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9.12.25 20년 전 화이트 크리스마스, 직접 경험한 4땅굴 발견 관통했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32)
  2. 2009.12.21 1박2일 혹한기 캠프 '예능 아닌 최강 다큐'였다 (강원도 겨울 군대시절 폭설과의 전쟁) by 진리 탐구 탐진강 (84)
  3. 2009.09.22 군대일기 수양록 '9월의 첫 눈' 사실일까? by 진리 탐구 탐진강 (101)
  4. 2009.08.28 대학생 전방입소 거부, 연병장서 시위 그 후... by 진리 탐구 탐진강 (54)
  5. 2009.06.17 DMZ 수색대 짬장의 작살, 김일성고기 잡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62)
  6. 2009.02.28 군대에서 발견한 5잎 클로버는 행운일까? by 진리 탐구 탐진강 (6)
  7. 2009.01.18 북한 땅굴과 남북전쟁 위기감에 대한 단상 by 진리 탐구 탐진강 (2)


온 누리에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성탄절 크리스마스입니다. 오늘은 제가 군대에서 직접 경험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이야기 할까 합니다. 그 때는 1989년 12월 25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금으로부터 바로 20년 전 그 날 입니다. 

강원도 양구 최전방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습니다. 군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외롭고 쓸쓸한 날입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을 거쳐 크리스마스 날에도 시추대의 지하 시추 작업은 계속 됐습니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한국군과 공동 시추작업을 하던 미군들이 모두 휴가를 갔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추작업이 한창인 장소는 이미 지하에 땅굴 이상 징후가 거의 확실하게 포착된 곳이었습니다. 미군이 휴가 간 사이 국군 단독으로 북한 땅굴을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그래서 밤새 하얀 눈 속에서 시추작업을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하에서 북한의 땅굴 굴착 이상음이 들리다

그런데 언제부터 땅굴 이상 징후를 발견했을까요? 그 해 8월이었습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이었습니다. 전초 수색대는 북한의 땅굴 가능성이 큰 지역을 중심으로 매일 수색과 지하 청음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주로 낮에는 주요 지점에 뚫어 둔 시추공의 수위(지하수의 높이)를 재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밤낮으로 24시간 지하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청취하는 청음 탐지활동을 벌였습니다. 백두산부대 전초 수색대의 작전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날, 지하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하에 매설한 마이크로폰으로부터 포착된 소리는 일정 간격으로 굴착기 소음과 유사하게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지속적으로 계속 들렸습니다. 전초 수색대는 지하에서 북한의 땅굴 작업 소리로 추정되는 이상 징후를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당시 육군본부 시추대와 미군 시추대가 현장에 출동했습니다. 1980년대는 미군 시추대 장비가 좋아 한국군이 미군에 의존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부터 땅굴 이상 징후 탐지 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지하 시추공 뚫는 작전이 계속 전개됐습니다. 시추대의 시추공 뚫는 장비는 하와이 사막에서 지하 깊숙한 곳의 우물을 파는 용도였지만 땅굴 탐지에도 사용되던 것입니다. 

미군의 지하 투시 카메라를 시추공에 빠뜨리다

전초 수색 소대가 조용히 지내던 곳에 다른 군인들이 나타나면서 여러 사건과 에피소드도 많이 발생했습니다. 먼저 미군과의 에피소드 한 토막입니다. 수색 소대는 매일 시추공 의 수위를 재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저희 분대가 미군들과 조우를 했습니다.

그 중 미군 한 명은 시추공 주위에서 지하 암석층의 카메라 촬영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지하 카메라 촬영 작업을 돕겠다고 나섰더니 흔쾌히 미군은 동의했습니다. 지하 시추공 밑으로 카메라를 집어넣는 작업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카메라가 시추공 안에서 뭔가에 걸려 빼지도 넣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추공에 수위를 재던 도르래로 카메라를 꺼내려고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도르래의 끈에 카메라가 걸린 듯 했습니다. 그 후 힘차게 도르래를 감아서 밧줄을 끌어 올렸습니다. 두 팔에 잔뜩을 힘을 주고 도르래를 끌어올리는데 갑자기 뚝 하면서 밧줄과 카메라 연결 줄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카메라가 시추공 안으로 완전히 빠져 버린 것입니다. 미군이 '오 마이 갓' 소리를 크게 지르더니 발라당 땅바닥에 누워 버렸습니다. 너무 놀랐던 것입니다. 미군은 뭐라고 씨부렁 씨부렁 거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자신의 장비를 잃어버려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됐다는 것 같았습니다.

미군은 직업 군인이라서 각자 자신의 장비를 구매해 사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하 암석층을 투시해 촬영하는 특수 카메라라서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라는 것입니다. 미군은 다시 카메라를 구입하려면 자신의 월급에 크게 마이너스가 발생한다면서 거의 눈물을 쏟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미군의 표정은 그야말로 황당하고 어이없어 했습니다. 우리들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 도와주려 하다 발생한 사건이라서 미군은 이해는 하는 편이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날에 시추공이 4땅굴을 관통하다

다시 크리스마스 날 이야기로 돌아와 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도 한국군들으 계속 시추공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환호성이 들렸습니다. 시추장비에 뚫던 시추공이 4땅굴을 관통해 지하수가 순식간에 땅굴로 빠져나가며 그 지역의 지하수 수위가 낮아졌습니다. 북한 4땅굴은 지하 200미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새벽 하늘에는 하얀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이 단독 임무 수행으로 북한 제4땅굴을 발견한 것입니다. 북한 땅굴은 주로 서부 전선에 발견됐는데 중동부전선에 땅굴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지역이 바로 강원도 양구 펀치볼 근처입니다.
 
