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09.08.21 김대중 친필일기 전문, 위대한 사랑의 역사였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27)
  2. 2009.07.19 여자친구가 맞선본다 했다, 어떡해야 하나? by 진리 탐구 탐진강 (70)
  3. 2009.05.01 대만 갑부의 딸과 결혼한 친구의 비결 '선교'(최종편) : 술집에서 선교사 활동? by 진리 탐구 탐진강 (47)
  4. 2009.04.29 대만 갑부의 딸과 결혼한 친구의 비결 '편지'(1부) by 진리 탐구 탐진강 (48)
  5. 2009.04.13 에스토니아에서 보낸 한국 아가씨의 엽서를 받고나니 by 진리 탐구 탐진강 (12)
  6. 2009.04.12 하늘나라 천국우체국의 감동을 아시나요? by 진리 탐구 탐진강 (10)
  7. 2009.04.01 나를 놀라게 한 샨새교 교주님께 올리는 글 by 진리 탐구 탐진강 (22)
  8. 2009.02.22 20년전 군대 위문편지 보낸 선희에게 by 진리 탐구 탐진강 (17)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에 쓴 친필 일기의 일부가 공개됐습니다. 유족측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식 추모 홈페이지에 일기의 일부를 게재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친필 일기였기에 공개는 바람직한 일입니다. 다만 일부만 공개해 다소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친필 일기는 김 전 대통령이 올해 1월 1일부터 입원하기 1달전인 6월 4일까지 쓴 내용 가운데 일부에 불과합니다. 친필 일기는 하루 하루를 짧게 주요 내용이나 생각을 짧게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일부이기는 했지만 공개된 전문을 읽어보니 위대한 지도자의 인생과 사랑 그리고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을 넘는 이웃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극진한 아내 사랑에 대한 마음 가득했다

친필 일기의 내용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 이웃사랑의 소중함 등 따뜻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특히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며 극진한 아내 사랑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고난의 길에 있어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이희호 여사에 대한 고마움이 배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인생이란 의미있고 가치있게 사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도 밝혔는데 인상깊은 구절이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살지만 고인은 고통받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이웃을 위해 사는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추구한 '위대한 지도자'라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평생 올곧은 민주주의를 위한 '한 길'을 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독재시대에 정권에 의한 감금, 투옥, 가택연금, 암살 기도 등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헤치고 살아 온 인생을 통한 교훈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일기에서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라며 역사와 국민을 위해 평생 한 길을 걸었던 올곧은 삶을 밝혔습니다.


역사상 독재자는 결국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독재자들이 어떻게 탄생하고 심판을 받는지에 대한 생각도 언급했습니다. 그는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전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독재자들은 스스로 독재를 안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독재자로 전락해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정치인들은 새겨들어야 할 말인 듯 합니다.

김대중은 85세에도 인터넷을 하는 네티즌이었다

고인은 85세의 고령에도 인터넷을 하는 네티즌이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외신기자 클럽의 연설과 질의응답은 신문, 방송에서도 잘 보도되고 네티즌들의 반응도 크다. 여러 네티즌들의 '다시 한 번 대통령 해 달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며 네티즌들에 대한 관심을 반영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인터넷 보유국이 된 것은 김대중 대통령 시대에 멀리 혜안을 갖고 미래를 내다 본 결과입니다. 네티즌 글에도 슬퍼하고 국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름답고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이웃 사랑' 위대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손자인 종대에게 자신의 일생을 이야기해주면서 이웃사랑이 믿음과 인생살이의 핵심인 것을 강조했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로서 손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물룬 인생에서 이웃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용산참사를 언급하고 추운 계절에 철거로 쫒겨나는 빈민들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하기도 했습니다. 설날에는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 받은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다.'라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했습니다.

애틋한 노부부의 존경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이희호 여사의 친필 편지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라고 인생과 역사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인생을 달관한 성인의 격언처럼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이외에도, 용공 및 비자금 허위사실을 유포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에 대해 사실 무근임이 대검에서 밝혀졌기 때문에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란 내용도 있었습니다. 평생 용공 조작을 해온 독재정권과 비슷한 짓이 이루어졌나 봅니다. 고인은 그리고 클린턴 부부와의 인연, 그리고 과거 살인적 폭압적인 독재정권 시절의 수많은 고난과 생사를 오가는 시절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금의 3대 위기 ─ 민주주의 위기, 중소서민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언과 노력을 하겠다"를 다짐했지만 그 꿈을 완전히 보지못하고 서거했습니다. 평생동안 올곧게 가져온 민주주의와 중소서민 경제, 그리고 남북평화에 대한 열정을 마지막까지 보여준 셈입니다. 세계인들이 추모하고 애도하는 '위대한 세계적 지도자'의 인간적 모습과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친필일기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큽니다. 우리 모두 한번쯤 읽어보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행동하는 양심'에 대해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민주주의 인권 평화 시대를 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캐리커쳐 (출처 아리툰)


다음은 김 전 대통령의 친필 일기 전문입니다.

2009년 1월 1일
새해를 축하하는 세배객이 많았다. 수백 명. 10시간 동안 세배 받았다. 몹시 피곤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건강관리에 주력해야겠다. '찬미예수 건강백세'를 빌겠다.

2009년 1월 6일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2009년 1월 7일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2009년 1월 11일
오늘은 날씨가 몹시 춥다. 그러나 일기는 화창하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2009년 1월 14일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

2009년 1월 15일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

2009년 1월 16일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2009년 1월 17일
그저께 외신기자 클럽의 연설과 질의응답은 신문, 방송에서도 잘 보도되고 네티즌들의 반응도 크다. 여러 네티즌들의 '다시 한 번 대통령 해 달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

2009년 1월 20일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2009년 1월 26일
오늘은 설날이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귀성길을 오고가고 있다. 날씨가 매우 추워 고생이 크고 사고도 자주 일어날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 받은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다.

2009년 2월 4일
비서관회의 주재. 박지원 실장 보고에 의하면 나에 대해서 허위사실을 공표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서(100억 CD) 대검에서 조사한 결과 나는 아무런 관계없다고 발표. 너무도 긴 세월동안 '용공'이니 '비자금 은닉'이니 한 것, 이번은 법적 심판 받을 것. 그 의원은 아내가 6조 원을 은행에 가지고 있다고도 발표, 이것도 법의 심판 받을 것.

