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항쟁'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8.15 탱크의 이동을 보며 스친 군사반란의 기억 by 진리 탐구 탐진강 (32)
  2. 2009.06.07 하얀 나비를 보며 생각 난 노무현과 신기한 초자연 현상들... by 진리 탐구 탐진강 (25)
  3. 2009.05.18 5.18 광주항쟁, 어머니와 친구의 그 날... by 진리 탐구 탐진강 (100)


얼마 전에 경기도 양평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줄지어 지나는 탱크들과 장갑차들을 봤습니다. 탱크와 장갑차가 서울로 향하는 모습처럼 느꺼졌습니다. 물론 서울로 향하는 것은 아니고 훈련 중일 것입니다.

탱크나 장갑차를 보면 1980년이 생각나곤 합니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시절입니다. 종로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던 시절이라 광화문 앞을 지나 통학하곤 했습니다. 당시는 청와대 인근에 장갑차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의 눈으로 본 장갑차와 군인들은 무서웠습니다. 일반 시민들에게 커다란 위압감을 주었습니다.

신군부가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 즉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차근차근 군사독재 정권을 현실화했던 시기였습니다.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도 전두환 신군부를 무력 진압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국의 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전두환 군사독재는 김영삼을 가택연금시키고 김대중에게는 사형을 구형했습니다. 민주주의가 군사독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소위 '땡전 뉴스'를 들어야 했습니다. 방송사의 9시 뉴스는 "전두환 대통령은 ..."으로 시작되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눈과 귀가 있어도 올바른 소식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이 있어도 군사독재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대중은 나중에 미국의 도움(?)으로 사형을 면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1980년대는 군사독재의 탄압과 억압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진실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은 다시 군사독재와 항거를 시작했습니다. 목숨을 건 민주화 항쟁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많은 사람들이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구금되고 고문당하고 죽음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은 결국 다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절대 권력은 노리던 전두환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노태우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김영삼은 기존 군사독재 세력과 손잡은 3당 합당으로 대통령의 길을 열었습니다. 김영삼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력을 원했던 것입니다. 김영삼에 의해 정치에 입문한 노무현은 독재와의 야합을 반대하다 결국 야당의 가시밭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어렵게 민주주의가 꽃을 피워가고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기존 독재의 유산을 물려받은 당의 인물들과 같은 패였습니다. 그리고 과거 20~30년 전의 행태들이 사람들을 짓누르기 시작했습니다. 독재의 도시의 망령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광화문과 서울 광장은 전경들이 가득합니다. 시민들의 목소리는 없습니다. 전경차들을 보면 1980년 광화문을 지키던 장갑차와 군인들이 스쳐지나갑니다.

노무현은 부엉이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봉하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촌로는 그렇게 갔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삶은 이승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 모두가 소중하게 보듬고 가꾸어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김대중이 위독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병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갔습니다. 과거 민주화 세력도 병문안을 했습니다. 김대중에게 사형을 내렸던 전두환도 병문안을 갔습니다. 김대중은 대통령 시절에 전두환을 용서했습니다. 신앙의 힘이었다고 합니다. 용서와 화해란 당한 사람이 해주는 것입니다. 늘 DJ콤플렉스로 살며 김대중을 욕하던 김영삼은 병문안가서 화해했다고 합니다. 혼자 욕하고 혼자 화해한 셈입니다.

