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12.15 슬픈 겨울장미와 가을의 추억 7가지 풍경 찾아보니 by 진리 탐구 탐진강 (33)
  2. 2009.11.11 미실여왕 고현정과 비담의 눈물 '행복했다' by 진리 탐구 탐진강 (23)
  3. 2009.10.19 여자는 왜 여성 모임에 외모를 더 신경쓸까? by 진리 탐구 탐진강 (44)
  4. 2009.10.10 선덕여왕과 클레오파트라, 세계의 여왕들 누가 있었나? by 진리 탐구 탐진강 (31)


우연히 사진들을 정리하다보니 지난 늦가을과 초겨울에 아파트 단지 주변 길에서 발견한 장미꽃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미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잎도 흩날려 떨어진 시기에 빨간 장미꽃이 활짝 피어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때는 반추하면 지난 늦가을과 겨울장미를 추억하며 몇 글자 적어봅니다.

당시 노란 은행잎 단풍과 빨간 장미가 함께 있는 장면은 을씨년스럽기만 했습니다.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떨어진단풍잎을 바라보는 동네 아저씨의 모습이 늦가을의 고독과 묘하게 닮아 있었습니다.

그 뒤로도 몇번을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첫 눈이 오는 초겨울까지 장미는 피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이내 장미꽃도 스러져 갔습니다. 계절을 잊고 겨울에 피는 장미가 왠지 슬퍼보였습니다. 그런데 장미는 겨울에 재배할 수 없을까요? 나중에 그 이야기는 해보겠습니다.


지난 늦가을에 장미꽃을 보게 된 것은 산책삼아 마을 주변의 작은 산을 주말마다 오르면서 였습니다. 아내와 딸들과 함께 산행을 하고 난 후 돌아오는 길에 주말농장에 들러 마지막 김장 무와 배추를 수확하던 시기였습니다. 산 속에서 만나는 빨간 열매가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산을 올라 산등성이에서 김밥과 도시락을 먹는 재미는 일품입니다.



인적이 드문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은 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늦가을을 상징하는 억새의 모습은 이제 겨울로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려주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합니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모아 나무 구멍 보금자리에 겨울나기 준비하다!

늦가을에는 다람쥐도 겨울나기를 준비합니다. 아래 사진은 다람쥐가 나무 사이 틈 속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거기에 도토리를 물어다 놓은 장면입니다. 나무 구멍의 다람쥐집을 자세히 보면 도토리가 잔뜩 놓여 있습니다. 신기한 장면이었습니다.



추위에 강한 대파와 갓이 늦가을 들판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여러 음식에 다용도인 대파와 독특한 맛의 갓김치는 스산한 계절에도 소중한 반찬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대파와 갓이 가장 오래 재배되는 밭 작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 가족도 텃밭에 겨울을 지난 봄에 수확하는 양파를 심기도 했습니다.



길가에 마지막 조경용 꽃도 있습니다. 이들 꽃이 지면 도로의 조경은 내년 봄을 기약할 것입니다. 다양한 색깔의 꽃이 올해의 마지막 계절을 맞이하며 시들어 갔습니다.



다시 장미 이야기로 넘어가 봅니다. 장미는 왜 겨울에 재배하기 힘들까. 사실 장미는 꽃 중의 꽃일 정도로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아름다운 여성을 장미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서양의 미인하면 생각나는 고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유난히 장미를 사랑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려하게 살았지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클레오파트라와 장미의 운명이 묘하게 오버랩되어 지나갑니다. 슬픈 겨울장미처럼 말입니다. 겨울 장미가 재배 가능한지 살펴보고 심수봉이 부른 '겨울장미' 노래와 함께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겨울 장미 재배 가능할까?

장미는 야생에서 자랐는데 인간에 의해 점차 개량되어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원예적으로 재배되는 장미는 오랜기간에 걸쳐서 교잡 개량된 장미로서 분류적으로 보면 장미과 장미속의 교잡종(Rosa hybrida)이라고 합니다. 장미는 온대 지역에서 생육하는 화목류로서 봄과 가을에 걸쳐 생육하고 겨울에는 낙엽되어 휴면 상태에서 겨울을 월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봄이되면 다시 생육을 하는 특성을 가졌으며 이 경우 꽃은 5월 하순~6월 상순에 피고 열매는 여름 동안 성장한 후 가을이 되면 지게 됩니다.
 