땅굴 발견이라는 기쁨도 잠깐 이었습니다. 윤군본부에서는 현장에 대해 긴급 비상 상황을 선포하고 북한 선제공격을 대비한 비상 경계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북한 공격을 비롯 비상시 시나리오 별로 방어 대응 훈련도 병행했습니다. 그 때 부터 더욱 힘든 비상 경계 상황이 지루하게 지속되었습니다.

이제는 북한 땅굴 위치가 확인된 만큼 우리 군대가 북한 4땅굴까지 굴착해 가는 역갱도 공사를 시작해야 할 시점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시기는 겨울을 지나 다음 해 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광산 파는 장비인 TBM(Tunnel Boring Machine)이 투입되야 했습니다. 그 전에 미확인 지뢰지대가 많아 지뢰제거 작업을 통해 TBM 장비가 들어가고 여러 군인들을 위한 막사 건설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땅굴을 수직으로 관통한 후 해당 지역에는 공병대, 수단 수색대, 특공대 등 여러 군인들이 대거 투입됐습니다. 당시 저는 군사령관 표창으로 포상 휴가를 갈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휴가 가는 저를 대신해 중대본부에서 한 명이 파견나왔습니다. 그런데 중대본부 한 명과 윤군본부 병사가 공동으로 경계 근무하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해가 바뀐 것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중대본부와 윤군본부가 함께 2인 1조로 한 쌍인 우결(우리 결혼했어오) 두 사람은 깊은 산골엔 길가의 풀이나 사물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북한의 제 4 땅굴 발견 공로로 참모총장 표창을 받고 있는 장면

그런데 두 병사는 산딸기를 따러가다 미확인 지뢰 지대로 빠져 결국 지뢰를 밟고 말았습니다. 중대장은 저녁 11가 넘어 늦은 시간에 사건 현장에서 중대본부로 돌아왔습니다. 중대장은 휴가자들은 그대로 보내 주었습니다. 지뢰에 밟은 죽은 전우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4땅굴 수색 중 셰퍼드 군견이 지뢰를 밟아 죽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건과 사연이 있던 당시 4땅굴 역갱도 공사였습니다. 모두 이야기하기엔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 일단 여기까지입니다.

20년전 오늘은 크리스마스입니다. 함박눈이 탐스럽게 날리는 그 날이었습니다. 당시 군인들은 크리스마스의 감흥을 느낄 겨를도 없이 4땅굴 지하 관통 작업을 벌였고 결국 성공한 것입니다. 직접 경험한 일이라서 그런지 이맘 때면 당시 군인들이 보고 싶기도 합니다. 특히 화이트 크리스마스에는 유난히 4땅굴 발견 당시 시절이 스쳐 지나갑니다. 미군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휴가를 갔는데 한국군은 남아서 땅굴 탐사를 계속 했던 잔인한 날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아서 4땅굴은 한국군이 처음 발견부터 지하 시추공 관통 그리고 역갱도 공사까지 전 과정을 수행한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추억은 무엇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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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강원도 인제에서 촬영된 1박2일 혹한기 대비 캠프는 마치 겨울 군대 생활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사실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생활을 경험한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겨울철은 눈과의 전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어쩌다 여행 중 만나는 눈보라는 하나의 추억과 낭만일지 몰라도 군생활 중 매일 내리는 눈은 '하늘의 쓰레기'나 '악마의 비듬'에 불과했습니다.

벌써 20여년이 지났지만 1박2일 혹한기 캠프 장소를 보면서 강원도에서의 겨울철 군생활이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강원도 인제와 원통 그리고 양구에 걸친 최전방 지역은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말이 아직도 전해내려오듯이 험난한 산악지형 지역입니다.
 
그래서 1박2일 혹한기 대비 캠프 인제 내린천편은 겨울 병영 캠프를 보는 듯 했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 속을 뚫고 내려오는 1박2일 멤버들의 모습이 바로 겨울 군인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던 것입니다. 1박2일이 표방한 리얼 야생 로드 버라이어티라는 모토와 군대의 겨울나기는 다를 바가 없어 보였습니다. 

실제 제가 군대 시절에 겨울에 허리까지 차는 폭설이 내려 작전 도로도 막히고 병영 막사가 고립돼 배낭을 메고 매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서 산을 넘어 부식(군대 식사 재료)을 추진해야 했던 일도 많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1박2일 내용부터 먼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박2일 혹한기 캠프는 감동의 리얼 야생 로드 다큐였다

1박2일 멤버들이 보여준 인제 혹한기 캠프는 예능이 아닌 최강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예능으로 시작했지만 갑자기 내린 폭설로 산속에 고립된 야생 탈출기였습니다. 이승기는 극한 상황에서도 '예능이 아니다. 다큐다'라고 말하면서도 '눈내리는 것은 복이다' '눈으로 세트장을 만들었다면 돈이 엄청날 것이다'라며 긍정적으로 대하는 자세로 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폭설은 아무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멤버들은 배드민턴 게임과 라면 내기 복불복 게임을 마치고 비닐 막사의 야생에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이내 눈으로 변했습니다. 곧이어 폭설로 변했고 제작진은 긴급히 산속에서 철수하기로 했습니다. 자칫하면 산 속에서 완전히 고립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멤버들은 사륜 산악오토바이를 타고 일단 산정상에 도착한 후 반대편으로 걸어서 하산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사륜 산악오토바이는 인제 내린천 ATV팀이 1박2일을 도와준 것이었습니다. 폭설로 자동차 차량은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선발대로 강호동 이승기 MC몽은 산 정상에 도착 후 산 아래 내리막을 걸어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눈 내리는 길, 스노우로드였습니다. 멤버들이 내려오는 도중에 엄청난 눈보라를 만나 한치 앞도 보이지않는 길에서 사투를 벌였습니다.



