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2.05 방송출연한 옛 애인의 불행한 결혼 본다면? 당신의 생각은? by 진리 탐구 탐진강 (39)
  2. 2009.12.10 14년만에 냉장고 교체, 여자가 행복한 이유 by 진리 탐구 탐진강 (113)
  3. 2009.05.07 자식위해 평생 불구가 되신 어머님 전상서 by 진리 탐구 탐진강 (86)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 자신을 괴롭히는 상념의 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결혼한지 5년 정도 지난 무렵이었습니다. 여름 휴가를 맞이해 아내와 어린 두 딸과 함께 시골 고향집에 갔습니다. 부모님은 손녀딸들을 보는 재미에 마냥 즐거워 하셨습니다. 제가 장남이다보니 맏며느리가 된 아내에 대해 부모님은 늘 고마워 하셨습니다.

아내도 부모님께 항상 맏며느리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딸이 귀한 저희 집안에서 두 손녀의 등장은 아버지의 근엄함을 사라지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서도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아내는 낡은 시골집이지만 싫은 내색하지 않고 어머니의 부엌 일을 스스럼없이 함께 했습니다.

당시 여름휴가에는 여동생과 매제 그리고 두 아들도 저희 가족 일정에 맞춰 시골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저 보다 먼저 결혼을 한 여동생은 시골에서 사는 것이 죽도록 싫었던 터라 도시생활에 만족하며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여동생의 눈에 맏며느리가 된 오빠의 아내의 모습은 그래도 안심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저도 여동생 남편인 매제가 시골집에 오면 장인 장모에게 잘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그렇게 결혼 초기의 생활은 신혼 초기에 부부싸움을 몇번 했던 것 이외에는 그 후 무난하게 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여름휴가로 시골에 내려온 첫 날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저는 아침 일찍 잠이 깼습니다. 혼자서 거실에 앉아있자니 심심해서 TV를 켰습니다. 아침 방송에 어떤 여자가 출연해 자신의 결혼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은 이 글의 인물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 출처> 서울공식블로그 

그 여자는 기구한 결혼생활에 대해 TV 화면을 통해 담담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소위 민속각설이로 유명해진 사람이었습니다. 여자이지만 어찌나 엿장수 가위질이 뛰어나든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면서 방송출연까지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인상이 저에게 낯이 익은 얼굴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만났던 여자인 듯 한데 얼굴이 다소 통통해 비슷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자의 이름이라도 자막에 뜨면 확인해보자는 생각으로 계속 채널을 고정했습니다.

그 여자는 민속각설이가 된 사연을 말했습니다. 그 여자는 결혼해 각설이로 유명한 집안에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결혼 몇해 만에 그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했습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다리에 큰 부상을 당했던 것입니다. 남편은 회사에 다녔는데 직장을 다닐 수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의 갑작스런 사고로 그 여자는 각설이인 시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돈벌이에 나섰습니다. 남편이 일을 못하게 되면서 아이 둘과 남편을 먹여살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식당에서 일도 해봤지만 예술적 재능이 있던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각설이 공연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더 적성에 맞았습니다.
 
어느정도 외모도 되는데다 여자가 민속각설이 타령을 하고 게다가 엿가위쇼 가위질 솜씨가 예술적 경지에 오르면서 그녀는 지방 도시에서 유명해졌습니다. 여성 민속각설이가 드물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눈에 띄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소식은 방송국에도 알려졌고 급기야 방송출연을 하게 된 사연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사고로 다리가 불구가 되면서 자신이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면서 어렵게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던 당시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TV 화면 자막에 그녀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민속각설이 HOO'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한 장면

이럴 수가. 그 이름은 바로 제가 대학교 때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 사귀게 된 H였습니다. 복학 후 대학 3학년 때부터 사귀었는데 유치원교사를 하던 H는 제가 공부하던 대학 도서관에 나타나 밥을 사주곤 했었습니다. 지방도시에 살던 H는 한달에 한두번 서울에 올라오면 저를 만나러 왔던 것입니다. H는 저와 학번이 같았는데 제가 졸업 무렵이 되면서 집안의 성화에 못이겨 맞선을 보게 될 것이라고 언질을 주었습니다.