또한 원예로 재배하는 장미는 꽃의 형태와 개화 습성이 변천되어 있어서 4계절 언제나 꽃이 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꽃은 겹꽃으로 탐스러워서 정원용 꽃일 뿐만 아니라 별도로 장미꽃을 판매할 수 있어 농가 소득 작물로 크게 각광받게 된 것입니다. 
 
장미를 재재배하는데 적정온도는 낮 온도는 24~27℃이며 밤 온도는 15~18℃입니다. 장미꽃을 판매하기 위한 절화용으로 재배할 경우 이러한 온도 조건을 맞추어 주면 겨울에도 재배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즉 연중 4계절 재배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강한 품종도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온도를 맞추기 위한 난방시설과 난방비가 많이 소요되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 합니다. 게다가 꽃이 말라죽는 병에 걸릴 수도 있어 겨울장미는 상당한 노력과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졸업 입학 시즌에 만나는 장미는 이 같은 겨울장미의 소산일 것입니다.   

 


겨울장미 

철이없어 그땐 몰랐어요
그눈길이 무얼 말하는지
바람불면 그대 잊지못해
조용히 창문을 열면서
나는 생각해요

겨울에 피는 흰장미야
아직도 나를 기다리나
감춰진 마음 보고싶어
햇살을 향해 피었는가
사랑의 말 내게 들려줘요
그리움이 나를 반기도록
바람불면 그대 잊지못해
조용히 창문을 열면서
나를 기다려요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미실시대는 결국 자살로 끝났습니다. 미실 고현정은 신라 최고의 자리 용상에서 가장 화려한 복장을 입고 생을 마감하는 최후의 열연을 펼쳤습니다. 죽음마저도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온화한 미소만 남기고 떠났습니다.

미실의 죽음은 마침내 미실시대가 끝나고, 비로소 덕만공주의 선덕여왕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상에서 최후를 맞이한 미실은 그녀가 꿈꾸던 왕의 자리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했음을 뜻합니다. 죽음마저도 당당하고 아름답게 승화시켰습니다.
 
미실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는 장면은 멀리 서역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스스로 독사에 물려 자살을 선택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여걸 미실과 클레오파트라는 각각 다른 국가와 시대를 살았지만 당대 최고의 미녀로 각각 자신의 국가를 사랑했고 실질적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출중한 미모와 지략을 바탕으로 최고 권력자 남자들을 다스렸고 최고의 자리에서 홀연히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MBC 사극 대하드라마 선덕여왕 50회는 미실의 장열한 최후를 그렸습니다.

미실의 최후에 아들 비담도 선덕여왕 덕만도 끝내 눈물을 흘렸다

미실은 백제와의 국경선을 지키던 최정예 부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회군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미실이 전쟁을 통해 피를 뿌렸던 신라의 국경을 차마 자신의 목숨을 위해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미실은 사다함을 연모했듯이 신라를 연모했기 때문입니다.

미실은 모든 병력을 철수시키고 설원랑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습니다. 미실은 설원랑(전노민)에게 "항복할 수 없는 날에는 죽으면 그만이다. 오늘이 그날이다. 뒷일을 부탁하겠다. 나를 따른 자들을 모두 살려 잘 이끌어달라."고 담담하게 세상과의 작별을 준비했습니다. 미실은 "난 약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의 계획을 세웠고 그 중 마지막 계획을 실행하려는 것 뿐이다. 설원공께는 정말 미안하다"며 미실에게 충직했던 남자 설원랑에게 마지막 애정과 잊지않았습니다.



