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0.02.15 1박2일 제주도 여행이 특별한 3가지 이유 <시청자투어로 본 졸업/가족/신혼여행> by 진리 탐구 탐진강 (37)
  2. 2009.12.19 산타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준 감동 by 진리 탐구 탐진강 (37)
  3. 2009.10.18 여성 올리브비누 직접 만든 모로코 친구 황당 사연? by 진리 탐구 탐진강 (59)
  4. 2009.08.15 광복절 특별사면 받은 매제와 음주운전...사면권 남발 by 진리 탐구 탐진강 (41)
  5. 2009.07.17 헤어진 첫사랑을 다시 만나선 안되는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73)
  6. 2009.07.04 교사 17년 친구의 말 "개천에서 용 안난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108)
  7. 2009.06.30 에바는 서도영보다 김민준을 더 좋아해 by 진리 탐구 탐진강 (34)
  8. 2009.06.28 러브샷 5단계 대학 음주문화에 깜짝 놀랐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56)
  9. 2009.05.26 노무현 대통령, 노간지 시리즈가 뜨는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1250)
  10. 2009.05.18 5.18 광주항쟁, 어머니와 친구의 그 날... by 진리 탐구 탐진강 (100)


설날 명절에 맞춰 1박2일 시청자투어가 시작됐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번째로 펼쳐지는 시청자투어에는 무려 150만명의 신청자가 몰릴 정도로 엄청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청자투어에는 7팀 90여명이 선정되었고 2박3일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작년에 대활약을 했던 국악고 소녀시대와 한국체대 여대생들이 특별 참가한 것도 관심을 증폭시킵니다.

이토록 시청자투어가 엄청난 관심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상 우리나라 방송사에서 이렇게 많은 시청자들이 방송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참여해 2박3일간 촬영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강호동을 비롯 멤버들과 제작진이 시청자를 주인공이자 왕으로 대접해주는 1박2일의 인간적 정과 따뜻함이 무엇보다 시청자들을 끄는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1박2일이 그 동안 시청자들에게 가족과 같이 편안하게 다가간 노력이 공감을 받는 듯 합니다.
단순히 일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사람들과 함께 하며 진솔하게 다가갔던 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1박2일은 여행지에서 만나는 지역 주민이나 여행객 시민들과 격의없이 형 동생 삼촌 아저씨 친구가 되어주고 했습니다. 상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편안하고 행복한 기운이 감도는 프로가 1박2일인 셈입니다.


1박2일 제주도 시청자투어에는 가족,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동호회 등 7개팀 90여명이 참가한다 

이번 시청자투어는 제주도를 택했습니다.
제주도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꼭 한번을 가보고 싶은 곳이고 추억의 여행지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번 시청자투어가 제주도로 떠나는 것을 보니 특별한 추억과 회상에 잠기게 했습니다.

90년대 초반 대학시절 제주도 졸업여행의 아련한 추억
 

우선 제주도에 처음 여행을 가본 것은 1991년 대학교 3학년 때 였습니다. 당시 저는 군대를 제대한 후 복학생이었습니다. 저는 86학번인데 당시 약 3년의 군대를 다녀오니 대학 3학년에 복학 후 89학번과 함께 학교 캠퍼스 생활을 했습니다. 복학 후 현역 학생이나 복학생이나 서먹서먹한 분위기였고 각각 따로 다녔습니다.

그런 가운데 제주도 졸업 수학여행을 가기로 결정됐습니다.
사실 지금은 해외여행도 많지만 그 당시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최고의 졸업 여행 장소로 찾던 곳이 제주도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현역 학생 대표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복학생들이 함께 갔으면 하는데 많이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단기 복무인 방위 근무를 했기에 3학년에 함께 다니게 된 87학번후배들을 포함해 86학번 복학생들이 제주도 수학여행에 대거 참가할 수 있도록 저는 여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국악고 소녀시대 학생들의 여행은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제 인생에 있어 최초의 제주도 여행이 시작됐습니다.
대학생들이라서 비용절감 차원에서 완도에서 저녁에 출발하는 유람선 배를 타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떠나기로 한 완도에서 첫 날 배는 출발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태풍이 불었기에 하루를 완도에서 기다리며 현지에 묵어야 했습니다. 어렵게 떠난 제주도 졸업여행은 한라산 등반을 비롯해 2박3일간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졸업여행을 다녀온 후 현역과 복학생들이 모두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풍과 만난 제주도 신혼여행과 친구의 쌀집 트럭

두번째로 제주도에 간 것은 신혼여행이었습니다.
지금은 신혼여행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많지만 1990년대 중반 당시는 제주도 신혼여행이 많았습니다. 신혼여행은 비행기를 타고 떠났습니다. 다만 제주도에 군대에서 절친했던 친구가 있어 신혼여행 기간 동안 여행 일정을 모두 챙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신혼여행 첫 날에 공항으로 몰고온 것은 쌀집 트럭이었습니다.
신혼여행 내내 고난과 추억의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음 날 친구는 제주도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을 모두 모아서 단란주점 하나를 통째로 빌려 밤새도록 서울에서 온 친구의 신혼여행과 결혼식 축하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신혼여행이 끝나 돌아가야 하는 날이 왔는데 태풍이 불었습니다.
하루를 더 제주도에 묵어야 했고 친구는 자신이 쌀을 대고있던 관광호텔의 방을 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태풍이 지나갔지만 결항이 계속 돼 비행기편이 없던 터라 친구가 구해준 페리 배편으로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페리 배편을 타러가는 길도 친구는 쌀집 트럭을 몰고 왔습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제주도 신혼여행의 추억을 만들어준 친구가 지금 생각하면 정말 고맙기만 합니다.

      제주도의 소인국테마파크에 들렀을 때 아이들이 미니어처 불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다시 만난 태풍과 장모님 칠순 기념 제주도 가족여행

세번째 제주도 여행은 지난해 가족여행이었습니다.