2009년 2월 7일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2009년 2월 17일
명동성당에 안치된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천국영생을 빌었다. 평소 얼굴 모습보다 더 맑은 얼굴 모습이었다. 역시 위대한 성직자의 사후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

2009년 2월 20일
방한 중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출국 중 전용기 안에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전화로 1. 클린턴 대통령의 안부 2. 과거 자기 내외와 같이 있을 때의 좋았던 기억 3. 나의 재임시의 외환위기 수습과 북한 방문시 보여준 리더십 4. 다음 왔을 때는 꼭 직접 만나고 싶다 5. 남편 클린턴 대통령도 나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힐러리 여사가 뜻밖에 전화한 것은 나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한국 정부와 북한 당국에 대한 메시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무튼 클린턴 내외분의 배려와 우정에는 감사할 뿐이다.


2009년 3월 10일
미국의 북한 핵문제 특사인 보스워스 씨가 방한했다가 떠나기 직전 인천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개인적 친분도 있지만 한국 정부에 내가 추진하던 햇볕정책에의 관심의 메시지를 보낸 거라고 외신들은 전한다.

2009년 3월 18일
투석치료. 혈액검사, X레이검사 결과 모두 양호. 신장을 안전하게 치료하는 발명이 나왔으면 좋겠다. 다리 힘이 약해져 조금 먼 거리도 걷기 힘들다. 인류의 역사는 맑스의 이론 같이 경제형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 역사 같다.

1. 봉건시대는 농민은 무식하고 소수의 왕과 귀족 그리고 관료만이 지식을 가지고 국가 운영을 담당했다.

2. 자본주의 시대는 지식과 돈을 겸해서 가진 부르주아지가 패권을 장악하고 절대 다수의 노동자 농민은 피지배층이었다.

3. 산업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자도 교육을 받고 또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노동자와 합류해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4. 21세기 들어 전 국민이 지식을 갖게 되자 직접적으로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08년의 촛불시위가 그 조짐을 말해주고 있다.

2009년 4월 14일
북한이 예상대로 유엔 안보리의 의장성명에 반발해 6자회담 불참, 핵개발 재추진 등 발표. 예상했던 일이다. 6자회담 복구하되 그 사이에 미국과 1 대 1 결판으로 실질적인 합의를 보지 않겠는가 싶다.

2009년 4월 18일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와 인척, 측근들이 줄지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노 대통령도 사법처리 될 모양. 큰 불행이다.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도, 야당을 위해서도, 같은 진보진영 대통령이었던 나를 위해서도, 불행이다. 노 대통령이 잘 대응하기를 바란다.

2009년 4월 24일
14년 만에 고향 방문. 선산에 가서 배례. 하의대리 덕봉서원 방문. 하의 초등학교 방문, 내가 3년간 배우던 곳이다. 어린이들의 활달하고 기쁨에 찬 태도에 감동했다. 여기저기 도는 동안 부슬비가 와서 매우 걱정했으나 무사히 마쳤다. 하의도민의 환영의 열기가 너무도 대단하였다. 행복한 고향방문이었다.

2009년 4월 27일
투석치료. 4시간 누워 있기가 힘들다. 그러나 치료 덕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 크게 감사. 나는 많은 고생도 했지만 여러 가지 남다른 성공도 했다. 나이도 85세. 이 세상 바랄 것이 무엇 있는가. 끝까지 건강 유지하여 지금의 3대 위기 ─ 민주주의 위기, 중소서민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언과 노력을 하겠다. '찬미예수 백세건강'

2009년 5월 1일
이제 아름다운 꽃의 계절이자 훈풍의 계절이 왔다.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마당의 진달래와 연대 뒷동산의 진달래가 이미 졌다. 지금 우리 마당에는 영산홍과 철쭉꽃이 보기 좋게 피어 있다.

2009년 5월 2일
종일 집에서 독서, TV, 아내와의 대화로 소일. 조용하고 기분 좋은 5월의 초여름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아내와 좋은 사이라는 것이 행복이고 건강도 괜찮은 편인 것이 행복이다. 생활에 특별한 고통이 없는 것이 옛날 청장년 때의 빈궁시대에 비하면 행복하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다.

2009년 5월 18일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내한한 길에 나를 초청하여 만찬을 같이 했다. 언제나 다정한 친구다. 대북정책 등에 대해서 논의하고 나의 메모를 주었다. 힐러리 국무장관에 보낼 문서도 포함했다. 우리의 대화는 진지하고 유쾌했다.

2009년 5월 20일
걷기가 다시 힘들다. 집안에서조차 휠체어를 탈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좋은 아내가 건강하게 옆에 있다. 나를 도와주는 비서들이 성심성의 애쓰고 있다. 85세의 나이지만 세계가 잊지 않고 초청하고 찾아온다. 감사하고 보람 있는 생애다.

2009년 5월 22일
버마 혁명민주지도자 등 수 명이 내방. 민주화에 대해서, 나는 "버마는 외국의 지지는 충분히 얻고 있으니 이를 활용해서 안에서 국민이 자력으로 쟁취하도록 노력하시오"라고 격려했다.

2009년 5월 23일
자고 나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보도. 슬프고 충격적이다.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노 대통령,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사기밀 발표가 금지된 법을 어기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

2009년 5월 24일
노 대통령 장례식을 정부와 측근들은 국민장을 주장하는데 가족은 가족장을 주장해 결말을 못 보았다. 박지원의원 시켜서 '노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살았고 국민은 그를 사랑해 대통령까지 시켰다. 그러니 국민이 바라는 대로 국민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했는데 측근들이 이 논리로 가족을 설득했다 한다.

2009년 5월 25일
북의 2차 핵실험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태도도 아쉽다. 북의 기대와 달리 대북정책 발표를 질질 끌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주력하고 이란, 시리아, 러시아, 쿠바까지 관계개선 의사를 표시하면서 북한만 제외시켰다. 이러한 미숙함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서 핵실험을 강행하게 한 것 같다.

2009년 5월 29일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2009년 5월 30일
손자 종대에게 나의 일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이웃사랑이 믿음과 인생살이의 핵심인 것을 강조했다.

2009년 6월 2일
71년 국회의원 선거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남자와 여자의 연애나 결혼에 있어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친구의 약 20년전 이야기입니다. A군은 군복무를 제대한 후 대학 3학년에 복학해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날, 추적추적 비가 내렸습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A군은 머리를 식히고 싶었습니다. 잡자기 어디론가 혼자서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서울역으로 가서 야간 기차를 탔습니다. 좌석은 매진되어 입석표였습니다. 빈좌석에 무작정 앉았습니다. 기차 창밖으로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A군이 앉아있던 좌석의 곁을 한 여자가 잠시 주춤하다가 지나갔습니다. A군은 좌석의 주인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가슴이 조마조마 했습니다.

