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12.25 20년 전 화이트 크리스마스, 직접 경험한 4땅굴 발견 관통했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32)
  2. 2009.04.21 산딸기 따다 지뢰밟아 죽은 전우 생각하니 by 진리 탐구 탐진강 (25)
  3. 2009.04.18 20년전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찾고보니 by 진리 탐구 탐진강 (29)


온 누리에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성탄절 크리스마스입니다. 오늘은 제가 군대에서 직접 경험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이야기 할까 합니다. 그 때는 1989년 12월 25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금으로부터 바로 20년 전 그 날 입니다. 

강원도 양구 최전방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습니다. 군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외롭고 쓸쓸한 날입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을 거쳐 크리스마스 날에도 시추대의 지하 시추 작업은 계속 됐습니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한국군과 공동 시추작업을 하던 미군들이 모두 휴가를 갔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추작업이 한창인 장소는 이미 지하에 땅굴 이상 징후가 거의 확실하게 포착된 곳이었습니다. 미군이 휴가 간 사이 국군 단독으로 북한 땅굴을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그래서 밤새 하얀 눈 속에서 시추작업을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하에서 북한의 땅굴 굴착 이상음이 들리다

그런데 언제부터 땅굴 이상 징후를 발견했을까요? 그 해 8월이었습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이었습니다. 전초 수색대는 북한의 땅굴 가능성이 큰 지역을 중심으로 매일 수색과 지하 청음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주로 낮에는 주요 지점에 뚫어 둔 시추공의 수위(지하수의 높이)를 재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밤낮으로 24시간 지하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청취하는 청음 탐지활동을 벌였습니다. 백두산부대 전초 수색대의 작전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날, 지하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하에 매설한 마이크로폰으로부터 포착된 소리는 일정 간격으로 굴착기 소음과 유사하게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지속적으로 계속 들렸습니다. 전초 수색대는 지하에서 북한의 땅굴 작업 소리로 추정되는 이상 징후를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당시 육군본부 시추대와 미군 시추대가 현장에 출동했습니다. 1980년대는 미군 시추대 장비가 좋아 한국군이 미군에 의존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부터 땅굴 이상 징후 탐지 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지하 시추공 뚫는 작전이 계속 전개됐습니다. 시추대의 시추공 뚫는 장비는 하와이 사막에서 지하 깊숙한 곳의 우물을 파는 용도였지만 땅굴 탐지에도 사용되던 것입니다. 

미군의 지하 투시 카메라를 시추공에 빠뜨리다

전초 수색 소대가 조용히 지내던 곳에 다른 군인들이 나타나면서 여러 사건과 에피소드도 많이 발생했습니다. 먼저 미군과의 에피소드 한 토막입니다. 수색 소대는 매일 시추공 의 수위를 재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저희 분대가 미군들과 조우를 했습니다.

그 중 미군 한 명은 시추공 주위에서 지하 암석층의 카메라 촬영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지하 카메라 촬영 작업을 돕겠다고 나섰더니 흔쾌히 미군은 동의했습니다. 지하 시추공 밑으로 카메라를 집어넣는 작업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카메라가 시추공 안에서 뭔가에 걸려 빼지도 넣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추공에 수위를 재던 도르래로 카메라를 꺼내려고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도르래의 끈에 카메라가 걸린 듯 했습니다. 그 후 힘차게 도르래를 감아서 밧줄을 끌어 올렸습니다. 두 팔에 잔뜩을 힘을 주고 도르래를 끌어올리는데 갑자기 뚝 하면서 밧줄과 카메라 연결 줄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카메라가 시추공 안으로 완전히 빠져 버린 것입니다. 미군이 '오 마이 갓' 소리를 크게 지르더니 발라당 땅바닥에 누워 버렸습니다. 너무 놀랐던 것입니다. 미군은 뭐라고 씨부렁 씨부렁 거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자신의 장비를 잃어버려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됐다는 것 같았습니다.

미군은 직업 군인이라서 각자 자신의 장비를 구매해 사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하 암석층을 투시해 촬영하는 특수 카메라라서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라는 것입니다. 미군은 다시 카메라를 구입하려면 자신의 월급에 크게 마이너스가 발생한다면서 거의 눈물을 쏟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미군의 표정은 그야말로 황당하고 어이없어 했습니다. 우리들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 도와주려 하다 발생한 사건이라서 미군은 이해는 하는 편이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날에 시추공이 4땅굴을 관통하다

다시 크리스마스 날 이야기로 돌아와 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도 한국군들으 계속 시추공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환호성이 들렸습니다. 시추장비에 뚫던 시추공이 4땅굴을 관통해 지하수가 순식간에 땅굴로 빠져나가며 그 지역의 지하수 수위가 낮아졌습니다. 북한 4땅굴은 지하 200미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새벽 하늘에는 하얀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이 단독 임무 수행으로 북한 제4땅굴을 발견한 것입니다. 북한 땅굴은 주로 서부 전선에 발견됐는데 중동부전선에 땅굴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지역이 바로 강원도 양구 펀치볼 근처입니다.
 
