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11.14 어머니가 보내준 감 박스에 눈물 삼킨 사연 by 진리 탐구 탐진강 (29)
  2. 2009.11.01 무한도전 쌀 '뭥미', 웃음과 감동을 수확했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27)
  3. 2009.10.20 군대 간 아들, 아버지와 어머니 눈물의 차이 by 진리 탐구 탐진강 (66)


며친 전 회사에서 회의 중인데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회의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휴대폰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이폰 스마트폰입니다. 아이폰애 찍힌 전화번호를 살펴보니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낮에 저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회의 중 밖으나 나와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아이고. 집으로 전화를 한다는 것을 잘못 걸었구나."

"집에는 왜요? 급한 일 있으세요."
"아니, 오늘 장에 갔다가 아들 생각나서 감을 샀어. 한 박스 택배로 보냈다. 알려주려고."

"도시에도 감 많은데요. 안그러셔도 되는데요."
"감이 아주 좋더라. 한 박스에 만원 밖에 안해서 두 박스 샀단다."

"어머니, 보내신 감 잘 먹을게요."
"그래. 아이들하고 잘 먹어라."

어머니는 여전히 자식 생각 뿐입니다. 전화를 끊고나서 여러가지 상념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어머니는 혼자서 농사 일을 거의 다 하셨습니다. 저를 낳으실 당시에 낫에 무릎을 심하게 다쳐 한쪽 다리가 거의 불구나 다름없습니다. 그렇지만 불편한 다리로 소도 키우고 농사 일도 하고 자식들도 공부시켰습니다. 그 당시는 아버지가 도회지에 돈 벌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과거 저희 시골 농촌 아니 산촌은 초가집이었습니다. 밥은 가마솥에 나무 땔감을 태워 지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참으로 억척스런 삶을 사셨던 것이지요. 저는 어린 마음이지만 그런 어머니를 항상 애처롭게 생각했습니다. 어리지만 낫을 들고 논둑을 베고 나무를 하고 소에게 먹일 소꼴을 베기도 했습니다. 벼농사 밭농사도 어머니와 함께 했습니다. 고사리 손이지만 뭔가 돕고 싶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산 중턱에 있던 집 뒷동산에 감이 익어갔습니다. 엄청나게 큰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감나무의 높이가 5층 이상의 건물은 족히 됐습니다. 그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감을 따곤 했습니다. 제가 그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땄습니다. 대나무의 끝을 갈라서 감따는 도구로 이용했지요. 감나무가 너무 커 땅에서는 딸 수가 없었지요. 감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감을 모조리 땄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다칠까 걱정이었습니다. 그 감나무는 마을 청년들도 못올라갈 정도로 높이 솟아 있었어요.

"얘야, 그만 따라.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지 마라."
"아니요. 괜찮아요. 조금만 더 딸게요."

"그래도 위험하다. 이제 내려와라."
"엄마, 저 감나무 안 무서워요. 여기 끝에만 따면 돼요."

사실 그 때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감 하나라도 더 따고 싶었습니다. 어머니와 겨울 내내 함께 먹을 간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겨울에는 농한기라서 먹을 것을 비축해 두었습니다. 벼와 곡식을 추수하면 모두 장에서 팔아야 했습니다. 적은 돈이라도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집에서 먹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겨우 먹을 소량의 식량만 남겼습니다. 저에게 겨울 간식은 고구마와 감이었습니다. 고구마와 감은 별도의 대나무 울타리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배고프면 하나씩 빼먹곤 했지요.



큰 감나무에서 딴 감이 쌀가마니로 10 가마니가 넘었습니다. 겨울 내내 먹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감이 식량이나 다름없었지요. 그래서 감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모든 감을 다 땄던 것입니다. 감을 대나무 울타리 안에 두면 점차 홍시로 변해 갔습니다. 때론 곶감을 만들어 놓기도 했지요. 감나무 오르는 것이 어린 나이에 쉽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위해 제가 혼자서도 도울 수 있는 일 중 하나였습니다.


