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손으로 직접 쓴 편지 내용과 함께 카드를 받아보니 옛 생각도 났습니다. 과거에는 인터넷을 통한 이메일 카드가 아닌 손수 내용을 적어 카드를 보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언젠가부터 인터넷이 일상화되면서 사람의 정이 흐르는 수제 카드 보다는 간편한 온라인 카드가 유행했던 것 같습니다.
올해는 그래도 손수 카드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실제 카드 매출이 크게 늘었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사람살이에 있어 문명의 이기가 편하기는 하지만 때론 사람의 사람의 정겨움이 넘치는 아날로그가 좋을 때도 많은 듯 합니다.
사실 두 딸에게 카드를 받게 된 것을 생각해보면 과거 몇년 전에 밖에서 일만 하고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때가 생각나곤 합니다. 항상 회사 일을 핑계로 늦은 귀가였기에 아이들을 볼 시간도 별로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처남의 아들인 8살 처조카가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입니다. 내용 중 복(福)자와 그림이 창의적입니다.
당시 과거를 회상해보면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매일 늦게 퇴근하던 때였는데 어느 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집에 와보니 아내가 그림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둘째 달이 유치원에 그린 가족 그림이라고 했습니다.둘째는 가족 4명을 그림에 그렸습니다.
큰 딸이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엄마 아빠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다 그렇답니다. 가장의 존재감이 적어진 셈입니다.
그런데 아빠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족 그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당연히 저라고 생각했는데 긴 머리 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빠는 어디에 있는지 아내에게 물었더니 제일 작게 그려진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몸이 굳어지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에게 아빠의 존재가 한없이 작았고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이들에게 아빠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물었는데 둘째는 '돈 벌어오는 사람'이란 대답을 들었습니다. 또 한번의 충격이었습니다. 아빠의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매일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아이들에게 잘해주지 못하고 혼자서 고생한다고만 생각했던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아내는 저에게 이제는 가급적 빨리 퇴근해 아이들과 많이 놀아주라고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 날 이후, 저는 가급적 퇴근을 빨리 해 두 딸과 놀아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먹하던 아이들이 아빠와 뒹굴기도 하고 베개 싸움도 하면서 점차 친해졌습니다. 지금은 두 딸과 여러가지로 재미있게 지내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술자리도 필수적인 것이 아니면 피하는 편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아빠는 그냥 '돈 벌어오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기러기 아빠 열풍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시대 아빠라는 존재는 가족의 경제력을 책임지는 가족 구성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설문조사에도 나타났듯이 아빠의 존재는 가족에서 잊혀지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IMF 위기 시절에 유행했던 '아빠 힘내세요' 노래 분위기는 이미 과거가 되었습니다. 대신 엄마의 존재감이 가족에서 가장 커진 상태입니다. 엄마가 아이들과 가장 많이 놀아주고 신경써주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빠의 위기인 셈입니다.
가족의 행복에서 아빠의 존재가 잊혀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아빠 스스로 반성하고 노력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할 듯 합니다. 과거 아빠는 월급 봉투를 아내에게 내밀려 자신의 존재감을 찾았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월급이 통장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같은 기쁨은 누릴 수 없습니다. 이제는 가족과 함께 가정생활도 챙겨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 같은 가부장적 사회가 아닌 것입니다.
모 기업이 개최한 초등학생 대상 공모전 가족그림에는 아빠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빠의 실종, 엄마 신드롬이랍니다.
가족관객을 끌어모았던 판타지 어드벤처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2'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역의 로빈 윌리엄스가 주인공 래리 데일리에게 "행복의 열쇠가 뭔지 아느냐"고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래리는 가족과 같은 박물관 친구들을 위기에서 구출해낸 뒤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원하는 것을 같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래리는 우리 시대의 아빠의 초상과 같은 셈입니다.
모 기업이 '가족과 하루'를 주제로 청소년들의 미술작품 공모전을 실시한 후 분석해 본 결과 초등학생들의 특징은 아빠가 그림에 없었다는 결과였습니다. 설사 그림에 아빠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작게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초등학생들 그림의 특징은 아빠가 실종되고 엄마 신드롬으로 요약 정리된다고 합니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비롯 경제문제는 아빠인 가장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 있는데 가족에게서도 아빠는 존재감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니 서글픈 상황입니다. 초등학생들의 가족 그림에서 사라진 존재, 아빠는 어떻게 다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아빠가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갖는 길 밖에는 없을 듯 합니다.
불쌍한 아빠들을 위한 변명을 해보겠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아빠들의 현실은 열악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1개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 아빠들은 가장 많은 시간을 일하면서도 임금은 평균 이하를 받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한국의 아빠들은 최근 구조조정, 임금 삭감 등 여러 고통에 시달리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책임에 내몰려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눈물겨운 생존 경쟁에 놓여있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아빠는 자식들에게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소위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상징되는 아빠의 직장 업무가 주요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야근에다가 업무상 잦은 술자리도 문제입니다. 설사 주말에 휴식을 갖더라도 직장에서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잠만 자거나 TV시청에 시간을 쏟는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아이들과 놀아 줄 시간이 절대 부족하다는 반증입니다.
아빠가 가족 생계를 위해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결국 해결의 열쇠 또한 아빠에게 있습니다. 먼저 직장에서 업무가 많더라도 퇴근 시간을 가급적 빨리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쓸데 없이 소모하는 시간은 과감히 줄여야 합니다. 직장내 회식이나 술자리도 가능한 1차로 끝내고 귀가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과거에 비해 술자리 문화가 2차 3차를 강요하는 것은 거의 없어진 만큼 1차로 끝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주말에 피곤하더라도 아이들과 놀아주는 시간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에게 목마를 태워주거나 이불이나 베개를 이용한 놀이를 하거나 아이들과 레슬링을 하면서 친밀감을 늘려나가는 것도 효과가 큽니다. 아이들과 스킨십이 중요합니다. 아이들과 몸을 부대끼며 놀다보면 금새 친해질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놀다보면 오히려 피로나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기분이 더 좋아진답니다.
아이들과 함께 동네 가게를 다녀오거나 근처 도서관을 가서 책을 읽는 방법도 좋습니다. 겨울이라 날씨가 춥지만 공원을 아이들과 산책하거나 오늘 같이 눈이 내린 날에 눈사람을 함께 만들어보고 눈싸움을 해보는 것도 아이들에게 큰 추억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빠가 돈만 벌어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의 가장이라는 인식에 대해 아내가 옆에서 도와주면 더욱 효과가 클 듯 합니다. 기업들의 직장 문화도 가족도 곧 기업의 구성원이라는 인식 하에 아빠와 가족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미 잘 하고 있는 아빠들도 많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빠들을 위한 이야기였습니다. 행복은 작은 곳에 있습니다. 행복의 시작은 가족입니다. 오늘은 눈이 내린 세상이 무척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지금 당장 아이들과 함께 눈도 밟아보고 눈사람도 만들어 보면서 즐거운 일요일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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