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7.06 북한 금강산 아가씨 '호랑이 사느냐' 답변은... by 진리 탐구 탐진강 (44)
  2. 2009.03.09 벌교 주먹이시던 아버님이 약해지신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9)
  3. 2009.01.07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호랑이를 잡을 수 있을까? by 진리 탐구 탐진강 (2)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오는 11일 금강산 피격사건 1주기를 앞두고 "대북사업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 동안 남북을 하나로 잇던 금강산과 개성관광이 중단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멀어져가고 현대아산은 물론 현대그룹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지난해 7월 발생한 박왕자 씨가 금강산 관광 중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 이후 1년간 북한 관광 사업이 중단되고 있고 최근 남북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지구 상의 마지막 분단 국가인 남북한의 현실과 우리 민족의 아픔이 안타깝습니다. 그나마 같은 동포로서 북한 땅을 밟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 금강산과 개성 관광이 있었는데 1년이나 중단되고 서로 반목과 대결만 심화되는 것 같습니다. 대결과 반목 보다는 빨리 신뢰 회복과 함께 화해 평화 협력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지난 2000년 초에 북한 금강산 관광을 간 적이 있었는데 10년전 생각이 납니다. 1998년 말에 故 정주영 현대 회장의 소떼 방북을 계기로 당시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이 처음 시작되었으니 당시는 초창기였던 것 같습니다. 반세기 이상 분단의 모진 세월을 헤치고 시작된 금강산 관광이었으니 이산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금강산 관광은 유람선 풍악호를 탔던 것 같습니다. 2박 3일 관광이었고 잠은 유람선에서 자고 낮에는 금강산 관광을 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당시는 겨울이라서 금강산 관광을 위해 등산용 아이젠 등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첫 날, 금강산을 가기 위해 북한의 검색대를 지나는데 잠시 검문을 당했습니다. 주머니에 아이젠을 넣고 있어 그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긴장했습니다
"그게 뭐입네까?"
"아이젠인데요. 등산용 도구입니다."

"불편하지 않습네까?"
"안미끄러지고 괜찮아요."



이것이 제가 북한 땅에서 북한 사람과의 첫번째 대화였습니다. 그리고 금강산 관광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금강산을 오르다보면 중간 중간에 북한 안내원이 있었습니다. 목에는 털실 목도리를 하고 있었었는데 모두가 순박한 아가씨들 모습이었습니다. 관광객 한 명이 북한 아가씨에게 물었습니다.
"호랑이가 여기 사나요?"
"착한 사람에게는 호랑이가 보이고, 나쁜 사람에게는 안보입네다."

북한 아가씨의 답변을 듣고 관광객들은 순수한 답변에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호랑이가 있다고 믿으면 호랑이가 있을 것이고, 나쁜 생각을 갖고 보면 보이지 않을 것이란 답변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사실 산다는 것이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생각하면 안되는 일도 잘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금강산 관광이 다시 재개되고 남북 관계가 다시 평화와 화해의 길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현재의 대결과 반목의 모습을 보면 쉽지 않아 보입니다만 언제나 대결만 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인 듯 합니다.

이산가족들의 사연에야 예외 없이 눈물이 배어 있다.

1·4 후퇴 때 평안남도 진남포에 부인과 7남매를 남기고 내려왔다는 심재린 할아버지, 97살로 최고령 관광객이었다.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말했다. 함께 내려온 어머니는 임종하며 손을 잡고 이런 유언을 남기셨다. “너라도 살아서 고향 땅을 밟아라.” 어머니의 유언을 지킬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황해도가 고향이라는 70살의 김승룡씨는 북에 두고 온 어머니에게 “불효자를 용서해달라”고 절을 올리러 간다고 말했다. 고성군 해금강이 고향이라는 70살의 권만희씨는 부모님 제사를 지내러 관광선에 올랐다.

아쉬운 관광이 끝나고, 21일 저녁 9시 금강호가 장전항을 빠져나올 때다. 마침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바다로 나오면 분계선을 따라 확연히 구분되는 빛과 어둠의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남쪽으로는 가로등 불빛이 촘촘히 이어지다 도시의 불빛과 만나게 되지만, 북쪽으로는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그때는 숙박시설이나 편의시설도 없었다. 그날 관광을 마치면 다시 배로 돌아와 숙박을 했던 시절이다.

