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02.15 1박2일 제주도 여행이 특별한 3가지 이유 <시청자투어로 본 졸업/가족/신혼여행> by 진리 탐구 탐진강 (37)
  2. 2009.10.12 어머니 첫 해외여행 허락한 아버지의 변심 이유는? by 진리 탐구 탐진강 (88)
  3. 2009.05.07 자식위해 평생 불구가 되신 어머님 전상서 by 진리 탐구 탐진강 (86)
  4. 2009.02.15 복순씨와 결혼한 막내 남동생과 개명 고민 by 진리 탐구 탐진강 (8)
  5. 2009.01.14 겨울방학 최고선물 '비닐포대 눈썰매 타기' by 진리 탐구 탐진강 (6)


설날 명절에 맞춰 1박2일 시청자투어가 시작됐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번째로 펼쳐지는 시청자투어에는 무려 150만명의 신청자가 몰릴 정도로 엄청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청자투어에는 7팀 90여명이 선정되었고 2박3일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작년에 대활약을 했던 국악고 소녀시대와 한국체대 여대생들이 특별 참가한 것도 관심을 증폭시킵니다.

이토록 시청자투어가 엄청난 관심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상 우리나라 방송사에서 이렇게 많은 시청자들이 방송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참여해 2박3일간 촬영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강호동을 비롯 멤버들과 제작진이 시청자를 주인공이자 왕으로 대접해주는 1박2일의 인간적 정과 따뜻함이 무엇보다 시청자들을 끄는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1박2일이 그 동안 시청자들에게 가족과 같이 편안하게 다가간 노력이 공감을 받는 듯 합니다.
단순히 일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사람들과 함께 하며 진솔하게 다가갔던 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1박2일은 여행지에서 만나는 지역 주민이나 여행객 시민들과 격의없이 형 동생 삼촌 아저씨 친구가 되어주고 했습니다. 상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편안하고 행복한 기운이 감도는 프로가 1박2일인 셈입니다.


1박2일 제주도 시청자투어에는 가족,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동호회 등 7개팀 90여명이 참가한다 

이번 시청자투어는 제주도를 택했습니다.
제주도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꼭 한번을 가보고 싶은 곳이고 추억의 여행지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번 시청자투어가 제주도로 떠나는 것을 보니 특별한 추억과 회상에 잠기게 했습니다.

90년대 초반 대학시절 제주도 졸업여행의 아련한 추억
 

우선 제주도에 처음 여행을 가본 것은 1991년 대학교 3학년 때 였습니다. 당시 저는 군대를 제대한 후 복학생이었습니다. 저는 86학번인데 당시 약 3년의 군대를 다녀오니 대학 3학년에 복학 후 89학번과 함께 학교 캠퍼스 생활을 했습니다. 복학 후 현역 학생이나 복학생이나 서먹서먹한 분위기였고 각각 따로 다녔습니다.

그런 가운데 제주도 졸업 수학여행을 가기로 결정됐습니다.
사실 지금은 해외여행도 많지만 그 당시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최고의 졸업 여행 장소로 찾던 곳이 제주도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현역 학생 대표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복학생들이 함께 갔으면 하는데 많이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단기 복무인 방위 근무를 했기에 3학년에 함께 다니게 된 87학번후배들을 포함해 86학번 복학생들이 제주도 수학여행에 대거 참가할 수 있도록 저는 여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국악고 소녀시대 학생들의 여행은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제 인생에 있어 최초의 제주도 여행이 시작됐습니다.
대학생들이라서 비용절감 차원에서 완도에서 저녁에 출발하는 유람선 배를 타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떠나기로 한 완도에서 첫 날 배는 출발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태풍이 불었기에 하루를 완도에서 기다리며 현지에 묵어야 했습니다. 어렵게 떠난 제주도 졸업여행은 한라산 등반을 비롯해 2박3일간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졸업여행을 다녀온 후 현역과 복학생들이 모두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풍과 만난 제주도 신혼여행과 친구의 쌀집 트럭