그리고 미실의 남자 비담이 그녀의 최후를 지켜봤습니다. 미실이 용상에 앉아 여러 병의 독약을 삼킨 이후 아들 비담(김남길)이 나타나 참았던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라고 불러 드릴까요. 아니면 버려서 미안했다고 사과라도 하시려고요"라고 비통한 속내를 털어놨습니다. 아들 비담이 처음으로 어머니를 부르며 눈물을 부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실은 "난 미안하지 않다.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다. 덕만을 사랑하고도 그리 하라"며 아들 비담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미실은 아들 비담에게 모정을 숨기며 아들 비담이 스스로 강해질 것을 주문했는지도 모릅니다. 미실은 "사람이 목표인 것은 위험한 것이다'라며 단지 아들 비담이 덕만을 목표로 하는 것에 대한 마지막 조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독약이 온 몸에 퍼져 용상에 앉아있던 몸이 흔들리자 비담에게 의지해 몸을 곧추세운 미실은 "덕만은 아직인 것이냐"고 말하자 덕만(이요원)이 곧 나타났습니다.


미실이 용상에 앉아 눈을 감고 평화롭고 온화한 얼굴로 생을 마감한 가운데 덕만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미실의 죽음을 목도한 덕만도 눈물을 주루룩 흘렸습니다. 덕만은 "당신이 있었기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미실의 시대 안녕히..."라며 미실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덕만은 비록 정치적 경쟁자였지만 미실이 있었기에 덕만공주도 있었고 선덕여왕의 꿈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미실 시대를 끝낸 고현정의 '애이불비' 연기는 아름답고 뭉클했다

미실의 죽음은 아름다웠습니다. 대개 악역을 맡은 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 비참한 최후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실은 결코 불쌍하거나 비참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미실의 최후 장면은 소름돋을 정도로 고현정의 명연기와 명대사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비록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았지만 선덕여왕의 진정한 주인공은 고현정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악역이지만 고현정을 결코 미워할 수 없었고 미실은 드라마에서 최고의 여걸이었습니다. 미실이 최후를 맞이한 순간 드라마 선덕여왕이 끝난 것은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미실의 마지막 장면에 눈가가 저절로 붉어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미실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애이불비(哀而悲)'의 모습이었습니다. 슬프지만 비참하지도 않았고 슬픔을 나타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실 역을 끝낸 고현정은 실제 어떤 마음이었을까? 고현정은 방송 당일인 10일 '선덕여왕' 마지막 촬영을 마치며 시원섭섭한 마음에 눈물을 보였다고 합니다. 고현정은 "미실 덕분에 행복했다"는 짧은 소감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동안 미실로 살아왔던 지난 6개월의 감회를 '행복'이라는 단어 속에 압축해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날 일산 MBC 드림센터 선덕여왕 세트에서는 미실 고현정을 위한 조촐한 축하 파티가 열렸다고 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50회를 마지막으로 하차하게 된 미실 고현정을 위해 제작진이 준비한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연출을 맡은 박홍균 PD와 마지막 포옹과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고현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복잡한 감정이었을 듯 싶습니다. 

미실의 최후에 고현정도 여러 말을 잇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악역의 연기였지만 미실 역에 몰입해 미묘한 표정의 감정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했던 고현정이었습니다. 악역이었지만 시청자들은 미실에 열광했습니다. 미실의 죽음에 아쉬워했던 이유도 고현정의 연기가 그 만큼 대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덕여왕에서 더 이상 미실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은 크나큰 상실감과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이제 선덕여왕은 덕만의 시대에 비담과 춘추의 대결 구도가 그려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여걸들의 대결 시대가 막을 내리고 덕만의 남자들이 대결시대가 도래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미실 고현정의 하차는 오래 여운이 남을 전망입니다. 벌써부터 올해의 연기대상은 고현정이란 말이 쏟아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미실 고현정이 '행복했다'는 하차의 변은 그녀의 연기를 지켜본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로 '행복'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잘 가요. 미실'

미실 명대사 모음


"그래도 웃지는 말거라. 살짝 입꼬리만 올려. 그래야 더 강해 보인다."

"무서우냐? 공포를 극복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도망치거나 분노하거나."

"하늘을 이용하나, 하늘을 경외치 않는다. 세상의 비정함을 아나, 세상에 머리 숙이지 않는다. 사람을 살피고 다스리나, 사람에게 기대지 않는다."