장모님 칠순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제주도 출신의 아랫 동서가 있어 가족여행은 순탄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행은 언제나 방심을 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제주도 도착한 날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내렸고 공항에서 숙박지에 전화를 하던 동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주도에서 아주 멋진 팬션을 예약했던 동서는 거기에 전화로 확인해보니 뭔가 잘못돼 예약이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동서가 제주의 친척에게 부탁했는데 구두 상으로만 말하고 실제 확인을 못한 실수였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제주 가족여행은 시작됐지만 현지에서 멋진 장소와 음식을 비롯 아주 즐거운 여행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번의 제주도 여행은 모두 특별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대학시절 졸업여행으로 처음 간 제주도였고 그 후 새로운 인생의 출발인 신혼여행 그리고 장모님을 모시고 간 가족여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중한 추억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갈 때 마다 제주도 여행은 언제나 태풍을 동반한 고난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주도 여행 때 마다 닥친 태풍은 우리에게 특별한 추억을 하나 더 만들어주기 위한 하늘의 선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행스럽게 태풍은 잠시 스쳐지나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제주도로 떠난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비단 저 만의 생각은 아닐 듯 합니다. 그 동안 제주도로 수학여행이나 졸업여행을 떠났던 학생들, 그리고 소중한 결혼의 출발점에서 신혼여행을 갔던 신랑신부들, 그리고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여행간 사람들, 여러가지 사연들이 모여 따뜻한 행복을 만들어갔던 제주도의 추억들이 사람들 마다 아련하게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1박2일 시청자투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훈훈하게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제주도에 어떤 추억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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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점심 시간에 회사에서 부부동반 모임이 있어 오후에는 휴가를 내고 아내와 집에 일찍 들어왔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우체국 택배가 하나 배달됐습니다. 두 딸아이의 이름으로 낯선 택배가 배달됐습니다.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설렌 마음으로 택배를 받았습니다.

아내는 누가 보낸 선물인지 살펴보더니 대충 알아차렸습니다. 제 블로그를 자주 살펴보았던 터라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고 짐작했던 것입니다. 블로그 이웃인 모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모과님의 선물을 받기 전 까지는 어떤 선물일지 전혀 몰랐습니다.

우체국 택배의 박스를 뜯어보는 순간 놀랐습니다. 아이들도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너무나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던 것입니다. 박스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를 비롯해 퍼즐과 여러 책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에 대해 사려깊은 이야기를 크리스마스 카드와 글이었습니다. 제가 별도로 아이들을 블로그에 쓴 적이 없는데 세심하게 두 딸에게 각각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야기와 함께 그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글을 전해왔습니다.

두 딸은 너무나 기뻐서 곧바로 크리스마스 카드에 편지를 썼습니다. 모과 할머니께 쓰는 편지였습니다. 친 할머니도 아닌데 어쩌면 그렇게 저희 딸들을 잘 알고 있는지 신기했습니다. 두 딸도 전혀 만난 적이 없는 모과 할머니에게 푹 빠져서 각자 정성껏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싼타 할머니라고 했습니다. 아이들도 싼타 할머니라고 여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싼타 할머니의 선물에 두 딸이 감동하다

우체국 택배 박스를 열어 봤습니다. 그 안에는 초콜릿을 비롯한 여섯 종류 정도의 각종 과자와 퍼즐, 여섯 가지 종류의 책들이 가득했습니다. 내년에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는 둘째 딸은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는데 너무 좋아요"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는 퍼즐도 무척 좋아하고 평상시 즐기던던 놀이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취미까지 알았는지 놀라웠습니다. 역시 산타 할머니인가 봅니다.



이 모두가 블로그 이웃인 모과님의 정성스런 선물이었습니다. 선물 하나 하나를 고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따듯한 마음이 녹아있는지 저절로 느껴졌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모과님이 할머니로서 아이들에게 다정하고 정감있는 글이 친필로 씌여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모과 할머니에게 당장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겠다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연스런 공감의 대화였습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답장을 쓰겠다는 것이 오히려 대견스러웠습니다.


아내도 놀라운 눈치였습니다. 예기치 못한 산타 할머니의 선물에 감화된 것 같았습니다. 특히나 모과님이 두 딸의 이름을 알고 자신의 손주 딸과 다름없이 다정하게 생각해주는 마음씨에 고마움이 절로 드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아이들 이름을 알고 있는지 신기해 했습니다. 사실은 블로그를 하면서 오래 알게 된 모과님이 언젠가 아이들 이름을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모과님이 친히 카드와 함께 아이들 선물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모과 할머니의 친필 편지를 보더니 연신 방긋방긋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당장 자신의 방에 있던 크리스마스 카드를 꺼내 편지 답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이런 모습도 처음이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감동의 느낌은 똑같은 것 같았습니다.

블로그 이웃은 세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소통의 바다였다

블로그라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일기를 쓰는 공간이 아니라 세대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는 소통의 장이 아닌가 생각됐습니다. 비록 블로그가 인터넷에서만 만나기 때문에 정이 부족하고 이기주의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라도 오래 소통하다보면 이웃사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습니다. 블로그를 하다보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세대와 나이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소통의 바다였습니다. 지식 나눔의 장이었습니다.



자신의 손자라고 하더라도 쉽지않은 일이었습니다. 모과님은 제가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때 첫 글에 댓글을 달아주면서 격려를 해주신 분이었습니다. 생소한 블로그에 언제나 친근하고 사려깊은 댓글로 힘을 실어주곤 했습니다. 저 보다 나이가 많은 연배이신 분이 블로그를 하는 것에 놀라면서 매일 노력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도 거르지않고 글을 쓰면서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말 고마운 분입니다. 그런데 아이들까지 챙겨주시다니 또 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과 할머니를 위해 포즈를 취해 달라는 요청에 아이들이 흔쾌히 응했습니다. 두 딸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모과 할머니를 위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만큼 아이들의 마음도 싼타 할머니와 통했던 셈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모과 싼타 할머니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답장을 썼습니다. 평소와 달리 진지하게 정성껏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좋은 블로그 이웃 사촌은 인생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한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 하더라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남남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이웃사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온라인 블로그에서 만나는 이웃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블로그에서는 언제나 만날 수 있어 더욱 가까운 이웃사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블로그가 주는 장점은 인생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데 소중한 소통 수단인 것 같습니다. 친구 녀석 중에 최근 블로그를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너무나 잘한 선택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났고 많은 이웃과 사귀면서 취미 뿐만 아니라 인생의 즐거움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블로그는 평생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소중한 이웃과의 소통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던 분야의 지식을 배울 수 있는 학교와도 같습니다. 인터넷이라고 딱딱할 것 같지만 오히려 블로그 이웃이 더 정겹고 따뜻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받은 싼타 할머니의 선물이 온 집안을 들뜨게 했습니다. 블로그를 하면서 가장 큰 감동이었습니다. 이는 저는 물론 아내와 아이들 모두에게 커다란 기쁨과 행복이었습니다. 모과 싼타 할머니에게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편지를 쓰는 두 딸에게 특히 소중한 기억이 될 것입니다. 모과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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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모로코에 사는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는 모로코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 모로코 여성과 결혼한 친구 이야기를 블로그에 쓴 일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한국에 와서 얼마 전에 만났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올리브로 직접 비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대학 시절에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친구는 "자본주의의 꽃은 자영이다."라고 했습니다. 대학 1학년 때에 그런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대학교 입학해 자본주의 꽃이 자영이라고 하는 친구의 이야기는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세상을 통달한 사람과 같이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 친구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학 1학년 당시에 그 친구를 중심으로 몇명이 모여 독서클럽을 만들어 매주 책을 읽고 토론을 벌이곤 했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 때 각자의 글을 모아서 책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만들 돈이 없었습니다. 저와 친구는 당시에 소위 노가다를 해서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벽돌을 나르는 막노동을 하며 비용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대학 신입생 친구 '자본주의 꽃은 자영이다'

친구는 대학시절에 우리들과는 생각의 깊이가 다른 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치열했던 1980년 중반의 역사가 지나갔습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가 오는 듯 했습니다. 저는 군대를 가고 27개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했습니다. 당시 군복무는 30개월이었으나 대학생 문무대 및 전방입소 혜택으로 3개월을 단축받았던 것입니다.