두번째로 제주도에 간 것은 신혼여행이었습니다.
지금은 신혼여행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많지만 1990년대 중반 당시는 제주도 신혼여행이 많았습니다. 신혼여행은 비행기를 타고 떠났습니다. 다만 제주도에 군대에서 절친했던 친구가 있어 신혼여행 기간 동안 여행 일정을 모두 챙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신혼여행 첫 날에 공항으로 몰고온 것은 쌀집 트럭이었습니다.
신혼여행 내내 고난과 추억의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음 날 친구는 제주도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을 모두 모아서 단란주점 하나를 통째로 빌려 밤새도록 서울에서 온 친구의 신혼여행과 결혼식 축하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신혼여행이 끝나 돌아가야 하는 날이 왔는데 태풍이 불었습니다.
하루를 더 제주도에 묵어야 했고 친구는 자신이 쌀을 대고있던 관광호텔의 방을 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태풍이 지나갔지만 결항이 계속 돼 비행기편이 없던 터라 친구가 구해준 페리 배편으로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페리 배편을 타러가는 길도 친구는 쌀집 트럭을 몰고 왔습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제주도 신혼여행의 추억을 만들어준 친구가 지금 생각하면 정말 고맙기만 합니다.

      제주도의 소인국테마파크에 들렀을 때 아이들이 미니어처 불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다시 만난 태풍과 장모님 칠순 기념 제주도 가족여행

세번째 제주도 여행은 지난해 가족여행이었습니다.

장모님 칠순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제주도 출신의 아랫 동서가 있어 가족여행은 순탄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행은 언제나 방심을 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제주도 도착한 날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내렸고 공항에서 숙박지에 전화를 하던 동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주도에서 아주 멋진 팬션을 예약했던 동서는 거기에 전화로 확인해보니 뭔가 잘못돼 예약이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동서가 제주의 친척에게 부탁했는데 구두 상으로만 말하고 실제 확인을 못한 실수였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제주 가족여행은 시작됐지만 현지에서 멋진 장소와 음식을 비롯 아주 즐거운 여행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번의 제주도 여행은 모두 특별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대학시절 졸업여행으로 처음 간 제주도였고 그 후 새로운 인생의 출발인 신혼여행 그리고 장모님을 모시고 간 가족여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중한 추억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갈 때 마다 제주도 여행은 언제나 태풍을 동반한 고난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주도 여행 때 마다 닥친 태풍은 우리에게 특별한 추억을 하나 더 만들어주기 위한 하늘의 선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행스럽게 태풍은 잠시 스쳐지나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제주도로 떠난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비단 저 만의 생각은 아닐 듯 합니다. 그 동안 제주도로 수학여행이나 졸업여행을 떠났던 학생들, 그리고 소중한 결혼의 출발점에서 신혼여행을 갔던 신랑신부들, 그리고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여행간 사람들, 여러가지 사연들이 모여 따뜻한 행복을 만들어갔던 제주도의 추억들이 사람들 마다 아련하게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1박2일 시청자투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훈훈하게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제주도에 어떤 추억이 있으신가요?
 

 * 글이 유익하셨다면 아래 손가락 모양을 클릭해 추천해 주시는 따뜻한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얼마 전 어머니께서 첫 해외여행을 다녀오셨습니다. 해외여행을 한번 가자고 하면 아버지 눈치 때문에 주저하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신있게 해외여행에 나선 것입니다. 부모님은 시골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계십니다.

저녁에 퇴근해 아내에게 물어봤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어머니께서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 의아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놀라운 일인데."
"이모님들과 함께 중국 여행을 다녀오신데..."

"우리가 함께 해외여행 가지고 할 때는 안간다는 했는데."
"아버님이 이번에 다녀오시라고 했다는 거야."