"사람을 얻으려면, 먼저 강함을 보인 후 다가가서 손을 잡아야 한다."

"덕만 공주가 부럽습니다. 첫째는 덕만 공주의 발상이 부럽습니다. 두 번째 젊음이 부럽습니다. 훗날에는 제사, 정치, 격물이 분리되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늙었습니다. 세 번째는 성골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한이 됩니다. 쉽게 황후의 꿈을 이뤘으면 그 다음 꿈을 이룰 수 있었을텐데..."

"사랑이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덕만을 사랑하면 그리해야 한다. 연모, 대의, 이 신라 어느 것 하나 나눌 수가 없는 것들이다. 유신과도 춘추와도 그 누구와도 말이다. 나는 사람보다 나라를 가지려고 했다. 너는 나라를 얻고 사람을 가져야 한다"

"하늘의 뜻이 조금 필요합니다"



진심일까, 술수일까?
방심하지 마세요. 유신랑. 가령 열 명과 한 명이 싸울 때 말입니다. 고작 한 명을 상대로, 죽고자 덤비는 열 명은 없습니다. 결사적인 열 명은 없어요. 허나 그 열 명과 싸우는 한 명은 다르지요. 그 한 명은 필사적입니다. 내가 아니면 그 열 명과 싸워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미 마음가짐에서 그 열 명은 진 것입니다.  (33회)

최대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
나 또한 안타깝다. 허나 지금 중요한 것은 폐하의 편으로 넘어가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허니 상대등께선, 지금 덕만공주에 대한 추인을 바로 진행하세요. 상대등의 주도 하에! 단결된 우리 귀족연합이 황실의 죄를 덮어준다는 인상을 주란 말입니다. 그리고 황실에서 얻어낼 것을 더 얻어내세요. (29회)

상대의 마음을 알아내야 할 때
투전을 할 때 말입니다. 허패를 들고 판돈을 따려면 허세를 부려야 합니다. 더 세게 나와야죠. (28회)

유리한 상황에서도 신중하게
일을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일수록 명분이 중요합니다. 합당한 명분과, 정확한 증좌! 그 두 가지를 쥐기 전엔 함부로 움직여서는 아니 됩니다. (23회)

약올리는 걸까 가르치는 걸까
사람을 얻으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걸 해주거나, 그 사람이 무서워하는 걸로 협박을 해야 합니다. 공주님의 사람이라는 유신과 덕만… 그들이 뭘 원하는지, 뭘 무서워하는지, 아십니까? (18회) 

도망치라는 걸까 분노하라는 걸까
무서우냐? 공포를 극복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도망치거나 분노하거나. (17회)

무서워 하는 것과 무서워하지 않는 것...
저잣거리에 가면 이 미실이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소문도 있다 하더구나. 들은 적이 있느냐? 그 소문들마저도 다 내가 퍼뜨린 것이다. 사람들이 날 무서워하는 것과 무서워하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유리하겠느냐? (16회) 

그 다음부턴 설원공 네가 생각해
전쟁도 결국 사람의 일이 아닙니까? 사람을 흔들면, 군이 흔들리고, 또한 나라가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9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토요일에 아내가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던 아내는 어디서 옷을 하나 들고 나타났습니다. 무슨 옷이냐고 물어보니 우리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언니의 옷을 빌려왔다고 했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둘째 딸이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가는데 엄마도 함께 모이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학교 친구가 생일을 맞아 절친한 친구들을 초대했던 모양입니다. 토요일 학교 수업이 끝나고 동네의 유명 고깃집에서 생일 축하 행사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생일 파티에는 10명 정도의 친구가 초대받았고 엄마들까지 합치면 20여명이 식사를 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남자들은 동네에서 모임이 있을 경우 그냥 집에서 입던 편한 복장으로 만나곤 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동네 아줌마 모임에서도 달랐습니다. 모임이 있는 날이면 어떤 옷을 입고 갈지, 화장은 어떻게 할지 등 하루종일 고민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아내에게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동네 아줌마인데 왜 그렇게 신경쓰는 거야?"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모임에 더 신경쓰는 것 몰라."