친구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기업의 모로코 법인에 근무 중이었습니다. 친구는 단기 군복무 혜택을 받았기에 대학 동창들 보다 빨리 사회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모로코 현지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됐니다. 당시 결혼 이야기는 블로그 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참고] 모로코 여성과 카사블랑카 영화처럼 결혼한 친구 이야기

모로코 여성과 결혼한 친구는 현재 모로코의 제2의 도시인 카사블랑카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모로코로 가기 전에 친구를 한국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기도 했었습니다. 의류사업을 했었는데 1997년에 닥친 IMF 여파로 사업을 접고 모로코에서 새로운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친구는 당시에 다른 친구로부터 거액의 사기를 당했지만 '친구를 잃는 것 보다 차라리 돈을 잃는 것이 낫다'는 말로 위안을 삼았던 멋진 녀석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친구는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의지의 한국인입니다.

사기당한 친구 '친구를 잃는 것 보다 돈을 잃겠다'
  
다시 올리브 비누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친구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살기 때문에 한국에 자주 오지는 못합니다. 다행인 것은 친구가 무역사업을 하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에 가끔 오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이번에 올리브로 비누를 직접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조금은 엉뚱한 면이 있는 친구지만 남다른 생각이 있던 터라 이야기를 들어 봤습니다.

친구는 올리브가 식용으로도 사용되지만 미용으로도 좋다는 것입니다. 올리브를 이용한 여러가지 상품이 있지만 올리브 그대로의 천연 상태를 유지하는 상품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개발해 들어간 것이 액체인 젤 상태의 천연 올리브 비누였습니다. 기존에 고체 상태의 올리브 비누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체 올리브 비누는 화학약품을 첨가해 만들기 때문에 올리브 자체의 천연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모로코를 비롯 북아프리카 지역 및 지중해 연안에 자라는 올리브 나무의 모습

그 후 친구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상품화하기 위해 한국에서 포장과 유통을 담당할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유통을 담당할 사람이 갑자기 자금 사정을 핑계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미 국내 최초의 올리브 비누 개발을 완료한 친구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것도 아닌데 엄청난 개발비를 투입해 올리브 비누를 개발한 친구는 앞 길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자존심 강한 친구가 고민을 저에게 털어놨습니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좋은 방법이 없겠냐는 것입니다. 저도 문외한이다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친구가 만든 올리브 비누를 몇개만 달라고 했습니다. 이미 친구는 한국인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포장까지 모두 완료한 상태였습니다. 올리브 비누의 브랜드도 정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이름인 '카사블랑카'였습니다.

또 다른 시련, 직접 올리브 비누 만들다

저는 아내에게 친구가 만든 올리브 비누를 직접 사용해 보고 평가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올리브 비누는 여성들이 목욕이나 미용에 사용하면 용도로 유용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내는 두 딸과 함께 가끔씩 목욕을 다니곤 했습니다. 실제 올리브 비누를 사용해본 아내는 목욕 후 피부가 촉촉한 느낌이고 천연 아로마향이 남아있어 산뜻했다고 말했습니다. 젤 상태이기 때문에 목욕하기 전에 올리브 비누 젤을 몸에 바르고 사용하면 효과적이란 이야기였습니다.



올리브 비누가 젤 상태인 것은 화학첨가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친구는 100% 올리브 천연향 농축액을 사용하여 만들었습니다. 화학첨가물이 가미된 고체 비누는 올리브 특유의 향과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에 올리브 천연의 성분을 유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올리브 비누를 튜브 형태 용기로 제작하고 포장도 보관과 휴대가 용이하고 세련되게 만들기 위해 비용이 과다 소요됐던 모양입니다.


올리브 마사지 목욕은 지중해 연안의 미인들을 중심으로 수천년 전부터 널리 이용되어 왔다

이런 사연으로 저도 올리브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를 해봤습니다. 올리브비누를 만드는 성분의 종류에는 유칼리투스, 라벤다, 로즈마리가 있습니다. 유칼리투스는 꽃봉오리들이 컵같이 생긴 막으로 덮여있는 독특한 식물이고, 라벤다는 향의 여왕 또는 성녀 마리아의 식물로 불리는 허브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로즈마리는 향나무 향처럼 맑고 장미처럼 달콤한 향이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는 유칼리투스, 라벤다, 로즈마리를 각각 올리브비누로 만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올리브는 건강이나 미용에 효능이 많아 유럽과 중동 지방에서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이라 합니다. 올리브 마사지를 통해 자외선 차단 및 피부 노화를 방지하고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어 탄력있는 건강 피부 미용에 효과를 준 것이라 합니다.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는 영화로도 유명하지만 지중해 연안 해안도시라서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문명이 교차하던 곳이라 미인들이 많은 곳이기도 합니니다. 그래서 올리브 마사지를 비롯한 미용이 발달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어쨌든 친구의 시련과 도전을 그냥 지켜보기는 친구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학교 다닐 때에도 고집과 자존심이 강했던 친구는 결국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했고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돌이켜보면 친구는 황당하게도 의류 중소기업을 하면서 다른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고도 또 다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지만 그러한 시련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은 친구에게 모로코와 한국이라는 거리와 시간 등 문제가 녹록하지는 않습니다.

친구의 황당한 사연은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는데만 꼬박 하루가 걸리는 머나 먼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열심히 살고있는 친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고 좋은 방안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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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매제가 광명을 되찾았습니다. 매제는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정지된 상태였습니다. 운전면허 정지는 영업사원이던 매제의 입장에서 생계가 달린 문제라 늘 고민하곤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광복절 특사는 매제와 가족들에게 반가운 소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얼마 전에 매제와 누이 가족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단연 화제는 광복절 특사였습니다. 음주운전 초범이기 때문에 특사 가능성이 크다고 기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매제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쩌다 음주운전을 했어?"
"업무상 거래처를 만났는데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서 그만..."