"정말 의외인데..."
"막내 이모님이 환갑인데 자매들이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이모님 두 분을 포함 셋이서 중국 여행을 다녀오신 것입니다. 중국 여행은 막내 이모님의 아들이 주선을 했습니다. 여행 경비는 저와 동생들이 별도로 부쳐드렸습니다. 가능한 한 비용 걱정없이 다녀오실 수 있도록 형제들이 각각 경비를 넉넉하게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의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한번도 어머니가 여행가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집 떠나면 고생이라며 해외여행에 대해 거부감이 강했습니다. 더욱이 어머니 혼자서 여행가는 것에는 알러지 증상을 일으킬 정도로 완고했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의 불호령에 언제나 여행을 포기하곤 했었습니다. 아버지 혼자서는 밥도 못해 드시기 때문에 어머니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고 여행을 떠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 올해 여름휴가에 시골마을에서 온 가족들이 함께 모여 즐거운 한 때를 보내던 모습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어머니께서 여행을 떠나신다고 싱글벙글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예전의 모습이 아닌 듯 했습니다. 어머니는 집만 나오시면 아버지가 밥은 제대로 드실까, 시골집에서 키우는 개밥은 누가 줄까 늘상 걱정이 태산이셨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전혀 걱정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순순히 여행을 보내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완고하던 아버지께서 변심한 것 같습니다.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 사시는 모습을 지켜봤던 저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절대 해외여행을 가지도 않겠지만 어머니를 홀로 여행보내는 일은 없을 것 같다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칠순을 넘기면서 마음이 여려지신 듯 합니다. 산골 마을에서 젊은 시절부터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고집센 촌부의 대명사였던 아버지였습니다. 

저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그렇게 해외여행을 함께 가자고 했을 때는 아버지 핑계를 대며 거부하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이모님과 함께 해외 여행을 간다고 하니 서운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이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데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가득했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서는 두 분의 여동생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습니다. 언니로서 여동생들이 힘들 때에도 특별한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시절에 대한 회한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가부장적인 가장으로서 어머니를 늘 힘들게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이모님을 만나기 위해 여행 떠나는 것 마저 거절하던 시절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이모님들과 해외여행을 허락한 것은 천지개벽할 정도의 소식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형제들은 어머니께서 이모님들에게 늘 빚을 지고 사시는 듯 하였기에 이모님들과의 중국 여행을 축하해 드렸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님들은 중국 선양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중국 선양에서 사업을 하는 막내 이모의 아들이 현지 가이드가 되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해외여행이 중요하기 보다는 이모님들과 자매 셋이서 함께 있다는 사실자체가 더 행복한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들이 함께 여행한 것도 평생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 산골마을의 계단식 논과 조립식 주택으로 단장한 마을의 전경


중국 여행에서 귀국한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중국 잘 다녀오셨어요?"
"정말 가는 곳 마다 더럽더라."

"중국 가셨는데 좋은 곳 많이 못가셨어요?"
"우리나라가 좋더라. 외국에 가보니 우리나라가 깨끗하고 좋은지 알겠더라."

어머니께서는 빨리 한국에 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모님들과 첫 해외여행이라서 즐겁기도 했겠지만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잠시라도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도 항상 아버지 걱정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완고하고 집안 일도 안하시고 성질도 급하신 분입니다. 어머니는 항상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떨어져 지내시면 아버지 걱정이 태산같습니다.

아버지와 다시 통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없는 동안 식사는 잘 하셨어요?"
"막내가 집에 와서 밥해 줘 잘 지냈다."

그랬습니다. 부모님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 사는 막내 남동생이 시골집까지 출퇴근을 한 것입니다. 막내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데 일부러 아버지를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수씨가 그렇게 하도록 조언을 했을 듯 합니다. 마음씨 착한 막내 동생 내외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해외여행을 허락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가부장적 사고로 표현도 못하시고 자신의 고집만으로 평생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식들이 모두 결혼하고 나서 마음이 조금씩 변했던 모양입니다. 이제는 어머니와 두 분만 남게 되자 서로를 더욱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 가족들이 고추밭에서 이른 고추를 따기 위해 이동하는 장면