아마도 어머니는 이번 5일장에 가서 좋은 감을 보시고 제가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주말에 집에 있는데 아파트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택배요"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감 한 박스가 배달됐습니다. 거실에서 감 박스를 열어보니 먹음직스런 감이 가득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감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아내와 두 딸이 있어 제 컴퓨터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혼자 옛 생각을 하니 울컥하더군요. 아이들이 볼까 두려워 눈물을 삼켰습니다.

어머니가 보내준 감을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몇 개를 깎았지만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박스에 표시로는 10kg이었는데 갯수로는 100개 정도는 돼 보였습니다. 가까이 사시는 장모님과 이웃집에 몇개씩 나눠 드렸습니다. 다행히 두 딸도 감을 잘 먹었습니다. 대개 도시의 아이들은 초콜릿이나 사탕과 같이 너무 단 맛에 길들여져 감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요. 할머니가 보낸 감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따르던 아이들이었지요.

언제나 어머니는 자식들 걱정인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 마트만 가도 쉽게 감을 살 수 있지만 어머니가 보내주신 감은 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겨울나기를 하던 소중한 추억이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어머니가 정말 힘들 때 우리 가족을 지켜준 보물인 셈입니다. 부모님은 지금은 그래도 과거와 달리 금슬좋게 잘 지내십니다. 부모님은 가을 추수를 하면 매년 쌀과 고춧가루 등을 보내주시곤 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또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감 한 박스가 그것입니다. 곧 어머니의 생신입니다. 아내는 벌써 눈치를 챘습니다. 제게 말했습니다. "올해는 어머니 용돈을 두둑히 보내드려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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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또 한번 무한도전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무한도전 벼농사 특집 프로젝트 마지막 3부는 한시도 TV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감동의 도가니탕을 만들었습니다. 무한도전 멤버들의 절친 초호화 스타 게스트들도 빛났습니다. 무한도전의 1년간 연말 결산을 보는 듯 했습니다.

한편으로,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시는 부모님도 생각났습니다. 쌀값 폭락으로 시름하는 농민들도 스쳐지나갔습니다. 우리 민족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농촌의 슬픈 현실입니다. 또한 대북 쌀 지원이 끊기면서 나라의 쌀은 창고에 쳐박혀있고 또 다른 세계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의 아이러니가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무한도전은 웃음과 감동 속에서도 인간 세상의 희노애락을 이야기했습니다.

혹자는 무한도전을 '무모하지난 끝내 이겨내고 웃음과 감동을 주는 도전이 아름답다'고 평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은 늘 힘들고 어렵지만 그 도전은 아름답습니다. 무한도전이 왜 다른 예능프로그램과 차별화되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던 벼농사 프로젝트의 유종의 미(米)이자 대미(大米)였습니다.

무한도전의 정(情)과 초호화 스타들의 추수 동참 빛났다

이번 무한도전 벼농사 프로젝트 마지막편은 지난 1년간 가꾼 벼농사를 최종 추수하는 것이 하일라이트였습니다. 유재석 박명수 전진 정준하 정형돈 노홍철 길 등 무한도전 멤버들은 추수를 도와줄 절친 스타 연예인들을 즉석에서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밥사준다고 하자 두말없이 달려왔습니다. 바쁜 일정에도 강화도까지 달려와주는 의리와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꽃미남 배우 김범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벼농사를 돕는 모습은 의외의 장면이었습니다. 그가 나타나리라 예상을 못했고 그렇게 오래 머물며 벼를 베는 낫질을 할 것이라 생각을 못했습니다. 걸그룹 카라(구하라, 강지영, 한승연, 정니콜, 박규리)의 등장은 역시 최고의 인기를 실감할 만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논두렁과 논에서 히트곡 '미스터'에 맞춰 카라는 물론 무한도전 출연자들이 모두 함께 엉덩이춤을 추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김범이 좋아한다고 지목한 구하라와 벼를 베면서 서로 점점 다가가 호감을 드러내는 장면은 청춘남녀의 풋풋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김범은 논에 숨겨둔 콤바인 열쇠를 찾아 추수를 쉽게 끝내는데 결정적 역할도 했습니다. 한편, 김범을 초청했던 쩌리짱 정준하는 대장염으로 화장실을 오가며 촬영에 임하다가 결국 병원을 가야했지만 끝까지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스타들의 동참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쥬얼리(박정아 서인영 하주연 김은정), 가수 이민우와 바다, 힙합그룹 에픽하이(타블로, 미쓰라진, DJ 투컷츠), 개그맨 변기수 등 유명 연예인들이 총출동해 벼농사 추수의 일손을 거들었습니다. 바다의 논두렁 열창무대에 이어 새참시간의 창은 압권이었습니다. 애인 박정아가 나타나자 길(리쌍)은 예상치 못했는지 놀라서 벼에 숨어 수줍어하는 깜짝 만남 모습이나 그녀에 쌀다발 벼를 건네주거나 돌아갈 때 배웅해주는 장면은 영락없이 순수 청년의 이미지였습니다.
 