"집 근처라도 절대 음주운전은 안돼. 자신이나 가족은 물론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잖아."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형님"

"그래. 이번 광복절 특사는 가능한가?"
"예. 음주운전은 처음이라 가능할 것 같아요."

"광복절 특사로 나오면 두부 한 모 준비해야 겠네."
"...(일동 웃음)..."



음주운전은 절대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는 운전을 거의 하지 않는 편입니다. 저녁에 술 약속이 많기도 하지만 자주 술을 즐기는 저에게는 자동차는 귀찮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가용 자동차도 최근 몇 년전에야 구입할 정도였습니다. 아내가 자신이 운전할 것이니 자가용 구입하자고 졸라서 할 수 없이 구입했던 것입니다. 제가 술 먹고 퇴근할 때 아내가 기사가 될 것이라는 호언장담도 작용했습니다.
 
사실 자가용이 없어도 생활에 큰 불편은 없었습니다. 대중 교통 수단이 잘 발달된 도시에 살다보면 그리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집에서 자가용 사용은 1주일에 한 두번 정도 밖에 안됩니다. 멀리 아이들과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경우나 일가 친척을 방문하는 일에나 겨우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생활 주변에서는 가급적 걸어다니는 편입니다. 그러니 자가용은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너무 편리함을 찾다보면 문명의 이기에 종속이 심화되기에 중용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시 음주운전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지난 1990년대만 해도 음주운전은 다반사였습니다. 음주운전하다가 교통경찰에 걸려도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거나 고위직의 지인을 활용해 빠져나오는 일도 자주 벌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교통사고 사망율 1위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대적인 교통안전 캠페인과 음주운전 단속 등으로 지금은 교통수칙을 잘 지키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음주운전이나 과속 등 교통수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얼마 전에도 지인을 만나보니 음주운전으로 운전면허가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주변에도 음주운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교통안전 캠페인과 더불어 생활화될 수 있도록 함께 더 노력해야 할 듯 합니다. 

음주운전을 해도 광복절 특사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매제나 친구의 입장에서는 서운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특별 사면권이 남용되는 것도 국가 사회적으로 보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정부는 광복절 64주년을 맞아 약 153만명을 특별 사면했습니다. 대통령의 특별 사면권이 너무 인기 영합을 위해 남용되는 듯 하기도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출범 1년 6개월도 지나지않아 벌써 3번의 특사로 468만명을 사면해 주었습니다. 지난 참여정부 5년간 437만명을 사면해 준 것과 비교하면 이미 그 규모를 넘어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이명박 정부는 5년 임기동안 1500만명 이상을 사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면 공화국이라 할 일입니다. 무능했던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사면을 남발해 인기를 얻으려 했던 것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사면권 남용을 하지않겠다고 했고 작년에도 임기 중 추가 사면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법 질서 확립을 내세우는 현 정부의 기조와도 전혀 맞지 않은 일입니다. 대통령의 입맛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형국입니다. 특히나 이번 광복절 특사에서 죄질이 나쁜 음주운전 사범을 대거 사면한 것은 일반인의 법규 위반을 관행화시키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음주운전은 도로를 달리는 살인자와 다름없습니다. 과거 음주운전자 사면 이후 음주 사고는 25% 이상 증가하고 사상자는 1만명 이상 늘어났다고 합니다. 음주 사고로 인해 10조원 이상 사회적 비용이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음주운전에 대해서는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인 만큼 일벌백계하는 것이 마땅하고 더욱 단속을 강화해야 할 사안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지난 2007년 사면권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사면법을 개정해 사면위원회를 두고 있지만 전혀 활동을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권력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지난 60년간 4번만 사면을 단행했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8년 재임 기간 중 고작 190명을 사면했습니다. 대통령 마음 대로 사면하는 네로 황제와 같은 국가 체계는 문제가 있습니다. 경찰이나 검찰의 무분별 법집행도 문제가 많지만 사면권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광복절 특사를 맞아 매제에게는 행운입니다. 음주운전 사범의 굴레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절대 음주운전을 하지 않는 운전수칙의 준수와 자세가 필요합니다. 매제의 음주운전 문제는 우리나라 운전자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입니다. 음주운전해도 특별사면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 마저도 없어야 합니다. 도로 위의 인간 살상 흉기인 음주운전 자동차는 사라져야 합니다. 

그나저나 매제에게 두부 한 모를 보내주어야 겠습니다. 광복절 특면사면으로 운전면허시험장이 북적거린다는데 소양교육도 하겠지만 재발방지대책에 더 신경썼으면 합니다. '음주운전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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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은 풋풋하고 아름답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것이 첫사랑인지 아닌지 모를 때도 많습니다. 첫사랑을 어떻게 정의할지도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자신에게 의미있는 이성과의 첫기억 또는 애틋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것이 첫사랑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는 풋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첫사랑 또는 풋사랑의 추억을 더듬어가면 너무 이른 나이입니다. 당시 네살이었습니다. 이웃집의 여자 아이 N은 세살이었습니다. 첫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나이가 어립니다. 산골마을에서 바로 옆집에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농사 일을 나가면 저는 N과 하루종일 소꿉놀이를 했습니다. "나는 신랑, N은 신부" 그런 놀이였습니다.

네살 신랑과 세살 신부는 항상 집 앞의 뜰에 나와서 놀았습니다. 소꿉놀이 도구는 자연에 널린 돌과 풀이었습니다. 돌은 밥이 되고 풀은 국과 반찬이었습니다. 세살 신부는 돌과 풀로 밥을 짓고 국을 만들었습니다. 네살 신랑은 나무와 풀을 뜯어왔습니다. 나무는 밥을 지어야 할 용도이고 풀은 나물도 만들고 소에게 먹일 음식이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은 소꿉놀이하는 저와 N을 보면 장난스럽게 물었습니다.
"애들아, 너희들 결혼할 거니?"
"네. 결혼할 거예요."

"그래, 나중에 결혼해 잘 살아라. N아 언제 결혼할 거니?"
"....(수줍음)....어른이 되면."

그렇게 저는 N과 늘 함께 놀았습니다.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저는 이웃 마을로 이사를 갔습니다. N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N은 슬퍼했습니다. 저도 슬펐습니다. 헤어짐은 늘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N도 도시로 이사를 갔습니다. 영영 저는 N과 헤어졌습니다. 몇 년 후, 저도 도시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둘은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 시골 마을에 방학 때 갔습니다. 어머니가 느닷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너, 시골에서 소꿉놀이 친구였던 N 기억하겠냐?"
"N이요." 

