지대 출입증이 발급된 사람은 여러가지로 선택되고 검증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군대시절 생각이 나서 지난 20년전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찾아봤습니다. 예전 군생활회상록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비무장지대 출입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는 민정경찰대, 수색중대, 전초대, 수색정찰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것 같습니다.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 출입증 앞면과 뒷면 모습]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 상용 출입증'이란 명칭과 함께 '이 출입증은 민간행정 및 구제사업 제관서에 소속된 사람의 사용에 한함'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 출입증 소지자는 비무장지대 남경계선의 통과 및 비무장지대 남반부에서의 이용에 대한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 비무장지대 북쪽 부분을 출입하는데는 유효하지 않다.'고 부연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뒷면에는 영어로 똑같은 내용이 씌여 있었습니다. 이미 20여년이 지난 아주 오래 전 과거이지만 젊은 시절에 목숨을 걸고 비무장지대를 누비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갔습니다. 


아쉬운 것은 남한의 경우 '군인'이 비무장지대를 출입하기 위해서는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을 위한 인원으로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유엔군사령부, 흔히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같은 허가를 받은 군인을 '민정경찰(DMZ Police)'이라고 표현합니다. 북한은 '민경대'라고 합니다.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정전협정에 기인합니다.

지난 1953년 7월 27일, 미국
과 북한, 중국이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6.25 전쟁이 끝나고 남과 북 사이에는 휴전선인 군사분계선(MDL)이 생겼습니다. 당시 남한은 배제된 상태에서 정전협정문에 서명이 된 것입니다. 정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으로 2Km, 북으로 2Km 각각 사이의 땅이 바로 비무장지대입니다. 말 그대로 하면 군사적인 무장을 하면 안되는 지역인 셈입니다. 그리고 남북한은 비무장지대가 끝나는 지점에 철책을 만들어 대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① 어떤 군인이나 민간인도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북 각 지역 사령관의 특정한 허가가 있어야 하며(정전협정 제1조 제8항), ②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에 관계되는 인원과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를 얻은 인원이 아니면 비무장지대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정전협정 제1조 제9항). 또한 ③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진다(정전협정 제10항).

궁금증이 생겨서 북한의 비무장지대 출입증은 어떻게 생겼는지 검색을 해보니 하나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정전협정에 따른 문구는 없고 비무장지대 출입증의 소지자 신분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소비자는 북한의 민경대 소속 군인일 것입니다. 영화 JSA에서 남북한 병사는 아마도 이러한 신분증을 각각 소지하고 있었을 듯 합니다. 


     [좌측이 북한의 비무장지대 출입증 모습]

우리나라가 남북분단 국가라는 상징적인 장소가 비무장지대라면 비무장지대 출입증은 젊은 군인들이 온몸으로 분단의 현실을 느끼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무장지대에는 미확인 지뢰지대들이 도처에 위험이 산재해 있습니다.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선을 넘나드는 곳입니다. 뉴스에서도 여러번 보도된 GP에서 총기사건이 바로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군대 시절에는 어떻게 무시무시한  공포의 비무장지대에서 살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오싹하기만 합니다.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민족의 아픔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 같아 상념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전쟁을 잠시 중단한 개념인 휴전에 의한 정전협정이 아니라 진정으로 남과 북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종전으로 바꿔 평화협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습니다. 언제까지 동족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야 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서로 같은 민족으로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도 큰 진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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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제 군대시절 땅굴발견해 받은 참모총장상을 찾아보니 라는 글을 블로거뉴스에 포스팅했는데 메인에 떡하니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수백개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놀랍게도, 블로거뉴스가 20년만에 군대 시절의 그리운 전우들을 찾아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중에는 같은 21사단 백두산부대 출신 선후배 전우들은 물론 제4땅굴 발견과 특수 작전에 투입되었던 수색대, 공병대, 3군단, 육군본부 시추대 등 수많은 분들이 당시의 추억 속으로 달려왔습니다. 또한, 군대에 복무 중이거나 제대한 여러 예비역들이 같은 부대가 아니더라도 군대생활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대를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군대와 관련 다양한 분들의 댓글도 눈에 띄었습니다. 존경받는 참군인이신 당시 이준 사단장님의 자제분도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어떤 여자 분은 남자 친구를 21사단 수색대에 보낸 후 걱정했지만 용감하고 훌륭한 임무를 수행하는 남친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계기로 생각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가장 보람있는 것은 당시의 몇몇 전우들과 다시 재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수색중대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연락처를 많이 알게 되었고 전화를 통해 안부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선후배들이 별도의 카페도 운영 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전우들이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예전 전우들을 만나고 싶어도 연락처도 없어 별다른 도리가 없었는데, 블로거뉴스가 20년만에 전우들을 찾아주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많은 도움과 영감을 주신 zinicap님, 따뜻한 카리스마님, 해피아름드리님, 머니야머니야님 등 여러 블로거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반갑다, 전우야." "고맙다, 블로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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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