화장술과 미모로 천하를 지배했던 클레오파트라

"그래. 왜 그런 거야?"
"글쎄. 여자들은 여자들만의 자존심이 있는 것 같아. 여자들 사이에서 초라하게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지도 몰라."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학교에서 급식 도우미로 학부모들이 오는데 아줌마들은 화장과 복장이 화려하다고. 아줌마들끼리도 외모에 신경쓰지만 아이들에게 멋있게 보이려는 것이지. 그래야 자신의 아이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

"여자들은 남자들과 만날 때 신경을 더 쓰지 않나?"
"물론 외모에 신경을 쓰지. 그렇지만 남자들과 모임 보다는 오히려 여자들과의 모임에 더 신경쓰는 것 같기도 해."

아내의 설명을 듣고나니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여자들은 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성향을 타고 난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동성 친구들끼리의 모임에도 언제나 화장을 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는 이유가 따로 있었던 셈입니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더 경쟁심이 강하지 않나 생각도 듭니다. 비약인지도 모르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도 있는 것을 보면 여자들의 경쟁심은 일종의 질투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건강하고 건전한 경쟁심은 발전의 원동력입니다. 여자들이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약간의 사회적 과시욕도 있을 것이고 더 젊어 보이고 싶은 욕구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 여자들이 세계에서도 가장 부지런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블로그에 보니 해외 배낭여행을 하는데 외국인들과 같은 숙소에 묵었던 사연이 있었습니다. 한국 여자들은 제일 먼저 일어나 화장부터 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외국 여자들은 부시시한 맨 얼굴로 아침에 나타나지만 한국 여자들은 어느새 뽀샤시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편에 속하는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여자들의 특권이자 당연한 속성입니다. 요즘은 남자들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대이니 멋진 외모를 위한 남녀 모두의 과제인 듯 싶습니다. 사실 어떤 모임에서 여자가 화장도 안하고 나타나면 게을러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과도한 화장은 역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이제는 여자든 남자든 적당한 수준에서 외모에 신경을 쓰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에피소드 하나] 여자 아이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남자 아이들
아내가 둘째 딸의 친구의 생일 파티에 다녀온 후 남자 아이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자 아이의 생일 모임에 같은 반 남자 아이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남자 아이들은 초대받지 못했는데 모임에 온 것이랍니다.

그런데 불현듯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모습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어떤 여자의 생일 파티가 있었는데 일부 남자 아이들은 초대받고 나머지 남자 아이들은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초대받지 못했던 남자 아이들은 괜히 약이 올라 여자 아이의 생일파티에 가서 난동(?)을 부렸던 추억의 사건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이번 둘째 딸 친구의 생일파티는 함께 축하하면서 무사히(?) 끝났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 아이의 생일 파티는 남자 아이들에게도 관심사 중 하나인 모양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


대하사극 '선덕여왕'의 인기는 우리들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준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평소 우리가 몰랐던 우리나라 역사 속 인물들과 당시의 문화에 대해 이해하는데 공부가  되는 셈입니다. 특히 학생들에게 TV를 통해 쉽게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교육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 구성이다보니 다소 허구의 사실도 있을 수 있어 정확한 사실은 바로잡는 노력도 필요해 보이기는 합니다.

덕만공주(이요원 분)가 향후 신라의 왕위를 이을 부마를 추천하는 어전회의에서 혼인을 하지않고 스스로 부군(왕자 아닌 후계자)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김춘추, 비담 등 인물은 여자가 왕이 되겠다는 것에 황당하고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주로 보였습니다.