"내가 밭일 가면 옆집에서 N과 놀았는데."
"아, 어렴풋이 기억나요. 신랑 신부하면서 놀았던 것 같아요."

"그래, 맞다. 근데 N이 시골에 놀러 왔단다. 만나 볼래? 이쁘게 컸더라."
"음. 세월이 너무 지났네요. 궁금하지만..."



그렇게 네살 그리고 세살 때 소꿉놀이 신랑 신부가 만났습니다. 너무나 세월이 지나 서로는 당시의 모습을 자세히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서먹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린 시절의 소꿉놀이 부부였지만 너무나 많은 시간들이 지난 후 만남은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저와 N은 이미 당시의 추억이 아닌 20대의 시절로 만났기에 현실이 어색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N은 어머니와 예전에 살던 마을에 놀러왔다 저를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와 N의 어머니는 서로 친분이 깊어 소꿉놀이 부부의 만남을 주선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둘은 각자의 삶의 현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저는 N과 만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저 신비로운 추억만을 간직하며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고이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N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의 첫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듯 합니다. 그러나 그 추억을 만나는 순간부터 그 아름다운 첫사랑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서울로 초등학교 시절에 전학을 했습니다. 참기름집에 사는 여자 아이와 눈길을 마주치곤 했습니다. 한번은 같은 반이되었습니다. 마을에 살고 있어 서로는 스스럼없이 친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반이 갈리면서 영영 못만났습니다. 그러다 아이러브스쿨이 유행일 때 친구의 권유로 가입했는데 놀랍게도 Y가 저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서로 몇번의 메시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Y는 저를 잘 기억하는데 저는 기억못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만날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만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어린 시절에 N과의 추억을 간직하지 못했던 이유에서 입니다. 첫사랑이든 풋사랑이든 추억은 소중하게 간질할 때 영원히 아름답습니다. 나이가 들어 동창회를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첫사랑이든 소중한 친구와의 만남이든 사심이 들면 그것은 아름답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의 풋풋하고 때묻지 않은 시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사랑은 추억할 때 아름답습니다. 가슴 속의 첫사랑은 만나는 순간 그 추억은 사라집니다. 첫사랑은 만나지 않고 가슴에 묻어두고 추억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당시의 예쁜 추억만을 간직할 때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순간부터 상상 속의 신기루가 바로 사라집니다.

첫사랑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첫사랑은 아름답지만 추억으로 간직할 사랑입니다.
첫사랑은 영원토록 소중하고 순수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행복한 사랑입니다.
헤어진 첫사랑과 만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그 행복한 추억 속 사랑을 잃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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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사람들의 세상 살이에 있어 친구는 소중합니다. 며칠 전 고등학교 동문 친구들과 만났습니다. 현재 고등학교 교사인 친구도 있었습니다. 교사인 친구는 벌써 17년 동안 교편을 잡았습니다. 소주 몇 잔이 오가면서 친구는 요즘 교육의 현실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교육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관심 사항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특히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저 같은 부모의 입장에서 교육 문제는 관심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친구는 고등학교에서부터 벌써 학생들의 미래가 이미 정해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가장 선망의 대상은 역시 특목고였습니다. 외고(외국어고)나 과학고 그리고 자사고(자립형 사립 고등학교)가 대표적입니다. 특목고나 자사고에 다니는 학생들은 소위 일류 대학을 갈 수 있는 요건을 갖춘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특목고와 자사고는 어떤 학교일까 찾아봤습니다.
특목고란?

특수목적고등학교(특목고)를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90조에서는 '특수 분야의 전문적인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고등학교'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와는 특목고에서는 과학, 외국어, 농업, 해양, 예술, 체육 등 각 특수하고 전문적인 분야를 미리 학생들에게 습득시켜 그 분야의 전문가를 조기 양성을 하는 목표로 설립되었습니다. 과학고등학교, 외국어고등학교, 예술고등학교, 체육고등학교, 국제고등학교 등의 특목고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법규정상 한국과학영재학교는 특목고가 아니지만, 입시목적의 분류편의상 특목고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학부모들이 특목고 설명회에 대거 몰려 우리 사회에 팽배한 입시 교육 열풍을 실감케 한다 

사실 특목고는 일반 인문계 고교와 달리 특수 목적의 여러 학교를 지칭하는 말인데 최근에는 특목고를 일반적으로 과학계열인 과학고등학교와 외국어계열인 외국어고등학교를 지칭할 때로 변질되어 주로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 과학고와 외고로 대표되는 특목고는 입시 위주의 교육기관으로 변질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특목고를 명문 입시 고등학교로 보는 현상이 나타나고 특목고를 보내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고액 과외를 하는 부모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사고란?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자사고)는 정부 지원금이 없이 독립된 재정과 독립된 교과과정으로 운영되는 학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는 고등학교 평준화 이후 발생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되었으며, 학교 재정은 대부분 학생 등록금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교육이 가능하지만,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학생의 부담이 큰 편이기 때문에 귀족 학교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현재 6개의 자립형 사립고등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로는 민족사관고등학교, 상산고등학교, 해운대고등학교, 현대청운고등학교, 광양제철고등학교, 포항제철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최근 자사고로 지정된 하나고등학교는 서울시 은평구에서 2010년 개교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교사 친구는 특목고와 자사고에 이어 그 다음은 서울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북의 목동 소재 고등학교나 강북의 일부 명문 고등학교가 그 다음 순서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은 명문 대학을 꿈꾸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입시 위주 이기적 인간을 양산하고 무한 경쟁을 유발하는 고등학교의 서열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고 이는 학생들의 꿈과 희망을 앗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교육 이야기를 계속 하던 중 친구의 한 마디가 뇌리를 강타했습니다.
친구 :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난다'고 했지?
탐진 : 그렇지.

친구 : 요즘에는 '개천에서 용 안난다'고 해. 특목고나 강남과 너무 차이가 많이 나서 극복이 어렵지.
탐진 : 정말 교육이 문제구나.

