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사업'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5.01 대만 갑부의 딸과 결혼한 친구의 비결 '선교'(최종편) : 술집에서 선교사 활동? by 진리 탐구 탐진강 (47)
  2. 2009.04.10 모로코 여성과 카사블랑카 영화처럼 결혼한 친구 이야기 by 진리 탐구 탐진강 (25)


친구 K가 대만 갑부의 외동딸을 만나서 소설같은 사랑을 하게 된 사연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첫번째 이야기가 나간 이후 매일 많은 분들이 다음 편을 기대해 주셨습니다. 이번 최종편은 브라질에서 대만을 거쳐 한국까지 오게 된 이야기입니다. 1부와 2부를 못보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대만 갑부의 딸과 결혼한 친구의 비결 '편지'(1부)
대만 갑부의 딸과 결혼한 친구의 비결 '골라'(2부) : 성당에서 둘 만의 결혼식

대만행 비행기를 탄 K와 S는 꼭 축복받은 결혼을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대만에서  재력가인 S의 아버지는 외동딸이 사랑을 택해 브라질로 몰래 떠나버린 후 상심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분노 보다는 자신이 반대하는 한국 남자 K를 위해 몰래 야반도주하듯이 브라질로 도망쳐버린 딸에 대한 배신감이 컸습니다.
 
K와 S는 초조한 마음으로 대만에 도착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장인어른과의 만남은 K에게 배수의 진을 친 심정이었습니다. 드디어 K는 S의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K는 무릎을 끓고 S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 누구 보다도 따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

S의 아버지는 이미 엎지러진 물이 되어버린 딸의 사랑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두 사람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K는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다시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따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S의 아버지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브라질서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나?"
"옷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자네가 브라질에서 옷장사로 최고가 된 후 다시 나를 찾아오게. 그러면 인정해 주겠네."
"예,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K는 장인어른의 제안에 한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자신도 있었습니다. S의 아버지는 자수성가로 갑부가 된 분이었습니다. 순순히 K를 인정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지만 S가 고생을 통해 뭔가 깨닫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K와 S는 대만을 떠나 다시 브라질로 돌아왔습니다. K는 대만으로 떠날 때 보다 더 비장한 마음으로 브라질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K는 브라질로 돌아오자 마자 더 열심히 "골라 골라"를 외치며 장사에 몰두했습니다. 잠자는 시간 마저 줄여가면서 옷장사에 올인했습니다. 점점 K의 옷가게는 번창해 갔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한인 사회에서도 K의 옷장사로의 성공이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한인들 중에 옷장사를 하는 분들이 꽤 있었는데 K로부터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몰려오기도 했습니다. K는 마음이 넉넉한 친구라서 브라질의 한인들에게 비법 전수는 물론 한인들의 여러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를 못했습니다.

브라질에서 K의 옷장사는 성공적인 사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K의 "골라 골라" 다국어 메들리는 성공의 보증수표와 같았습니다. K는 사업이 번창해 갈수록 조금만 더 고생하면 S의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S도 사업의 번창에 따라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일요일에는 둘 만의 결혼식을 거행한 신부님의 성당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영화 'Love Story' 한 장면]

그러나, 불행은 예기치 않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잘 나가던 K의 의류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한 순간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K와 S가 그토록 희망을 꿈꾸던 의류 사업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습니다. K가 너무 한인들을 믿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K의 옷장사가 성공을 거두자 K에게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접근한 한인들이 사기를 친 것이었습니다. K는 한인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자금들을 쉽게 빌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 한인들이 돈을 빌려간 후 만기가 되어도 갚지않고 도피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K의 의류 사업은 한꺼번에 밀려오는 자금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도가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K와 S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한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대만에 갈 수가 없게 되거나, 다시 처음부터 사업을 일으키려면 수많은 세월이 필요할 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좌절과 포기를 모르던 K도 자신감을 잃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패배감일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희망이 사라진 S는 더 힘든 나날들이었습니다.

K와 S는 늘 믿음과 용기를 주던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신부님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K와 S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잠시나마 K와 S는 신부님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용기를 얻어 성당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 전화가 왔습니다. S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만에 계신 S의 아버지였습니다.
"요즘 몸은 건강하니?"
"네. 아버지."

"왜 목소리가 힘이 없니?"
"아니예요. 아버지가 웬 일로 전화를 주셨어요?"

"사랑하는 내 딸아. 힘들면 힘들다고 왜 말을 못하니?"
"......"
S는 눈물이 날 것 같아 도저히 전화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Love Story / Taylor Swift]

"K를 바꿔주라. 딸아."
"네, 접니다. 어르신."

"브라질 생활 정리하고 대만으로 돌아오게."
"네. 아닙니다."

"자네의 브라질 생활을 다 알고 있다네. 의류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도 알고 있고 사업이 부도난 것도 다 알아."
"네. 어떻게..."