게다가 눈길이 미끄러워서 멤버들은 계속 넘어지곤 했습니다. 촬영하던 VJ가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히말라야나 북극이 따로 없었습니다. 1박2일 멤버들은 극한 눈보라에도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감동을 연출했습니다. 아이리스와 1박2일을 교차편집한 장면을 보니 딱 들어맞았습니다. 2012가 1박2일이란 의미라는 MC몽의 말이 이상해 보이지가 않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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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각본없는 야생 리얼 버라이어티 다큐였습니다. 1시간 30분이 넘는 길을 걷는데 후발대인 이수근 김C 은지원 일행이 폭설이 줄어든 틈을 타 사륜 산악오토바이를 타고 유유히 내려왔습니다. 그 때 해피선데이의 대표 연출자인 이명한PD가 산 아래에서 걸어서 올라와 강호동과 극적인 조우를 했고 함께 감격적인 포옹을 했습니다.

또한, 제작진들도 함께 만났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이산가족 상봉과도 같았습니다.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됐는데, 산 위에서 내려온 VJ가 '넘어지며 구르면서 촬영했다'고 말하자 산 아래에서 올라온 VJ가 고생했다면서 어깨를 두드려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1박2일 제작진과 멤버들의 팀워크가 빛난 장면의 연속이었습니다. 이것은 예능이 아닌 최강 다큐였습니다.

폭설로 고립된 군대 막사 10일간 추억, 생존 전쟁이었다

다시 강원도 양구에서의 겨울 군생활 추억담으로 넘아가 봅니다. 지난 1980년대 중반, 군생활 도중 겨울에 폭설로 당시 저희 소대 막사가 고립된 적이 있었습니다. 산 속에서 땅굴탐지 특수 수색대 임무를 맡아 단독 소대 생활을 했던 터라 고립되면 외부와 단절되고 식사도 할 수 없어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늘이 뻥 뚫린 듯 폭설은 매일 계속 내렸고 도로는 완전히 허리 높이의 눈으로 뒤덮였습니다. 매일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제설작업을 해도 50미터를 뚫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비상 식량도 바닥나고 결국 저희 소대는 매일 1개 분대씩 돌아가며 산정상을 넘어 반대편 평지까지 걸어서 부식과 식량을 배낭에 메고 돌아오는 작전을 돌입했습니다. 새벽에 출발해도 밤 12시에 도착하는 강행군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막사와 도로의 눈을 치우는 제설작업에 하루 동일 매달렸습니다.


눈이 멈추기만 바랐지만 무심한 하늘은 하루도 쉼없이 눈발을 흩날렸습니다. 군장을 멘 부식추진조는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매서운 눈보라 속에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산악 눈길을 걷는 것 조차 힘들었습니다. 소대원의 식사와 목숨이 걸린 일이라 한 순간도 쉬지않고 걷고 또 걸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고립된 생활 기간이 무려 10일이나 됐습니다. 가장 오래 고립된 시기였습니다.
 
그 후로도 폭설도 도로가 막혀 단기간 고립되는 일은 자주 있었습니다. 물론 작전도로가 넓어 겨울 내내 제설작업만 계속 했습니다. 강원도 양구 최전방 가칠봉을 비롯한 산악지대는 9월부터 첫 눈이 내리기 시작해 다음해 5월까지 눈이 내릴 정도였습니다. 정말 눈만 보면 지긋지긋했습니다. 
지금은 지나간 추억으로 남았지만 강원도 산악지대에서 겨울 군생활은 눈이 결코 낭만이 아닌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것은 인식하게 해준 경험이었습니다.
 


이 처럼 1박2일 혹한기 대비 캠프는 바로 강원도 최전상 군인들의 겨울병영생활을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 이번 강원도 인제편은 1박2일의 리얼 야생 버라이어티 정신과 저력을 보여준 감동의 명작이었습니다. 아울러, 오늘도 나라를 지키는 국방의 의무에 겨울 내내 고생할 최전방 국군 장병들에게 따뜻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젊은 그들이 있어 오늘 밤도 편안히 잠잘 수 있기 때문입니다. 1박2일이 있어 즐겁고 최전선 군인들이 있어 평안한 하루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무려 40여년 이상을 강원도 산 속 마을에서 살고있는 강원도 노인 아저씨와 강호동이 눈 속에서 마주치자 두 사람이 잠시 나눈 대화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역경과 도전 속에서도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동안 인생을 달관한 산할아버지의 우문현답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호동 : 왜 우리는 험한 날씨를 몰고 다니는 걸까요?
아저씨 : 다 복이예요, 복.