친구는 사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목동의 고등학교와 일반 보통 고등학교를 비교했습니다. 목동의 고등학교 1개반에 1등급이 10명이면, 일반 고등학교는 전체 학년 중 10명이 1등급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특목고나 강남의 고등학교는 1개반의 1등급이 10명 이상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 처럼 엄청난 차이가 나는 이유는 학교별 성적도 있지만 전국 수능 점수가 더 많이 반영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사 17년차인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슴이 답답해 왔습니다. 과거에도 학교별로 수준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의 고등학교 서열화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목동의 부모들은 강남으로 이사가려 하고 강남 부모들은 외국 유학을 보내는 세태라는 말도 있습니다. 강남은 부모나 아이들의 신분 과시의 장이기도 하지만 과열 교육 문제를 일으키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곳인 셈입니다. 부의 대물림은 교육으로 계속 진화하고 돈 없는 가정에는 허리가 휘는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특목고를 위한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마음껏 뛰어놀아야 할 초등학교 어린이 시절부터 매일 하루 종일 이기적 경쟁 위주의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한 몫 하는 것 같습니다. 현 정부 들어와 입시 열풍을 고조시키는 일제고사와 같은 교육 정책을 표방하면서 더욱 과열되고 있습니다. 부모들의 이기적 욕심도 아이들을 어린 시절부터 입시를 위한 성적 기계로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 4~6학년을 대상으로 전국 일제고사가 12년 만에 부활했다

과거에는 시골 마을의 학생들에게 "개천에서 용난다"고 하며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개천에서 용 안난다"고 하니 작은 희망마저 없어져 버린 셈입니다. 정부의 이기적인 성적 지상주의 인간을 만드는 정책이나 부모의 자기 자식만을 위한 이기적 욕심으로 인해 아이들이 병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점수만 잘 따는 인간이 아니라 정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아쉽습니다.

요즘 입시 지옥에서 고생하는 학생들에게 안영미 버전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사회와 부모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니들이 고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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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늦게 퇴근해 잠시 휴식을 취할 겸 TV를 켰더니 유재석 김원희가 진행하는 <놀러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MBC 새 주말특별기획 드라마 <친구, 우리들의 전설>에 출연 중인 김민준과 서도영이 출연했습니다.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 유오성의 강렬한 인상이 남아있던 터라 김민준과 서도영이 누군가 지켜봤습니다.

재미있었던 것은 <놀러와>에서 김민준과 서도영이 KBS2 <미녀들의 수다>에 최장수 패널인 영국인 에바를 사이에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내용이었습니다. 
김민준과 서도영은 '우정도 테스트' 코너에서 서로 에바를 잘 알고 있다며 즉석 대결을 했습니다. 두 남자가 어떻게 에바와 친하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즉석에서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 답신을 받아본다는 것은 어느정도 이상의 사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습니다.



이날 방송에서 서도영은 "나 어떡하지?"라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에바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서도영은 에바와의 사이에 대해 "만난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최근에 급격히 친해졌다" "괜찮은 친구인데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몰라 이성으로서는 어떤지 모르겠다"고 애매한 답변을 했고 이에 대해 노홍철은 "나와 출발이 같은데?"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서도영과 에바의 궁금증이 무르익을 무렵 김민준이 "나도 에바와 아는 사이다" "요즘 보면 에바가 나와 서도영을 사이에 두고 고민 하는 중인 것 같다"고 공개해 깜짝 놀라게 한 것입니다. 이어 김민준은 "나도 에바에게 문자를 보내서 에바의 반응을 보고 싶다"고 서도영과 즉석 대결이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에바로부터 문자 답변이 올까 궁금한 장면이었습니다. 정말 에바로부터 서도영에게 17분만에 문자 답신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서도영은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렇지만 에바는 서도영에게 "왜 나 지금 일본인데"라며 간단한 내용이었고 무미 건조했습니다. 

잠시 후 분위기는 반전되었습니다. 에바가 김민준에게 18분만에 답신한 문자메시지는 "오빠 오랜만이에요^^ 저 일본이에요~~"라며 귀엽고 친근한 모습을 과시한 것입니다. 에바는 두 남자에게 같은 질문에 서로 다른 느낌의 답신을 보낸 셈입니다. 에바는 김민준에게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었습니다.

서도영은 당황한 기색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날 함께 출연한 게스트인 이범수가 두 남자에게  다시 한 번 문자를 보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서도영은 에바에게 "서울에 오면 와인 한 잔 하자" 문자를 다시 보냈습니다. 또한 김민준은 "서울에 오면 영화 한 편 보자"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에바는 확실히 김민준을 선택했습니다. 에바는 김민준에게 먼저 답변을 보냈습니다. 서도영은 문자를 더 늦게 받기도 했지만 문자 답변의 차이에서 또 한번 충격을 받은 듯 의기소침해 했습니다.



에바는 김민준에게 "곧 한국 들어가요. 다음 주에 시간나면 놀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며 친절하고 애교있는 문자메시지 답변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서도영에게는 "괜찮아? 다음에 한 번 보자"라며 간결한 문장만 보냈습니다. 에바는 김민준과 서도영에게 다소 대비되는 문자를 보냄으로써 확실히 김민준에게 더 호감을 나타낸 것입니다.

에바의 이러한 모습은 몇년전 한류스타인 안재욱과의 스캔들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공항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돼 열애설로 비화된 적이 있었습니다. 실상은 개그맨 김제동이 인사시켜주고 잠깐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 수준으로 종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방송은 에바가 김민준과 서도영 사이에서 삼각관계 또는 김민준과 다정한 관계라는 사실을 공개한 셈이 되었습니다. 서로 청춘 남녀가 국경을 초월해 만날 수 있는 글로벌 사회라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다만 방송에서 에바와 김민준 서도영이 서로의 친분을 과시한 것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사뭇 궁금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애교있고 깜찍한 모습으로 한국인 남성 팬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는 에바와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고있는 김민준 서도영의 방송 후 대결이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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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학생들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겸한 모임이어서 소주 잔도 오갔습니다. 어떤 분이 소주와 맥주를 맥주잔에 섞은 서민(?) 폭탄주 일종인 '소맥'을 제조했습니다. 그리고 소맥 두 잔을 각각 두명씩에게 돌렸습니다.

폭탄주 한잔씩을 마신 후 모두가 즐거운 대화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한번 폭탄주를 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도 두 사람씩에게 술잔에 건네졌습니다. 대개 술잔을 건배하고 한번에 마시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남녀 대학생에게 술잔이 주어졌습니다. 그러자 대학생들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러브샷, 러브샷, 러브샷"
"2단계, 2단계, 2단계"


어리둥절한 저는 옆에 앉아있던 여대생에게 물어봤습니다.
"2단계가 뭐예요?"
"러브샷 2단계는 서로 목을 감아서 마시는 거예요."

여러 사람들이 러브샷을 외치자 잠시 머뭇거리던 여대생이 말했습니다.
"그냥 러브샷 1단계만 할게요."