결혼식 일주일을 앞두고 타블로는 신부 강혜정을 향해 "청첩장 받으러 가는 날 이렇게 일하고 있다. 내가 평생 지켜줄게"라고 영상편지를 보내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무한도전은 인연을 소중히 하는 듯 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동안 무한도전과 인연과 인맥이 되었던 스타 연예인들이 벼농사 추수의 보람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한도전 멤버들과 끝까지 남았던 게스트들이 직접 추수한 벼를 이용해 따뜻한 즉석 쌀밥을 지어먹는 장면도 훈훈했습니다.

우리 농촌과 벼농사 쌀의 소중함과 훈훈함이 주는 의미는?

이번 벼농사 프로젝트는 많은 화제를 뿌렸습니다. 2PM의 박재범이 등장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한국인 비하글 논란으로 미국으로 떠났지만 그 전에 무한도전 벼농사 녹화가 있었기에 벼농사 프로젝트 2부 방송에서 박재범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진행형인 박재범 사태는 소속사 대표 박진영의 대처 방식이나 네티즌들과 팬들의 공방 등과 맞물려 혼란스런 상황입니다. 다만 창창한 청년의 아까운 재능이 성급한 오류와 재단으로 끝나지않나 하는 몰인정 사회 분위기가 아쉬움을 자아냈습니다.

벼농사 프로젝트는 사실 매우 힘든 프로그램입니다. 무한도전이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3~4월에 논갈기하고 모판 만들고 5월에 모내기하고 6~9월에 김매기 등 벼를 보살피면서 10월에 추수를 하는 과정을 화면에 담는다는 것이 재미와 웃음을 주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다큐멘타리 프로라면 모르지만 예능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도전은 결국 해냈습니다.
 


어떤 이는 논두렁에서 탈춤을 추고 돼지머리 고사를 지내고 가수들의 콘서트를 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예능을 하라는 것인지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무한도전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1년 동안 벼농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친환경 우렁이 유기농법을 활용해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쌀을 생산했습니다.
 
농촌은 요즘 매우 힘든 상황입니다. 쌀값폭락으로 농민들의 야적 시위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농촌과 쌀값 대책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한 태도와 푸대접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농가 수입이 25%나 줄어들 것이란 이야기도 들립니다. 나라에는 쌀이 쌓여있지만 대북 쌀 지원도 몇년째 끊기면서 남아도는 쌀에 대한 대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스턴트 식품이 범람하면서 우리나라 주식인 쌀 소비도 줄고 있습니다. 이번 무한도전 벼농사 프로젝트를 계기도 농촌의 소중함과 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정부도 농촌과 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겠습니다.

무한도전의 꾸준한 사회공헌과 새로운 변화의 시작인가?

이번 무한도전 벼농사 추수편 녹화가 있던 날은 박명수의 생일이었습니다. 그의 팬클럽인 데블스에서 특별히 축하떡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박정아가 연인 길을 위해 축하공연과 함께 막걸리를 새참으로 배달해온 장면도 무한도전만의 인간적인 정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전진이 곧 입대한다는 소식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하하가 입대할 때와 비교해보면 전진은 아주 짧게 화면에 나왔는데 1년 6개월 동안 함께 했던 무한도전 멤버로서 아쉬움도 클 듯 합니다.