(덧붙여, 1박2일 멤버들이 산에서 미끄러지는 TV장면을 보던 아이들은 저기서 비닐 포대 눈썰매를 타면 재밌겠다고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이미 비닐 눈썰매를 타본 아이들의 경험은 놀이를 생각한 모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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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였습니다. 9월의 가을비이지만 문득 군대 시절의 첫 눈의 기억이 오버랩되어 지나갔습니다. 여기 내린 비는 다른 곳에서는 눈이 될 수 있습니다.

첫 눈은 어떤 이들에게는 낭만의 상징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다른 이들에게는 고통의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전방에서 군대 생활을 한 남자들에게는 눈은 '악마의 비듬'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늘에서 쏟아지는 쓰레기 정도로 치부될 만큼 지긋지긋한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1980년대 중후반에 군대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8월에 신병교육대를 마치고 최전방 전초 수색중대 백골소대에 자대배치를 받았습니다. 전초 수색중대는 단독 소대 단위로 산 속에서 생활했습니다.

비무장지대 수색 중 지뢰를 밟아 고참 1명이 즉사하고 여러 명이 파편에 부상당한 직후라서 소대 분위기가 살벌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권도 및 특공무술 훈련을 받았습니다. 말이 훈련이지 대부분 얼차려와 군기잡기였습니다.


강원도 양구의 가을은 빨리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훈련을 받고 저녁에 계곡 냇가에서 목욕을 하면 온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어느날, 우연히 이미 제대한 고참이 남겨두고간 군대 일기 '수양록'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막사 뒷편의 후미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수양록을 열심히 읽어봤습니다. 고참의 군생활을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미리 저의 군생활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고참의 수양록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 눈을 의심하며 다시 읽었습니다.
198*년 9월 **일
첫 눈이 내렸다.
군대에서 첫 눈은 그리 반갑지가 않다. 여기 강원도 양구는 산이 많아서 눈이 많이 온다.
올해 겨울도 아마 눈과의 전쟁을 해야겠다. 올해가 군에서 마지막 겨울이니 조금만 참자.


그렇습니다. 9월에 첫 눈이 내렸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12월도 아닌 9월에 어떻게 눈이 내린단 말인가? 그리고 계속 고참의 수양록을 넘기며 읽어내려갔습니다. 수양록에는 그 후 부터 눈에 대한 기록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눈이 내리는지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9월부터 시작한 눈은 그 다음해 3월 4월도 넘기고 있었습니다. 언제 눈이 그칠 것인가. 수양록을 한참 넘기다보니 5월이 됐습니다.
198*년 5월 *일
오늘도 눈이 내렸다.
눈이 지긋지긋하다. 이번이 마지막 눈이면 좋겠다. 더 이상 눈을 보고 싶지 않다. 

사실 당시 수양록을 다 읽는 동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어떻게 9월부터 시작된 눈이 그 다음해 5월까지 내린단 말인가. 그렇다면, 강원도 양구의 겨울은 9월부터 5월까지 무려 9개월이나 계속 되는 셈입니다. 입대하기 이전까지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군대에서 맞이하는 눈은 반가움의 대상이 아니라 고난과 고통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9월에 눈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9월에 눈이 내릴 수는 없겠지' 생각했습니다. 그 해에는 10월에 첫 눈이 내렸습니다. 겨울 내내 눈만 치웠던 것 같습니다. 도로가 눈에 막혀 부식 차량이 들어오지 못해 군장을 메고 가칠봉을 넘어 부식을 추진해와야 하는 날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새벽에 기상하면 1개 분대는 어둠과 폭설을 뚫고 군장을 멘 일단의 병사들이 이동했습니다. 그들의 우리들의 생명줄이었습니다.
 
온통 눈으로 덮힌 산악지대 가칠봉을 넘어 반대편에 산 허리에 도달하면 부식 차량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수십 킬로미터를 가야 하는 왕복 대장정이었습니다. 허리춤까지 차오른 산악지대 눈길을 군장메고 걷는 일은 거의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때론 낭떠러지 위를 걷다가 미끄러져 아래로 추락하기도 했습니다. 부식 추진조가 동료들의 식량을 군장에 메고 다시 막사에 돌아오면 저녁 늦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강원도 양구의 산악지대에는 눈이 어른 키 만큼 내리기도 했다

그들이 무사히 도착하면 우리 소대원들은 모두 막사 앞으로 나가 무사귀환을 환영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무사히 도착한 것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어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당시 1980년대 군대에서는 먹는 것 하나가 가장 소중한 시기였습니다. 닭고기 하나를 더 얻기 위해 부식추진조는 다른 부대와 육박전을 감행하기도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는 그 만큼 배가 고팠고 절박하기도 했습니다.

부식 추진 분대가 출발한 다음에 남아있는 전 소대원은 막사에서부터 작전도로의 눈을 치웠습니다. 제설작업은 그야말로 작전이었습니다. 하루종일 눈을 치워도 100미터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눈과의 전쟁으로 지쳐갔습니다. 매일 치워도 막사 앞 100미터를 못치웠습니다. 눈으로 완전 고립된 단독 소대였기에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아무도 찾을 수 없고 폭설로 고립된 산 속의 섬이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해 9월말인가 였습니다. 비무장지대를 오가는 전초 수색대 생활도 적응이 되었습니다. 산 속의 적막감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 만큼은 결코 반갑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그런 9월 어느날, 누군가 밖에서 소리쳤습니다.
"첫 눈이 내립니다."