저는 목표로 하는 곳에 입사에 낙방하면서 백수였던 터라 H의 맞선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자신이 너무 초라했기에 빨리 원하는 곳에 입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H는 맞선 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청첩장을 보내왔습니다.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 때 저에게는 대기업 합격 통지서도 날아왔습니다. H가 결혼식을 하는 시간은 제가 신입사원 교육이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더욱이 결혼식 장소는 바로 신입사원 교육 연수원에서 바로 인근이었습니다. 신입사원 교육 퇴소식이 끝나는 날, 저는 H가 결혼하는 식장을 지나 서울로 곧장 올라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기분은 참으로 쓸쓸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기업을 다니면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결혼 후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교까지 저는 가난한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결혼은 처음으로 안정감있는 생활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TV화면에서 이미 잊고 지냈던 대학 시절의 옛 애인을 보게 되다니 놀랍기도 하지만 불쌍한 H의 모습에 온갖 상념이 머리 속을 휘감고 돌았습니다. 차라리 H가 결혼해 행복한 모습으로 방송에 출연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갑작스런 사고와 불행한 결혼생활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옛날 여자친구의 모습 뿐이었습니다. 안타깝고 슬프기도 했습니다.

한참 상념에 젖어있는데 잠이 깬 아내의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저는 부지불식 간에 재빨리 TV 채널을 돌렸습니다. 이미 지나간 오래 전의 추억인데 괜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H에게도 측은지심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아내에게 TV방송을 우연히 본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결혼 후 TV화면에서 우연히 과거 결혼 전 애인의 불행한 장면을 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드실 것 같으신가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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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은 학교에 다녀오면 냉장고 문부터 열곤 합니다. 냉장고 속의 물을마시거나 냉동실에 보관된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한 것입니다.

 

주말에 집에 있는데 아이들이 냉장고 문을 열더니 아이스크림이 녹았다며 울상이었니다. 냉동실을 살펴보니 냉장고의 냉각기(콤프레서)가 고장난 것 같았습니다. 아내가 냉장고를 새로 사야 겠다고 저에게 살짝 말을 걸었습니다.

냉장고를 새로 장만하는 것이 이때?

그래. 새로 사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냉장고 몇 년 됐어?

 

아마 14년쯤 되었을 거야. 결혼한지 14년 됐잖아.

벌써 14년이나 됐구나. 참 오래도 사용했네.

 

TV를 제외하고 가전제품 모두 14년 동안 쓰고 있어

그러고보니 결혼 후 가전제품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네. 냉장고가 몇 리터 짜리더라.


금성 골드스타 그 시절 광고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새로 구입한 양문 냉장고에서 포즈를 취한 첫째 딸과 아직은 새로 설치해 텅빈 냉장고 내부의 모습


저는 냉장고의 모델명을 찾아봤더니 약
370리터 용량이었습니다. 신혼 당시는 두 식구라서 그 정도 크기로도 충분한 용량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네 식구에다가 몇 년전부터 저희 집에서 제사까지 지내고 있어 냉장고가 너무 작았습니다. 다행히 조상들의 제사를 우리 집에서 모시기로 한 이후 구입한 김치냉장고가 있어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대가족의 장손이라 집안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은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아내는 대가족의 맏며느리로서 아무 불평없이 제사는 물론 가족 친지들의 경조사를 잘 챙겨왔던 것입니다. 사실 알뜰살뜰한 아내는 냉장고가 작아 한번쯤 불만도 이야기할 만 한데 그 동안 그런 내색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장난 냉장고의 상표를 살펴보니 골드스타(GoldStar) 브랜드였습니다. 금성사 시절의 생산 브랜드인 셈입니다. 금성사 가전제품을 보니 감회가 새로왔습니다. 금성사는 지금은 LG전자입니다. 우리나라 가전제품의 원조격인 전자회사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금성 가전제품의 광고카피가 생각났습니다. 냉장고를 14년째 사용하고 있으니 금성 골드스타 브랜드의 광고는 정확했습니다.

 

저희는 신혼 당시 혼수 가전제품으로 금성( LG) 제품을 전부 구입했습니다. TV, 냉장고, 세탁기, 오디오, 전자레인지 등 가전제품 모두가 그랬습니다. 1995년에 금성사가 LG전자로 회사명이 바뀌었지만 저희가 결혼한 1996년에는 금성 골드스타 브랜드 모델이 여전히 생산 판매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의 가전제품은 골드스타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참으로 오랜 기간을 함께 한 추억의 브랜드입니다.