"그게 되는 일이야?"(김춘추, 유승호 분)
"동서고금에 여자가 왕이 된 적은 없었지."(비담, 김남길 분)
"이런 일은 고구려·백제에도 없었던 일이야!"(하종, 김정현 분)
"서역(중국 서쪽의 지역)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데 그 나라는 곧 망했어!"(염종, 엄효섭 분)
"천하 만민이 어찌 이런 일을 이해할 것인가?"(미생, 정웅인 분)
 
실제로 그 당시에 덕만공주가 여왕에 등극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실제 여왕에 반기를 들고 칠숙이나 비담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발생해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골인 덕만공주가 여왕이 되는 것이 왕위계승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정통성을 갖고 있어 일부의 반발은 있었을 수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절대 권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7세기는 한-중-일 동양 3국의 여왕시대였다

사실 신라의 덕만공주가 여왕에 즉위하기 이전에 일본(왜국)에는 이미 여왕이 등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염종이 서역에서만 있었던 것 처럼 묘사되었지만 신라에서 바로 이웃 국가인 일본에 추고여왕(스이코 여왕)이 먼저 탄생했던 것입니다. 덕만이 후계자로 나서기 직전의 일입니다. 일본의 추고여왕은 592년에 즉위하여 628년까지 무려 36년이나 왕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것은 632년이니 단지 4년전에 추고여왕 시대가 존재한 것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일본의 여왕 언급을 일부러 빼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쨌든 신라는 당연히 일본의 여왕 존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중국의 당나라도 왕래할 정도였으니 일본의 왜나라와 교류가 있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덕만공주가 여왕이 되겠다는 선언은 이미 일본이나 서역 등의 사례도 있었기에 새삼 천지개벽할 일은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은 우니라라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신라 중기 632년부터 647년까지 15년 동안 재임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입니다. 선덕여왕은 권력 찬탈에 의한 것이 아닌 정통 왕위계승 절차에 의한 여왕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권력에 의해 세워진 허수아비도 아닌 자주적 권력을 가진 여왕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서역의 여왕은 클레오파트라 7세를 의미할 것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이집트의 허수아비 여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선덕여왕과 클레오파트라는 어떻게 달랐나?

여기서 선덕여왕과 클레오파트라를 비교해 볼까요. 선덕여왕은 남자들을 다스렸고 클레오파트라는 남자들의 힘에 의존한 측면에서 약간 차이가 있었습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비롯한 당대의 영웅들이 자신에게 충성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당시의 시저(카이사르), 안토니우스 등 영웅들과 결혼해 그들의 권력에 기반한 허수아비 신세였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미모가 로마 영웅들을 끌어들이는 외교적 묘책이었던 것입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원전 51년부터 30년까지 즉위했습니다. 병약했던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으로 다스리다가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중간에 왕위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도와주어 다시 복위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권력욕은 컸던 모양인지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죽자 다시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계속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권력 계승과정의 정통성도 부족했고 권력도 로마 영웅들의 힘과 결혼에 의해 유지하는 불완전했습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와 연합에 실패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서역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 이전에도 이집트에는 여왕이 있었습니다. 역사상 세계 최초의 여왕은 이집트의 여왕 하트셉수트입니다. 하트셉수트는 기원전 1503년부터 1482년까지 재위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400년전 기원전 16세기에 이미 이집트에 여왕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트셉수트는 이집트의 파라오(고대 이집트의 왕)가 되었습니다. 하트셉수트도 정통 왕위계승은 아니었고 섭정으로 왕권 권력을 장악해 스스로 파라오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하트셉수트는 남장여자 세계최초의 여왕이었다

특이한 것은 남자만 파라오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남자 옷을 입고 인조수염을 달고 파라오 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남장 여자의 왕이었던 셈입니다. 하트셉수트에 왕권의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 자신의 의붓아들이자 사위인 투트모스 3세에 의해 자신의 업적인 건축물과 벽화들이 파괴당하고 역사 기록에도 지워진 바 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하트셉수트도 정통성 문제로 인해 불행한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일본이나 중국은 선덕여왕과 어떻게 다를까요? 동양 최초의 여왕은 앞서 언급한 스이코여왕입니다. 스이코가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 것은 당시 권력자인 소가씨가 스이코를 옹립했기 때문입니다. 스이코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습니다. 실제 실권은 소가씨와 쇼토쿠태자가 주로 행사했던 것입니다. 스이코가 일본 최초의 여왕이자 동양 최초의 여왕이라는 역사적 의미는 있지만 한계가 분명했던 셈입니다.