우리 소대원들은 막사 밖을 내다보며 원망어린 눈으로 첫 눈을 바라봤습니다. 고참의 수양록은 정확히 맞았습니다. 저는 9월에 첫 눈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눈은 그 해 겨울을 지난 그 다음해 5월까지 내렸습니다. 그 눈의 악몽은 저의 수양록에도 그렇게 기록되었습니다.
198*년 9월 **일
첫 눈이다. 지긋지긋한 악마의 비듬이 다시 시작됐다.
이번 겨울만 잘 버텨보자. 제대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을을 맞이할 때 강원도 최전방에서는 겨울을 준비해야 합니다.
국군 장병 여러분, 힘내세요. 화이팅.

당시 주요 사진과 일지를 담은 군생활 회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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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1980년대 대학가는 매일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던 시절입니다. 당시는 공포의 군사독재 정권 시대였습니다.

대학생이 된 이후 그들은 엄청난 갈등을 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배웠던 사실들이 엄청나게 달랐던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알면서 부조리와 불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정의감이 불타오르던 시기였습니다.


대학가 시위에는 무차별 최루탄 난사와 백골단의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전투경찰과 달리 백골단은 하얀 헬맷을 쓰고 몽둥이를 들고 가장 앞으로 뛰어나와 공격을 했기에 백골단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최루탄이아 백골단 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일 잡혀가면 엄청난 구타와 폭력이  행해졌던 시절임을 생각하며 겁없던 젊은 대학생들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은 당시 1학년 때 문무대에 입소해 군사훈련을 받았고, 2학년 때는 최전방 부대에서 전방 입소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군사독재 시절의 군사교육에 대한 거부감이 컸습니다. 1986년에는 서울대 학생이던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민주주의 쟁취 및 전방입소 거부를 외치며 분신 자살을 하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당시 폭압적 정권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대학생들의 전방입소를 강제화했습니다. 거부하면 강제로 입대를 시켰고 교련과목 학점이 주어지지 않았고 군복무 단축 혜택도 없었습니다. 

전경들이 대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있고 뒤에는 하얀 헬맷을 쓴 백골단이 서 있다.

그 다음 해인 1987년은 역사적인 민주화 항쟁이 전국 대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이 대거 참여해 일어난 해입니다. 그런데 그 해에도 대학생들의 전방입소 거부 움직임은 계속 벌어졌습니다. 입소가 몇일간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방 입소를 하면서도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고 반독재 구호가 난무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도 교내 운동장에서부터 반독재 구호와 함께 시작된 시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학생들은 태운 버스가 최전방 군부대의 연방장에 멈췄습니다. 완전 무장 군인들이 연병장에 내린 대학생들을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사단장이 대학생들이 나와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연병장에서도 연좌농성을 하면서 반독재 구호를 외쳤고 민중 가요를 다 함께 부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군사독재라는 이유로 사단장과의 악수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두려움을 모르는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군대에서 그것은 순진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내 군인들과 조교들의 폭력과 얼차려가 시작됐습니다. 군대에서 반항은 가차없는 폭력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유와 진리를 추구한다는 상아탑은 아니었던 시절이었고 군대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고분고분해질 수 밖에 없었던 셈입니다. 기선을 제압한 조교가 크게 외쳤습니다.
"여기가 어딘 줄 아나?"
"...(침묵)..."

"여긴 그 악명높은 삼청교육대다. 어디에도 도망갈 곳이 없다. 도망가면 사살이다."
"...(허걱)..."

대학생들은 놀랐습니다. 삼청교육대라면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무력으로 장악한 후 사회정화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불법 군대 입소시켜 무자비한 폭력과 훈련을 시켰던 곳입니다. 인권은 전혀 없던 곳이었습니다. 가장 악명높은 강원도 최전방의 삼청교육대가 바로 거기 였습니다.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인 강원도 양구의 백두산부대였습니다. 기가 눌린 대학생들은 온통 까마득한 산으로 둘러싸인 연병장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삼청교육대 시절의 훈련방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훈련이었습니다. 

인권이 말살된 시절의 삼청교육대 훈련은 무자비했다

실제 소위 휴전선 철책에서 야간 근무도 이루어졌고,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GP에도 들어가야 했습니다. 4월의 강원도 산악은 너무 추었습니다. 실제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군사적 대결의 분위기에서 대학생들에게 극도의 긴장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난생 처음 최전방에서 훈련받는 대학생들은 가족들과 친구들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나이의 군인들과 대학생들이 같은 내무반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해야하는 암울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로서 공감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깊은 산 속에서 자유를 잃었지만 결국은 다가 올 희망과 미래였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런 전방입소 훈련이 끝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지긋지긋한 강원도 양구의 전방입소가 끝나고 친구들에게 한마디했습니다. "강원도 양구를 향해 오줌도 누지 않겠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내 5월이 오고 6월이 다가왔습니다. 5월은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달이라 대학가는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해 6월은 전국에서 들불처럼 민주화항쟁이 일어났습니다. 대학생들을 필두로 시민들이 대거 동참했습니다. 군대라는 특수성을 이용해 장기 군사정권을 획책했던 독재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전방입소 군사훈련이 결국 대학생들에게 아무런 특효약이 되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 다음 해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이제 군대도 많이 좋아졌겠지 하는 기대도 했습니다. 처음 입대해 준비하는 곳은 춘천 102보충대였습니다. 하필이면 강원도 춘천이란 말인가. 그 후 실제 훈련을 받는 부대가 배치됐는데 강원도 양구 백두산부대였습니다. 이런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춘천 소양호를 건너 배를 타고 더블백을 물고 산을 넘어 백두산부대에 도착했습니다. 조교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얼차려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전 해 대학생 전방입소에서 받았던 그 연병장이었습니다. 이미 기선을 제압한 조교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OO대학 출신 손 들어! 어서!"