당돌한 직장 여자와 대학 복학생, 기차에서 만나다

조금 후 지나갔던 한 여자가 다시 되돌아 왔습니다. 창밖을 보고있던 A군에게 여자가 말했습니다.
"여기 자리 있어요?"  
"모...르겠는데요."

A군은 앉았던 자리 옆의 책가방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놨습니다. 자리에 앉은 여자가 말을 걸었습니다.
"몇학년?"
"삼~ 삼학년"

"몇학번?
"팔육 학번"

"나랑 같은 학번이네. 난 B양이야. 우리 친구하자. 넌 이름이 뭐니?"

당돌한 B양이었습니다. A군은 B양이 당돌하고 신기했습니다. 처음에 무뚝뚝하던 A군은 B양의 나긋나긋한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A군과 B군의 만남이 시작됐습니다. 둘 다 기차 입석표를 샀는데 좌석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A군과 B양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B양은 기차가 대전역 부근에 도착하자 우표 5개를 핸드백에서 꺼냈습니다.
"난 여기서 이제 내려야 해. 넌 의무적으로 나에게 우표 5개 만큼 편지를 해야 해."
"알았어. 잘 가"



서울의 A군과 대전의 B양은 그 후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A군은 학보가 나오면 편지를 함께 넣어 보냈습니다. B양은 자주 편지를 학교로 보냈습니다. 직장인이었던 B양은 주말에는 A군이 공부하던 대학 도서관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B양은 식사를 사주고 다시 대전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A군의 B양의 호의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가난한 자신이 B양에게 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A군은 4학년이 되었습니다. B양은 서울에 올 때 마다 A군이 공부하던 도서관에 나타났습니다. B양은 A군에게 늘 용기를 주는 말을 했습니다. A군은 B양의 마음이 고맙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취업 시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A군이 노리던 정부투자기관 입사에 실패했습니다. A군은 입사를 하면 B양을 위해 뭔가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A군은 취업에 실패하고 다른 기관에 도전해야 했습니다. A군은 B양에게 미안했습니다. B양은 A군에게 실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A군은 대학 졸업 후에도 백수였습니다. 경쟁이 치열하던 정부투자기관 시험에 낙방 후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에 실시된 시험을 봤습니다. 시험이 끝나자 B양이 대전에 잠시 와달라고 했습니다. B양은 직장을 그만 두고 유치원을 개업하기로 했는데 개업 준비를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던 A군은 B양의 유치원 개업 준비를 돕기로 했습니다.

가난한 대학생과 부잣집 딸의 슬픈 이야기의 결말은?

그런데 유치원 개업 준비를 돕기 위해 A군이 가보니 B양과 그녀의 남동생 그리고 친척 동생들이 와 있었습니다. A군은 쑥스러웠지만 열심히 일을 거들었습니다. 저녁에는 B양의 남동생과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B양과 저녁에 데이트를 했습니다. B양은 말을 꺼냈습니다.
"나 내일 선본다."
"그래."

B양이 선본다는 말에 A군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아직 백수인지라 B양을 위해 뭐라 해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B양은 부잣집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B양과 남동생에게 별도로 아파트를 얻어주었습니다. 그 날 밤 A군은 B양의 남동생의 방에서 함께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A군은 대전역으로 갔습니다. A군이 떠나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역 앞에서 B양은 다시 말했습니다.
"여기 근처에서 선보기로 되어 있어."
"그렇구나. 좋은 사람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A군과 B양은 역에서 헤어졌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A군은 자신의 초라한 처지가 슬펐습니다. 그래서 B양의 맞선을 단념시키지도 못했습니다. A군은 서울에 올라 와 모 대기업 입사시험을 봤습니다. 대기업은 가기싫었지만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그 후 대기업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녀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려고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A군에게 우편물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그 우편물은 B양의 결혼식 청첩장이었습니다. A군은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B양은 그 당시 선본 남자와 결혼식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B양이 선본다고 했을때 붙잡지 못한 자신이 후회되었습니다. 아직 백수인 자신의 입장에서 B양에게는 불행할 수도 있어 B양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취직하면 B양을 다시 만날 것이라 다짐했었던 것입니다.

A군은 곧바로 대기업 신입사원 교육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입사원 연수 마지막 날이 B양의 결혼식 날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결혼식 장소가 수원이었습니다. A군의 신입사원 연수원에서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A군은 퇴소식 날 고민했습니다. A군의 연수원 버스는 수원역에 내려주었습니다. B양의 결혼식을 곧 앞두고 있었습니다. A군은 결국 B양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운명은 그렇게 A군과 B양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A군과 B양은 왜 결혼할 수 없었을까?
남자는 직장을 먼저 구해 여자친구를 위해 무엇인가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선보다는 것이 단지 미팅 정도로만 다소 가볍게 잘못 생각했습니다.
여자는 맞선본다는 고백이 자신에게 프로포즈를 해달라는 마지막 요청이었을 수 있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남자는 자존심 상 초라한 자신을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맞선본다고 했을 때 붙잡았어야 했지만 남자는 여자의 행복을 위해 그러지 못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일구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자존심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적극적이고 당돌한 모습에 다소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여자는 한 남자와의 결혼이 사랑이 먼저일 것이지만 결국 현실 앞에 나약해질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바라보는 맞선의 차이는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의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친구 K가 대만 갑부의 외동딸을 만나서 소설같은 사랑을 하게 된 사연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첫번째 이야기가 나간 이후 매일 많은 분들이 다음 편을 기대해 주셨습니다. 이번 최종편은 브라질에서 대만을 거쳐 한국까지 오게 된 이야기입니다. 1부와 2부를 못보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대만 갑부의 딸과 결혼한 친구의 비결 '편지'(1부)
대만 갑부의 딸과 결혼한 친구의 비결 '골라'(2부) : 성당에서 둘 만의 결혼식

대만행 비행기를 탄 K와 S는 꼭 축복받은 결혼을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대만에서  재력가인 S의 아버지는 외동딸이 사랑을 택해 브라질로 몰래 떠나버린 후 상심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분노 보다는 자신이 반대하는 한국 남자 K를 위해 몰래 야반도주하듯이 브라질로 도망쳐버린 딸에 대한 배신감이 컸습니다.
 