배가 항구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모두들 갑판 위에 나와 아쉬움을 달랬다. 이산가족들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누군가 멀어져가는 어둠을 향해 “어머니” 하고 목놓아 불렀다. 또 누군가는 갑판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 당시 기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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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저녁에 '딩동'하고 초인종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골에서 부모님께서 찹쌀 한 가마와 옥수수 종자를 택배로 보내셨던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물었더니 "주말농장하려고 어머님께 옥수수 종자를 부탁드렸는데 함께 보내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버님은 1950년대 청소년 시절을 벌교에서 생활하셨습니다. 큰 아버님이 벌교에서 고등학교를 다니셨고 아버님은 함께 기거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벌교는  고등학교가 있던 거의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인근 농촌 마을이나 멀리 떨어진 산골에서도 벌교로 학교를 보내야 했습니다. 큰 아버님과 아버님은 시골에서 벌교로 유학을 간 셈입니다.


아버님은 당시 벌교에서 주먹을 좀 쓰셨다고 합니다. 과거부터 벌교하면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벌교에서는 젊은 청년들은 물론 청소년들 사이에도 결투(?)가 많았나 봅니다. 아버님은 외지에 유학가서 남들에게 구박받지 않고 강한 남자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항상 체력 단련을 했다고 합니다.
 
시골 고향 집에 오면, 나무로 직접 만든 평행봉에서 항상 운동을 하셨습니다. 이소령이 혼자서 무예를 익히는 수련과도 흡사할 것입니다. 벌교에서 당시 청년이던 큰 아버님과 아버님은 함께 다니면서 주먹으로 벌교 지역을 평정하셨다고 합니다. 특히, 아버님은 힘과 체력이 좋아서 5일장이 열리면 씨름대회에 나가서 1등도 여러번 했다고 합니다. 어머님께 전해들은 이야기라서 정확한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산골 고향으로 돌아오신 아버님은 잠시 고향집에 놀러왔던 어머님을 만나 결혼하셨습니다. 외조부모께서 반대하신 결혼이었지만 거의 막무가내로 결혼식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아버님의 기개(?)는 어떤 사람들도 막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 외조부모님은 집안의 평안을 위해 결혼에 승락했다고도 합니다.


[영화 워낭소리 : 촌로 부부의 모습은 부모님을 연상케 한다.]


아버님은 결혼 후에도 시골 마을에서 호랑이로 불리셨습니다. 아버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뜻대로 가정과 마을을 호령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량으로 생활했던 것입니다. 간혹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지게에 나무를 지고오시면 산딸기를 칡잎에 싸오곤 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따온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땐 저는 아버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늘상 어머님께 호통치던 모습에 대한 반발심만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희는 매년 여름이 가족들이 모두 시골에 모여 휴가를 보냅니다. 작년 여름에 자식들이 휴가를 시골에 모였는데 아버님은 어머님을 힘들게 하셨습니다. 그 후 자식들은 어머님 편으로 전부 합세해 아버님이 고립된 적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장성했고 결혼까지 한 상황에서 아버님의 처사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머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으니 당시 아버님의 상실감이 컸을 것입니다. 어버님은 아버님 걱정에 다시 시골에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칠순이 되신 아버님을 위해 형제자매 가족들이 함께 고향에 모였습니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앙금도 모두 풀고 다시 가족들이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예전보다 많이 힘이 없어보이시는 아버님을 보니 송구스런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는 자식들에게 곡식들을 자동차에 실어주시면서, 어머님은 올해 여름에도 시골에 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직도 아버님은 칠순 나이에 시골 마을 이장을 맡고 계십니다. 젊은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찹쌀 한 가마와 옥수수 종자를 받았습니다. 아내가 부탁드린 것은 옥수수 종자 뿐인데 찹쌀 한 가마도 보내신 것입니다. 사실 찹쌀 한 가마는 아버님이 보내라고 하신 것일 듯 합니다. 아버님은 언제나 그러셨습니다. 어머님에게 옥수수만 보내지 말고 참쌀 한 가마도 함께 보내라고 하셨을 분입니다. 자식들과 어머님 앞에서는 늘 근엄한 모습이었지만 돌아서면 한없이 자식들을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말씀으로 표현을 못하는 산골 마을의 전형적인 아버님이셨습니다.
 