"브라질서 사업하는 지인들로부터 소식을 수시로 듣고 있었어. 자네의 사업 수완과 성공을 이미 듣고 있었어. 자네가 최근에 사업이 부도난 것은 자네의 잘못은 아니잖아. 너무 사람 믿지 말게. 그만 내 딸과 함께 대만으로 돌아오게. 자네가 이겼네."
"장인어른...."

K와 S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K와 S는 브라질 생활을 접고 대만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K는 다시 재기해 성공한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장인어른은 두 사람의 사랑과 결혼을 인정한 상태이니 고집을 피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S가  브라질 생활을 힘들어하고 대만의 고향 생각을 많이 해 더 이상 브라질에 머물기는 힘든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S의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두 사람의 브라질 생활을 거의 다 알고 있었습니다. S의 아버지는 브라질의 지인들을 통해 사랑하는 딸이 잘 지내는지 늘 궁금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K의 사람 됨됨이와 사업 수완을 멀리서 지켜봤던 대만의 장인어른은 K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갑작스런 부도로 인해 S가 상심하고 괴로와 하는 모습을 더 이상 못본체 할 수 없었습니다.

대만에 도착한 K와 S는 거기서 새로운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장인어른의 사업에 참여하기 보다는 선교사의 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장인어른도 같은 종교라서 적극 후원했습니다. S의 아버지는 당분간 두 사람이 홀가분하게 그 동안의 고생을 잊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기도 했습니다. K는 대만의 오지를 돌며 선교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K와 S가 심적으로 안정을 찾고 행복한 시간을 다시 보내게 된 셈이었습니다.

몇년의 세월이 지난 후, K는 한국과의 무역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부산과 대만을 오가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부산에 머무르는 기간도 많았습니다. 무역사업도 했지만 주말을 이용해 K는 선교사 일도 병행했습니다. K는 무엇이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친구였습니다. 한국 남자 K와 대만 갑부의 딸 S는 브라질서 시작해 대만을 거쳐 한국에 이르는 사랑과 행복을 함께 했던 것입니다.


[영화 'Love Story' 한 장면]

저는 K가 몇년전 한국에 도착했을 때 대학 1학년때 친구들과 함께 캠퍼스 앞의 주점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K가 대학을 중퇴하고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지 15년여가 지난 후 처음이었습니다. 그와 밤새도록 그 동안의 해외에서의 삶과 S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생활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K는 술을 한잔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학 때 주당이던 K가 아니었습니다. 선교활동하면서 술은 완전히 끊었다는 것입니다. K에게 물었습니다.
"야. 그런데 너 어디서 선교를 하냐?"
"주로 술집에서..."


"장난하냐? 술집에서 선교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나는 남들이 다 하는 곳 보다는 비록 힘들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한단다."

"그런데 술을 한잔도 하지 않고 어떻게 선교가 가능하냐?"
"지금까지 한 잔도 안했잖아. 물 한잔으로 이렇게 있잖아."

저와 친구들은 도저히 K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밤새도록 대학교 앞으로 주점을 돌며 K를 시험했습니다. 새벽 5시가 되었건만 K는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술 한잔도 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물이나 콜라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친구들이 이미 지치고 졸려서 몸을 가눌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K가 한마디 했습니다.

"이래도 못믿겠냐?"
"K야. 우리들이 졌다. 이제 집에 가자."

친구 K의 러브스토리 3부작 최종편은 여기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어떤 분은 요즘같은 현실에 어찌 K와 S의 순수한 사랑이 가능한지 놀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K와 S의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표현상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K는 정말 지독한 녀석입니다. 다시 만나면 부산 도착 후 선교 이야기를 들어봐야 겠습니다. 많은 관심을 갖고 K와 S의 국경과 신분을 뛰어넘는 러브스토리를 읽어주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5월의 연휴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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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모로코 여성과 결혼한 대학 친구 S를 몇년만에 만났습니다. S는 모로코 왕국의 카사블랑카에 살고 있는 친구입니다. S는 모로코 여성과 결혼한 한국 남자 중 몇번째 손가락 안에 들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아이 둘을 낳고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카사블랑카에서 잘 살고 있지만, S는 13년전 완고하신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쓰고 모로코 여성과 결혼한다는 것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최근 대학 친구들과 동창회를 처음 열었는데 S의 근황이 궁금했던 참인데 어제 오후에 S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친구와 이심전심이었는지 마침 한국에 출장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대학시절에 친했던 다른 친구와 함께 만났습니다. S는 모로코의 특산물인 올리브를 비롯한 현지 상품과 한국 중국의 제품을 거래하는 무역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S를 만나고나니 S가 모로코 여성과 어려운 선택을 하여 결혼할 당시가 생각났습니다. 군대를 6개월 단기로 다녀온 S는 친구들보다 일찍 사회에 진출해 무역회사에 다녔습니다. 친구들은 군대에서 복학해 대학을 다니던 시기였습니다. S가 다니는 무역회사는 모로코에도 법인이 있어 S는 현지에서 몇년을 근무하게 됐습니다.
거기서 아리따운 현지 여성과 아름다운 로맨스가 시작됐던 것입니다. 그 때가 1990년 쯤이었는데, 사실 그 당시 한국사회에서 외국인과의 국제 결혼을 생각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특히나 로모코의 여성과의 결혼은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S가 한국 본사로 발령이 났는데, 어느 날 S의 여자친구가 모로코에서 한국에 여행을 온 일이 있었습니다. S는 당시에 여자친구로 의심하는 친구들에게 모로코의 직장 동료일 뿐이라고 완전히 시치미를 뗐습니다.
"S야, 모로코에서 한국까지 머나먼 길을 온다는 것은 너를 좋아해서 그런 것 아닐까? 여자친구 아니냐?"
"아니야. 모로코 현지에서 직장동료인데 한국에 일도 있고해서 온 거야."