K와 S는 초조한 마음으로 대만에 도착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장인어른과의 만남은 K에게 배수의 진을 친 심정이었습니다. 드디어 K는 S의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K는 무릎을 끓고 S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 누구 보다도 따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

S의 아버지는 이미 엎지러진 물이 되어버린 딸의 사랑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두 사람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K는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다시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따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S의 아버지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브라질서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나?"
"옷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자네가 브라질에서 옷장사로 최고가 된 후 다시 나를 찾아오게. 그러면 인정해 주겠네."
"예,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K는 장인어른의 제안에 한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자신도 있었습니다. S의 아버지는 자수성가로 갑부가 된 분이었습니다. 순순히 K를 인정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지만 S가 고생을 통해 뭔가 깨닫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K와 S는 대만을 떠나 다시 브라질로 돌아왔습니다. K는 대만으로 떠날 때 보다 더 비장한 마음으로 브라질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K는 브라질로 돌아오자 마자 더 열심히 "골라 골라"를 외치며 장사에 몰두했습니다. 잠자는 시간 마저 줄여가면서 옷장사에 올인했습니다. 점점 K의 옷가게는 번창해 갔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한인 사회에서도 K의 옷장사로의 성공이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한인들 중에 옷장사를 하는 분들이 꽤 있었는데 K로부터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몰려오기도 했습니다. K는 마음이 넉넉한 친구라서 브라질의 한인들에게 비법 전수는 물론 한인들의 여러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를 못했습니다.

브라질에서 K의 옷장사는 성공적인 사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K의 "골라 골라" 다국어 메들리는 성공의 보증수표와 같았습니다. K는 사업이 번창해 갈수록 조금만 더 고생하면 S의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S도 사업의 번창에 따라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일요일에는 둘 만의 결혼식을 거행한 신부님의 성당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영화 'Love Story' 한 장면]

그러나, 불행은 예기치 않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잘 나가던 K의 의류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한 순간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K와 S가 그토록 희망을 꿈꾸던 의류 사업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습니다. K가 너무 한인들을 믿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K의 옷장사가 성공을 거두자 K에게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접근한 한인들이 사기를 친 것이었습니다. K는 한인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자금들을 쉽게 빌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 한인들이 돈을 빌려간 후 만기가 되어도 갚지않고 도피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K의 의류 사업은 한꺼번에 밀려오는 자금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도가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K와 S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한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대만에 갈 수가 없게 되거나, 다시 처음부터 사업을 일으키려면 수많은 세월이 필요할 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좌절과 포기를 모르던 K도 자신감을 잃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패배감일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희망이 사라진 S는 더 힘든 나날들이었습니다.

K와 S는 늘 믿음과 용기를 주던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신부님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K와 S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잠시나마 K와 S는 신부님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용기를 얻어 성당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 전화가 왔습니다. S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만에 계신 S의 아버지였습니다.
"요즘 몸은 건강하니?"
"네. 아버지."

"왜 목소리가 힘이 없니?"
"아니예요. 아버지가 웬 일로 전화를 주셨어요?"

"사랑하는 내 딸아. 힘들면 힘들다고 왜 말을 못하니?"
"......"
S는 눈물이 날 것 같아 도저히 전화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Love Story / Taylor Swift]

"K를 바꿔주라. 딸아."
"네, 접니다. 어르신."

"브라질 생활 정리하고 대만으로 돌아오게."
"네. 아닙니다."

"자네의 브라질 생활을 다 알고 있다네. 의류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도 알고 있고 사업이 부도난 것도 다 알아."
"네. 어떻게..."

"브라질서 사업하는 지인들로부터 소식을 수시로 듣고 있었어. 자네의 사업 수완과 성공을 이미 듣고 있었어. 자네가 최근에 사업이 부도난 것은 자네의 잘못은 아니잖아. 너무 사람 믿지 말게. 그만 내 딸과 함께 대만으로 돌아오게. 자네가 이겼네."
"장인어른...."

K와 S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K와 S는 브라질 생활을 접고 대만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K는 다시 재기해 성공한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장인어른은 두 사람의 사랑과 결혼을 인정한 상태이니 고집을 피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S가  브라질 생활을 힘들어하고 대만의 고향 생각을 많이 해 더 이상 브라질에 머물기는 힘든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S의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두 사람의 브라질 생활을 거의 다 알고 있었습니다. S의 아버지는 브라질의 지인들을 통해 사랑하는 딸이 잘 지내는지 늘 궁금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K의 사람 됨됨이와 사업 수완을 멀리서 지켜봤던 대만의 장인어른은 K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갑작스런 부도로 인해 S가 상심하고 괴로와 하는 모습을 더 이상 못본체 할 수 없었습니다.

대만에 도착한 K와 S는 거기서 새로운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장인어른의 사업에 참여하기 보다는 선교사의 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장인어른도 같은 종교라서 적극 후원했습니다. S의 아버지는 당분간 두 사람이 홀가분하게 그 동안의 고생을 잊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기도 했습니다. K는 대만의 오지를 돌며 선교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K와 S가 심적으로 안정을 찾고 행복한 시간을 다시 보내게 된 셈이었습니다.

몇년의 세월이 지난 후, K는 한국과의 무역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부산과 대만을 오가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부산에 머무르는 기간도 많았습니다. 무역사업도 했지만 주말을 이용해 K는 선교사 일도 병행했습니다. K는 무엇이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친구였습니다. 한국 남자 K와 대만 갑부의 딸 S는 브라질서 시작해 대만을 거쳐 한국에 이르는 사랑과 행복을 함께 했던 것입니다.


[영화 'Love Story' 한 장면]

저는 K가 몇년전 한국에 도착했을 때 대학 1학년때 친구들과 함께 캠퍼스 앞의 주점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K가 대학을 중퇴하고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지 15년여가 지난 후 처음이었습니다. 그와 밤새도록 그 동안의 해외에서의 삶과 S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생활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K는 술을 한잔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학 때 주당이던 K가 아니었습니다. 선교활동하면서 술은 완전히 끊었다는 것입니다. K에게 물었습니다.
"야. 그런데 너 어디서 선교를 하냐?"
"주로 술집에서..."


"장난하냐? 술집에서 선교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나는 남들이 다 하는 곳 보다는 비록 힘들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한단다."

"그런데 술을 한잔도 하지 않고 어떻게 선교가 가능하냐?"
"지금까지 한 잔도 안했잖아. 물 한잔으로 이렇게 있잖아."

저와 친구들은 도저히 K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밤새도록 대학교 앞으로 주점을 돌며 K를 시험했습니다. 새벽 5시가 되었건만 K는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술 한잔도 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물이나 콜라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친구들이 이미 지치고 졸려서 몸을 가눌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K가 한마디 했습니다.

"이래도 못믿겠냐?"
"K야. 우리들이 졌다. 이제 집에 가자."