아버님이 보내주신 찹쌀 한 가마를 보면서 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젊은 청년시절의 기개를 항상 잃지안고 호령하시던 아버님이 이제는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예전에 비해 아버님이 어머님께 조금은 부드러워 지신 것 같아 다행이지만 한편으로 약해지신 아버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벌교에서 주먹을 자랑하던 열혈 남아였던 아버님이 이제는 마을에서도 예전과 같은 호랑이 모습은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아버님의 자존심은 예전부터 '쌀'이었습니다. 아무리 한량이라고 하시더라도, 논농사는 반드시 당신이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항상 가장 품질좋은 쌀 농사를 짓곤 했습니다. (지금은 표고버섯 재배를 비롯해 여러가지 일들도 하십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쌀을 보내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아버님이 보낸 '찹쌀'은 그 이상의 마음이 담긴 선물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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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것은 솔직히 자살행위이다. 무턱대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호랑이에게 잡아 먹힐 수 있다. 왜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나?

아버지는 지난 70년대 겨울철 농한기가 되면 겨울철에 생계를 위해 노루, 꿩, 멧돼지, 오소리  등 야생 동물을 수렵하셨다. 겨울철 농한기에, 아버지가 밤샘 수렵에 나가면 나의 할 일은 오소리 잡는 아버지의 새벽 식사를 전달해 일이었다. 오소리를 잡으려면 밤새 오소리가 살고있는 바위 동굴 앞에서 불을 피우고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새벽에 어느 계곡의 바위 계곡에 계신 아버지를 걱정해 도시락을 만들어 주셨다.

겨울 어느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아버지 새벽밥을 챙겨 어느 바위 계곡의 바위굴에 가게 됐다. 공교롭게도, 그 날 새벽에 오소리가 굴 속을 튀어나와 나를 파란빛이 번쩍이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오소리는 굴 앞에서 사냥꾼들이 쳐놓은 쇠꼬챙이를 벗어나 바위 굴 앞의 작은 공터에서 자신을 잡으려한 사람들을 향해 이글거리는 파란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오소리의 그 눈빛은 너무나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워 온몸이 얼어붙은 정도였다.  

오소리를 잡으려면 오소리 굴 앞에서 연기가 많이 나도록 불을 피우고 몇일이든 계속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오소리가 연기를 피해 굴 밖으로 나오면 쇠꼬챙이로 오소리를 잡는 것이다. 오소리를  기다리다가 오소리가 바위 굴 앞의 쇠꼬챙이들을 피해 헤치고 나오면 놓칠 수 밖에 없다. 내가 본 오소리는 용케도 쇠꼬챙이를 피해 바위 굴을 나와 잠시 굴 앞의 평지에서 나와 사람들을 응시하다가 산으로 도망가 버렸던 것이다. (참고로, 너구리 잡는 방법도 오소리 잡는 방법도 비슷하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안에서 '너구리 잡냐?'는 이야기는 연기를 피워 너구리를 잡는 사냥에서 유래된 말이다.)


나의 아버지는 과거 70년대 야생 동물을 수렵하는 고수였던 것이다. 지금은 절대 오소리, 노루, 멧돼지 등 야생동물을 잡지 않으신다. 너무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아버지는 당시 겨울철 농한기에는 야생동물 수렵을 통해 팔아야만 생계가 유지가 되었던 때문이다.

나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안되고 굴 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해 그 때 굴 입구에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소리를 잡으려면 오소리 굴 앞에서 계속 기다려야 한다. 오소리 굴 앞에서 연신 연기를 피워야 한다. 오소리를 잡으려면 결국 연기를 피우고 마냥 기다려하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제 시골 마을은 겨울철 농한기이다. 아버지는 이제는 오소리를 잡지 않으시지만 겨울이 되니 어린 시절 오소리 잡던 옛날 그 시절이 생각난다.

결론적으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안되고, 호랑이 굴 앞에서 연기를 피우고 밖으로 나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호랑이를 잡겠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무턱대고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가는 호랑이 밥이 될 수 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호랑이를 굴 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하는 불을 피워 부채를 부쳐 연기를 굴 속으로 계속 밀어넣고 결국 호랑이가 굴 밖으로 나올 때 쇠꼬챙이 등 도구를 이용해 잡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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