저는 손을 들었습니다. 다른 몇 명도 손을 들었습니다. 다시 조교의 비장한 한 마디가 들렸습니다.
"너희들은 죽었다고 복창한다. 작년 여기 연병장에서 기억나는가? 앞으로 튀어 나와!" 

삼청교육대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군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으로 대상자들을 검거하기 위한 군경 합동작전의 명칭이 '삼청작전'이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국보위는 1981년 1월까지 4차에 걸쳐 6만 755명을 불법으로 강제 체포했습니다. 피검거자들은 보안사령부를 비롯한 심사위원회에서 A B C D 4등급으로 분류되어 A급 3,252명은 군법회의 회부되었고, B급과 C급 3만 9,786명은 각각 4주교육 후 6개월간 노역과 2주의 교육 후 풀려나야 했습니다.

정통성이 없던 군사정권이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했지만 삼청교육 입소자들 가운데는 반체제 인사를 비롯해 억울하게 검거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의 4주간 교육은 군부대 연병장 둘레에 헌병을 배치하고 엄중한 총기 무장 감시 속에서 무차별 구타와 폭력이 자행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현재 밝혀진 것만으로도, 당시 삼청교육대에 끌려 가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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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김일성고기를 아시나요?
지금으로부터 20년전 군대 같은 소대에 1주일 고참 K가 있었습니다. 하루만 빨라도 깍듯이 고참으로 모셔야 하는 특수부대(?)였습니다. K는 비무장지대 수색정찰대인 우리 소대의 짬장이었습니다. 짬장은 주방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군대에서 자주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비무장지대 수색대는 소대단위로 별도로 산 속에 은거해 생활했습니다.

K는 지독한 산골의 오지에서 자랐던지라 빵도 먹지 못했습니다. K는 인스턴트 식품류들을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과도하게 특이한 식성의 고참이었습니다. 전방에서는 아침 식단이 빵이었는데 짬장인 자신이 먹지못하기 때문에 아침마다 K는 자신만의 채식 식단을 별도로 하나 더 준비하곤 했습니다. 소대원들이 빵을 먹는 시간에 K는 자신의 특별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어느 여름 날, 짬장 K가 DMZ 수색에 나섰습니다. 강원도 양구 중동부 전선의 계곡 물 속에는 소위 '김일성 고기'로 불리는 물고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K는 수색 전날부터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수색에 나선 K가 완전 군장과 별도로 몰래 준비한 것은 물고기 사냥용 작살이었습니다.
 
그 날은 너무 더웠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에 수색을 한다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비무장지대의 계곡을 지나던 참이었습니다. 짬장 K가 드디어 작살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평생 처음 맛보는 특별식을 제공하겠다."
"...네..."

수색대원들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짬장 K는 병장 고참이었을 때라서 수색대를 이끌던 시기였습니다. K는 저격병 및 M60 기관총 사수 부사수 등 몇명을 주변 경계 근무를 시킨 후 곧바로 계곡의 웅덩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방탄복 등 완전 무장도 해제하고 팬티만 입고 작살을 들고 물 속으로 유유히 헤엄쳐 갔습니다.

얼마 후 K가 작살에 커다란 물고기를 명중시켜 물에서 나왔습니다. 군대에서 김일성고기라고 불리는 물고기였습니다. 양구 산악지대 계곡에는 김일성고기가 많이 살았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김일성고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물이 차가운 지역인 양구 등 이북에만 서식하는 물고기였습니다. K는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몇번을 거듭하며 엄청난 수의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신기에 가까운 작살 수렵 실력이었습니다. 우리 수색대원들은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속으로 탄성을 질렀습니다. 비무장지대 내에서는 말을 해도 안되고 담배를 피워도 안되는 지역입니다. 물론 작살로 물고기 잡아도 안됩니다. 그러나 가끔 일탈도 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것 이외에도 구렁이를 잡거나 물찬(?) 더덕을 캐는 일도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데 그 일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습니다.

K가 다시 물 속에서 나왔습니다. 작살에 팔뚝만한 김일성고기 2마리가 동시에 잡혔습니다. 화투로 치면 1타2피인 셈입니다. 그렇게 어느 한 여름날 수색대는 물가에 있었습니다. 비무장지대 적군 수색은 안하고 물고기 수색만 한 셈이었습니다. 김일성고기를 잡았으니 전혀 근무를 안한 것은 아닙니다만...  K의 물고기 사냥이 끝나고 수색대원들은 황급히 비무장지대를 빠져나왔습니다.

열목어는 강원도 중동부 지역 부근부터 이북의 차가운 물에서만 서식하는 산천어 종류이다

막사에 도착하기 전 냇가에서
K가 드디어 요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수색대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건 김일성고기가 아니다."
"그럼 무슨 물고기입니까?"

"열목어. 천연기념물이다"
"...(허걱)..."