이내 남녀 대학생은 러브샷을 했습니다. 여학생이 더 적극적이고 남학생은 수동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러브샷 1단계는 서로 팔을 감고 마시는 방식이었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러브샷이라고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도 러브샷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일반 성인들의 일부 음주 문화가 대학생들에게도 유행이라는 사실에 다소 놀랐습니다.

러브샷은 러브(Love)와 샷(Shot)이 만난 영어이지만 영어권 국가에는 존재하지 않는 콩글리쉬라고 합니다. 곡비즉진(曲臂卽盡 ‘서로 팔을 구부려 잔을 비우라’)이라는 글이 경주 안압지에 써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음주문화인 러브샷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현재의 러브샷은 지난 1980년대 지방의 기관장들이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면서 전국으로 확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러브샷도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려가며 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무리한 러브샷 시도로 인해 법원에서 강제 성추행 혐의로 벌금 300만원 판결이 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대학생들이 러브샷 2단계를 외치던 모습을 생각하니 대학가 음주문화가 궁금했습니다. 옆에 앉아있던 여대생에게 다시 물어봤습니다.
"요즘 대학생들도 러브샷을 자주 하나요?"
"가끔 술자리에서 러브샷을 해요."

"그렇군요. 대학생들도 러브샷을 한다니 흥미롭네요."
"러브샷은 5단계까지 있어요."

"5단계요. 처음 들어보는데요. 어떤 것인가요?"
"1단계 2단계는 아실 거구요. 3단계는 여자가 남자 무릎 위에 올라 앉아서 목을 감아서 마시는 거예요."

"(허걱) 그래요."
"4단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으로 술을 전달하는 거구요. 5단계는 서로 입으로 술이 왔다 갔다 오가는 거예요."

"정말요? 놀랍군요."
"실제로 4단계 5단계는 거의 안해요."

저를 비롯한 직장인들은 5단계의 설명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실제로는 4단계 5단계의 러브샷은 거의 없다고 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일반인들도 러브샷은 1단계나 2단계 수준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학생들은 더욱 폭탄주와 러브샷 문화를 진화(?)시켜 5단계까지 만들었다니 창의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1980년대 대학 시절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음주문화는 다른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러브샷이란 단어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소주와 막걸리를 주로 마셨던 시절이었습니다. 1990년대 러브샷은 사랑하는 남녀 연인 사이인 경우 친구들이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해 남자들끼리 러브샷을 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러브샷 문화가 대학생들에게도 유행인 줄은 몰랐습니다. 서로 좋은 분위기 속에서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데 있어 러브샷이 부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너무 과도한 경우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려지게 하기도 합니다. 러브샷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조심해야 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올바르고 건전한 음주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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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지금 인터넷에는 이미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추모의 열기가 뜨겁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간지'라는 친근한 별명으로 불리고 있기도 합니다. 간지는 어원이 일본어인 간지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 원래의 뜻과는 약간 다르게 변화되고 의역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느낌, 감각(Feel)" 이란 간지의 어원이 우리나라에서는 "폼이난다", "멋있다"의 의미로 사용되면서 인터넷 신조어인 '노간지'로 탄생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노짱'이나 노간지는 비슷한 별명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네티즌 사이에서는 그냥 순수 한국말인 노짱이 낫지 않느냐는 갑론을박도 있기는 합니다. (댓글 의견 중에는 우리말'간지다'가 어원이라는 말도 있는데 "간드러진 멋이 있다" 의미로 노간지가 생겨난 것이랍니다.)

특히, 인터넷에는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을 담은 노간지 시리즈가 뜨고 있습니다. 일반 국민들 앞에서는 고개 숙이고 늘 소탈한 서민의 모습이었지만, 절대 권력자나 강자들에게는 당당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이 다시 한번 네티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노간지는 바로 나의 친구나 이웃이라는 친근감의 상징

사실 노간지 시리즈가 뜨는 이유는 몇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우선 노간지는 바로 나의 친구나 이웃이라는 자각이 반영된 상징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들과 똑같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노간지는 바로 나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그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셈입니다. 노간지는 바로 우리의 이웃집 친구, 아저씨, 오빠, 형, 할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권위를 국민에게 넘겨주고 국민과 소통했던 대통령 인식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새로운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수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최고 권력자가 권위를 벗고 일반 대중과 함께 호흡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일반 국민의 대표로서 대통령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그러한 탈권위주의, 진정한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그 권력의 주체로서 감당할 능력이 부족했는지 모릅니다. 오히려 고인을 물어뜯고 짓밟고 깎아내리기 바쁜 하이에나 언론과 특권 기득권 세력의 재물이 되고 있어도 방관자이거나 동조자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지난 수천년을 제왕이나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절대 권력 치하의 백성으로 살아왔기에 갑자기 국민에게 주어진 권력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셈입니다. 노간지는 이러한 탈권위시대의 산물인 것입니다. 인터넷은 권위주의가 사라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지가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 아니던가. 대통령을 욕하더라도 노간지는 소중한 국민들을 이해한다면서 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써 주권자의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 대통령 노무현 어록 중 -

때늦은 후회와 반성 그리고 사람에 대한 소중한 가치

노간지는 그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왔던 인생 궤적에 대한 재평가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오직 조국과 국민들을 위해 살아왔던 당당한 삶에 대한 재평가와 재발견인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비로소 그의 죽음 앞에서 숙연해졌습니다. 그리고 때늦은 후회와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소중한 가치들을 발견한 것입니다. 물질 만능주의 앞에 나약해졌던 우리 모두는 진정 소중한 가치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는 사람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나름대로 국정을 위해 열정을 다했는데 국정이 잘못됐다고 비판 받아 정말 괴로웠다.
아들 딸과 지지자들에게도 정말 미안하다.
퇴임 후 농촌 마을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아 참으로 유감이다.
돈문제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만 이 부분은 깨끗했다.
나에 대한 평가는 먼 훗날 역사가 밝혀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잊고 지냈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준 노간지의 모습들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이렇게 소탈하지만 당당한 최고 권력자 대통령을 우리가 맞이하게 될까요?

'아기'를 놀린 노간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국민이면 봐야 하는 노간지 시리즈입니다.


(* 여기서 호화요트는 극우 보수언론의 거짓말 물어뜯기에 대한 반어법입니다.^^ )
<* 오타 발견 : 옳바른(X) -> 올바른(O),  주늑들지(X) -> 주눅들지(O)>






자전거 타는 노간지.


한글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노간지.


엘리자베스여왕과 노간지.


인디아나 노간지.


아이들과 줄다리기하는 노간지.


농촌 촌부 모델이 된 노간지.


회장님과 노간지의 만남.


네티즌이 된 노간지.


꼬마 아가씨와 만난 노간지.


아이 울린 노간지.