양문 냉장고가 바꾼 거실 인테리어와 아내와 두 딸의 행복
 



당장 아내와 저는 냉장고를 구입하기 위해 동네 할인마트를 찾았습니다
. 오랜만에 찾은 가전 매장은 과거와 많이 달랐습니다. TV는 대형 화면의 LCD TV PDP TV가 대세였습니다. 냉장고는 세련된 디자인의 양문 여닫이 냉장고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실 TV에 눈이 많이 갔습니다. 남자는 TV, 여자는 냉장고에 더 애정을 갖고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나 봅니다.

 

아내는 LG 디오스 냉장고와 삼성 지펠 냉장고를 살펴보더니 핑크색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는지 지펠을 선택했습니다. 홈바가 있는 760리터 대형 양문 여닫이 냉장고입니다. 저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사도록 했습니다. 그 동안 아무 말없이 마음 고생했을 아내를 위한 배려였습니다. 아내는 자기가 하자는 대로 남편이 순순히 냉장고를 구입하라고 하자 다소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가격도 150만원에 가까운 거금인데도 흔쾌히 응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속으로는 다소 부담도 되었지만 저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대가족의 맏며느리로서 제 역할을 잘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습니다. 아내는 그 이후 내내 싱글벙글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집에 양문형 냉장고가 배달되었습니다. 작은 냉장고 대신에 커다란 냉장고가 집안을 차지하면서 거실 인테리어는 완전히 재배치를 해야 했습니다.

 

두 딸도 양문 여닫이 냉장고가 들어오자 무척 즐거워 했습니다. 첫째는 냉장고 앞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아내와 두 딸이 모두 행복해 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언젠가 냉장고 CF 광고에서 본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카피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두 딸아이가 새 냉장고를 보더니 갑자기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이승기가 냉장고 광고에서 부르는 지펠 아삭 그런 노래였습니다. 문득 저는 아내와 딸아이들이 이승기를 좋아해서 지펠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아내와 두 딸은 이승기의 팬이었습니다. 확인한 사항은 아니지만 조금 선택에 일부 작용은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어쨌든 냉장고로 인해 요즘 아내와 두 딸, 즉 세 여자가 아주 행복해 합니다. 더욱 밝아진 거실 분위기도 집안을 환하게 하고 있습니다. 진작 냉장고를 살 걸 하면서 저도 혼자서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할부금이 문제이지만. 여자들이 왜 냉장고에 애착을 갖고 냉장고와 대화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 글이 있어 소개하면서 마치고자 합니다.

여자는 왜 냉장고와 대화할까?

"여자는 왜 냉장고와 대화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당연히 여자가 가장 많이 시간을 투자하여 음식들을 보관하는 곳이며 온가족의 건강한 식생활과 가장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냉장고가 없던 시절엔 광이란 곳이 있었고 그 집안의 가장 안주인만이 광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광 열쇠를 내주는 것은 비로소 며느리를 그 집안의 안주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고, 한편으로 광이란 곳은 집안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곳이 되기도 했다.

광에 벌레나 쥐들이 득실거리면 나라가 망하거나 흉년이 되거나 흉한 일이 집안에 생기는 경우가 있었기에 광은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특히 광에 먹을 것이 가득하면 할수록 그 집안의 부를 상징했고 온 가족의 1년 치 식량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음식을 보관하는 곳은 광에서 냉장고로 변했고 때문에 여자들이 냉장고에 집착하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 하는 경우도 있지만 냉장고는 가족들이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장만해서 놓은 곳이기 때문에 여자들은 더 크고 성능이 좋은 냉장고를 원하는 것이다. 이제 남자들도 여자가 왜 냉장고에 집착하는지 이해를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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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칠순이 다 되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계십니다. 호랑이같은 아버지와 함께 부부의 연을 맺은 이후 어머니는 청춘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자식들은 대도시에서 결혼해 살고 있고, 막내 남동생이 가까운 도시에서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곤 합니다.

그러나, 장남인 제가 자주 부모님을 찾아뵙지도 못해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다리 한쪽이 불편하십니다. 어머니가 불편하신 다리로 평생 산골에서 힘든 농사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제게는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불행하게도 예기치 못한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절게 된 사연과 혼자서 저를 키운 새색시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은 까마득한 두메산골입니다. 아직도 온통 산으로 뒤덮인 고향은 비포장도로를 통해 하루에 세 번 버스가 다닐 정도로 산골 오지입니다. 부모님은 산골 외딴집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름 휴가 만큼은 시골 집에 동생들 가족들과 일정을 맞춰서 함께 가곤 합니다.