우리는 말문을 닫았습니다. 천연기념물을 이렇게 많이 포획했으니 천벌을 받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물고기를 먹는다는 기대감 등 각자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실 강원도 양구지역 1급수의 깨끗한 물에는 김일성고기라고 불리는 산천어가 많이 있었습니다. 물이 맑고 차가운 곳이라서 그런지 남쪽 지방과 같이 물고기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몇종의 산천어 부류가 주로 서식했습니다.

김일성고기를 열목어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잘못된 용어이기는 합니다. 눈이 튀어나와 망둥어처럼 생긴 물고기를 부대원들은 김일성고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수색대원들은 열목어와 김일성고기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열목어와 김일성고기는 산천어 형제뻘 정도 되는 셈입니다. 강원도 양구 지역의 열목어는 눈이 빨개서 김일성고기로 불리게 됐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김일성고기는 백두산 천지에 김일성이 산천어를 풀어서 서식하게 해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일성은 생전에 백두산에서 기른 산천어를 보양식으로 즐겨 먹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날 우리 수색대원들은 짬장 K가 만든 열목어 회를 실컷 먹었습니다.
천연기념물을 먹었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그런데 비무장지대에서는 정전협정상 천연기념 포획에 대한 위반 규정은 없지 않을까요?)

[추가] 열목어는 맛은 그다지 없었습니다. 젊고 배고팠던 20대 초반의 군인 시절이라서 무엇이든 식성이 좋았던 터라 주는 대로 잘 먹었을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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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20년전 군대 앨범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진기한 추억이 있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행운의 상징으로 4잎 클로버를 떠올리곤 하는데 앨범에는 4잎 클로버와 함께 5잎 클로버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4잎 클로버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히 5잎 클로버가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20년전 강원도 양구의 최전선에 근무하던 군대 시절에 막사 근처에 클로버 군락이 있었습니다. 남자들만이 근무하는 군대는 삭막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20대 초반이라 전우들은 감수성도 있었기에 때론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빡빡 머리 군인들이 클로버를 찾고 있는 모습을 지금 상상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클로버 군락에는 대부분 3잎 클로버였지만 4잎 클로버도 간혹 찾을 수 있었습니다. 몇개의 4잎 클로버를 발견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5잎 클로버 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해 어떻게 5잎 클로버가 앨범에 남아 있었는지 모르지만 몇개의 4잎 클로버와 하나의 5잎 클로버가 20년 만에 세상에 선보이게 된 셈이 되었습니다. 
[5잎 클로버 뒷면 : 사진을 크게 보니 5잎 클로버가 확실합니다.]

[5잎 클로버 앞면 : 앞면에서 보면 이파리 두개가 겹쳐서 좀 헷갈립니다.] 

[4잎 클로버 : 확실히 4잎은 구분이 잘 됩니다.]

[4잎 클로버와 5잎 클로버 비교 사진 : 4잎과 5잎 클로버는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5잎 클로버의 자연 상태의 사진이 없어 붉은노을님 블로그에 양해를 구하고 자연 속에서의 5잎 클로버의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클로버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3잎 클로버는 소망 믿음 등을 의미하고, 4잎 클로버는 대체로 행운 행복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5잎 클로버는 흔치 않아서 무엇을 상징할까 궁금했습니다. 여기저기 정보를 찾아보니, 5잎 클로버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나라마다 다른데 5잎을 어떤 기독교 지역(독일)에서는 완성되지 않은 십자가라서 불행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저는 4잎도 있고 5잎도 있으니 좋은 의미만 생각하렵니다.

클로버가 기독교적인 해석과 의미가 담겨있어서 그런지 같은 클로버라도 잎의 숫자에 따라 상징이나 대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일랜드의 국화가 클로버라고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요한절 밤에 4잎 클로버를 발견하면 행운이나 승리를 가져다주며 벨기에서는 처녀에게 멋진 남자를 만나게 해준다는 전설(?)이 있답니다.

군대에서 제4땅굴 발견한 것도 4잎 클로버의 행운이었고, 지뢰사고를 비롯 여러차례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것도 클로버의 도움이 있었고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고 예쁜 딸들을 낳아서 잘 사는 것도 모두 클로버의 행운과 사랑의 계시가 아니었나 혼자서 생각해 봅니다. 믿거나 말거나 사람은 자신이 좋은 방향에서 긍정의 힘을 불어넣으면 좋은 일이 많을 듯 합니다.

보너스 사진으로 단풍잎입니다. 최전선의 후미진 계곡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많았는데 사태리 계곡에는 유난히 단풍이 아름드리 장관을 펼쳤습니다. 그 단풍잎 중 하나입니다.

모든 분들에게 클로버의 행운과 행복 그리고 사랑이 넘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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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최근 국정원 관련 모 교수가 북한이 김포까지 땅굴을 파는 등 남침 전쟁이 임박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개인 차원에서 언론사에 배포해 물의를 일으킨 모양이다.