게다가 칠순을 넘기시면서 예전과 같은 기백도 조금 약해지신 듯 합니다. 아버지께서 이제는 어머니를 위해 여행도 권유하실 만큼 달라진 모습에 감동을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께서 언제나 기운넘치는 모습을 점차 잃는 듯 하여 아쉬움도 교차합니다. 평생을 유아독존과 같이 고개를 숙이지않고 살아오신 아버지께서 이제는 어머니를 위해 배려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독립영화 '워낭소리'를 보면서 부모님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산골마을에서 평생 살면서도 도시와는 담을 쌓고 지내시던 아버지. 어머니는 늘 불만을 표시하지만 아버지의 고집과 한 마디에 조용히 순종하며 살아오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이모님들과 즐거운 한 때를 허락하셨습니다. 사랑을 표현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연일지 모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저는 다시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아니, 해외여행 안간다고 하시더니 가실 생각을 하셨어요?"
"이제는 가보고 싶더라."

저는 어머니의 한 마디에 다시 한번 반성을 했습니다. 과거 안가신다고 하셔도 계속 어머니와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한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 독립영화 워낭소리는 가족과 고향 그리고 부모님을 생각하게 한다


"어머니, 다음에는 꼭 우리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가자구요."
"그러자구나."

"어머니 칠순이 곧 다가오니 아버지와 함께 가요."
"그래. 아버지가 안가시려고 할 것 같기는 하지만."

"저희가 설득하겠습니다."
"너희들이 그리 해보렴."

어머니께서 이렇게 자신있게 말씀하신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가족들과 여행하자고 하면 뒤로 빼시던 어머니께서 이제는 주저없이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아버지를 믿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옹고집 인생이 변심을 하자 어머니께서 기운이 넘치시는 듯 합니다. 다가오는 어머니 칠순에는 부모님을 비롯 온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도 이제는 손주들을 비롯 함께 여행가는 것에 대해 거부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어머니의 자신감은 이미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행복한 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이제는 서로 사랑과 배려도 표현하면서 사세요.

오늘 당장 사랑한다 말해보세요.

樹 欲 靜 而 風 不 止(수욕정이풍부지)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쳐주지 않고

子 欲 養 而 親 不 待(자욕양이친부대)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네
<論語> 나오는 구절입니다.

돈을 벌면 잘 해드려야지,
성공해서 잘 해드려야지...하면 늦습니다.

부모님은 돈을 많이 번 아들,
크게 성공한 딸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고생하며 노력하는 그대로의 자식을
기다리며 행복해 하십니다.

‘아버님이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이 순간을 어머니가 지켜보셨더라면... "
하는 순간이 오기 전에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십시요.

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것이 언제였나요?
어머니를 안아 드린 것이 언제였나요?

오래전에 우리가 받았던 것을 돌려 드릴 때입니다.
손톱을 깎아 드리고, 발을 씻겨 드리고,
등을 밀어 드리고, 어깨를 주물러 드리세요.
부엌에서 설거지하시는 어머니 등 뒤에서
살짝 안아보세요.

처음은 어색하겠지만, 얼른 용기를 내보세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이
서로의 가슴에 물결 칠 것입니다.

우리는 쑥스러움 때문에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오.

- 고도원의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해드려야 할 45가지 중에서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칠순이 다 되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계십니다. 호랑이같은 아버지와 함께 부부의 연을 맺은 이후 어머니는 청춘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자식들은 대도시에서 결혼해 살고 있고, 막내 남동생이 가까운 도시에서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곤 합니다.

    그러나, 장남인 제가 자주 부모님을 찾아뵙지도 못해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다리 한쪽이 불편하십니다. 어머니가 불편하신 다리로 평생 산골에서 힘든 농사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제게는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불행하게도 예기치 못한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절게 된 사연과 혼자서 저를 키운 새색시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은 까마득한 두메산골입니다. 아직도 온통 산으로 뒤덮인 고향은 비포장도로를 통해 하루에 세 번 버스가 다닐 정도로 산골 오지입니다. 부모님은 산골 외딴집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름 휴가 만큼은 시골 집에 동생들 가족들과 일정을 맞춰서 함께 가곤 합니다.