땅굴 발견이라는 기쁨도 잠깐 이었습니다. 윤군본부에서는 현장에 대해 긴급 비상 상황을 선포하고 북한 선제공격을 대비한 비상 경계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북한 공격을 비롯 비상시 시나리오 별로 방어 대응 훈련도 병행했습니다. 그 때 부터 더욱 힘든 비상 경계 상황이 지루하게 지속되었습니다.

이제는 북한 땅굴 위치가 확인된 만큼 우리 군대가 북한 4땅굴까지 굴착해 가는 역갱도 공사를 시작해야 할 시점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시기는 겨울을 지나 다음 해 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광산 파는 장비인 TBM(Tunnel Boring Machine)이 투입되야 했습니다. 그 전에 미확인 지뢰지대가 많아 지뢰제거 작업을 통해 TBM 장비가 들어가고 여러 군인들을 위한 막사 건설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땅굴을 수직으로 관통한 후 해당 지역에는 공병대, 수단 수색대, 특공대 등 여러 군인들이 대거 투입됐습니다. 당시 저는 군사령관 표창으로 포상 휴가를 갈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휴가 가는 저를 대신해 중대본부에서 한 명이 파견나왔습니다. 그런데 중대본부 한 명과 윤군본부 병사가 공동으로 경계 근무하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해가 바뀐 것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중대본부와 윤군본부가 함께 2인 1조로 한 쌍인 우결(우리 결혼했어오) 두 사람은 깊은 산골엔 길가의 풀이나 사물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북한의 제 4 땅굴 발견 공로로 참모총장 표창을 받고 있는 장면

그런데 두 병사는 산딸기를 따러가다 미확인 지뢰 지대로 빠져 결국 지뢰를 밟고 말았습니다. 중대장은 저녁 11가 넘어 늦은 시간에 사건 현장에서 중대본부로 돌아왔습니다. 중대장은 휴가자들은 그대로 보내 주었습니다. 지뢰에 밟은 죽은 전우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4땅굴 수색 중 셰퍼드 군견이 지뢰를 밟아 죽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건과 사연이 있던 당시 4땅굴 역갱도 공사였습니다. 모두 이야기하기엔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 일단 여기까지입니다.

20년전 오늘은 크리스마스입니다. 함박눈이 탐스럽게 날리는 그 날이었습니다. 당시 군인들은 크리스마스의 감흥을 느낄 겨를도 없이 4땅굴 지하 관통 작업을 벌였고 결국 성공한 것입니다. 직접 경험한 일이라서 그런지 이맘 때면 당시 군인들이 보고 싶기도 합니다. 특히 화이트 크리스마스에는 유난히 4땅굴 발견 당시 시절이 스쳐 지나갑니다. 미군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휴가를 갔는데 한국군은 남아서 땅굴 탐사를 계속 했던 잔인한 날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아서 4땅굴은 한국군이 처음 발견부터 지하 시추공 관통 그리고 역갱도 공사까지 전 과정을 수행한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추억은 무엇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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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지난 일요일 오후에 주말농장에 가서 고추와 호박을 비롯한 채소 모종을 심었습니다. 삽질로 땅을 파서 하나씩 소중하게 심는 작업이 미래를 위한 투자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준비한 모종을 모두 심고 옆을 보니 딸기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이웃 주말농장 분양받으신 분이 심어놓은 딸기 모종인데 예쁘게 꽃이 핀 것입니다.

딸기꽃을 보니, 군대 시절의 가슴 아픈 일이 생각났습니다. 중동부 전선의 봄은 서울보다 한참 늦게 다가옵니다. 지난 20년전의 봄이었습니다. 제 4땅굴의 징후를 발견하고 비상 경계 근무와 훈련이 반복되던 시기였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저녁까지 만일에 발생할 수 있는 북한의 기습공격에 대비한 특수 훈련과 비상 근무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느덧 철책선에도 꽃이 활짝 피고 싱그러운 신록이 그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근무하던 부대는 땅굴 탐지 소대였습니다. 제 4땅굴의 징후를 발견해 이미 북한이 굴착한 지하의 땅굴을 시추공(지상에서 지하로 뚫는 수직 굴착법)을 통해 발견한 직후였습니다.