항상 전쟁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는 것은 우리나라와 같이 국가 안보가 중요한 나라에 있어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 물증과 사실이 아닌 개인적 주장으로 지나친 위기감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 우리 국민들은 위정자들이 남북 분단의 냉전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나 전쟁 위험을 다소 과장해 국내 정치에 악용한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북한의 전쟁 위협 자체를 너무 과소 평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 1990년 양구에서 발견된 제4땅굴의 추억
나는 군대 시절에 강원도 양구에서 발견된 제4땅굴 발견 당시 실제 수색 활동에 참여한 바 있어 북한의 전쟁 위협이 얼마나 집요한지 실감한 바 있다. 양구의 제4땅굴은 이미 안보관광시설로 활용되어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 중의 하나이다. 제4땅굴은 북한의 새로운 침투 방법으로 모색되어 굴설된 땅굴로 1978년 제3땅굴이 발견된지 12년만인 1990년 3월 3일에 양구 동북쪽 26㎞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군사분계선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 데일리NK 뉴스]

이제는 제4땅굴이 있는 안보 관광지이자 남북 분단의 대치 상황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양구의 해안(亥安) 마을에 한번 가보고 싶다. 해안 마을은 펀치볼(punch bowl)이라고도 불린다. 해안 마을이 위치한 분지 형태가 거대한 화채 그릇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미군이 펀치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유래이다. 만일 통일이 된다면 나의 가족과 반드시 가보고 싶은 첫번째 장소가 펀치볼과 비무장지대가 될 듯 싶다.

역사 속에서 자주적 국가 안보의 중요성 실감
과거 우리 민족이 당했던 치욕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자주적인 국가 안보는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지금 순간에도 우리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것도 24시간 365일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한다. 20대 초반, 혈기 왕성한 젊은 나이에 군대를 다녀온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있어 그 시절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 소중한 추억이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렇지만, 현재 발견된 4개의 북한 땅굴 이외에 추가로 발견된 땅굴은 없다. 제1땅굴은 1974년 11월 고랑포에서 발견됐고, 제2땅굴은 1975년 3월 강원도 철원에서 발견됐으며 제3땅굴은 1978년 10월 경기도 문산에서 발견된 바 있다. 그리고 1990년 3월 강원도 양구에서 제4땅굴이 발견된 이후 북한 땅굴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북한이 1970년대에 여러개의 땅굴을 팠으나 그들이 판 땅굴이 계속 발견되자 땅굴 공사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하에서 땅굴을 파는 일은 북한군에 가장 힘든 노가다 작업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하에서 땅굴 공사 작업은 어떤 식으로든 지하에서의 공사 소리나 지하수의 변화 등에 의해 쉽게 노출될 수 있어 효율성이 무척 떨어지는 일이다.


북한 땅굴 위협은 과거 우리가 그 실체를 몰랐을 때에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북한 땅굴은 지난 1990년 제4땅굴 발견이후 거의 20년 가깝게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가공할 위협 수준은 아닌 듯 하다. 우리나라의 국방 수준이 높아져 북한이 땅굴을 굴착하면 곧바로 탐지할 수 있는 첨단 장비가 있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땅굴이 가동할 경우 즉각 타격해 용도 폐기할 수 있는 첨단 무기들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정치적 위기감 조성은 경계해야
일반 국민들은 북한의 땅굴에 대해 막연히 위기감을 느끼거나 불안해 할 수 있다. 어느정도 국가 안보에 대해 긴장감을 갖는 것은 좋으나 실제와 달리 너무 과도한 위기감으로 스트레스까지 받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아울러, 정치적으로 국민들에게 국가 안보를 빙자한 실제 이상의 불안감 조성은 정치권에서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국가 안보는 정치적으로 악용할 대상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역사 앞에서 가져야 할 민족적 시대적인 소명이기 때문이다.

가볍게 시작한 글이 주제가 땅굴과 안보에 대한 얘기다보니 너무 딱해진 것 같다. 정리하면, 국가 안보는 자자손손 우리 민족이 살아가야 할 존재의 의미 차원에서 중요하지만 한편으로 실제 새로 발견된 땅굴도 없이 과장된 사실과 가능성이라는 미명 하에 너무 과장해 정치적 악용이나 위기감 조성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국가 안보는 외부에 요란스럽기 보다는 냉철하고 착실하게 만일의 위협에 대해 철통같은 준비가 중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제4땅굴의 관광 안내에 대한 내용을 첨부한다. 땅굴 중 유일하게 내부에 관람용 전동차를 운행하고 있다. 강원도 춘천과 양구를 함께 여행한다면 하나의 선택이 될 듯 하다. 아마도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실제 전쟁의 위협에 살고있는 우리의 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www.gwhsed.go.kr/cyberschool/gangwondo/yanggugo/dongmul/danggul.htm

관광지명 : 제4땅굴

위 치 :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현3리

개 요

  • 제4땅굴은 1990년 3월 3일 발견되었으며 국내에서 유일하게 내부 관람용 전동차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 땅굴광장에는 50여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공간과 기념비, 군장비 및 안보교육관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안보교육관에는 280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영화관과 전시관을 비롯하여 북한의 관광지를 필름에 담은 3-D입체영상기가 휴게실에 비치되어 있어 북한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갖게 됨으로서 국내안보교육장의 활용되고있다.

규 모

    높  이 : 약 1.7m  
    폭     : 약 1.7m  
    깊  이 : 지하 145m  
    총길이 : 2,052m

관람방법

    통일부 양구북한관에서 출입신청(당일 신청 출입가능)  
    매주 화요일은 관람불가

교 통

    동서울,상봉동터미널에서 양구까지 버스운행, 양구에서 해안까지 4회 운행  
    서울-춘천-양구-해안

관 람 료 : 청소비(대인 1,000원, 소인 500원)  
                ※ 단체(30인이상):30%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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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