한편으로 스이코 여왕의 탄생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 최초의 여왕을 잉태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탄생이 스이코 여왕 이후에 있었고 그 다음으로 중국에 측천무후가 탄생하기도 합니다. 모두 7세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7세기는 한국 일본 중국에 여왕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 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여자로서 여왕 황제가 된 것은 측천무후가 유일합니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690년부터 705년까지 재위했습니다. 측천무후는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고종의 총애를 얻어 고종의 황후인 왕씨를 몰아내고 655년에 스스로 고종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측천무후는 고종의 병환을 구실로 권력을 장악한 후 고종이 죽자 아들인 중종과 예종을 마음대로 즉위시키기도 했습니다. 측천무후는 결국 690년에 나라 이름을 주(周)라 칭하고 스스로 황제에 등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장간지가 난을 일으켜 중종을 복위시키고 당나라를 부흥시키며 측천무후는 병사했습니다. 측천무후도 정통성있는 권력이 아니었기에 역사적으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중일 동양 3국의 여왕시대는 7세기가 가장 활발했지만 897년 신라의 진성여왕을 마지막으로 쇠퇴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여왕은 선덕여왕에 이어 진덕여왕이 있었고 진성여왕에 이르기까지 신라시대 3명이 전부였습니다. 불교가 융성한 시기에는 여왕의 존재가 있었지만 남성 중심의 유교가 번성하면서 여왕의 등장은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라에는 정통성을 가진 여왕이 여럿 탄생했다는데 의미가 큽니다. 신라는 동양에서 가장 정통성있는 여왕을 탄생시켰고 권력을 장악했으며 신라의 융성시대를 열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예카테리나 대제의 30년 철권통치

서양에서도 남성 중심의 기독교가 번창하면서 여왕의 존재는 사실상 어려웠습니다. 로마 기독교에서 독립한 영국국교 성공회가 등장하면서 영국에 유럽최초의 여왕인 메리 1세가 1553년에 처음 탄생한 바 있습니다. 헨리8세와 캐서린 왕비의 딸이 메리 1세였습니다. 메리 1세가 죽은 후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딸이자 메리 1세의 이복누이인 엘리자베스 1세가 1558년 즉위했습니다. 엘리자자베스 1세는 유럽의 두 번째 여왕으로 정통성있는 왕위 계승을 하여 영국 발전을 이었습니다. 영국은 이후에도 빅토리아 여왕,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등이 탄생하는 등 세계에서 가장 여왕이 성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영국에 이어 러시아 네덜란드 덴마크 등 여타 유럽 국가에서도 여왕들이 탄생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 예카테리나 1세는 1725년 즉위했으나 2년에 불과한 단명의 꼭둑각시 재위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1762년부터 1796년까지 장기 집권한 여왕이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 여왕은 남편 표트로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철권통치의 예카테리나 2세는 대제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 후 옐리자베타 여왕이 있었습니다. 그 후 유럽에는 1980년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여왕이 등장했고 1972년 덴마크의 마르그리테 2세가 탄생했습니다. 여왕 칭호를 받고 있지만 실상은 권력이 없는 명예와 상징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선덕여왕은 세계사 역사에서도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스이코 여왕 중국의 여왕 측천무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서양의 여왕을 비교할 때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고 왕정을 안정화시켜 나라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절대 권력을 남용하지도 않았고 정통성도 부여받아 후세의 왕들이 치적을 남길 수 있는 기반도 마련했습니다. 7세기 동양에서 여왕시대를 이끈 대표적 인물이 선덕여왕인 셈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에 와서 보면 아쉬운 측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 여왕의 역사나 자신의 역사를 과장해 위대한 시대로 묘사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도 우리의 역사에 대해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킬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서양사 위주의 역사에 함몰되어 우리나라의 역사를 과소평가할 이유는 없습니다.

분명 우리나라 역사와 세계 역사에서 선덕여왕의 존재를 재발견한 것은 드라마 선덕여왕의 의미가 큽니다. 이제는 선덕여왕의 재발견이 보다 발전적인 측면에서 재조명하고 세계 역사에서 한국의 여왕이 위대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를 만드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진리 탐구 탐진강