작은 산골 마을에 오순도순 살고있던 평화로운 땅에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작은 소대가 생활하던 땅에는 육군본부 시추대를 비롯한 공병대 미군부대 등 수많은 군인들이 집결했습니다. 아마도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발령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매일 우리는 북한군이 감행할 수 있는 모든 공격에 대비한 가상 시나리오 훈련을 하고 경계 근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봄 날에 중대장이 저에게 특별 휴가를 다녀오라고 명했습니다. 우리 소대는 개인 휴가는 없고 소대 전체 휴가를 다녀오는 특수한 조직인데 의아했습니다. 알고보니, 수개월전에 사단 대표로 군단 역량 측정대회에 나간 적이 있는데 예기치 않게 우수한 성적을 받아 이번에 특별 휴가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날, 제 대신에 중대 본부에서 1명이 대체 근무를 위해 작전 지역에 파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중대 본부에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 날에 휴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비상상황에서 혼자 휴가를 갈 수 있는 행운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즐거운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다 중대본부에서 밤 10시에 취침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밤 11시경 중대장이 전원 기상을 시켰습니다.


중대장은 슬프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했습니다. "오늘 지뢰를 밟았다. 1명은 죽고 1명은 다리가 잘렸다. 작전 중 발생한 사고이다. 가슴아픈 일이다. 지금은 매우 위급한 비상경계 중이니 전 중대원은 동요하지 말라. 오늘을 교훈삼아 각별히 지뢰사고에 조심하기 바란다"와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중대장의 사건 소식을 듣는 동안에 망연자실했습니다. 겉으로는 지뢰사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걱정했지만 한편 속마음에서는 '아, 모처럼 맞이한 휴가를 못가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중대장은 "내일 휴가 가는 O상병은 예정대로 휴가 간다. 아침에 까만 봉지를 줄테니 갖고 가라."라고 말했습니다. 지뢰사고에 대한 아픔도 있지만 고대하던 휴가를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게 단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중대장이 건네준 까만 봉지를 들고 발걸음도 가벼운 휴가를 떠났습니다. 중대장은 까만 봉지를 연대본부 인사계에 전달하고 휴가를 가라고 했습니다. 연대본부에 도착하니 정문 위병소 앞에는 봉고차 한대가 정차해 있었습니다. 일단의 민간인들이 위병소 앞에서 유리창을 깨면서 울분을 토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연대본부 인사계를 찾았습니다.

인사계 준위에게 까만 봉지를 전달하자, 인사계는 저에게 말을 했습니다.
"어제 지뢰밟아 죽은 OO의 유품이구만." "휴가 잘 다녀오게."

순간 하늘이 하얗고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하게 멍해졌습니다. 까만 봉지에는 전날 지뢰를 밟아 죽은 전우의 유품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휴가를 떠난다는 생각에 까만 봉지를 돌리며 연대본부로 향했던 것입니다. 연대본부 위병소 앞에 있던 봉고차의 사람들은 죽은 전우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젊디 젊은 아들을 잃은 부모와 가족들은 청천벽력같은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죽은 전우의 슬픔을 뒤에 두고 휴가를 갔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제가 경계근무에 나가야 하는 곳에서 두명의 군인이 지뢰를 밟았습니다. 제 대신에 근무에 나선 중대본부의 전우와 육군본부에서 파견 온 군인이 경계근무에 나섰다가 산등성이에 있던 산딸기를 봤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산딸기를 따기 위해 산등성이에 올랐다가 지뢰를 밟은 것입니다.
 


그들이 산딸기를 따러 간 위치는 미확인 지뢰지대였습니다. 항상 미확인지뢰지대를 넘나들던 수색소대원들과 달리 그들은 처음 근무를 서다보니 미처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것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뢰를 밟은 육군본부 군인은 즉사했고 중대본부 전우는 한쪽 다리가 잘려나가는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비록 지뢰사고의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모른 체로, 휴가를 다녀왔지만 휴가 기간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더구나 휴가에서 돌아온 후 당시 지뢰사고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나서는 너무나 슬펐습니다. 산딸기는 봄철에 비무장지대나 철책 부근의 산자락에 은밀하게 유혹을 합니다. 이미 지형에 익숙한 군인들은 적절하게 대처를 하지만 처음 근무를 하는 군인들은 사전에 숙지시킨 주의사항에도 불구하고 산딸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평상이 지나다니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에서도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는 곳이 최전선의 지역입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항상 위험이 도사리는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날의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금도 딸기꽃이나 산딸기를 보게 되면 저를 대신해 죽은 듯한 전우를 생각하며 슬픔에 젖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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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얼마 전 남북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에서 산불이 발생해 몇일간 계속 번졌습니다. 북한측에서 화공작전으로 산불을 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사실 비무장지대에서 산불이 일어나면, 맞불을 놔서 꺼지게 하거나 그냥 비가 와서 자연적으로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이번 산불도 다행히 최근에 비가 와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 비무장지대라는 특수한 환경이 존재합니다. 제가 군대 시절에 비무장지대에 근무했기 때문에 실제로 남북분단의 현실을 누구보다 피부로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화 'JSA(공동경비구역)'은 비무장지대 내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이 겪는 에피소드를 다소 과장되게 표현을 했지만 어느정도 상황을 묘사한 측면도 있습니다.