어머니는 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으신 분이셨고 아버지는 초등 교육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지난 1960년대는 교육 환경이 매우 열악한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시골 마을에 잠시 머물던 시절에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을 '주먹자랑 하지 말라'고 알려진 벌교에서 지냈던 분으로 엄청난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결혼 후 신혼 시절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는 군대 입영을 기피한 상태였는데 아버지를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에서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헌병대를 피하기 위해 초가집의 흙벽을 무너뜨리고 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 후 아버님을 몇년 동안을 도시에서 숨어지냈습니다. 당시에는 군대에 간 후 사망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군대 기피가 많았다고 합니다.

갑자기 어머니는 새색시가 생과부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홀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고 땔감을 구해 생활해야 했습니다. 당시 시골집은 초가집이었고 나무 땔감으로 밥을 짓고, 소꼴을 베어 소를 키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전기도 가스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녁엔 방에 호롱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미 임신 중이었습니다. 혼자서도 힘든데 홀몸이 아닌 상태로 논농사 밭농사를 짓고 소까지 키워야 하는 고난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겹게 일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혼자서 열심히 밭 일을 하다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서둘러 밭에서 일을 끝내고 머리에는 소꼴을 가득 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사고가 터졌습니다. 길가에 뻗은 칡넝쿨에 걸려 어머니가 넘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넘어지던 중 머리에 인 소꼴에서 낫이 떨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낫은 어머니 앞에 날이 선 상태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예리한 낫의 날에 닿아버렸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로 어머니는 무릎의 힘줄이 끊기는 대형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사고를 당하고도 치료를 할 병원도 없었습니다. 곁에는 아버지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당시 저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어머니는 무거운 몸이다보니 칡넝쿨에 걸려 균형을 잡지 못한데다 낫을 피하지 못해 다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임신한 상태에서 수술을 하는 것도 몸 속의 아이에게 해가 될까봐 못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어머니는 그 사고로 인해 한 쪽 다리가 불편한 불구가 되셨습니다. 그러한 몸으로 어머니는 다시 농사를 짓고 혼자서 저를 낳아서 길렀습니다. 지금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갓 결혼 후 남편도 없이 무려 5년을 그렇게 농사도 짓고 저를 키웠던 것입니다. 저는 아가 시절을 마당이나 밭을 기어다니면서 놀았다고 합니다. 마당에서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나 닭과 함께 놀고, 밭에서는 지렁이가 친구였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도 일을 하고 계시고, 밭에 가서도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워낭소리는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저의 유년 시절은 밤낮으로 어머니 밖에는 없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호롱불 밑에서 제게 한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5살 때 처음 어버님이 고향으로 돌아오셨지만 저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신 후에도 집안 일은 하지않고 한량으로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싹텄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마음의 화해가 어느정도 되었고, 아버지도 나이가 들면서 과거와 달리 농사 일이나 집안 일도 했습니다.

제 나이가 5~6세 정도일 때도 저는 동네 아이들과 산에 올라가 고사리 손으로 나무를 하곤 했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것은 오직 어머니 일을 돕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저의 일을 돕는 역할이었습니다. 청소년기 시절에도 방학 동안 내내 어머니가 하시는 일을 돕는데 땀을 흘리곤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제가 어머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 때부터 어머니 혼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돕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왜 다리 하나가 불편하게 되셨는지 얘기를 처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어머니가 다리를 절면서 걷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불구가 된 것이 모두 제 탓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어머니를 보면, 그 젊은 시절에 임신한 몸으로 어떻게 다리가 잘리는 고통을 참고 이겨냈는지 가슴이 아프곤 합니다. 제가 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늘 변함없이 생각하는 정신적 지주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벼가 익어가는 여름 날, 논둑을 걸으면서 저에게 하신 말씀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단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어머님은 소중한 등불과 같았습니다. 제가 방황하거나 잘못 가려하면 언제
나 등대처럼 저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다리가 잘리는 듯한 고통을 어떻게 참고 견디셨습니까. 그리고 홀로 저를 어떻게 키우셨나요.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고생만 하셨습니다. 특히 홀로 키웠던 저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 유년시절의 기억 마저 희미하지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힘든 일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자주 연락도 못드려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해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지금은 자식들도 모두 결혼해 잘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어머니의 귀중한 가르침과 사랑 덕분입니다.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은 어머니가 그리워집니다. 언제나 힘을 주시는 어머님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찾아뵙겠습니다. 밤낮으로 기온차가 큰 데 건강 조심하세요.

언제나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해보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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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