전진의 하차에 이어 무한도전은 하하의 복귀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방황하던 길이 무한도전에 안착한 상태에서 하하의 복귀는 프로그램의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한도전은 원년 멤버들이 다시 재결성되는 셈이지만 그 동안 포맷에만 머무를 경우 식상함을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따라서 길의 역할 정립과 무한도전이 그 동안 추구했던 내용의 질적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벼농사 프로젝트는 새로운 실험마당이었습니다. 다음주 식객 미국 프로젝트도 변화의 연장선상인 듯 합니다. 앞으로 무한도전의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주목되는 이유입니다.  

무한도전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울림이 큰 것은 역시 사회공헌인 것 같습니다. 단지 웃음만 파는 예능프로그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불우이웃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따뜻함이 있습니다. 이번 벼농사 프로젝트를 통해 수확한 쌀의 이름은 '뭥미(米)'로 정해져 시청자들에게 마지막까지 미소를 짓게 했습니다. 무한도전 쌀 '뭥미'는 벼농사 프로젝트에 참여한 재범을 비롯 게스트들은 물론 불우이웃들에게 전달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전에도 무한도전은 '듀엣가요제 앨범 판매수익금 전액을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벌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한도전은 매년 무한도전 달력 판매 수익금으로 마련된 수 억원을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해오고 있기도 합니다. 무한도전이 일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불우이웃돕기에 나서고 있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무한도전의 김태호PD가 계속 보여줄 사람사는 세상을 기대하게 되는 벼농사 프로젝트가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무한도전은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웃들에게도 무한한 관심과 배려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한도전의 정신이고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역경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단 1%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무한도전은 어쩌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인지도 모릅니다. 따뜻하고 훈훈한 무한도전 세상에 박수를 보냅니다.

시골에서 보낸 쌀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며칠 전에 퇴근해보니 시골 농촌에서 부모님이 보낸 햅쌀 쌀가마니가 도착했습니다. 가을에 벼농사를 추수하시면 부모님은 도시에 사는 자식들에게 쌀을 보내주십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쌀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올해 내내 퇴약볕 밑에서 일하시며 어렵게 수확한 쌀을 보내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무한도전에서 추수를 한 이후 햅쌀로 따끈한 밥을 해먹는 장면은 바로 오늘 하루 한끼 식사를 하더라도 우리 농촌과 농부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보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농촌과 쌀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하는 하루입니다.
      무한도전 쌀 '뭥미'는 '한 톨의 쌀알에는 농부의 88번의 땀이 배어 있습니다'를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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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이 옷을 여미게 합니다. 가을도 깊어가면서 단풍도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맘 때가 되면 군대에서의 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을 각각 따로 느낄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오늘은 그 시절에 비로소 가슴으로 느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과 사랑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때는 1980년 중반이었습니다. 치열했던 대학 2년의 시간들을 추억하며 군대에 가야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암흑같은 군사 독재와 맞서 대학가의 민주화 항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군대를 가기 전 까지 어머니 일을 도왔습니다. 저는 한량이셨던 아버지를 지독하게 싫어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어느정도 마음을 잡고 일을 했습니다. 표고버섯 재배였습니다. 산 등성이에서 일해야 하기에 매우 위험힌 작업이었습니다. 겨울에는 참나무를 베고 봄에 버섯종균을 넣은 후 나무를 세워두는 과정이었습니다.

과거 이야기부터 해야 겠습니다. 제가 본 유년시절의 아버지는 늘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었습니다. 결혼 후 5년동안 군대를 기피해 도피생활을 했던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제가 5살 때 였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그 때부터 언제나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힘들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임신했을 때 홀로 일하고 오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오던 소꼴에 꽂아둔 낫이 떨어져 무릎의 힘줄이 끊어지는 중상을 당했습니다. 산골이라 병원도 못가고 평생 불구가 된 것이었습니다.

아침 태양의 햇살은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에 반짝였다

저는 나중에 고등학생 시절에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더 컸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표고버섯 재배를 함께 했습니다.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시라는 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는 일하시면서도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저는 대들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러지 못하도록 타일렀습니다.


당시 저는 다리를 절뚝 거릴 정도로 일을 했습니다. 마침내 군대를 가는 날이 왔습니다. 저는 집 앞에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시골 집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면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네 번 정도 버스가 다녔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산을 내려가는데 아버지를 계속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말없이 따라왔습니다. 