비무장지대는 군인이라도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구역입니다. 특별하게 출입증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이 비무장지대를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전협정상 군인들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무장출입증도 까다로운 심사절차에 의해 승인된 극히 일부의 특수 군인에게만 발급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비무장지대 출입증이 발급된 사람은 여러가지로 선택되고 검증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군대시절 생각이 나서 지난 20년전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찾아봤습니다. 예전 군생활회상록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비무장지대 출입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는 민정경찰대, 수색중대, 전초대, 수색정찰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것 같습니다.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 출입증 앞면과 뒷면 모습]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 상용 출입증'이란 명칭과 함께 '이 출입증은 민간행정 및 구제사업 제관서에 소속된 사람의 사용에 한함'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 출입증 소지자는 비무장지대 남경계선의 통과 및 비무장지대 남반부에서의 이용에 대한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 비무장지대 북쪽 부분을 출입하는데는 유효하지 않다.'고 부연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뒷면에는 영어로 똑같은 내용이 씌여 있었습니다. 이미 20여년이 지난 아주 오래 전 과거이지만 젊은 시절에 목숨을 걸고 비무장지대를 누비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갔습니다. 


아쉬운 것은 남한의 경우 '군인'이 비무장지대를 출입하기 위해서는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을 위한 인원으로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유엔군사령부, 흔히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같은 허가를 받은 군인을 '민정경찰(DMZ Police)'이라고 표현합니다. 북한은 '민경대'라고 합니다.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정전협정에 기인합니다.

지난 1953년 7월 27일, 미국
과 북한, 중국이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6.25 전쟁이 끝나고 남과 북 사이에는 휴전선인 군사분계선(MDL)이 생겼습니다. 당시 남한은 배제된 상태에서 정전협정문에 서명이 된 것입니다. 정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으로 2Km, 북으로 2Km 각각 사이의 땅이 바로 비무장지대입니다. 말 그대로 하면 군사적인 무장을 하면 안되는 지역인 셈입니다. 그리고 남북한은 비무장지대가 끝나는 지점에 철책을 만들어 대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① 어떤 군인이나 민간인도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북 각 지역 사령관의 특정한 허가가 있어야 하며(정전협정 제1조 제8항), ②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에 관계되는 인원과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를 얻은 인원이 아니면 비무장지대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정전협정 제1조 제9항). 또한 ③ 군사분계선 이남 비무장지대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진다(정전협정 제10항).

궁금증이 생겨서 북한의 비무장지대 출입증은 어떻게 생겼는지 검색을 해보니 하나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정전협정에 따른 문구는 없고 비무장지대 출입증의 소지자 신분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소비자는 북한의 민경대 소속 군인일 것입니다. 영화 JSA에서 남북한 병사는 아마도 이러한 신분증을 각각 소지하고 있었을 듯 합니다. 


     [좌측이 북한의 비무장지대 출입증 모습]

우리나라가 남북분단 국가라는 상징적인 장소가 비무장지대라면 비무장지대 출입증은 젊은 군인들이 온몸으로 분단의 현실을 느끼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무장지대에는 미확인 지뢰지대들이 도처에 위험이 산재해 있습니다.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선을 넘나드는 곳입니다. 뉴스에서도 여러번 보도된 GP에서 총기사건이 바로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군대 시절에는 어떻게 무시무시한  공포의 비무장지대에서 살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오싹하기만 합니다.

비무장지대 출입증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민족의 아픔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 같아 상념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전쟁을 잠시 중단한 개념인 휴전에 의한 정전협정이 아니라 진정으로 남과 북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종전으로 바꿔 평화협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습니다. 언제까지 동족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야 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서로 같은 민족으로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도 큰 진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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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