친구 K의 러브스토리 3부작 최종편은 여기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어떤 분은 요즘같은 현실에 어찌 K와 S의 순수한 사랑이 가능한지 놀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K와 S의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표현상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K는 정말 지독한 녀석입니다. 다시 만나면 부산 도착 후 선교 이야기를 들어봐야 겠습니다. 많은 관심을 갖고 K와 S의 국경과 신분을 뛰어넘는 러브스토리를 읽어주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5월의 연휴를 보내세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얼마 전에 대학 동창 모임이 있었습니다. 졸업 후 20여년만의 모임이라 친구들의 근황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미 중년의 나이에 모이니 친구들에 대한 소식이 그리움으로 다가섰습니다.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사는 친구나 기사 딸린 고급차를 타고다니는 사모님이 된 동창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 날의 단연 최고 이야기는 대만 갑부의 외동딸과 결혼한 친구의 사연이었습니다.

부산에 살고 있어 그 날 참석은 못했지만 동창 K의 결혼 스토리는 압권입니다. K의 사연은 약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K는 고향이 부산입니다. 부산에서 상경해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게 됐습니다. K는 모든 모임을 주도하는 연예인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습니다. K가 대학MT나 모임에서 선보인 노래는 그 날 이후 공식 지정곡이 될 정도였습니다.

K의 대표적인 레파토리는 CM송 메들리였습니다.
"12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둘이서 만나요~ 부라보콘~ 살자쿵 데이트~ 해~태 부라보콘~~ 생감자로 만든 포테이토칩~~~ 농~심~ 크레오파트라~~~ 드세요~ 농~심~ 크레오파트라~   " 1980년대를 풍미하던 CM송의 일부를 메들리로 계속 이어지게 만든 곡들입니다. 80년대의 대학가는 군사독재 타도의 분노가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도 낭만이 있었습니다. 비록 소주 한잔의 추억 속에서 노래를 부르더라도 장엄한 서사시의 투쟁가가 있었고 한편으론 낭만의 곡들이 있었습니다. CM송 메들리는 그 중간의 흥겨운 화합의 노래였습니다. 

CM송 풀 메들리 80년대  사례

온 세상에 울리는 말고 고운 소리 영창피아노~

맑은 소리 고운 소리 영창피아노 영-창

열두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둘이서 만나요

부라보콘 살짝쿵 데이트
부라보콘------살ㅡ짝-쿵 데이트

해태 부라보 콘

손이가요 손이가 새우깡에 손이 가요

어른손 아이손 자꾸만 손이가

언제든지 새우깡 어디서나 맛있게

누구든지 즐겨요 노옹심! 새우깡!!

비비 비벼보자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ㅡㅡ (두손으로 비벼도 되잖아!)

ㅡ팔도 비빔면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그리 예쁜가요

----------------아아아아아아아 아카시아 껌
아아아 아아아아----------------아카시아 껌

생감자로 만든 포테이토 칩 (포테이토 칩)
생감자로 만든 포테이토 칩

---------------아아아아아-----------농심농심
농심 크레오파트라---------드세요 농심-------

크레오파트라

쵸코가 외로워 쿠키를 찾네 쵸코친구 쿠키친구

쿠키가 외로워 쵸코를 만나네 오리온 쵸코칩쿠키

오리온 쵸코칩쿠키 쿠키 이이!!!

이상하게 생겼네 롯데 스크류바

삐익삐익 꼬였네 들쑥날쑥해

사과맛 딸기맛 롯데 스크류바

쥬시후레쉬 후레쉬민트 스피아민트

오 롯데껌 좋은 사람만나면 나눠주고 싶어요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손에 담아 드려요 오란씨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

오오오오 오 오 오 오란씨

으쌰으쌰 어기여차 재미로 먹고 맛으로 먹는

오리온 고래밥 오리온 고래밥

오리온 고래고래고래고래 밥! 헤이!!

대학 1학년을 끝마치고 어느 날, K가 대학을 중퇴하고 해외로 떠났습니다. 독재의 그늘을 벗어나 해외로 망명한 듯한 히피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이어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마련해 떠난 도피 자금으로 다른 나라에서 물건을 팔아서 돈을 모아 다른 국가를 방랑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국가의 언어를 배웠습니다. 해외 여행을 꿈꾸기 어려웠던 그 당시에는 매우 희귀한 변신의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K는 미국을 떠나 다시 브라질로 갔습니다. 그는 낮에는 중국집에서 일하고 밤에는 중국어학원에서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그러다 K는 중국어학원에서 그녀(이하 S)를 만났습니다. S는 미국에 유학 중인 대만 출신 여대생이었습니다. S가 방학 기간 동안에 브라질에 여행을 왔다가 잠시 중국어학원의 임시 강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K는 첫 눈에 S에 반했습니다.


[사진] 영화 '러브스토리' (1996년작, 배창호 감독)

K의 중국어는 이제 걸음마 단계였습니다. S에게 뭔가 중국어로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럴 만한 실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날 부터 K는 중국어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편지를 쓰는 일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밤새도록 중국어로 편지를 썼습니다. 한 숨도 안자고 정성을 다해 한 통의 편지를 쓰고나면 이미 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동이 트면 K는 자건거를 타고 S가 머물고 있던 숙소를 향해 달렸습니다. S의 숙소에 편지를 넣어두고 다시 중국집으로 가서 일을 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중국어학원에서 S로부터 중국어 수업을 받았습니다. S는 편지를 받았지만 모른체 눈길도 주지않고 수업만 했습니다. K는 다음 날도 편지를 썼고 새벽이 되면 S의 숙소에 편지를 놓아두고 왔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K의 편지에 S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게다가 새벽 마다 자신의 숙소에 편지를 놓고 도망가듯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K를 본 S는 '한번 만나 주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한국 남자 K와 대만 여자 S의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둘은 만나는 동안,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눈빛으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만남이 지속되면서 S가 오히려 더 K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S는 사랑하는 K를 위해 브라질에 아예 머물러 버렸습니다. 그러다, S는 비자가 만료되어 브라질을 떠나야 했습니다. 브라질의 공항에서 둘은 약속했습니다.
"다시 돌아 올게. 조금만 기다려."
"언제까지나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렇게 둘은 뜨거운 포옹과 함께 브라질 공항에서 이별을 했습니다.

[참고] K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K와 S의 러브스토리는 조금 길기 때문에 여기서 1부는 마치겠습니다. 다음 2부를 기대해 보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K와 S의 러브스토리는 K를 몇년전 만나서 밤새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탐진강 블로그를 구독하시려면 옆의 RSS 추가버튼을 이용해 주세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잠시 밖에 나갔다가 오니 회사의 책상 위에 깨알같이 쓴 엽서 한 장이 놓여있었습니다. 대학 졸업 이후에는 거의 처음 받는 엽서였습니다. 게다가, 한국도 아닌 북유럽의 발틱 국가 중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이라는 도시에서 보낸 엽서였습니다.