서울로 향하던 탱크와 장갑차를 보니 아련한 1980년 군사독재의 기억이 스쳐갔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당시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광화문이나 서울 광장의 모습은 1980년과 닮아 있습니다. 관변 단체의 공간일 뿐입니다. 과거 1980년에도 군사독재 관변단체는 그렇게 했습니다. 2009년 8월 15일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독립을 했습니다. 해방된지 64주년 광복절입니다. 해방된 나라에 살지만 아직도 일제의 그늘이 느껴지는 음산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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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주말농장에 갔다가 하얀 나비를 봤습니다. 하얀 나비가 텃밭의 채소 잎에 앉아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지나칠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얀 나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났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날 아침에 하얀 나비가 영정으로 날아들어 잠시 머물다 떠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는 무심코 지나쳤던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얀 나비를 눈 앞에서 직접 보고나니 노무현 영정의 하얀 나비가 생각났습니다. 그저 미신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같은 현상이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로부터 하얀 나비는 망자와 영혼으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흰색은 신생, 순결, 고귀, 재생 등을 뜻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은 나비로 환생한다는 믿음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29돌 기념식에서는  '5·18 영령의 환생을 바란다'는 하얀 나비를 날려보내는 의식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얀 나비를 보면서 여러가지 상념이 스쳐지나간 것은 어쩌면 이러한 일들이 우연치고는 특별했기 때문일 듯 합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노무현 사후에 여러가지로 나타난 것은 신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알려진 것들이 많지만, 그 동안 몇가지 신기한 현상들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봉하마을에 내린 갑작스런 폭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바로 다음 날, 고향인 봉하마을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갑자기 엄청난 폭우가 내렸습니다. 일반적으로 5월말에 갑작스런 폭우는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하늘도 울고 땅도 운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상서로운 빗방울이 커다란 폭우가 되어 하늘과 땅을 씻어내린 것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영결식 전날 밤에 뜬 빨간달

어떤 분들에 의하면 영결식 전날 밤에 빨간 달이 떴다고 합니다. 이는 영웅이 떠나가는 것과 나라의 큰 일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빨간 색조를 띤 달이 뜨는 일은 매우 희귀한 자연 현상이라고 합니다. 평생 볼까 말까 한 현상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진은 인터넷 참조)


영결식 날 봉하마을에 나타난 흰 비둘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인제가 열리던 봉하마을에 나타난 흰 비둘기도 사람들에게 신비한 현상으로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온 몸이 완전히 하얀 비둘기였습니다.

그 날은 아침에 봉하마을에서 발인제가 있었는데, 서울 경복궁에서 열리는 영결식장으로 이동하기 바로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하얀 비둘기가 나타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구차가 떠나기 직전까지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흰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으로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노제가 열리는 서울광장 상공의 오색 채운

서울광장에서 노제가 열리던 시각에 하늘 위에는 오색 채운 즉, 구름 무지개가 잠시 떠 있었다고 합니다.

오색 채운도 일반 사람이 평생동안 한두번 볼까 말까한 현상이라고 합니다. 매우 보기 드문 일인 셈입니다. 수십만 명이 모인 노제 현장의 하늘에 나타난 오색 채운. 오색 채운은 위대한 인물의 죽음에 대해 하늘에서 신이 마중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노제 이후 하늘을 나는 봉황의 나래(?)

노제가 끝난 이후 하늘에 나타난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는 별로 아는 분들이 많지 않다고 하는데 노제가 끝나고 난 이후에 하늘에 봉황의 날개 또는 천사의 모습 형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의 초자연적인 현상일 수 있지만 하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땅을 떠나가는 날에 일어난 일인지 궁금해집니다.

이같은 초자연 현상들은 일생 동안 거의 볼 수 없는 것들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점에서 특이합니다. 신기한 일들이지만 그렇다고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그냥 이러한 일들도 있었다는 측면에서 참고하면 될 듯 합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힘으로 해석하고 과학으로 풀기 어려운 일들도 많은 편입니다. 다만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입니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김정호의 노래 '하얀 나비'는 무슨 의미일까? 노래는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의미 심장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전 사진들을 김정호의 '하얀 나비' 노래와 함께 동영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동영상을 클릭하면 노래와 영상이 나옵니다. 



하얀나비 - 김정호

1.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은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님인데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걸 서러워 말아요
음 음~음~음~음
음 음~음~음~음

2. 음~ 어디로 갔을까 길 잃은 나그네는
음~ 어디로 갈까요 님찾는 하얀나비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걸 서러워 말아요
음 음~음~음~음
음 음~음~음~음
[동영상] 카페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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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느덧 30년이 지났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그 날이 다시 오면. 그 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저는 당시 큰집에서 기거하며 일찍이 서울 유학을 했었습니다.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에 총격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이웃 아줌마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하고 스스로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장갑차와 군인들의 서울 입성,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저는 중학교를 가려면 늘 청와대 앞 길을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그 길에는 장갑차가 보였습니다. 완전 무장한 군인들도 보였습니다. 5월도 그랬습니다. 당시는 왜 군인들과 장잡차가 청와대 앞에 그토록 많이 지키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인 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1979년 전두환은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1980년 체육관에서 대통령에 오른다]

오월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큰집에 전남대에 다니던 친척 형이 올라왔습니다. 그 후부터는 그 형은 도무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큰집의 다락방에 늘 숨어지냈던 것입니다. 언제 닥칠지 모를 군인들의 검거를 피해 다락방에 하루종일 숨어있었습니다. 저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왜 그랬을까? 당시는 광주 지역 대학생이면 모두 잡아갔던 시절이었습니다.