신고하는 전경에 고개 숙인 노간지.


서민들과 함께 한 노간지.


아이들 눈치보며 점심먹는 노간지.


아이들에게 고개 숙인 노간지.


썰매타는 노간지.



손녀를 태우고 자전거 타는 노간지.



다정한 노간지 부부.

상록수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칠은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출처] 탐진강의 함께사는세상이야기

노무현 대통령 주요 업적
1) 국가 신용등급상승 총 4단계 상승
2) 암환자 건강보험 보장률 총 20%이상 상승
3) 외한보유액 286억달러 상승
4) 주택보유율 9.7% 상승
5) 정부 R&D 예산 13% 상승
6) 육아지원예산 8000억원 이상 상승 5배이상 상승
7) 1인당 명목 국민소득 8000달러 상승(2만 달러 시대 개막)
8) 남북 인적왕래 약 10배 상승
9) 복지비율 39%상승
10) 북한 NLL침범 100회 이상 줄임
11) 국제 특허건수 1위상승 건수 1500회 이상 증가
12) 부도 업체수 90%이상 대폭 줄임
13) 전력증가 전차, 전투기, 전투함 1.7배 증가
14) 실업자수 60만명 이상 줄임
15) 기술석차 상승
16) 국가 기초 기술 상승
17) 소비자 물가 1.4 포인트 줄임(물가 안정)
18) 국가 정보 순위 11위 상승
19) 총 연구 개발비 7조원 상승
20) 공공 도서관 크게 증가
21) 미술관 증가
22) 박물관 상승
23) 종합 주가 기수 800 증가(주가 1400 시대 개막)
24) 외국인 투자 22억 달러 증가
25) 자유화 정도 FREE로 상승
26) 중소기업 현금 보유 1.9배 증가
27) 수출액 2배 이상 증가


* 극우 보수언론과 정부는 그 동안 노무현 업적 지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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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느덧 30년이 지났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그 날이 다시 오면. 그 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저는 당시 큰집에서 기거하며 일찍이 서울 유학을 했었습니다.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에 총격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이웃 아줌마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하고 스스로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장갑차와 군인들의 서울 입성,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저는 중학교를 가려면 늘 청와대 앞 길을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그 길에는 장갑차가 보였습니다. 완전 무장한 군인들도 보였습니다. 5월도 그랬습니다. 당시는 왜 군인들과 장잡차가 청와대 앞에 그토록 많이 지키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인 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1979년 전두환은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1980년 체육관에서 대통령에 오른다]

오월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큰집에 전남대에 다니던 친척 형이 올라왔습니다. 그 후부터는 그 형은 도무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큰집의 다락방에 늘 숨어지냈던 것입니다. 언제 닥칠지 모를 군인들의 검거를 피해 다락방에 하루종일 숨어있었습니다. 저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왜 그랬을까? 당시는 광주 지역 대학생이면 모두 잡아갔던 시절이었습니다.

문학소년이었던 착한 친구가 5월이 오자 눈물을 흘렸다

1980년대 중반, 저는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전두환 군사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되고서야 1980년 5월 광주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가에는 소위 '짭새(비밀 경찰)'들이 출몰하던 시기였습니다. 대학생들은 군사 독재에 항거해 독재와 맞서 싸웠습니다. 항상 대학 캠퍼스에는 최루탄이 난무하고 백골단 특수경찰들이 교정에 난입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대학교 입학식 장에 최루탄이 날아들면서 대학 생활을 처음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그 날의 광주 비디오도 처음 보게 됐습니다. 대학생들이 몰래 숨어서 비디오를 봐야만 했습니다. 언제라도 군사 정권은 대학생들은 강제로 잡아가던 살벌한 철권통치의 시절이었습니다. 군사정권에 항의하는 대학가의 시위는 5월을 맞아 치열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의 5월, 서울의 대학가는 광주출정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1980년 그 시절에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는 몇몇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항상 조용히 책만 읽던 문학소년이었습니다. 문인을 꿈꾸던 착한 친구였습니다. 대학가에 계속 되던 시위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런 친구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1980년 당시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 항쟁이 전국적으로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친구는 1980년 5월,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그리고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친구는 광주 시내에서 의료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친구는 그 당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했습니다. 어린 중학생의 눈으로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의해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리거나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은 큰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몇 년이 지나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월이 오면서 조용하던 친구는 처음으로 시위에 나섰습니다. 전투경찰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지 못하도록 대학들을 완전 봉쇄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전투경찰들의 포위망을 뚫고 서울 도심으로 진출했습니다. 군사독재의 타도와 민주주의를 목놓아 외쳤습니다. 군사독재에 대항한 전국 대학가 민주화 항쟁의 시작입니다. 
 
산골의 어머니를 찾아온 대학생들 '배가 고파요'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낭만이 아닌 시대적 갈등 속에서 보내고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일을 조금이라도 도와드려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대학생이 된 저에게 처음으로 1980년 어느 날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첩첩산중에서 농사를 짓고 사시는 어머니가 어떻게 1980년 5월을 알고 계신지 궁금했습니다. 철저하게 5월 광주는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진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언론도 군사정권에 의해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어머니가 저녁 밥을 짓고 있는데 5~6명의 대학생들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허름한 복장에 몰골이 말이 아닌 젊은이들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배가 고픈데 밥 좀 주세요."
"젊은이들은 누구세요?"

"저희는 대학생들입니다. 광주에서 산을 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학생들."

어머니는 그 대학생들을 통해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 의해 자행됐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알게 됐던 것입니다. 대학생들은 당시 무장 군인들의 총칼로부터 살아남기위해 산등성이를 계속 걸어서 산골 마을까지 왔습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산골에 도착한 학생들은 무작정 마을 이장님 집을 찾아 밥 좀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1980년 광주, 공수부대원들이 한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한번도 광주의 5월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생이 되고나서야 처음으로 그 당시의 대학생들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그 당시 대학생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 1980년 5월이 지나갈 무렵에 큰집의 다락방에 전남대에 다니던 친척 형이 숨어지내야 했는지, 친구는 그 당시 무엇을 목격했고 왜 눈물을 흘리는지 과거의 역사가 하나씩 조각이 맞추어지면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이미 30년이 지난 광주의 그 날 이야기로 제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치열한 1980년대 중반의 대학 시절을 보냈고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민주화를 쟁취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와 아이들과 평범하게 살아가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직장인입니다. 다시 5월 그 날이 오면, 지난 1980년 그 날에 대한 세가지 기억들이 오버랩되어 지나갑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5월 그 날의 역사입니다. 아직도 그 역사는 현재 진행행인지 모를 일입니다.

[참고 글]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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