깨알처럼 작은 글씨의 엽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엽서를 보낸 주인공은 한국 아가씨였습니다. 현재 혼자서 1년간 유럽의 문화예술 공연만을 전문적으로 탐험하고 있는 문화공연전문가 유모씨였습니다. 이미 유씨는 결혼자금을 몽땅 털어서 세계 각국의 문화공연만을 대상으로 1년간 세계일주를 한 바 있는 '당찬' 한국 여성입니다.

세계최초로 1년간 각국 문화공연 일주를 완주한 한국 여성

아마도 문화공연 만으로 1년간 세계일주를 성공한 여성은 유씨가 세계 처음일 것입니다. 물론 이미 결혼은 멀리 미룬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꿈인 세계적인 문화공연 기획 전문가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미혼의 젊은 아가씨가 혼자서 전세계 각국을 여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씨는 세계 문화공연 일주를 다녀온지 1년만에 다시 1년간 유럽 문화공연 탐험을 다시 떠난 것이었습니다.

▲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온 엽서 앞면의 '아름다운 도시 탈린' 모습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더불어 구 소련에서 가장 먼저 독립한 3개국 중 하나입니다. 최근 유럽연합(EU)에 가입해 곧 화폐를 유로화로 도입할 예정이지만 아직은 기존 화폐인 에스토니안 크로네를 사용하며 물가 역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 비해 저렴한 편이라고 합니다.

탈린의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중세의 느낌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도시로 40만명이 살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성문 아래로 다니고 성벽 아래는 시장이 있고, 광장에는 기념품과 특산품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장사를 한다고 합니다.

엽서의 뒷면은 작은 글씨의 편지 내용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가씨 혼자서 외롭게 이국 땅을 여행 중이어서 그런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사진 속 풍경 만큼 탈린이라는 도시가 그다지 아름다운 모습은 아닌 듯 합니다. 에스토니아는 지금도 눈이 오고 도시 전체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고 합니다.

장갑도 없이 여행하느라 힘든 것 같은데,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면서 엽서를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엽서는 저에게만 보낸 것은 아니고 한국에 있는 여러 지인들에게 한꺼번에 보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엽서를 받으니, 정이 없는 이메일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 사는 세상의 느낌이 들었습니다. 멀리 에스토니아에서 바다를 건너 온 엽서 내용의 일부를 소개해 봅니다.


"놀라셨죠? 깜짝 놀래켜 주려고, 미리 말도 안하고 보내는 거지요.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계시죠?
---(중략)---
지금 여기는 발틱 국가 중 가장 윗쪽에 있는 에스토니아 탈린이라는 도시예요. 사진 속 풍경 멋있죠? 사진 속 풍경 멋있죠? 사기야, 사기! ㅋㅋ

지금 4월 1일인데도 눈이 오고, 온 도시가 꽁꽁 얼어붙었다니까요. 벨기에에서 장갑까지 다 버렸는데 손시려!ㅠㅠ"

---(중략)---

낯선 땅에서 숙식도 불편하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국 땅에서 홀로 여행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거기다가 선진국에 비해 여행객을 위한 시설이 낙후되어 있는 국가에서는 교통도 불편하고 날씨도 추워서 무척 힘들 것 같습니다. 이미 1차 세계일주 당시에도 여행 도중에 배낭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등 숱한 고난과 도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끝내 역경을 극복하고 1년간 문화공연 탐험을 끝마치고 돌아와 쓴 책이 '카니발로드'라는 책입니다. 그런 유씨가 다시 유럽 일주를 떠난지 3개월 정도 지났지만 앞으로 남은 9개월여를 무사히 끝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수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를 기대해 봅니다.
 

정이 없는 이메일 대신 가끔 편지나 엽서를 주고받는 행복

한국은 이제 라일락꽃이 활짝 피어 향기가 싱그러운 계절입니다. 멀리 외국에서 보낸 엽서에는 라일락 꽃향기 처럼 느껴지는 설레임이 있습니다. 사월은 라일락꽃과 자목련의 그늘 아래서 시(詩)를 노래하는 계절입니다. 옛날 대학 시절 학보 속에 주고받던 편지의 그리움이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손으로 쓴 편지 대신에 이메일을 주고받는 문명의 이기가 자리잡았습니다. 직접 손으로 깨알같이 쓴 정성이 담긴 엽서를 받고나니, 우리네 인생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 너무 인스턴트 식품처럼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쉽고 편리한 이메일도 좋지만, 가끔은 우리 주변의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이웃들과 따뜻하고 훈훈한 편지나 엽서를 주고 받는 것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추억이 될 듯 합니다. 아름다운 꽃들과 싱그러운 초목들이 햇살을 머금은 사월과 오월에는 직접 손으로 쓴 편지나 엽서를 주고받는 행복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돌아가신 장인 어른의 기일을 앞두고 충북 제천에 있는 납골당에 다녀왔습니다. 장모님과 아이들을 비롯한 가족들이 모두 함께 3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오전 이른 시간에 출발을 했습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초여름 날씨이고 고속도로가 봄꽃 구경 행락객들로 인해 교통체증이 심해 다소 힘든 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처럼 납골당에 모셔진 어르신을 뵈러 가는 길이라서 그런지 아이들도 힘들지만 잘 참아주었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이전에 장인 어른은 이미 돌아가신 터라 생전의 모습을 뵌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결혼 후 장모님을 비롯한 가족들과 벌초하러 가면 낫질에 일가견이 있던 저는 열심히 묘지의 잡초와 잡목들을 제거하곤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장모님은 당신의 남편을 위해 뻘뻘 땀흘리면서 쉴새없이 낫질을 하는 사위가 듬직하게 느꼈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지난해 장인어른의 묘소가 재개발 지역이 되면서 지금의 납골당으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신지 벌써 15년이 넘었습니다.

장모님의 상념과 눈가에 비친 이슬 방울

지난해 당시는 바쁜 업무로 인해 찾아뵙지 못했기에, 올해는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납골당을 찾게 된 것입니다. 장모님은 장인 어른이 돌아가신지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장인 어른을 찾게 되면 여전히 깊은 상념이 드시나 봅니다. 아이들과 사위들도 있어 눈물을 보이지 않으시려 애쓰시지만 어느새 장모님은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가족들이 함께 납골당에 모셔신 장인 어른의 자리에 꽃장식도 새로 하고,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보내실 수 있도록 가족 예배도 드렸습니다.