    어머니는 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으신 분이셨고 아버지는 초등 교육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지난 1960년대는 교육 환경이 매우 열악한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시골 마을에 잠시 머물던 시절에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을 '주먹자랑 하지 말라'고 알려진 벌교에서 지냈던 분으로 엄청난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결혼 후 신혼 시절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는 군대 입영을 기피한 상태였는데 아버지를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에서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헌병대를 피하기 위해 초가집의 흙벽을 무너뜨리고 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 후 아버님을 몇년 동안을 도시에서 숨어지냈습니다. 당시에는 군대에 간 후 사망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군대 기피가 많았다고 합니다.

    갑자기 어머니는 새색시가 생과부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홀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고 땔감을 구해 생활해야 했습니다. 당시 시골집은 초가집이었고 나무 땔감으로 밥을 짓고, 소꼴을 베어 소를 키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전기도 가스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녁엔 방에 호롱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미 임신 중이었습니다. 혼자서도 힘든데 홀몸이 아닌 상태로 논농사 밭농사를 짓고 소까지 키워야 하는 고난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겹게 일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혼자서 열심히 밭 일을 하다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서둘러 밭에서 일을 끝내고 머리에는 소꼴을 가득 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사고가 터졌습니다. 길가에 뻗은 칡넝쿨에 걸려 어머니가 넘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넘어지던 중 머리에 인 소꼴에서 낫이 떨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낫은 어머니 앞에 날이 선 상태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예리한 낫의 날에 닿아버렸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로 어머니는 무릎의 힘줄이 끊기는 대형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사고를 당하고도 치료를 할 병원도 없었습니다. 곁에는 아버지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당시 저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어머니는 무거운 몸이다보니 칡넝쿨에 걸려 균형을 잡지 못한데다 낫을 피하지 못해 다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임신한 상태에서 수술을 하는 것도 몸 속의 아이에게 해가 될까봐 못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그 사고로 인해 한 쪽 다리가 불편한 불구가 되셨습니다. 그러한 몸으로 어머니는 다시 농사를 짓고 혼자서 저를 낳아서 길렀습니다. 지금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갓 결혼 후 남편도 없이 무려 5년을 그렇게 농사도 짓고 저를 키웠던 것입니다. 저는 아가 시절을 마당이나 밭을 기어다니면서 놀았다고 합니다. 마당에서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나 닭과 함께 놀고, 밭에서는 지렁이가 친구였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도 일을 하고 계시고, 밭에 가서도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워낭소리는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저의 유년 시절은 밤낮으로 어머니 밖에는 없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호롱불 밑에서 제게 한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5살 때 처음 어버님이 고향으로 돌아오셨지만 저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신 후에도 집안 일은 하지않고 한량으로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싹텄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마음의 화해가 어느정도 되었고, 아버지도 나이가 들면서 과거와 달리 농사 일이나 집안 일도 했습니다.

    제 나이가 5~6세 정도일 때도 저는 동네 아이들과 산에 올라가 고사리 손으로 나무를 하곤 했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것은 오직 어머니 일을 돕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저의 일을 돕는 역할이었습니다. 청소년기 시절에도 방학 동안 내내 어머니가 하시는 일을 돕는데 땀을 흘리곤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제가 어머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 때부터 어머니 혼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돕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왜 다리 하나가 불편하게 되셨는지 얘기를 처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어머니가 다리를 절면서 걷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불구가 된 것이 모두 제 탓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어머니를 보면, 그 젊은 시절에 임신한 몸으로 어떻게 다리가 잘리는 고통을 참고 이겨냈는지 가슴이 아프곤 합니다. 제가 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늘 변함없이 생각하는 정신적 지주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벼가 익어가는 여름 날, 논둑을 걸으면서 저에게 하신 말씀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단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어머님은 소중한 등불과 같았습니다. 제가 방황하거나 잘못 가려하면 언제
    나 등대처럼 저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다리가 잘리는 듯한 고통을 어떻게 참고 견디셨습니까. 그리고 홀로 저를 어떻게 키우셨나요.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고생만 하셨습니다. 특히 홀로 키웠던 저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 유년시절의 기억 마저 희미하지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힘든 일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자주 연락도 못드려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해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지금은 자식들도 모두 결혼해 잘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어머니의 귀중한 가르침과 사랑 덕분입니다.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은 어머니가 그리워집니다. 언제나 힘을 주시는 어머님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찾아뵙겠습니다. 밤낮으로 기온차가 큰 데 건강 조심하세요.