친구들 사이에서 S는 믿음직한 형님과 같은 존재라서 모두가 그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멀리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모로코에서 온 여성을 위해 기꺼이 여행 가이드가 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눈망울이 크고 순수한 마음과 함께 매우 아름다운 모로코 여성이었는데 친구들은 서로 가이드를 하겠다고 나서던 때였습니다.

카사블랑카는 ‘하얀 집’이라는 뜻으로 아랍어로는 다르엘베이다(Dar el-Beida)라고 한다. 카사블랑카는 베르베르인의 어항으로 1468년 파괴된 고대 도시 안파의 자리에 포르투갈인에 의해 건설되어, 1757년 모로코 술탄에게 점령되었다.
18세기 후반에 무역항으로서 재건되어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의 무역업자가 정착하였고,
1906년에는 무역액이 탕헤르를 앞질러 모로코 제1의 항구가 되었다. 1907년 프랑스가 점령, 1912년 이후 료티 원수(元首)의 통치하에서 근대적인 항만과 도시가 건설되었다.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공업의 중심지이다.      - 두산백과사전 중에서 -

그리고 약 1년이 지났습니다. S와 오랫만에 술을 먹고 친구에게 넌즈시 물었습니다.
"너 예전에 모로코에서 온 여자와는 어떻게 지내냐? 직장동료치고는 너무 다정해 보였는데..."
"그냥 직장동료라니까..."


말꼬리를 흐리는 S가 역시나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 날 술을 얼큰하게 취해 S가 기거하는 누나집에서 함께 잠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S는 친구인 내가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경계했지만 넉살좋게 S의 집을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가정집에서 보기드문 팩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신기한 팩스로 달려가 구경을 하는데 모로코에서 전송된 편지가 있었습니다. S의 모로코 여자친구였습니다. 그날 밤, S는 모로코 여성과의 연인 관계임을 나에게 처음 실토했습니다.

그리고 몇년후 1996년경 S는 당시 주한 모로코 대사 부부 와 부모님 및 가족 친지들을 모시고 축복받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은 가족 위주여서 다시 S를 만난 것은 결혼 후 첫아이 돌잔치였습니다. 모로코의 그 여자친구는 아내가 되어 있었고 모로코 대사, S의 어머니 등이 참석해 있었습니다. S와 모로코 아내는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 후, S는 국내에서 독자적인 의류사업으로 꽤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IMF 외환위기로 인해 사업을 접고 몇년간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모로코 카사블랑카로 이사를 가서 살게 된 것이었습니다.
S는 아내인 모로코 여성과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두고 있고 모로코의 처가집을 자주 들르고 한국에 오면 부모님을 찾아뵙고 한다고 합니다.

친구 S는 주말에 카사블랑카에서 모로코 수도 라바트에 있는 처가집까지는 약 1시간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데 거기서 명예직이지만 한국어 학교의 교감으로도 활동 중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국제학교에 다니는데 영어, 아랍어, 프랑스어 등을 배우고 한국어는 가정에서 이미 마스터했다고 합니다. 모로코도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남아 선호사상이 있어 유산 상속은 주로 아들에게 권리가 있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도 합니다. 여러가지 모로코 이야기도 있겠지만 다음 기회가 있으면 다뤄보겠습니다.
 

한편, S의 아버지는 귀하게 키운 막내였던 S가 모로코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지만 이제는 마음을 풀고 모로코의 예쁜 손주들이 방문할 때 마다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고 합니다. S가 당시 국내에서는 매우 보기 드물고 어려운 선택의 결혼을 했지만 이제는 편안하게 그 때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친구인 S가  모로코 여성과 결혼해 카사블랑카에 살고 있는 것이 마치 아름다운 영화 '카사블랑카'의 파노라마 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카사블랑카는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보그만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로 유명한 항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카사블랑카 영화는 5대 명작 영화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또, 미국 가수 버티히긴스가 1982년 내놓은 '카사블랑카' 노래는 음반이 발매되자마자 무려 29주 동안이나 빌보드 차트에 머무는 빅 히트를 기록했고 1983년 국내에 상륙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국내 가수 최헌 씨가 번안해 불렀고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카사블랑카 노래를 들으면 감미롭고 심금을 울리는 리듬이 깊은 감흥에 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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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