가족들과 일정을 끝마치고 납골당을 나오다가 특별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천국우체국 우체통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하늘나라로 보내는 글을 쓸 수 있는 공책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이 세상에는 없지만 그리운 하늘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천국우체국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천국우체국으로 가는 우편함 앞에서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결혼하면 장인어른과 술 한잔 기울이는 것을 꿈꾸었는데 비록 함께 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아내와 딸이 사위와 함께 잘 살고 있으니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지켜보시라'고 마음을 전했습니다. 천국우체국 우체통 옆의 벽에는 꽃잎편지라는 시 구절이 붙어 있었습니다.


사실 납골당에 오기 전 까지는 천국우체국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일반에도 천국우체국과 같은 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살펴보니, 전국의 주요 납골당에는 천국우체국과 같은 곳을 마련하고 있고 사이버 공간에도 서울시의 추모의집을 비롯한 여러 하늘나라우체국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사람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그리움과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배달되지 않는 하늘나라우체국의 편지이겠지만 그 간절한 마음은 하늘로 닿아 통하지 않을까 기원해 봅니다.

가슴 뭉클한 사연과 애절한 그리움

잠시 둘러 본 하늘나라우체국에는 가슴을 저미는 그리움을 담은 여러 사연들이 가슴뭉클하고 눈시울을 젖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일찍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어머니는 거의 매일 딸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고 너무나 애틋하고 애절한 사연이라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찡하게 했습니다. 
보고싶은 딸아

잘 지내지.
어저께 까지 쌀쌀하더니만 오늘은 덥다는 생각이 든다.
온도차가 심한 요즘 건강한지.
너무 보고싶어 견딜수가 없어.
일하다가도 문득문들 네 생각에 눈물이 난다.
건강해야 돼. 그렇게 힘들어 했으니 하늘나라에서는 건강하게 하고싶은 일 하면서 마음껏 보내.

이별이란게 세월이 흘러도 이렇게 가슴아플까.
점더 잘해줄걸.많이 사랑해줄걸.이별후에야 후회하는 바보같은 엄마였구나.
먹고싶은것 실컷 사 주지도 못했고 갖고 싶은것 다 해주지도 못헀는데
이렇게 쉽게 이별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너무나 긴 병원생활에 한없이 지쳐서 힘들어하던 너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눈물이 흐른다.

그래도 꿋꿋하게 잘 참아내던 우리 딸이었는데 엄마가 잘 지켜줘야 했는데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다음에 만나면 못해준 사랑 듬뿍 주련다.
엄마 용서해. 그리고 웃는모습 꿈속에서라도 보고싶어.
딸~아 딸~아 사랑해.

먼저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남편이 띄운 담담한 사연은 얼마나 두 부부의 사랑이 아름답고 깊은지 느껴지는 가슴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아내에게

어느덧 4월하고도 중순이 다가오네.
잘 지내고 있지..오랜만에 오네..
시간이 이리도 잘 가는지..잡고만 싶어...
당신이 나를 잘 이해해 주고 ..
너무 고마워 ..나만 그리 생각하는 거 아니지...
알지..난 항상 ..아니. 영원히 두 딸만 바라보며 살 거라는 거..

이래야 내가 굳게 맘을 먹을거 같아..핑계라도 좋아..
아니 절대 핑계가 아니라는거 알아줬으면 해..
실수하지 않는 실수를 그래도 맘 단단히 먹고 ..
잘지켜가며 살께.. 미안한 맘은 평생 간직하고 살께..
미안함을 더 이상 안하게끔 할께..

울 딸들 잘키울께...중3이 된 큰 애도 ..열심히 하는거같아..
막내역시도..한차례 혼나고 아빠맘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너무 불쌍하지만 ..강하게 키우려면 ..어쩔수없잔아..
이제 5년생인대..자신이 알아서 ..해야지..물론..뒷바침은 잘 할께..

처형네나 처제..처가집 아버님 어머님..처남..
요즘은 통 연락을 못하고 사네..
내가 먼저 해야지...아무래도 ..
당신보내고...우리랑 연락 자주하면 많이 생각날까 ..그런 걱정도 들어..
서로 그런것 같아..하지만..알잖아..당신과약속..
평생 아버님 어머님으로 모시며..살 거라고...가까이..많이 만나지는 못하지만..

서울 하늘 아래 사는 동안.. 그렇게 살거야...
항상 우리가족들...잘 될 수 있게...도와줘...
아버님 한테도 가봐야하는데.. 나같은 아들도 없을 거야...죄송할 뿐이야..
당신한테도 담주에 갈께...
잘 지내고...
또 올께..

사랑해...나 죽는 그 날까지..
당신밖에 없다...
잘자....미안하구.

하늘나라에 있는 그리운 사람에게 보내는 여러 편지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한 사연들을 읽다보면, 우리가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진지하고 숙연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 하나의 사연들이 감동으로 밀려와 눈물이 자꾸 흐를 듯 하여 애써 참았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 일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행복과 사랑의 우리 인생



장모님이 납골당에서 하신 말씀이 뇌리에 남아 맴돌곤 합니다. 자식들이 미리 준비한 장인 어른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젊은 사진을 준비했어? 그러면 나는 늙어보이잖아." 장모님은 첫 사랑과 결혼하신 후 시집살이도 심하게 하셨고 일찍 장인 어른을 떠나보내시고 홀로 자식들을 키우시면서 고생하신 것을 생각하면 당신의 남편에 대한 원망도 있을 법한데, 장인 어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히 그 당시 젊은 시절의 마음 그대로 남아계신 것 같았습니다.
 
하늘나라로 보내는 애절한 사연을 담은 천국우체국을 보면서 느낀 점이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인생일지도 모릅니다. 영원한 이별과 그리움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애절한지 모릅니다. 서로 미워하고 노여워하고 살기 보다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하루 하루를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복과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인생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서로 사랑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4월 1일 0시 30분. 낯선 여인의 쪽지를 받았습니다. 티스토리를 하면서 처음으로 받은 쪽지인지라 약간 당황했습니다. 이것은 스팸일지도 모르니 닫아 버릴까? 아니지, 밤 늦게 쪽지를 보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 마음이 흔들리고 머리 속이 뒤숭숭했습니다. 


속는 셈 치고 쪽지를 열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쪽지를 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이 만우절인 것에 착안해 귀엽고 깜찍한 샨새교 교주님이 왕림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즐겁고 훈훈하게 편지를 보내다니 하면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샨새교가 무엇이냐고요? 티스토리의 한글 이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티스토리를 하면서 이번 깜짝 이벤트는 처음인지라 샨새교 교주님께 편지를 답장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선 교주님의 편지 내용은 살펴봐야 하겠지요.