    언제나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해보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막내 남동생이 지난해 10월 결혼을 했습니다. 그 전에 남동생은 상견례를 하기 위해 결혼할 예비 신부와 함께 서울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상견례 전에도 막내는 시골의 부모님께 여자 친구를 인사시켜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바쁜 일상으로 인해 저는 상견례 이전까지 막내의 여자 친구 이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상견례 자리에서 알았지만 막내가 결혼할 예비 신부의 이름은 "O 복순"이었습니다. 요즘은 복순이란 이름을 짓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상당히 많았습니다. 복순 씨는 이름 때문에 그 동안 학창 시절에 놀림을 받거나 괴로와 했던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개명도 생각했던 모양인데 완고한 아버님으로 인해 거의 포기한 듯 합니다. 막내도 촌스런 이름이라고 소개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복순 씨는 막내 남동생과 결혼했고 우리 집안과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복순 씨는 저에게는 제수씨가 된 셈입니다. 지난 1월 아버님 칠순 행사로 인해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모였는데 막내까지 결혼을 하니 부모님께서는 흐뭇한 모습이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복순 씨의 이름 만큼 가정에 복이 있을 것이라는 해석도 내놓으셨습니다.

    오늘 뉴스를 보면 전국적으로 개명 열풍이라고 합니다. 뉴스에도 복순이 등장해 읽게 되었습니다.
    대법원은 1999년 3만 656건에 불과하던 개명 신청이 지난해 14만 6천 840건으로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2005년 7만여 건에 불과하던 개명 신청자는 2006년 50% 넘게 늘어 10만 명을 돌파했으며, 2007년 12만여 명, 2008년 14만여 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또 80대 이상의 신청자들은 청자, 점순, 복순, 후남, 엽분이 등 흔치 않은 이름들도 있는 반면, 은혜, 미현과 같은 시대와 전혀 동떨어지지 않은 이름들도 있다.    [CBS 뉴스 중 일부 발췌]


    개명에 대해서는 2005년 11월 '범죄은폐 등 남용 의도가 없다면 원칙적으로 개명을 허가해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온 이후 개명 신청은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합니다. 즉, 성명권은 헌법상 행복추구권과 인격권의 내용을 이뤄 자기결정권의 대상이 되는 것이므로 본인의 주관적 의사나 필요성이 존중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 고향 친구들이나 또래들 중에는 요즘 사람들에게 촌스런 이름이라고 평가하는 이름이 많습니다. 순자, 기순, 점순, 점우, 향미, 춘자, 정숙, 창구 등등. 당시는 그러한 이름들이 흔하게 접할 수 있던 시기라고 크게 촌스럽거나 거추장스런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여동생도 이름의 끝자에 'O숙'이 들어가 학창 시절에 많이 고민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자신의 이름에 대해 100% 만족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듯 합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행하는 이름이 있을 정도이니 언제나 만족하는 이름은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상 대대로 족보를 중시하고 돌림자는 사용해야 하는 한자 문화권에서 이름이 주는 의미는 상당합니다. 그래서 돌림자는 가족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가족의 역사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림자로 인해 이름에 불만을 갖게 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때 개명은 상당히 가족에서 진통을 겪게 됩니다.