문학소년이었던 착한 친구가 5월이 오자 눈물을 흘렸다

1980년대 중반, 저는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전두환 군사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되고서야 1980년 5월 광주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가에는 소위 '짭새(비밀 경찰)'들이 출몰하던 시기였습니다. 대학생들은 군사 독재에 항거해 독재와 맞서 싸웠습니다. 항상 대학 캠퍼스에는 최루탄이 난무하고 백골단 특수경찰들이 교정에 난입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대학교 입학식 장에 최루탄이 날아들면서 대학 생활을 처음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그 날의 광주 비디오도 처음 보게 됐습니다. 대학생들이 몰래 숨어서 비디오를 봐야만 했습니다. 언제라도 군사 정권은 대학생들은 강제로 잡아가던 살벌한 철권통치의 시절이었습니다. 군사정권에 항의하는 대학가의 시위는 5월을 맞아 치열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의 5월, 서울의 대학가는 광주출정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1980년 그 시절에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는 몇몇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항상 조용히 책만 읽던 문학소년이었습니다. 문인을 꿈꾸던 착한 친구였습니다. 대학가에 계속 되던 시위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런 친구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1980년 당시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 항쟁이 전국적으로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친구는 1980년 5월,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그리고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친구는 광주 시내에서 의료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친구는 그 당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했습니다. 어린 중학생의 눈으로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의해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리거나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은 큰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몇 년이 지나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월이 오면서 조용하던 친구는 처음으로 시위에 나섰습니다. 전투경찰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지 못하도록 대학들을 완전 봉쇄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전투경찰들의 포위망을 뚫고 서울 도심으로 진출했습니다. 군사독재의 타도와 민주주의를 목놓아 외쳤습니다. 군사독재에 대항한 전국 대학가 민주화 항쟁의 시작입니다. 
 
산골의 어머니를 찾아온 대학생들 '배가 고파요'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낭만이 아닌 시대적 갈등 속에서 보내고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일을 조금이라도 도와드려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대학생이 된 저에게 처음으로 1980년 어느 날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첩첩산중에서 농사를 짓고 사시는 어머니가 어떻게 1980년 5월을 알고 계신지 궁금했습니다. 철저하게 5월 광주는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진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언론도 군사정권에 의해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어머니가 저녁 밥을 짓고 있는데 5~6명의 대학생들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허름한 복장에 몰골이 말이 아닌 젊은이들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배가 고픈데 밥 좀 주세요."
"젊은이들은 누구세요?"

"저희는 대학생들입니다. 광주에서 산을 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학생들."

어머니는 그 대학생들을 통해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 의해 자행됐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알게 됐던 것입니다. 대학생들은 당시 무장 군인들의 총칼로부터 살아남기위해 산등성이를 계속 걸어서 산골 마을까지 왔습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산골에 도착한 학생들은 무작정 마을 이장님 집을 찾아 밥 좀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1980년 광주, 공수부대원들이 한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한번도 광주의 5월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생이 되고나서야 처음으로 그 당시의 대학생들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그 당시 대학생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 1980년 5월이 지나갈 무렵에 큰집의 다락방에 전남대에 다니던 친척 형이 숨어지내야 했는지, 친구는 그 당시 무엇을 목격했고 왜 눈물을 흘리는지 과거의 역사가 하나씩 조각이 맞추어지면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이미 30년이 지난 광주의 그 날 이야기로 제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치열한 1980년대 중반의 대학 시절을 보냈고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민주화를 쟁취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와 아이들과 평범하게 살아가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직장인입니다. 다시 5월 그 날이 오면, 지난 1980년 그 날에 대한 세가지 기억들이 오버랩되어 지나갑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5월 그 날의 역사입니다. 아직도 그 역사는 현재 진행행인지 모를 일입니다.

[참고 글]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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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