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일생을 담는 만큼 자서전 이야기가 다른 분들에게는 삶의 궤적이 달라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넉넉한 마음으로 상대방 입장에서 그 인생의 족적을 이해주는 아량과 배려를 부탁드리며 첫번째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저에게 공부하면 어머니의 영향이 가장 큽니다. 어머니는 홀로 저를 낳고 논밭을 일구며 소까지 키우며 20대를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가 병역을 기피해 서울서 수년간 도피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6살까지 '애비없는 자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홀로 저를 키우면서도 늘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동화책은 언강생심이었습니다. 구술로 어머니가 이야기해준 전래동화가 유년시절 남아있는 공부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도 다른 산골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흘러간 유행가 가사처럼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고사리 손에 낫을 들고 땔감 나무를 베고 소에게 먹일 소꼴을 베야 했습니다. 아이 때부터 혼자 고생하는 어머니를 돕는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되면 호롱불 밑에서 어머니에게 한글을 배웠습니다. 한글을 익히며 구구단 산수를 배웠습니다.
저는 9살이 되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왜 9살에 학교를 갔냐구요? 당시 산골마을에서는 모두 9살에 학교에 갔습니다. 큰 비가 내리면 산골 계곡에 순식간에 물이 불어 나이 어린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늦게 학교를 보냈던 이유입니다. 자동차도 없던 신작로, 늘 한적한 길을 따라 2Km 이상을 까만 고무신 신은 아이들이 걸어서 그렇게 학교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한 후 한글을 쓸 줄 아는 학생은 저 밖에 없었습니다. 유치원은 물론 어떤 공부시설도 없었으니 입학하고 처음 '가나다라'를 배웠던 시골 학교였습니다. 전교생 100명도 안되는 시골학교에서 줄곧 1등이었습니다. 한개 학년에 하나의 학급만 있었으니 급장(반장)이었습니다. 그러다 2학년에 되고 2학기에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큰아버지가 적극 서울 유학을 권했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서울에 온 후 시내 종로의 교동초등학교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서울은 역시 달랐습니다. 첫 시험을 치렀는데 반에서 40등 정도였습니다. 당시 한 반이 60명 가량이었으니 하위권 성적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사귄 친구들도 중하위권 친구들이었습니다. 저는 30등과 40등 사이를 계속 오갔습니다. 당시 큰어머니는 종로에서 세탁소를 운영하셨습니다. 세탁소에 딸린 방에서 기거하던 시절이라 공부할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4학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집이 당시 서울의 달동네 서대문 홍은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잠시 버스를 타고 교동초등학교를 다녔으나 갑자기 학군이 생겨 홍은동의 홍제초등학교로 전학을 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큰집은 단칸방 신세였습니다. 친구도 없고 전학을 하니 고향의 어머니 생각만 가득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혼자서 책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역사 책을 좋아했습니다. 당시 과외가 유행이었지만 과외를 받을 처지가 아닐 정도로 궁핍하고 가난했습니다.
다음 해 5학년이 됐습니다. 어느 날 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 아이가 생일 파티에 남자 여자 아이들을 초청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초대했습니다. 저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화가 나서 그 아이의 집에 쳐들어 갔습니다. 문전박대당했고 저희들의 항의로 생일파티는 난장판이 났습니다. 서울에 유학와서 첫번째 커다란 일탈이었습니다. 여자 아이 엄마와 우등생 친구들에게 심한 욕설을 들었습니다.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뭐하는 짓이야"
"거지같은 양아치 **들아, 꺼져!"
그 날 이후 저는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 공부 잘하는 것들아, 한번 해보자' 마음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서 교과서를 외웠습니다. 큰 소리로 책을 읽었습니다. 5학년 중간고사는 여전히 30등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실망스런 등수였습니다. 그러나 좌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동안 공부를 너무 안했기에 기초가 부족했습니다.
그 해 겨울 기말고사에서 드디어 20등대에 처음 진입했습니다. 한번 공부 습관이 생기다보니 재미를 느끼게 시작했습니다. 5학년 기말고사에는 10등대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친구들도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큰아버지 몰래 가정통신문 성적표에 도장을 찍어서 담임에게 제출할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반에서 늘 1등을 하던 여자 아이 K가 3등으로 밀려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속으로 좋아하던 아이였습니다. 크리스마스에 그 아이에게 카드를 쓴 후 책상서랍에 몰래 넣었습니다. 수줍던 시골 소년으로서는 엄청난 용기였습니다.
"OO아, 너무 속상해 하지마. 너는 다음에 1등할 수 있을 거야. 크리스마스 잘 보내."
그 후 그 여자 아이 K에게 카드를 받았습니다.
"고마워. 너도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 너 공부 못하는 줄 알았는데 등수 많이 올랐더라. 열심히 해."
사실 예상하지 못한 K의 크리스마스 카드 답장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받아본 여자의 크리스마스 카드였습니다. 당시 카드가 보편화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K의 카드는 설레게 했습니다. '그래. 더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속으로 또 다짐했습니다.
다시 6학년에 올라갔습니다. K는 다행스럽게 같은 반이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10등 안에 처음 진입했습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 첫 성적표를 들고 낙담하고 좌절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놀랐습니다. 반에서 6등이었습니다. 장족의 발전이었습니다. K는 1등이었습니다. 속으로 내 일 처럼 기뻤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렀습니다.
미처 상상하지 못한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적은 제가 1등이었습니다. 도저히 서울 학생들과 경쟁해 1등은 할 수 없다고 아예 포기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책상서랍 안쪽에 누군가 보낸 편지가 있었습니다. 짝사랑하던 K였습니다.
"탐진강, 1등 축하해. 너 정말 대단하구나. 나도 기뻐. 곧 중학생이 되는구나. 중학교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자."
시골 초등학교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후 종로의 교동초등학교와 홍은동 홍제초등학교에 이르는 초등학생 시절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K와는 그 후 어떻게 됐냐구요? 과연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상위권을 유지했을까요? 아쉽지만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하는 습관을 키워주어야 한다
- 공부하라고 잔소리 하는 것 보다 부모가 먼저 책읽는 모습을 보여주자
- 아이가 공부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 (맹모삼천지교)
- 책읽을 때는 소리내어 읽고 연습장에 써보는 연습을 한다
- 목표를 정하고 끈기와 집중력을 갖고 공부한다
-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자
- 꾸준히 노력하는 자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된다
- 교과서만 충실히 해도 충분히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
- 서로 격려하는 선의의 경쟁자를 두고 공부를 해보자
* 앞에서 언급했듯이 좌절과 도전의 자서전 기록입니다. 그냥 어떤 삶의 궤적인지 그대로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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