    이름이 촌스럽거나 특이해서 개명을 고민하는 분들이 많은데 단순히 촌스럽다는 이유 만으로 개명을 서두르는 것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전에 한글 이름 열풍인 적도 있습니다. '박차고 나온 놈이 탐이나' 'O초롱초롱 빛나리" 등이 그 예인데 어릴 때는 귀여운 이름이지만 나이가 들면 유아틱한 이름 때문에 개명을 고심한다고 합니다.

    [MBC '내 이름은 김삼순' 드랍마 장면 중에서]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이름이 촌스럽지만 한편으로 시청자들을 쉽게 흡인해주고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이라는 장점도 많습니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촌스런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절한 금자씨" "맨발의 기봉이" "흡혈형사 나도열" 등등. 정감있고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일 듯 합니다.

    사회적으로 생활하는데 크게 지장이 가지 않는다면 굳이 가족과 부모님이 물려준 이름을 개명까지 하는 것은 심사숙고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름도 어차피 유행이 있고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입니다. 유명인 중에는 특이하거나 촌스럽다고 판단되는 이름이 많습니다.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겠지만 너무 이름에 연연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름에 자신감을 갖고 매진한다면 오히려 이름으로 인해 더 좋은 결실을 맺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복순 씨는 막내 남동생과 결혼해 소중한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들도 이름 만큼이나 복스럽고 친근하고 사랑스런 이름의 복순 씨를 환영합니다. 막내 내외가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합니다. 더 이상 이름에 고민할 필요없이 좋은 이름을 잘 살려 발전하면 금상첨화일 듯 합니다.

    [참고] 사회적인 생활에 큰 불편을 겪어 반드시 개명을 해야만 하는 경우는 다음을 참고하세요.

    개명절차

      ① 개명 허가 신청서 1부
          법원에 비치되어 있으나, 해당 양식에 따라 워드로 작성해도 됩니다.
      ② 호적등본 1부
      ③ 주민등록 등본 1매(발급일 6개월 이내)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주말에 산촌 마을 고향에 다녀왔다. 아버님 칠순을 맞아 온 가족이 함께 한 자리였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두 딸들은 시골에 눈이 내린다는 소식으로 들떠 있었다. 두 딸에게 가장 신나는 일은 시골에서 비닐 비료 포대로 만든 눈썰매를 타는 일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는 일 보다 눈 쌓인 산비탈에서 비닐 눈썰매를 타는 일이 겨울방학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싫지 않은 눈치다. 비록 시골에 오는 손주들의 목표가 당신들을 위해서는 첫번째는 아니더라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시골에 가는 것을 손꼽아 가다리는 손주들이 대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딸은 시골에 가는 일이 언제나 즐겁다. 여름에는 마음껏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물고기를 잡고, 겨울에는 산비탈에서 눈썰매를 신나게 탈 수 있는 천연의 놀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고향집은 산골 외딴 집이다. 그래서 냇가의 물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고, 산과 들은 모두가 우리들 만의 자연 놀이터이다.


    우리 두 딸을 포함해 아이들만 여섯명이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이지만 인공으로 잘 만든 눈썰매장에서 타는 플라스틱 눈썰매 보다는 시골 산비탈에서 타는 비밀포대 눈썰매가 100배 재밌다고 한다. 아이들은 산비탈에서 눈썰매를 타는 것은 스릴이 있단다. 그리고 줄도 서지 않아도 되고 원하는 만큼 실컷 눈썰매를 즐길 수 있어 좋단다. (참고로, 비닐포대 눈썰매는 다 쓴 비료포대 속에다 짚을 가득 넣으면 간단히 만들 수 있다.)

    어른들은 폭설로 인해 어떻게 다시 서울로 돌아가나 걱정이지만 아이들은 계속 눈이 내려 눈썰매를 탈 수 있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갈 수 있는 방학을 기다리는 손주들. 산골 외딴 집이라 컴퓨터도 없고 과자 가게도 없다. 그러나 산골은 도시의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다. 개학하면 두 딸은 자랑할 것이 참 많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제 부모가 된 나와 동생들이 칠순 부모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이다.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