저는 "아버지 그만 들어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봤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뒤로 돌렸습니다. 그 때 저는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을 보았습니다. 이제 막 산꼭대기에는 떠오른 아침 태양의 햇살에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이 순간 반짝했습니다. 난생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렸지만 저는 이미 아버지의 눈물을 봤던 것입니다. 그렇게 강하신 분이셨던 아버지의 눈물은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군대를 향해 가면서 저는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화해를 했습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면회왔다가 아들 못만난 어머니의 눈물 

저는 강원도 중동부 전선에 있는 백두산부대의 비무장지대 수색대에 배속받았습니다. 위험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만큼 부대의 군기는 살벌했습니다. 신병 시절은 너무 괴롭고 힘든 훈련과 얼차려의 연속이었습니다. 수색대는 소대 단위로 생활했습니다. 산골짜기에 은밀하게 막사를 짓고 생활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강원도 산골은 급격히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훈련은 물론 물동이를 지고 물을 나르고 화목(불때는 나무)을 하고 짬밥을 버리는 등 잡일도 신병의 몫이었습니다.

어느 날, 열심히 물동이를 나르고 있는데 저를 부르는 소리가 멀리 막사에서 들렸습니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급히 뛰어가보니 부대 통신보안 전화를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전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영문도 모른체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라고 말하자 마자 어머니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어쩐 일이세요?"라고 묻자 어머니는 겨우 말문을 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한번 보기 위해서 머나 먼 남쪽에서 강원도 산골까지 산 넘고 물 건너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의 부대가 면회가 안되는 곳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아들이 입대 후 보냈던 안부 편지를 받고 무작정 아들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연대 본부를 찾아왔던 어머니는 아들의 면회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연대 본부에서 전화라도 연결해 주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저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저는 건강하게 잘 있어요."라며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어머니와 전화를 끊고 막사 뒤 후미진 곳에 혼자 앉아서 저는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1박 2일에 걸쳐 강원도 산골까지 오셨다가 아들 얼굴도 못보고 되돌아간 어머니가 안타까웠습니다. 나중에 휴가가서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맛있는 떡과 음식을 해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대본부의 병사들이 그 음식을 전달해주지 않고 그냥 배달사고를 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눈물흘리고 돌아서며 아들에게 음식을 전달해달라고 호소했을텐데 말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속 눈물과 어머니의 흐느끼는 눈물은 하나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근엄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약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대부분 그랬습니다. 가부장적인 농촌 사회에서는 특히나 그러했습니다. 아버지는 완고했고 어머니는 자애로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항상 희생만 하시는 어머니가 안타까웠고 호통만 치시는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겉으로는 강한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여렸습니다. 어머니는 숙명처럼 가족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렸고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보였지만 마음 속은 더 강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은 하나였습니다. 다만 그 표현이 달랐을 뿐입니다.

요즘은 아버지도 약해지셨는지 예전과 같지는 않습니다. 얼만 전에는 어머니가 여행을 다녀오시도록 배려하는 모습도 있으셨습니다. 칠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경운기를 몰고 농사일도 하시지만 과거와 달라지신 모습니다. 한편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다정해지신 것 같아 다행스럽지만 몸이 쇠약해지신 것 같은 아닌지 걱정도 듭니다.   

오늘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쌀 두 가마니 보냈다. 내일 도착할 거다."
"추수하느라 힘드셨겠어요."

"아니다. 막내가 와서 도와줘 잘 끝냈다."
"도움을 못드려 죄송해요." 
(막내 남동생은 지난해 결혼해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전화 좀 해라. 이번에 추수에다 표고버섯까지 나와서 고생했단다."
"네. 알겠어요."

어머니의 전화를 끊고 저는 잠시 멍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가장 걱정하는 분은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전화를 드렸습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별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심전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이 전해져 옵니다. 앞으로는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와도 자주 전화를 드려야 겠습니다. 저도 어느새 아버지를 닮았는지 표현이 서투른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 한 가정을 일구고 아버지가 되고나니 만감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글로 대신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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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