안녕하세요.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샨새교입니다. :D

샨새교(티스토리 국문명) 여러분을 매일 만나고, 여러분이 남겨주신 러브레터를 읽으면서, 얼마나 여러분의 사랑이 큰 지 그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소중한 분들이 샨새교에는 절세미남미녀가 많다며 자랑을 늘어뜨려주시고, 또한 추천을 마다하지 않으셔서 낯부끄러울 정도랍니다. :)

오늘은 절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주시고, 또 매일같이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정성들여 쓴 멋진 서사시로 러브레터를 남겨주시는 블로거 여러분께 꼭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부끄러워서, 그리고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몰라 미루다가 오늘을 빌어 러브레터 쪽지를 1통 보내드렸습니다. 모두 받으셨나요?

샨새교 역시 여러분을 오래 전부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 이미 눈치채고 계셨죠? 앞으로 우리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 더욱 자주 표현하고 나누도록 노력해보아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스러워질,
샨새교 교주 올림 

그 동안 러브레터를 받아보면서도 애절한 사랑을 전해주지 못한 교주님의 따사롭고 훈훈한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아실려나. 제가 샨새교를 널리 전파하는 열혈 선교사라는 사실을. 오늘도 샨새교에 대해 회사의 동료 수십명에게 포교를 했습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샨새교의 아름다운 중년 파워입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샨새교 교주님은 아리따운 여성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교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러브레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시라. 오늘 새벽에도 잠들지 않고 이렇게 러브레터를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 소원이 생겼습니다. 교주님의 미모를 언제 볼 수 있을까요? 뭐, 박색이라도 러브레터는 계속 될 것이니 역시 안심하시라. 한번 샨새인은 영원한 샨새인. 이거, 너무 샌새교에 홀린 것은 아닌가 심히 스스로 우려됩니다. 남아 일언 중천금. 샨새교 교주님이 언제나 사랑을 듬뿍 주신다면 열혈 선교는 계속 될 것입니다.


이제 밤이 깊었으니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해야 겠습니다. 꿈나라에서는 샨새교 교주님의 얼굴 모습을 그려 보고 싶습니다. 아침이 밝아오면 다시 샨새교를 위한 포교와 레브레터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교주님, 만우절이라고 너무 사랑을 헤프게 베풀지 마소서. 그럼, 20000 총총.
그리운 교주님 만나러 꿈나라로 여행을 떠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군대 복무 기간 동안에 사용했던 '군생활 회상록'을 꺼내 봤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은 백두산부대에서 소속 부대 배치 당시에 나누어주었던 일종의 앨범입니다. 지난 1988년에 입대했으니 이제 20년이 지났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은 이미 색도 바랬고 글자로 벗겨지는 등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군생활 회상록을 넘기다가 초등학생의 '군군 아저씨에게'로 시작되는 위문 편지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선희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편지 내용은 남아 있는데 편지봉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희가 보낸 편지에는 자신과 함께 엄마와 남동생의 사진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약 6 장 정도되는 사진인데 어쩌면 소중한 자신의 가족사진일지도 몰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어졌습니다.

선희는 아마도 당시 대구의 어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편지 내용 중에도 성은 없고 그냥 선희라는 이름만 있었습니다. 편지 내용이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단어 구사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선희도 세월이 흘렀으니 서른살이 훨씬 넘었을 나이일 것입니다.

지금은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 편지를 보내는 일은 없어진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초등학생들이 위문편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제가 20년전 근무하던 곳은 강원도 최전방이라서 학생들 위문편지도 다른 후방 부대들을 거쳐 제일 마지막에 받을 수 있어 일부 초등학생들 편지만 겨우 도착했었습니다. 아예 못받는 경우도 있었으니 편지라도 하나 받으면 감개무량한 시기였습니다.
 
먼저 간단히 당시 선희의 편지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저는 고향이 대구이고 대구에서 자라고 있어요. 먼저 우리 반의 여러 이야기를 말씀드릴께요. 저희 반에는 말썽장이들만 모여서 지내고 있어 그런지 언제나 덤벙대고 작은 사고도 가끔씩 일어난 답니다.

저번에는 교실에서 제기로 탁구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깨는 일이 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장난스러운 아이들을 용서해 주시기도 하셨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보내주신 편지를 내 친구가 빼앗아가서 아저씨와 나의 편지내용이 다른 아이들에게 들통날 뻔 하였지만, 내가 간신히 빼앗아 내용이 들통나지 않았어요.

아저씨, 휴전선을 지키실 때 북한 공산군과 마주보기도 하시죠. 그 때의 기분이 어떠세요. 저는 아저씨가 어떤 분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그리고 더 친해지고 싶어요.


선희는 연필로 글씨를 또박또박 예쁘게 쓰는 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여학생 다운 착한 심성과 함께 문장 실력이 우수한 편이었습니다. 같은 반 남자 아이들에게 편지를 빼앗겨 간신히 되찾았다는 내용은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당시 편지 보낸 시기는 1989년 10월이었습니다.)

당시 군대시절에 저는 위문편지를 상병 때 한 번 이외에는 받지를 못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위문편지가 선희가 보낸 셈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위문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남학생이어서 그런지) 군인에게 답장을 받아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이 어린 마음에 속상한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제가 군인일 때는 선희에게 정성껏 답장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희는 당시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엄마와 남동생 셋이서 살고 있었나 봅니다. 선희가 보낸 사진 중에 아빠는 없고 가족 셋이 찍은 사진이 있었고 산소에 남동생과 함께 앉아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선희는 아빠도 없이 자라다보니 일찍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던 듯 합니다. 가족사진을 여러장 편지와 함께 보내주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던 기억입니다.


당시에 갑자기 땅굴 수색 등 작전과 맞물려 혼란스러워지면서 어쩌다가 사진을 돌려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강원도 중동부전선에는 9월에 첫 눈이 내리고 다음해 5월까지 지긋지긋하게 눈이 내릴 정도였던 기억입니다. 그 기간동안에 제4땅굴 수색 작전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이라고 선희에게 가족 사진을 돌려주고 싶은데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군대에서는 볼 수 없는 추억이겠지만 군생활 회상록에 남겨진 '선희의 국군 아저씨 위문편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선희에게 가족사진이라도 돌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 보내지 못했지만, 선희가 보고싶어했던 당시 군인 아저씨들 사진입니다. 늦었지만...]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